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전공자 집단의 오타쿠성(2)

아래의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10월 13일에 2023년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학술 심포지움이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서강대 대학원생 분들을 만나서 나도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 나와 하렘 애니에 대해 토론(?)하였던 하이데거 전공자 S 선배님도 계셨다. 요즘도 애니를 자주 보시냐고 여쭤보니 S 선배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

"요즘은 잘 안 봐요. 저는 이제 여성들을 위한 작품에만 전념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러니까, 북부 대공과 남부 왕자가 여주를 두고 싸우는데, 결국 중앙 황제가 여주의 진정한 사랑을 차지하게 되는… 뭐, 그런 로판에 빠져 계시다는 거죠? 알고 보니, 여주는 사실 악역 영애로 환생한 인물이었다든가…"

S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어… 음… 저희 이제 하이데거 이야기 해보죠;;;"

(2) 하지만 대화가 하이데거를 주제로 쉽게 전환되지는 않았다. 나는 "요즘은 잘 안 봐요."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물어보았다.

나: "잘 안 본다."의 기준이 뭔가요? 가령, <최애의 아이> 보셨어요 안 보셨어요?
S 선배님: 1화까지만 보고 안 봤어요!
나: 이미 1화를 봤다는 것부터가 '이쪽' 세계에 발을 담그고 계시다는 거잖아요!

그 순간, 철학과 대학원생 8명이 있던 테이블에서 4명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들도 <최애의 아이>를 보았다고 순순히 고백하였다.

(3) 중세철학을 전공하신 K 선배님은 이세계물에 빠져 계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로 나온 작품들을 보는 건 아닌데, 옛날 작품들을 자주 돌려 보긴 해. <리제로>라든가 <방패 용사 성공담>이라든가… 다 명작이잖아?!"

<리제로>까지는 지하철에서도 종종 광고를 할 만큼 유명한 작품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방패 용사 성공담>을 언급하신 것을 듣고서 선배님께서 이세계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셨다는 것을 직감했다.

(4) 그 다음 날이었던 10월 7일에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헤겔학회에 참석했다가 깜짝 놀랐다. 내 바로 앞에 앉아계신 분이 오뱅계르크(Ovaine Gyeruk) 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오늘 방송 계륵"이라는 우왁굳의 밈을 토대로 만들어진 셔츠인데, 한정판이라 진성 우왁굳 팬덤(팬치)이 아니면 구하기도 힘든 굿즈였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무려 '헤겔학회'에서 이 셔츠를 입은 사람이 내 앞에 있다니, 너무 충격을 받아서 발표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 여자친구도 진성 팬치라 급하게 카톡으로 "지금 헤겔학회에 오뱅계르크 셔츠 입은 사람이 내 앞에 있어!"라고 연락을 주었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여자친구: 가서 귓속말로 '킹-아!'라고 해봐.

(5) 더 놀란 건, 그 셔츠를 입고 계신 분의 얼굴을 보니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헤겔철학을 전공하는 M 씨였다는 점이다. M 씨와 종종 학교에서 보았지만, 이분이 진성 팬치인 줄은 처음 알았다. 발표 중간 쉬는 시간에 M 씨에게 다가가 우왁굳 팬덤만이 알 수 있는 비밀 인사를 건냈다.

나: 헤겔학회에서 M 씨와 만나다니, 정말 '킹-아!'네요.
M: 네?! '튄-다!'고요?!
나: 아뇨ㅋㅋㅋ '킹-아!'라고요!
M: 아ㅋㅋㅋㅋ 설마 '킹-아!'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유석 씨도 우왁굳 방송 보시나요!?ㅋㅋㅋㅋㅋ

나도 가끔 형 방송을 보긴 하지만, 매번 찾아보는 정도까지의 진성 팬치는 아니라서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가끔 보긴 하는데… 저는 돚거 짭치에요;;;"

그러자 M 씨가 뭔가 약간 아쉽다는 톤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이세돌 유입이시구나…"

팬치들 사이에서 '이세돌 유입'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 우왁굳의 버츄얼 아이돌 그룹인 '이세돌(이세계아이돌)'이 결성된 2021년 이후에서야 이세돌들을 보고서 우왁굳을 접하게 된, 한 마디로 '근본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황급히 변명을 했다.

"아;;; 제가 박쥐단이긴 한데, 그 전부터 왁굳 형 노가리를 좋아했어요. '물 묻은 놈' 이론이라든가 '느그자 느그랑이' 논쟁이라든가;;;"

그제서야 M 씨는 경계심을 푸시고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아ㅋㅋㅋㅋ 형 노가리 재미있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세돌 유입'이라는 표현에 진땀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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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sheep-duck이지만 애니는 보지 않습니다 진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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