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상대방의 재산을 고려하는 것에 대하여

댓글 다신 여러 선생님들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재산과 인격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하한 유의미한 상관성이 있는지가 의심스럽고 충분한 근거로 뒷받침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것이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철학이 아닌 사회이슈를 다루는 글 같습니다. 물론 사회이슈에 대해서도 철학적 논의가 가능할 테지만, 쓰신 글이 철학의 개념틀을 가지고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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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반박한 댓글에 동의하시는 정도로 이해하고 따로 반론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철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 제가 한 노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 주장의 논지를 명확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 주장에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반박을 하시는 댓글이 그 전제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던 거 같습니다.)

철학의 개념틀을 가지고 사회현상을 분석하지 않는다고 철학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분야가 애매해서 잡념 카테고리에 단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려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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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려는 시도는 좋은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 포함 다른 분들이 비판적으로 답글을 다는 이유는 주장의 성격에 따라 근거의 성격 역시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좋은 인격적 요소"와 "좋은 경제적 지표" 사이의 충분/필요조건을 다루는 것으로서 주장된다면, 이는 철학적인 선험적 논변의 대상이 될 수 있겠죠. 혹은 "좋은 인격적 요소는 좋은 경제적 지표를 만들 수 있다 "라는 명제를 "논리적 명제"로서 다루는 것이라면 논리학적 분석틀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장하시는 것처럼

"개연성"에 대한 것이라면, 이러한 개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종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경우 철학적 접근이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적 연구나 통계적 실증 연구에 가깝겠죠. 논변을 통해서 가설을 세우고 이것을 증명하는 작업은 비단 철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니깐요. 따라서 개연성 주장을 위한 유의미한 (예컨대) 사회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모종의 근거를 제시하시긴 하셨지만 유의미하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직관"이나 "상식"에 기대는 것은 학문적 접근과 거리가 멀 뿐더러, 철학적 접근과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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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개연성이 크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통계들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너무 상식과 직관에 의존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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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분이나 아니면 어딘가 경제관념에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부모님이 보증금 1000만 원을 내주셨기에 용돈을 드리고 받는게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월 60만 원을 용돈으로 드리는 게 당연하다면 도덕은 몰라도 경제관념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원금 1000만 원에 대한 이자가 연 720만 원이라뇨. 보증금에 대한 이자만 무이자로 모아도 5년이면 4천 가까이 되니 만일 진짜 이렇게 하는 여성이 있다면 경제관념과 미래에 대한 비전은 꽝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부모님이 검소한 거부셔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며 점수를 따는게 막대한 상속재산을 확보하는 전략일 수 있다거나 하는 등 조건이 외삽되는 것은 사양하겠습니다.

자세히 따져보신 거라고 하니 저도 꼼꼼히 보며 지나가다 몇 자 얹었습니다.

계산이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어떻게 연 720을 보증금 이자로 받을 수 있죠? 참고로 여성A는 임대인이 아니라 임차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우엘벡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처녀들은 한결 신중하고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학업 성적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장차 좋은 직업을 갖는 데에 필요한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긴 하지만, 그건 여가 활동이나 심심풀이일 뿐이다. 거기에는 성적인 쾌락과 자기 도취적 만족감이 거의 대등하게 작용한다. 더 나이가 들면, 그녀들은 이러저러한 조건을 따져 가며 합리적인 결혼을 하려고 애쓴다. 그녀들은 대개 상대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적 조건이 합당하고 취미나 기호에 공통점이 있을 때 혼인을 결정한다. 사랑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런 결혼이 행복할 리 없다(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가져다 주는 융합적이고 퇴행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모조모 따지며 실리를 챙기는 사람은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없다). 오늘날의 여자들은 그런 선택을 통해서 앞 세대 여자들을 괴롭힌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변한다. 열정의 고통이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은 권태와 공허감, 늙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뿐이다.”

보증금 1000만 원을 부모님이 빌려주셨기에 당연하게 드리는 용돈이 너무 과도하게 책정됐다는 말입니다. 부모님께 매년 용돈 720만 원을 드리느니 차라리 사채를 써서 보증금을 마련했다면 돈을 훨씬 아낄테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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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마련한다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지 않고 평균보다 생활비를 여유롭게 썼을 수 있겠죠. 그러나 보증금과 부모님의 용돈은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해보입니다. 제가 보증금 때문에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는 듯이 쓰긴 했지만 애초에 효도 혹은 은혜를 갚는다는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 더 일반적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그녀의 생활비로 그녀의 경제관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도출하려면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돈을 자신의 사치에 사용했다면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녀가 그 돈을 자신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pt를 받는다거나, 주기적으로 기부를 한다거나 등등. 여기서 저는 어떤 불필요한 조건을 외삽는게 아닙니다. 애초에 재산량같은 어떤 객관적인 숫자로 개인의 인성이나 도덕성을 의미있게 도출하려면 여러가지 조건이 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혹은 어떤 조건이 붙더라도 도출할 수 없다는 의견도 가능합니다). 애초에 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녀를 평가하는 사람의 인성이 더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앞서 적은 답글이 제 의도를 잘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점에서 제 잘못이 큰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생산적인 대화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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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소한 부분을 물고 늘어졌는데 의도는 농담조였습니다. 전혀 농담처럼 전달되지 않아 미안합니다. 애초에 원글은 bigalan님께서 하시려는 것처럼 세밀한 논증을 하는 글이 아니기에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시지 말라고 꼬투리 잡았는데 읽고 보니 제 말투가 더 진지빨아서 농담처럼 안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경제관념이 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논지에는 동의합니다만, 개인이 처한 상황 등 변수가 무궁무진하기에 5년간 3천을 모아야 한다 등으로 구체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시하신 여성분의 사례는 알뜰하고 효심까지 있는 인성 훌륭한 여성으로 보입니다. 다만 부모님 용돈 부분은 보증금을 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용돈을 월 60으로 책정했다는 것처럼 읽혀서, 경제관념이 좀더 바르다면 차라리 대출로 보증금을 마련하고 이자를 갚는게 낫지 않을까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보증금과 별개로 부모님께 응당 용돈을 드리는게 옳다라는 것을 폄하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뻘소리 농담조로 하려던게 첫 댓글을 잘못 달아 이지경에 이르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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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라는 표현을 비롯해서 PC가 횡행하는 오늘날에 크게 공격과 비난을 받았을 주장이군요. 게다가 표현을 몇 개 바꾸면 남자들에 대해서도 결론이 완전히 같은 얘기를 할 수 있겠군요. '합리적'의 어떤 의미에서 남자들은 덜 '합리적인 결혼을 하려고 애쓴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아마 남자들이 사랑을 정말로 중요시 한다거나 여자들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남자든 여자든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은 극히 어렵고 대다수나 상당수의 남자들은 사랑을 성적 소유욕과 혼동하는 존재, 특히 감각적 매력에 눈이 멀어서 상대의 전인격적 면모를 소흘히 하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최근 몇십년 전부터는 적어도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는 상대에 대해서는 '요모조모 따지는' 경향도 늘었죠.

(1)

인용문의 저자인 미셸 우엘벡은 실제로 좌파와 PC 진영에게 극도의 비판을 받는 논쟁적인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을 토로하면서도, 그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없는 일종의 '불치병'을 앓는 듯한 유령들이 떠돌아다니는 초기작들은 좋아하는 편입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이나 <소립자>, 논쟁적이지만 <플랫폼>까지는 좋아합니다.)(다만 이 초기작에서도 기묘한 백인/남성/엘리트주의가 시대적 변화로 인해 추락하는 과정을 수용하지 못하는 듯한...그런 인상이 남아있죠.)

다만 요근래 작품들인 <복종>과 <세로토닌>에서는, 결국 이 문제들이 외국인들과 PC 경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저것들이 없다면 내 문제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죠.

뭐.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가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불치병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데이빗 포스터 윌러스와 결을 같이하고 (이들의 보다 학구적이고 중립적인 선배로는 돈 드릴로가 있겠죠),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인식하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특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기묘한 자의식에서는 필립 로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이 방면에서는 나보코프의 1인극이 떠오르는 측면이 좀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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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부분이 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여자의 남자친구가 실망할 근거가 무엇인가요? 모은 돈이 3,000만원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경제관념을 강하게 대표하는 지표이고, 이를 근거로 인격적 요소를 평가하는 요소인지 말입니다.

나이가 30이 되는 여자가 얼마만큼의 돈을 모아야,

남자친구가 만족하는 돈의 액수에 해당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의 액수라는 것이 지극히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개인의 인격성이라는 선험적이고, 당위적인 판단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몇 가지만 짧게 코멘트 드립니다.

  1. 인격적 완성도가 '선험적이고 당위적인' 요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인격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건 선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고요, 'a가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a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ought to)라는 것과는 별개의 사실을 표현하는 진술입니다.

  2. 나아가, 선험적, 당위적 사실이 후험적 사실에 의해 입증/반증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가령,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 명을 살리는 게 선하다’는 ‘더 많은 이가 행복한 것이 더 좋다’라는 보조적 법칙만 선제된다면, ‘백 명을 죽이는 것이 백 명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들을 덜 행복하게 한다’라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입증됩니다.

  3. 아마도 ‘가치 평가적 진술’과 ‘당위적 진술’ 간의 혼동을 범하신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가치 평가적 진술이 후험적으로 정당화된 진술로부터 정당화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역시나, 아닙니다. ‘사탕이 맛있다면, 사탕을 먹으면 기분좋아질 것이다’와 더불어, ‘사탕을 먹었으나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라는 사실 진술은 ‘사탕은 맛있지 않다’라는 가치평가적 진술을 정당화합니다.

  4.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의도하신 바는, 남자 a와 여자 b에 대해, ‘a는 b가 3천만원 이상을 모았길 바란다’라는 a 의존적 진술로부터 ‘b의 인격성이 이러저러하다’라는 보편적 가치 평가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시지 싶습니다. 하지만 원문의 논증은 이와 별개로 이미 일반화된 차원에서 누군가가 3천만원 이상을 모으지 못했다면 그의 인격이 이러저러함을 예측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어서, 이는 적절한 반론이 아닙니다.

원문의 논증이 세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원문의 결론이 동의할 만한 것인지가 제게도 불분명해보입니다만, @tshumh 님의 반론 내지 의문 제기가 적절하지 않아보여 의견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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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관하여

모은 돈이 3,000만원이면 그 인격성 판단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10억원이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제게 의문입니다. 과연 인격성 판단에 있어서 선험적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2.에 관하여

선험적 요소를 후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지는 저는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 명을 살리는 게 선하다’라는 명제가 선험적인지 의문입니다.

3.에 관하여

‘사탕은 맛있지 않다’가 과연 가치평가적 진술인지도 의문입니다.

4.에 관하여

저는 왜 하필 3,000만원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3,000만원이라는 우연적 요소로부터 인격성이 막바로 도출될 수 있을까요?

이상으로 제 부족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car_nap님의 견해도 충분히 수긍합니다만, “인격성”이라는 개념이 철학의 한 고찰영역이라면 당연히 선험적으로 고려할 요소가 있고, 3,000만원이라는 돈의 액수가 가치판단에 있어 과연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을까하는 소박한 의문제기였습니다.

다소 제 글이 거칠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ㅠ

BHL과 나눈 편지에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타락의 전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절대적인 불가역성'이라고 말하거나 '지도와 영토'에서 자신의 입으로 우리들(화가, 소설가)도 상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슈퍼마켓을 찬양하고 카메라의 단종에 대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그렇죠. 현대사회(성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가지는 폭력성을 들추면서도 대안은 없다, 그것들이 주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해방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점에서 그의 스승인 쇼펜하우어의 느낌도 나고요. DFW와 결을 같이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실제로 '처녀'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그닥 성차별적이라고 읽히지는 않는 문단입니다. 여성들이 '경제적', '합리적'인 결혼을 하려고 하는 이유도 앞세대 여자들을 괴롭힌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인데, 이 앞세대는 소설의 문맥으로 보면 68 혁명의 앞세대, 가정과 사회 내의 성차별을 직격으로 받았을 세대이기 때문이죠.

(1)

다만 미국적 감수성과 서유럽적 감수성의 차이인지, 우엘벡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지만, 윌러스는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 보입나다.

립스키와 했던 인터뷰나 에세이들을 보면, 분명 철학 석사에 MFA에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 (바스, 바셸미, 핀천 등)을 꽤 애독했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를 피하죠.
또한 (본인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지만) 백인 지식인 이미지에 걸맞는 온갖 형태의 중독 (섹스, 마약, 알콜, 항정신성 약품)에 대해서도 죄다 가지고 있었지만 최대한 말을 아낍니다.

대신 언제나 미국 남부 노동자 같은 반다나를 쓰고 ("나는 평범한 미국인이야!"), 대중문화에 대해서나 주저리주저리 거리고, 끊임없이 중서부 출신 (가장 특색이 없고 농업 중심의 미국스러운 곳이지만, 윌러스는 중서부에 있었다 뿐이지 아버지부터 교수인 대학 도시 출신입니다. 이런 곳과 보통의 중서부를 같게 두는건...조금 어려운 일이죠.)에 테니스 선수였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죠.

(2)

항상 이런 논의들은 적을 지나치게 거대하게 잡고는 엉뚱한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정확히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리고 그게 정말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 문제인가? 아니면 그저 나 혹은 내가 속한 특정 그룹에게는 일어나고 다른 그룹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인가?) 이런 복잡한 사유를
모두 내팽게치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형이상학적인 적을 만들고서는 알아서 패배해버리는 느낌입니다.

적이 거대하고 유령 같은데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러다보니 이상한 대상을 적 대신 상정해서 공격하는 결론에 이른거 같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분노가 없는 돈 드릴로나 자기자신조차 냉정하게 바라보는 쿳시나 여성 작가인 토니 모리슨 등이 한 수 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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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엘벡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되는 말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백인/중산층/이성애자 남성의 입장에서 글을 쓰니까요. 비난의 대상이 되는 68이나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누군가에게, 성소수자와 여성 혹은 저숙련 노동자들에게는 해방이었음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느낌마저 들더군요. 욕망이 허용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욕망의 해방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겁니다. 하고싶은 말을 소설을 빌려 풀어쓰는 작가의 한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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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두고 합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우엘벡의 그 글을 '여성혐오적'이라고까지 느낄 것입니다. 우엘벡이 괜히 좌파와 PC 진영에게 극도의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엘벡의 그 글은 제가 이미 논평한 대로 '그럼 남성들은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다르더라도 그 다름이 남성들로 하여금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가'라는 뻔한 질문에 대한 뻔한 답을 야기합니다. 그 답을 조금 더 부연하면 이렇습니다: 여성들이 "사랑 따위는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대개 상대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적 조건이 합당하고 취미나 기호에 공통점이 있을 때 결혼을 결정하고 그 결과 불행해져 권태와 공허감, 늙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남은 불쌍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 저는 21세기에 이런 극단적인 일반화와 단정을 접하고 어이없어 하지 않고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여성들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런 여성들과 결혼한 남성들은 뭔가요?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니까 자신을 열정 없이 합리적인 고려를 통해서만 선택한 여성들과의 결혼 생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엘벡의 소설에서 일말의 재미를 넘어서는 어떤 심오함이나 작품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달리 자비로운 해석을 해줄만한 맥락을 상상하기 어려운 이 발췌문이 그 느낌을 정당화 해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