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상대방의 재산을 고려하는 것에 대하여

저는 이 부분이 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여자의 남자친구가 실망할 근거가 무엇인가요? 모은 돈이 3,000만원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경제관념을 강하게 대표하는 지표이고, 이를 근거로 인격적 요소를 평가하는 요소인지 말입니다.

나이가 30이 되는 여자가 얼마만큼의 돈을 모아야,

남자친구가 만족하는 돈의 액수에 해당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의 액수라는 것이 지극히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개인의 인격성이라는 선험적이고, 당위적인 판단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몇 가지만 짧게 코멘트 드립니다.

  1. 인격적 완성도가 '선험적이고 당위적인' 요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인격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건 선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고요, 'a가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a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ought to)라는 것과는 별개의 사실을 표현하는 진술입니다.

  2. 나아가, 선험적, 당위적 사실이 후험적 사실에 의해 입증/반증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가령,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 명을 살리는 게 선하다’는 ‘더 많은 이가 행복한 것이 더 좋다’라는 보조적 법칙만 선제된다면, ‘백 명을 죽이는 것이 백 명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들을 덜 행복하게 한다’라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입증됩니다.

  3. 아마도 ‘가치 평가적 진술’과 ‘당위적 진술’ 간의 혼동을 범하신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가치 평가적 진술이 후험적으로 정당화된 진술로부터 정당화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역시나, 아닙니다. ‘사탕이 맛있다면, 사탕을 먹으면 기분좋아질 것이다’와 더불어, ‘사탕을 먹었으나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라는 사실 진술은 ‘사탕은 맛있지 않다’라는 가치평가적 진술을 정당화합니다.

  4.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의도하신 바는, 남자 a와 여자 b에 대해, ‘a는 b가 3천만원 이상을 모았길 바란다’라는 a 의존적 진술로부터 ‘b의 인격성이 이러저러하다’라는 보편적 가치 평가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시지 싶습니다. 하지만 원문의 논증은 이와 별개로 이미 일반화된 차원에서 누군가가 3천만원 이상을 모으지 못했다면 그의 인격이 이러저러함을 예측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어서, 이는 적절한 반론이 아닙니다.

원문의 논증이 세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원문의 결론이 동의할 만한 것인지가 제게도 불분명해보입니다만, @tshumh 님의 반론 내지 의문 제기가 적절하지 않아보여 의견 남겼습니다.

2개의 좋아요

1.에 관하여

모은 돈이 3,000만원이면 그 인격성 판단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10억원이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제게 의문입니다. 과연 인격성 판단에 있어서 선험적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2.에 관하여

선험적 요소를 후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지는 저는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 명을 살리는 게 선하다’라는 명제가 선험적인지 의문입니다.

3.에 관하여

‘사탕은 맛있지 않다’가 과연 가치평가적 진술인지도 의문입니다.

4.에 관하여

저는 왜 하필 3,000만원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3,000만원이라는 우연적 요소로부터 인격성이 막바로 도출될 수 있을까요?

이상으로 제 부족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car_nap님의 견해도 충분히 수긍합니다만, “인격성”이라는 개념이 철학의 한 고찰영역이라면 당연히 선험적으로 고려할 요소가 있고, 3,000만원이라는 돈의 액수가 가치판단에 있어 과연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을까하는 소박한 의문제기였습니다.

다소 제 글이 거칠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ㅠ

BHL과 나눈 편지에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타락의 전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절대적인 불가역성'이라고 말하거나 '지도와 영토'에서 자신의 입으로 우리들(화가, 소설가)도 상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슈퍼마켓을 찬양하고 카메라의 단종에 대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그렇죠. 현대사회(성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가지는 폭력성을 들추면서도 대안은 없다, 그것들이 주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해방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점에서 그의 스승인 쇼펜하우어의 느낌도 나고요. DFW와 결을 같이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실제로 '처녀'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그닥 성차별적이라고 읽히지는 않는 문단입니다. 여성들이 '경제적', '합리적'인 결혼을 하려고 하는 이유도 앞세대 여자들을 괴롭힌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인데, 이 앞세대는 소설의 문맥으로 보면 68 혁명의 앞세대, 가정과 사회 내의 성차별을 직격으로 받았을 세대이기 때문이죠.

(1)

다만 미국적 감수성과 서유럽적 감수성의 차이인지, 우엘벡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지만, 윌러스는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 보입나다.

립스키와 했던 인터뷰나 에세이들을 보면, 분명 철학 석사에 MFA에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 (바스, 바셸미, 핀천 등)을 꽤 애독했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를 피하죠.
또한 (본인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지만) 백인 지식인 이미지에 걸맞는 온갖 형태의 중독 (섹스, 마약, 알콜, 항정신성 약품)에 대해서도 죄다 가지고 있었지만 최대한 말을 아낍니다.

대신 언제나 미국 남부 노동자 같은 반다나를 쓰고 ("나는 평범한 미국인이야!"), 대중문화에 대해서나 주저리주저리 거리고, 끊임없이 중서부 출신 (가장 특색이 없고 농업 중심의 미국스러운 곳이지만, 윌러스는 중서부에 있었다 뿐이지 아버지부터 교수인 대학 도시 출신입니다. 이런 곳과 보통의 중서부를 같게 두는건...조금 어려운 일이죠.)에 테니스 선수였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죠.

(2)

항상 이런 논의들은 적을 지나치게 거대하게 잡고는 엉뚱한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정확히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리고 그게 정말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 문제인가? 아니면 그저 나 혹은 내가 속한 특정 그룹에게는 일어나고 다른 그룹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인가?) 이런 복잡한 사유를
모두 내팽게치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형이상학적인 적을 만들고서는 알아서 패배해버리는 느낌입니다.

적이 거대하고 유령 같은데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러다보니 이상한 대상을 적 대신 상정해서 공격하는 결론에 이른거 같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분노가 없는 돈 드릴로나 자기자신조차 냉정하게 바라보는 쿳시나 여성 작가인 토니 모리슨 등이 한 수 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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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엘벡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되는 말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백인/중산층/이성애자 남성의 입장에서 글을 쓰니까요. 비난의 대상이 되는 68이나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누군가에게, 성소수자와 여성 혹은 저숙련 노동자들에게는 해방이었음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느낌마저 들더군요. 욕망이 허용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욕망의 해방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겁니다. 하고싶은 말을 소설을 빌려 풀어쓰는 작가의 한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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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두고 합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우엘벡의 그 글을 '여성혐오적'이라고까지 느낄 것입니다. 우엘벡이 괜히 좌파와 PC 진영에게 극도의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엘벡의 그 글은 제가 이미 논평한 대로 '그럼 남성들은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다르더라도 그 다름이 남성들로 하여금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가'라는 뻔한 질문에 대한 뻔한 답을 야기합니다. 그 답을 조금 더 부연하면 이렇습니다: 여성들이 "사랑 따위는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대개 상대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적 조건이 합당하고 취미나 기호에 공통점이 있을 때 결혼을 결정하고 그 결과 불행해져 권태와 공허감, 늙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남은 불쌍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 저는 21세기에 이런 극단적인 일반화와 단정을 접하고 어이없어 하지 않고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여성들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런 여성들과 결혼한 남성들은 뭔가요?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니까 자신을 열정 없이 합리적인 고려를 통해서만 선택한 여성들과의 결혼 생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엘벡의 소설에서 일말의 재미를 넘어서는 어떤 심오함이나 작품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달리 자비로운 해석을 해줄만한 맥락을 상상하기 어려운 이 발췌문이 그 느낌을 정당화 해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