[연구계획서]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으로

학위논문 연구계획서를 써 보았습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분석철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확장시켜서 논문을 쓰려고 해요.

학과 행정 일정 때문에 매우 급하게 쓴 글이긴 한데, 지도교수님께서는 일단 이대로 진행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셨어요. 혹시 현상학이나 해석학을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조언이나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20세기의 철학적 해석학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근거하여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본래 해석학은 성서와 같은 고전적 텍스트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하는 학문이었지만,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해석학에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부여하였다. 즉, 후설에 따르면, 세계란 우리가 어떠한 지향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수학적 태도를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물체로 주어지고, 우리가 종교적 태도를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신성을 드러내고 있는 피조물로 주어진다. “이 세계는 나에 대해 단순한 사태세계(Sachenwelt)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가치세계, 재화(財貨)세계, 실천적 세계로서 거기에 있다.”(Husserl, 『이념들』, 제1권: §28) 하이데거는 자신의 스승 후설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통찰 속에 일종의 ‘해석학적’ 함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세계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세계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인 의미는 해석이다.”(Heidegger, 『존재와 시간』: §7) 따라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우리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해석이란 이제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이란 우리의 모든 지각과 추론에서 이미 수행되고 있다. 해석학 역시 텍스트 해석과 관련된 ‘방법론적’ 문제를 넘어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과 관련된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존 해석학의 경향은 오늘날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연 현상학과 해석학이 서로 아무런 갈등 없이 결합될 수 있는 분야인지에 대한 의문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둘 사이의 문제는 ‘선입견’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현상학과 해석학 사이의 입장 차이에서 부각된다. 즉, 현상학은 본래 우리의 자연적 세계경험에 대해 판단중지를 내린 상태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순수한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고안된 철학적 기획이다. 선입견이란 현상학에서는 제거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불순물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석학은 우리가 매 순간 특정한 관점, 태도, 맥락 속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사유이다. 해석학에서는 선입견이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우리 이해의 근본 조건에 속한다. 바로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해 현상학과 해석학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간격이 존재한다. 현상학은 선입견을 극복하고서 대상을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해석학은 선입견을 조건으로 삼아 우리의 지각과 추론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석의 활동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은 현상학이 상정하고 있는 순수한 ‘봄’이라는 개념을 의심스러워한다. 후설은 1인칭의 주관적 성찰 위에 모든 학문을 정초하고자 한 데카르트처럼 ‘봄’이라는 활동에 지나치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현상학적 탐구와 발견이 결국 직접적 봄을 통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직접적 ‘봄’(Sehen)—단순히 감각적인 경험하는 봄이 아니라 어떤 종류이건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의식인 봄·일반—은 모든 이성적 주장의 궁극적 권리원천이다.”(Husserl, 『이념들』, 제1권: §19) 그러나 가지계(intelligible world)에 대한 지적 직관을 강조한 플라톤 이래로, 모든 철학은 결국 일종의 봄에 호소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후설이 비판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자들조차 자신들이 명증적이고 필증적인 봄 위에서 철학을 구성하였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따라서 현상학자가 말하는 직접적 봄과 형이상학자가 말하는 직접적 봄이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설령, 현상학자의 봄이 형이상학자의 봄과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점에서 현상학이 형이상학에 대해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는 별도의 해명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후설의 텍스트 안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을 찾기가 힘들다.

가다머 이후 오늘날까지 진행된 해석학의 역사란 바로 현상학적 해석학을 어떻게 수정하거나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쾨르, 데리다, 바티모 등 주요 해석학자들은 모두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았다. 가령, (a) 리쾨르는 현상학과 해석학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다만, 리쾨르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초월론적 현상학(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이라고 일컬어지는 기획을 통해 주체의 지향적 구조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그는 주체란 부단한 해석을 통해서만 알려진다고 지적하면서 ‘현상학적 해석학’을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데리다는 현상학과 해석학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두 입장이 결국 ‘봄’이라는 활동을 강조한 나머지 ‘현전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de la présence)’에 빠지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특별히, 선입견을 이해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가다머의 해석학조차 여전히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경험’ 따위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일종의 형이상학이라고 여겨진다. (c) 바티모는 현상학적 해석학이 지니고 있는 내적 문제를 인정한다. 그는 해석학이 진정으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이 이해의 조건에 대해 제시하는 논의조차 결국 단순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니힐리즘(nihilism)’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해석학이 나아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본 연구는 오늘날 해석학이 처한 고민에 대한 대안으로 ‘분석적 해석학(analytic hermeneutics)’을 제시하고자 한다. 분석적 해석학이란 해석학이 ‘현상학’을 벗어나 ‘언어 분석’을 자신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현상학이 주체의 지향적 구조를 ‘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과 달리, 언어 분석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 사용과 언어 규범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둘 모두 ‘봄’이라는 은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언어 분석에서 ‘봄’이란 우리 바깥에 고정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와 상대방 사이의 대화에서 일어나는 매 순간의 소통 과정이야말로 언어 분석이 보고자 하는 대상이다. 가령,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라는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p & ~p”라는 형식을 지니지만, 이 문장의 의미가 언제나 단일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형식논리학 수업의 맥락에서는 ‘거짓’이라고 평가받을 것이고,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 화자와의 대화에서는 ‘무의미’하다고 평가받을 것이며, 시적인 언어로 사용되는 상황에서는 ‘참’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각각의 상황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달라진다. 다만, 그 이유는 ‘지향적 구조’나 ‘구문론적 구조’ 따위가 이 문장의 다양한 의미를 보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2인칭적 대화’ 속에서 이 문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석학과 언어 분석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그동안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통해 해석학을 다루고자 한 많은 인물들이 분석적 해석학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가령, 대륙철학의 경우, 철학적 해석학의 대부 가다머가 이미 자신과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유사성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주제로 교수자격 논문을 썼던 투겐트하트 역시 이후에는 비트겐슈타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해석학과 언어 분석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펠과 하버마스도 (비록 본 연구와는 다소 상이한 주장을 제시하긴 하지만)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또한, 영어권 철학에서도, 데이빗슨과 로티가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맥도웰과 브랜덤 등 ‘피츠버그 학파’라고 일컬어지는 진영이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학의 논의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본 연구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제Ⅰ부에서는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가다머에 이르는 20세기 해석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현상학적 해석학의 의의와 한계가 비판적으로 고찰될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와 오늘날 철학자들이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는지 등 이후의 논의를 위한 이론적 배경이 이 부분에서 설명될 것이다. 제Ⅱ부에서는 분석적 해석학의 기본 전략이 소개될 것이다. 언어 분석을 통해 해석학의 통찰들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핵심 논증들이 이 부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제Ⅲ부에서는 현상학적 해석학이 그동안 이해의 조건으로 제시한 ‘선입견’, ‘지평 융합’, ‘영향사적 의식’, ‘물음과 대답의 논리’ 등을 언어 분석의 관점에서 더욱 철저하게 해설할 것이다.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해 제기된 많은 비판들이 분석적 해석학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대답될 수 있는지가 이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제Ⅳ부에서는 분석적 해석학을 받아들일 경우 ‘이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가 해명될 것이다. 특별히, ‘실재’, ‘경험’, ‘진리’, ‘지식’, ‘이성’ 등 전통적 철학에서 무비판적으로 사용된 개념들로부터 잘못된 형이상학적 함의가 제거하는 작업이 이 부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전체적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Ⅰ부: 현상학에서 현상학적 해석학으로
제Ⅱ부: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으로
제Ⅲ부: 분석적 해석학의 총론
제Ⅳ부: 분석적 해석학의 각론

본 연구가 지닐 수 있는 의의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로, 본 연구는 현상학적 해석학을 둘러싼 오늘날 해석학의 중심 논쟁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철학적 해석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철학적 해석학이 전통적 형이상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혐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 철학적 해석학이 자기 자신을 상대화하는 니힐리즘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본 연구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둘째로, 본 연구는 그동안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논의한 다양한 입장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포괄적으로 종합한다. 두 철학적 사조 사이에 가교를 놓고자 한 로티, 하버마스, 투겐트하트, 맥도웰, 브랜덤 등의 다양한 시도가 본 연구를 통해 한 곳에 집약될 것이다. 셋째로, 본 연구는 현상학적 해석학이 목표로 한 형이상학 극복의 기획을 분석적 해석학을 통해 더욱 철저하게 수행한다. 현상학적 해석학이 제시한 근본적으로 올바른 통찰들이 '직접적 봄'이라는 의심스러운 전제 위에 성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본 연구를 통해 강조될 것이다. 넷째로, 본 연구는 형이상학에 대한 극복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전통적 철학의 주요 개념들이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본래의 일상적 의미를 되찾아주는 작업이 본 연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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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학기 졸업하시려는 계획이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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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종합시험 응시에 연구계획서가 필요해서, 일단 급하게 계획서만 쓴 거에요. 아직 졸업하려면 2년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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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YOUN 님. 아주 멋진 논문으로 탄생할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요?^^ 응원합니다!

사실 원래 길게 아래에 뭐라고 썼습니다만, 응원을 해야 될 마당에 옳지 않은 자세가 아닌가 하는 마음에 포함하지 않은 댓글을 일단 올립니다. (혹시 그 내용을 보고 싶으시면 알려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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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내용을 비판하셔도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쓴 게 뭐라고, 남들한테 아무 비판이나 지적도 안 받을 생각을 한다면 그게 이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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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뭐라 평가하거나 반박할 입장은 못되고, 그냥 생각을 조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YOUN 선생님께서 대안으로 제시하시려는 분석적 해석학은 논리객관주의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인식주관이 어떻게 언어 사용과 언어 규범을 인식할 수 있는가?와 같은 현상학에서 제기되는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위 글에서도 나오듯

언어 분석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 사용과 언어 규범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부분에서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분석적 해석학은 이 문제를 증명되지 않고 넘어가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여기에 대한 논의를 조금은 해야될 것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그리고 여기서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이 가진 두가지 담화의 틀, 즉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적절히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는 것도 감히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오이겐 핑크가 지적한 이후로 현상학의 근본개념들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요, (이는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라는 두가지의 다른 이념이 있다는 사실에서 논리필연적으로 귀결되죠) 데리다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사실상 고의로 무시하고 내린 비판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그래서 상당히 까다로운 이 두가지의 현상학의 이념을 분명히 드러내고 분석을 두 방향으로 혹은 두 방향을 고려하여 진행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선생님의 논문이 다루는 것은 현상학이라기 보다는 현상학적 해석학, 그리고 더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이 분석적 해석학이므로 제가 드린 말씀은 앞으로 논문에서 이루어질 논의에서 크게 상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분석적 해석학에서 전제하고 있는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의미를 알며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언어공동체의 존재는, 후기의 후설이 제기했던 공동체에 대한 논의 및 상호주관적 명증(후설에 있어 상호주관적 명증 등을 주목하는 최근 연구도 있습니다)의 논의에 포함 또는 연결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후설의 체계 내에서 논의되거나 혹은 최소한 후설이 제기한 것에 대한 수정적/발전적 논의로서 고려될 여지도 있다는 것인데요...(저는 이 부분에 그다지 큰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힘을 내시라고 응원을 해야할텐데, 제가 어설프게 여러가지를 지적하게 된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만...부디 멋진 논문으로 완성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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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적을 해주셨다고 생각해요.

(1) 사실, 저는 원래 '봄'이라는 은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런 은유가 데카르트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지도교수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이 은유를 반드시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입장이 다소 바뀌었어요.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통찰(Übersicht)'과 후설이 말하는 직접적 '봄(Sehen)'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제가 해명해야 하는 사항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두 가지가 충분히 구분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요.

(2)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의 구분이 후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중요하긴 한데, 이 구분이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근본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약간 의문스럽긴 해요. 특히, 발생적 현상학이 아무리 의미 구성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문제는 "우리 의식이 시간적으로 의미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너는 어떻게 정당화하는가?"라는 물음일 거라고 생각해요. 후설은 결국 "나는 의식이 이러이러한 식으로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을 '본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렇게 되면 현전의 형이상학 비판에 그대로 다시 걸려들게 될 거라고 봐요. 마치 '의식 작용'이라는 고정된 대상을 우리 앞에 세워 놓고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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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의견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더 깊이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지 못해서 아쉽네요. 제가 알기로는 현전의 형이상학과 탈현전의 형이상학이 구분되며 서로 치환할 수 없다고 하는데요, 이 점을 데리다가 간과하였다는 것이 후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검토한 연구자등이 지적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오류가 답습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YOUN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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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데카르트적인 mental discourse language로 해석해야할 필연성은 없다고 봅니다. 당장 생각나는 예시는 데카르트의 "봄"을 라캉이 시선/응시의 그물망으로 변용한 것인데요 (세미나 11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즉 1인칭적인 "봄"이 이미 의미(욕망)의 상호주관적 그물망을 전제하는 그러한 "봄"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물론 후설이 이걸 지지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유사한, 그리고 제가 보기에 Youn님의 접근방식과 유사해 보이는 것이 데이빗슨의 해석학(!)인데요 (interpretive charity 역시 해석학적 원리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데이빗슨 역시 1인칭의 언어적 발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른 한명의 언어적 발화자가 필요하다는 2인칭적 상호주관성에 대한 논변을 펼치죠 (e.g. "The Second Person" (1992)).
혹시 Youn님의 2인칭 해석학과 데이빗슨의 논점이 어떻게 변별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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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실제로, 해석학 전공자들 중에서는 가다머와 데이빗슨을 함께 놓고서 비교하는 경우도 많죠. (맥도웰도 그 두 인물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도, 사고, 언어, 진리가 언제나 상호적으로 전제된다는 데이빗슨의 '삼각측량' 논증에 관심이 있어요.

다만, 제가 각각의 입장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공부한 게 아니다 보니, 현재로서는 데이빗슨의 아이디어와 제가 생각하는 내용들이 뚜렷하게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말하기는 힘드네요. 그래도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저는 데이빗슨의 핵심 논증들이 결국 "'p' is true iff. p"라는 타르스키의 규약 T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로서는 굳이 규약 T 같은 공식을 논증의 기초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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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번에 박사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는데, Youn님과 마찬가지로 하버마스를 아주 집중하여 다루지는 않더라도 경유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논문 작성을 위해 따로 로티와 하버마스를 연구할 계획이시라면 예전 올빼미처럼 관련 세미나를 열어 같이 공부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제가 많이 배우는 입장이겠지만 :kissing_smiling_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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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습니다. 제가 10월 초에 시험이 있어서, 그게 끝나는대로 연락드릴게요! 로티와 하버마스의 논문이나 책 중에서 서로 흥미를 가지는 부분을 뽑아내어서 돌아가며 발제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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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분석적 해석학에 대한 언급을 하신 분은 이승종 교수님 정도만 알고 있는데, 혹시 다른 연구자 분들도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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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없네요;; 저도 이승종 교수님 책 보고서 저 용어를 사용한 거라서요. 그렇지만 ‘분석적 해석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해석학과 분석철학에 둘 다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찾아보면 꽤 있긴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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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너무 기대되는 주제네요. 항상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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