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루이스가 예수의 대속 사건에 대해 논하였다고?!: 루이스의 종교철학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 S. 루이스도 아니고, 분석 형이상학자인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가 그리스도교의 형벌 대속 이론에 대해 논문을 썼군요. 루이스가 온갖 철학적 주제에 개입한 인물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신학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는지는 몰랐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교의 형벌 대속 이론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쓴 글인 것 같네요. 스탠포드 철학백과의 '데이비드 루이스' 항목(David Lew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형벌 대속을 믿는가?」(1997a)에서, 루이스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위해 적절하게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오직 가끔씩만 받아들인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에 대해 흥미로운 난점을 제기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형벌 대속의 형식이 아닐 것이라고 시사하면서 말이다.

In “Do We Believe in Penal Substitution?” (1997a), Lewis notes that we only sometimes accept that one person can be properly punished for another’s misdeeds. He uses this to raise an interesting difficulty for the Christian idea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suggesting this may not be a form of penal substitution that is normally acceptable.

그밖에도 루이스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증명이나 자유의지에 근거한 신정론에 대해서도 글을 썼네요. 물론, 데이비드 루이스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만족한 무신론자(contented atheist)"라고 표현하기도 했다는 만큼, 루이스의 글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논제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내용인 것 같네요.

그렇지만 루이스가 꽤나 종교철학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기는 합니다. A Compaion to David Lewis라는 책에서는 종교철학에 대한 루이스의 관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데이비드는 더 넓은 분석 형이상학 속의 전문 분야로서가 아니라 종교철학에 그 자체로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학부 세미나에서 철학적 신학과 악의 문제에 대해 가르쳤다. 실제로 그의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은, 특별히 반사실문에 대한 그의 작업은, 분석적 종교철학에서 작업하는 철학자들에게 중요하다.

David was interested in philosophy of religion for its own sake, not just as a specialty within broader analytic metaphysics. He taught undergraduate seminars on philosophical theology and on the problem of evil. Indeed much of his metaphysics, especially his work on counterfactuals, is of consequence for philosophers working in analytic philosophy of religion.

Stephanie R. Lewis, "Where (in Logical Space) Is God?", in A Companion to David Lewis, Barry Loewer and Jonathan Schaffer (eds.), Wiley Blackwell, 2015, 207.

개인적으론, 마이클 더밋이 예수 부활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것만큼이나 루이스가 형벌 대속 이론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니, 루이스의 종교철학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는 글도 있네요.

예를 들어, 우리는 법에 종사한 적 없거나 법 학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법철학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물리학을 해본 적이 없는 물리철학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한 철학자는 주제를 내부에서부터 실천을 통해 알고 있지 못하다. 동일하게, 우리는 철학을 내부에서부터 실천을 통해 알고 있지 못하면서도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로렌스 크라우스 같은 무지한 물리학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크라우스의 경우, 비록 그러한 모든 물리학자의 경우에서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를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X에 대해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과 X를 내부에서부터 실천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

왜 이것이 종교철학이라고 다르겠는가? 나는 철학자가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우리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고자 한다. 그 철학자가 종교를 내부에서부터, 특정한 종교에 대한 신실하고 공감적인 실천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닌 이상 말이다. 데이비드 루이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그의 세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적 실천가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내부로부터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나는 루이스가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우리가 무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그것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그대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공감적 실천을 통해, 내부에서부터) 알지 못하였다.

For example, how seriously ought one take a philosopher of law who has never practiced law or who doesn't even have a law degree? How seriously ought one take a philosopher of physics who has never done physics? Such a philosopher does not know the subject from the inside by practice. Equally, how seriously should one take a physicist such as the benighted Lawrence Krauss who does not know philosophy from the inside, by practice, yet pontificates about philosophical questions? In the case of Krauss, though not in the case of all such physicists, we should not take him seriously at all.

To be a good philosopher of X one ought to know both philosophy and X from the inside, by practice.

Why should it be any different for the philosophy of religion? I incline to the view that one should not take too seriously what a philosopher says about religion unless he knows religion from the inside by the sincere and sympathetic practice of a particular religion. David Lewis, without a doubt, was one of the best philosophical practitioners of his generation. And yet he understood nothing of religion from the inside.

I am not saying that we should dismiss what Lewis says about religion. I am saying that we should not take it too seriously. He literally doesn't know (by sympathetic practice, from the inside) what he is talking about.

뭐, 저는 종교철학자가 종교를 반드시 내부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J. L. 맥키나 다니엘 데닛 같은 무신론자들은 꽤나 좋은 논의를 촉발시키는 훌륭한 무신론 종교철학자라고 생각해요. 또, 루이스의 종교철학 논문들을 아직 꼼꼼하게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형벌 대속 이론 비판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저는 루이스의 종교철학 논의도 진지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X에 대해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과 X를 내부에서부터 실천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라는 지적은 분명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집합론을 전공한 사람이 수학철학을 하는 것에 대해서나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과학철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죠. 오히려 그 분야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면서 다른 학위가 없이 철학만 한 사람들이 주눅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유달리 종교철학에 대해서만큼은, 기성 종교의 신앙인이 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신 분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최근에도 다른 사이트에서 종교철학과 관련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기독교인 철학자들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잡아 무시하는 태도에 좀 열이 받아서 흥분했네요. 반 인와겐이나 플란팅가 같은 인물들조차 그냥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창조과학자와 동일시되어버리는 모습에 살짝 꼭지가 돌았습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저 인물들의 형이상학에 제가 동조하진 않지만, 무슨 주장을 해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무시하겠다는 태도는 제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인 이상 꽤나 모욕적으로 들리더라고요.)

여하튼, 무신론자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이슬람이든 힌두교인이든 상관 없으니까, 철학판에서는 철학만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흥미롭고 의미 있는 논의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토론하고, 지적받을 만한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만 가지고 비판하는 문화가 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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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루이스의 논문집 중에서는 약간 잡다구리(?)한 주제의 논문들을 모아둔 논문집에 수록된 논문이라 잘 안 알려진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고 제가 받은 인상이 그리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논문에서 루이스의 핵심은 신학적 입장으로서의 속죄에 대한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 theory of the Atonement)이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형벌의 대속이라는 개념이 가당한 개념인가 하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철학자로서 던질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하구요. 이 논문은 <속죄의 본질 논쟁>(아마도 제목이 맞을 것 같은데)이라는 글모음에서 인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마이클 더밋이 예수 부활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것만큼이나 루이스가 형벌 대속 이론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이 짧은 논문을 읽고 저는 마음이 조금 들뜨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분석철학이 변증론 말고도 이런 식으로 신학과 접점을 맺을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그 뒤로 분석 신학(analytic theology)이라는 분야도 생겨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기도 했구요. 아직 설익은 생각이고 제가 원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닌 줄 믿습니다만, 앞으로 저는 제 전공분야 말고도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변증학과 신학적 주제에 대한 분석적 접근 같은 것을 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X에 대해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과 X를 내부에서부터 실천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라는 지적은 분명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동의합니다. 저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철학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과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을 더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이고, 또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다져져 있어야 반성적 사고도 가능해지는 것이겠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학철학을 한다고 해서 과학전문가가 되어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적어도 반성적 사고를 시작할 충분한 기초자료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튼, 무신론자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이슬람이든 힌두교인이든 상관 없으니까, 철학판에서는 철학만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흥미롭고 의미 있는 논의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토론하고, 지적받을 만한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만 가지고 비판하는 문화가 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례한 종교인과 거만한 비종교인이 참 많습니다. (존재명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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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hi Nation 팟캐스트에서 데이비드 루이스의 종교철학에 대해서도 짧게 다룬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듣다보면 루이스가 "다신론적 무신론자(polytheistic atheist)"였다는 피식하게 되는 얘기도 나오니 많이들 한번 살펴보시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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