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전공자 집단의 오타쿠성(1)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글(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입니다. 어제, 오늘 학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개하기 위한 빌드업(?)으로 이 글을 먼저 올려봅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난 후에도 매우 농도 짙은 오타쿠가 반드시 몇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곁에서 본 바로는 그들의 언동은 매우 흥미 깊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가까이서 볼 기쁨을 느끼는 반면, 미성숙한 사회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언동에 그때마다 곤혹감을 느껴왔던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 물론 '그들'이란 전부 정신과 의사이며, 사견으로는 정신과 의사만큼 오타쿠 비율이 높은 직업은 적다고 생각된다. 1997년 에반게리온 붐이 일어났을 때 내가 아는 모 의국에서 얼마나 <에바> 논쟁이 융성했었는가라는 여담까지 깊게 파고들지는 않겠지만."1

(1) 정신과 의사만큼 오타쿠 비율이 높은 집단이 있다. 바로 철학 전공자 집단이다. 서강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30명 정도였던 전체 대학원생 중 내가 직접 알고 있는 '공개된 오타쿠'만 세어도 5명은 되었다. 여기에 친하게 지내던 철학과 학부생들까지 포함하면, 오타쿠 비율은 훨씬 높아진다.2

(2) 정치철학을 전공하셨던 K 선배님께서는 "<진격의 거인>이야 말로 정치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라고 극찬을 하셨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공하셨던 K 선배님께서는 "아니메는 현대인의 욕망을 그 어떤 매체보다도 잘 반영한다!"라는 명언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주자학을 전공였던 후배 J는 술만 마시면 "미에룬다, 센가(보인다, 선이)."3라며 아니메의 장면을 흉내내곤 하였다.

(3) 어느 날 S라는 오타쿠 여자 선배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유석씨는 애니를 어디서 보세요? 기숙사 사시면 보시기 힘들지 않나요?"

"그냥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보는데, 왜 힘든가요?"

"애니에서는 야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가령,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라든가……."

그 순간, 나는 평소에 그다지 말이 많지 않으셨던 이 선배님의 덕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 애니'를 알고 있었던 것인가?

(4) 그 여자 선배님과 하렘 애니에 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한 적도 있다. 나는, 비트겐슈타인 전공자 K 선배님의 주장을 따라, "하렘 애니란 별 볼일 없는 남성들이 여성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하렘 애니 속 주인공들은 아주 평범한 인물들인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수많은 히로인들에게 사랑 공세에 둘러싸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여자 선배님은 <니세코이>를 예시로 들며 반박했다.

"이치죠 라쿠 정도면 정말 괜찮은 남자 아닌가요? 요리 잘하지, 상냥하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데요?"

(5) 나는 그 여자 선배님을 통해 애니 속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문제에 대해 현실의 여성이 상당히 복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령, 내가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에서 하치만이 유이를 '걸레(bitch)'와 '처녀'라고 부른 것을 비난하자, 그 여자 선배님은 오히려 하치만을 옹호하셨다. 하치만은 이야기 속에서 점점 성장해가는 캐릭터이며, 보면 볼 수록 매력적인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4

  1. 사이토 타마키,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 이정민, 최다연 옮김, 에디투스, 2018, 24쪽.
  2. 약간 맥락은 다르지만, 철학 전공자 집단만큼 그리스도인(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포함) 비율이 높은 집단도 드물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 역시 일종의 '오타쿠' 활동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니메 오타쿠와 신앙 오타쿠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3. <진월담 월희>의 주인공 토오노 시키의 유명한 대사이다.
  4. "농도 짙은"(?) 오타쿠인 여자친구 K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작품을 볼 때면 남성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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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ㅋㅋ 제 집에 있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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