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정신현상학』 역주 관련 질문

『정신현상학』 국내 번역본에 관련해서 질문드립니다. 국내에서 현재 구할 수 있는 『정신현상학』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임석진 역(2006)과 김준수 역(2022)이 대표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임석진 선생님 번역본의 경우 역주 수가 꽤나 되는 걸로 아는데, 그 역주가 본문을 읽기에 도움이 될까요? 정신현상학을 (이성 장까지만)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데 임석진 선생님 번역본으로 먼저 읽어볼까 해요. 왜냐하면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Werke판과의 차이에 관한 주석 이외에) 내용에 관한 역주는 잘 보이지 않는데, 임석진 선생님 번역본은 비교적 친절한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 역주나 번역에 치명적인 내용상의 오류는 거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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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전공자 분들이 더 자세한 답변을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개인적인 의견만 드려보겠습니다. 임석진 역이 한길사에서 나온 3판을 말하는 것이라면 비추입니다. 한길사 판의 경우 임석진 선생이 동양철학에 너무 심취하여 정신현상학을 되지도 않는 동양풍으로 억지 해석/번역해버리는 바람에 아주 기괴해져버린 판본입니다. 제 기억상 역주의 대부분이 이런 동양철학에 대한 역주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얼핏 듣기로는 임석진 선생이 번역한 초판본이 독일어에 충실하게 직역한 버전이라 더 낫다고 들었습니다. 임석진 역을 읽으시겠다면 초판본을 찾아보세요.

김준수 역은 제가 읽어본 적은 없으나 새로 나온 번역이기도 하고 김준수 교수는 국내에 잘 알려진 헤겔 연구자이기도 하니, 둘 중에 선택한다면 이쪽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능력이 되신다면 영역본으로 보시거나 영역본을 참조해가시면서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독일어 독해가 가능하시다면 당연히 독어본이 제일 좋구요.) 임석진 역 말고도 다른 연구자 분들이 국역한 원고 등을 몇번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국역본을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가 되었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뭐 사실 독일어로 읽는다고 이해가 잘 되는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만...) 물론 이것은 역자들이 번역을 개떡같이 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헤겔의 서술 자체에서 기인합니다. 헤겔의 난해한 서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헤겔이 왜 난해하게 썼는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겔은 주어-술어로 이루어진 인도-게르만어의 통사적 구조를 기본적으로 못마땅해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언어의 구조를 유지하는 이상 사변적 진리를 포착할 수 없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헤겔은 주어-술어로 이루어진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도, 이러한 독일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언어를 이리저리 비틀고 언어유희도 집어넣고 소위 장난질을 친 것입니다. 즉 헤겔은 인도-게르만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난해한 서술을 도입하였지만,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인도-게르만어가 아니면 헤겔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죠. 인도-게르만어와 접점이 0인 한국어는 말할 필요도 없구요. 이런 까닭에, 독일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독-한 대역으로 읽는 독자 내지 연구자라면 모를까, 헤겔을 순수 국역본을 통해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자기 방식대로 오해하고 헤겔을 이해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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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진 교수님의 헤겔 번역본과 관련해서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 의견들이 올라왔습니다.

첨언하자면,얼핏 Herb님의 댓글과 제가 올린 링크의 댓글들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특히, 국역본으로 헤겔을 이해할 수 '있다/없다'에서 의견이 갈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둘 다 근본적인 요지는 같다고 생각해요. (a) 헤겔을 임석진 역이든 김준수 역이든 국역본으로 쌩으로 읽으면 결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b) 그런데 이건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헤겔의 서술 방식 자체의 문제에요. (c) 그래서 사실 헤겔 텍스트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의 문제보다도, 좋은 헤겔 해설서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님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를 추천드려요. 지금으로서는 이 책에 동의하지 않는 내용도 많지만, 그래도 입문서로는 참 정리가 잘 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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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께서 말씀하셨듯 2004년에 출간된 임석진 역 한길사 판의 경우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당시 역자이신 임석진 선생님께서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기보다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옮기겠다는 의도를 갖고 작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통일이 필요한 철학적 개념어들이 그때그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거나, 과감한 의역으로 인해 문장 전체의 의미가 원문 문장과 상당한 차이를 지니게 되거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동양철학에 대한 역자 선생님의 취향이 깊이 반영되어 "의식은 융통자재하고 상생상승한다"처럼 옮겨진 부분들이 꽤 많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말미암아 이 책은 헤겔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학술적으로 활용하기에 다소 불편한 역본으로 간주되었죠.

반면 동일한 역자의 82년 지식산업사판 번역본은 위의 번역처럼 동양철학 관련 문제(...)는 없고 원문에 비교적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기억으로는 딱딱하고 불가해한 원문에 대한 윤문이 꽤 들어가 있습니다. 난해한 헤겔의 문장들을 자연스럽고 이해가 되는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판본은 절판된 지 오래라는 점입니다.

원문에 대한 충실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현재 김준수 선생님 번역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다른 전공자 분들도 대체로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문헌학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비판본인 펠릭스 마이너의 Gesammelte Werke 판을 대본으로 삼았고, 중요한 개념어들에 일관적으로 통일된 번역어들이 할당되었으며, 문장이나 대명사의 애매성 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다수의 번역 가능성들을 명기해놓고 대안적 번역들이 각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김준수 역은 다른 역본들에 비해 강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겔 책은 독일인들도 읽다가 집어던지는 책입니다. 독-한 번역이라는 필터를 통해 한 번 더 꼬여 있으면 그 어려움은 더하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제 경험상 그 어려움은 헤겔이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 헤겔이 암시적으로 적수로 겨냥하는 당대의 철학자들, 책 전체, 나아가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잡고 있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맥락(특히 헤겔의 경우 여기서 오는 어려움이 심합니다) 등 내용적인 요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의 제안은, YOUN님 말씀처럼 이런 내용적인 부분들을 친절하게 채워줄 수 있는 해설서를 한두 권 정도 읽는 것입니다. 전문 연구자의 수준에 올라서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차 문헌들이 그런 어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다른 주저인 『논리의 학』에 비해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해설서들이 꽤 나와 있습니다. YOUN님께서 추천해주신 한자경 선생님의 책 외에도, 예컨대 다음과 같은 해설들을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훌게이트 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외의 헤겔 해설서 등에 관해서는 다음 글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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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이 국역본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해주셨으니, 정신현상학을 읽는 것에 대해서 조금 말을 해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는 처음 헤겔 (혹은 어떤 철학자) 을 공부할 때는 이런 저런 문헌을 찾아보는 것보다, 1차 문헌을 중점적으로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수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쌩으로 읽으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 조언은 위에서 언급한 훌게이트의 책 정도만 간간히 가이드로 읽으면서 1차 문헌을 꼼꼼히 읽어보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 프로세스는 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따릅니다: 1. 1차 문헌의 원하는 부분을 읽는다 2. 그 부분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말이 되는지를 생각하며 reconstruct한다 3. 자신이 생각한 reconstruction을 염두에 두고 그 부분을 다시 읽는다. 이 프로세스를 밟게 되면, 주로 2번에 시간을 가장 많이 쏟으실 것입니다.). 이때 속도가 너무 느려도 조바심 내지 않고 차근차근 읽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느리게 읽힌다는 것이 잘 읽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밀도가 높은 책이니요. 실제로 제가 살면서 처음 들었던 철학 수업이 헤겔이었는데, 정신현상학을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해나가는 수업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약 40쪽 정도 읽었었습니다. 즉, 12주 동안 40쪽 읽는 페이스로 읽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신현상학을 끝까지 안 읽었다고 뭐라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정신현상학에 관련된 조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각 챕터/섹션들을 정신현상학의 프레임 안에서 읽어야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감각적 확신이라던가, 인지라던가 하는 것들이 어떤 형태의 회의주의를 나타내고 있고, 그 회의주의가 왜 실패하는지 등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헤겔이 쓰는 용어의 뜻들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뜻들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말이 안 된다 싶으면 헤겔이 어떤 뜻으로 그 용어를 썼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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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관련해서 도발적인 책이 나왔네요.

저도 비전공자지만 재야의 아마추어가 저런 책을 내는 걸 좋게 볼 수가 없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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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비전공자여도 ’재야의 아마추어‘가 아닌 ’재야의 고수‘라면 환영이지만 저 책같은 경우는 아닌듯하네요.
책소개만 봐도 독어본을 기반으로 한 학회번역본을 영어본 작업으로 비판하고, 트란스첸덴탈과 트란스첸덴트이 각각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하는 것보면 할말하않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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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이 제일 좋고 의역은 읽으면 안 되는 수준 낮은 번역이라는 생각이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또 전공자뿐만 아니라 철학 바깥의 독자들도 읽기에 좋은 쉬운 번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불가능하다거나, 직역이 진입장벽을 낳고 카르텔을 형성한다든가, 어려운 문장을 써서 직역하는 철학자들이 "자신감"을 결여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똑같이 복사해 옮기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원문-번역문 간 비교가 용이하도록 중요한 문장 성분들을 대응시켜서 번역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 저는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는 철학자들이 "이권다툼을 하는" "카르텔"이라고 칭해져야 할 정도로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서로 다퉈서 빼앗을 만큼의 이익이나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요. 끝으로 철학자들이 직역을 하는 동기 역시 자신감의 결여나 책임 회피가 아니라, 논문에서 인용하고 구절 해석에 활용하는 등 국내 학술활동에 활용하기 위함이라는 점이 유력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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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양한 층위의 논의들이 이리저리 뒤섞여서 제시해주신 좋은 지적들이 묻히게 되고, 생산적인 논의들을 이어나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1. 성경도 현대어성경, 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 등이 나오는 마당에, 헤겔 역시 현대어헤겔, 쉬운헤겔, 우리말 헤겔, 등이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어떤 역자가 동양철학에 심취해서 성경을 동양철학적 개념들로 번역해 놓았다면, 저는 이것을 적어도 "이상한 번역"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임석진 교수의 동양풍 정신현상학을 "기괴한 번역"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상함을 넘어 기괴한 이유는 임석진 교수의 개인적 능력이 이상하지 않은 번역을 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직역만을 고집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역 번역본도 있고 의역본도 있어서, 독자가 자신의 목적과 여건에 맞추어 선택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같은 이유로, 자연스러운 한국어에 가까운 의역을 고집할 이유도 없습니다. 원글에서는 질문자께서 학술적 관심에서 헤겔을 읽는 것 같기에, 직역 운운하여 추천한 것 뿐입니다. 연구자들은 주로 직역을 선호하니까요.

  3. 저작권법이 걸려있어서 번역본이 제한되는 경우, 좋지 않은 번역이 출판되어서 "진입장벽"이 된다는 말에도 어느정도 동의하는데요. 그런데 단 한권의 번역본만이 출판될 수 있다면,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일까요? "원전이 그러하다고 운운하는 직역"일까요? 아니면 "독한본어를 배제한 한국어 의역"일까요? 아니면 키메라처럼 "원전에 충실한 의역"이라는 것이 가능한걸까요?

끝으로, 거창한 수사를 자주 사용하게 되면, 화자 스스로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인정투쟁", "상징자본"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이권다툼", "카르텔"을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정투쟁이라고 한다면, 이 포럼에 답글을 다는 것 역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는 인정투쟁일텐데 이 포럼 역시 이권다툼과 카르텔의 공간이겠군요. 개념이 외연이 지나치게 넓어진다면, 그 개념이 공허한 것은 아닌지를 의심해봐야 합니다.언급해주신 칸트학회 등의 예시들은 주목해볼만한 예시인 것이 맞습니다만, 이것을 자극적인 수사 없이 담백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또한 "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 "책임을 회피", "상아탑을 보호하려는 이상주의적인 발상" 등을 지적하시면서 정신분석을 시도하고 계시는데요. 이러한 시도를 하시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만, 포럼에서의 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레토릭보다는, 근거를 통한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상연 교수에 대한 글에서도 썼습니다만, 반대편에 있는 이 역시 몇몇 단어만 바꾸어서 똑같이 말할 수 있거든요. "의역에 집착하는 것도 원문(진리)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이다". 이러한 수사가 오고가는 것이 학술적인 논의에 어떤 보탬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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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선생과 칸트학회 사이의 논쟁이 불행히도 그다지 건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기로 양측은 서로의 번역이 정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부딪쳤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종현 선생이 처음 제기했던 비판 중 하나는, 번역서라는 것이 다양한 해석에 따라 상이하게 나와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 일방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일이 불가능한데 왜 "정본"이나 "공인"이라는 표현을 쓰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칸트학회에서도 받아들여서 출판사에 요청해 해당 표현들을 철회했던 것으로 압니다. 더구나 번역어에 대해 양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음에도 어느 한 쪽의 번역어가 일방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는 점은 백종현 선생도 칸트학회도 기고문에서 거듭 주장해왔습니다. 그렇게도 과격하게 지면에서 논쟁했던 양측이지만 "정본 번역서나 번역어의 획일화는 있을 수 없다"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루만 관련해서도 학자들 간 번역어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어렴풋이 알고 있긴 한데, 논쟁에서 투고되었던 글들을 읽을 수 있는 곳을 잘 몰라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알고 계시다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 논쟁에 참여하신 학자분께 간략히 듣기로는, 그 논쟁은 번역서의 정본 인정이나 번역어의 정답을 정하기 위해 벌어졌다기보다는 루만에 대한 양측의 해석 차이에 기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분들도 번역서에 '정본'이라는 것이 있음에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는 "원전에 충실"이라는 말에 숨어 책임 있는 번역을 회피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또 책임 있는 번역이 어떤 번역을 뜻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직역을 하면 자신의 번역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고, 의역을 하면 자신의 번역에 책임을 지는 것인가요? 중대한 가치를 지니는 학술 번역서를 자기 이름으로 내놓는 이상 학자들은 모두 자신의 번역이 틀릴 수 있고 그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이 가해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흔히 역자 후기나 서문에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는 문구는 상례가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번역과 관련된 비판이 정당하면 받아들이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토론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방어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번역개정판을 출간하는 작업도 심심치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점을 인지하면서 번역서를 출간하는 학자들은 직역을 하든 의역을 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번역에 책임을 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직역이나 일본식 한자어의 차용은 생각보다 철학 텍스트의 어려움에 크게 기여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애초에 진입장벽은 철학뿐만이 아니라 학문이라는 활동에서 없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 텍스트가 어려운 이유는, 철학자들이 똘똘뭉쳐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부러 번역을 어렵게 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다뤄지는 내용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징자본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학문이라는 상징공간 내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그 공간 내에서 통용되는 규칙과 전통을 익히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대가로 지불하고 진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문에서 논해야 하는 대상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다룰 수가 없고, 따라서 실질적으로 학계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학술적 텍스트들이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식 한자어를 번역서에서 모두 제거하고 직역을 모두 의역으로 고친다고 해서 어려운 철학 텍스트가 쉬워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일반 독자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양질의 해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한데 그런 일이 아주 훌륭하게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진입비용을 아예 없애버리는 일은 철학이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할 만큼 복잡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철학 연구자들이 배타적 태도를 지닌 카르텔이어서가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생물학, 수학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것이 "순진한 생각"이고 "상아탑을 보호하려는 이상주의적인 발상"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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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국 학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Weif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학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기 위해 번역을 어렵게 하는 거라면, 어려운 연구서만 출판돼야 앞뒤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론 비전공자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책들도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윈번의 신은 존재하는가?, 가브리엘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등 일반 철학의 입문서도 번역이 되고 있고, 박찬국 교수님의 삶이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와 같은 철학사 입문서들도 쓰여지니깐요. 그렇다면 저는 꼭 학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하려고 한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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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TheNewHegel님과 Weif님이 서로 대립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3자인데다 번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두 분의 논쟁에 끼어들기는 참 민망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두 분 모두 (a) 직역만이 최선의 번역이라는 생각에는 반대하시는 것 같고, (b) 국내에서 종종 건설적이지 않은 번역 논쟁이 발생한다는 점에도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만, (c) '카르텔'이나 '이권다툼'이라는 표현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상황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제 생각에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번역으로 상대편의 이익이나 힘을 뺏으려 하기보다는 나름대로 각자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번역에 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 TheNewHegel님은 그런 대부분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서 '카르텔'이나 '이권다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신 것 같고요. 반대로, Weif님은 번역을 둘러싸고 발생한 몇몇 불미스러운 사례와 저작권법으로 인한 현실적 문제 상황을 고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륙철학에서는 어학 실력이나 번역어 선정 자체가 학문적 권위와도 상당 부분 연결되어 있으니, 번역 논쟁이 언제나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지적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여하튼, 저는 (너무 양시론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두 분의 주장 모두가 학계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각각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을 뿐, 그 강조점이 반드시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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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띤 토론은 생산적일 수 있지만, 토론이 과열되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태를 우려해서 그간 이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다른 분들의 의견을 읽으며 제 의견을 보태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1. 일단 '카르텔' 혹은 '이권 카르텔'이라는 표현의 의미와 적절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카르텔(독일어, Kartell)"이란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 생산량, 판로 따위에 대하여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하는 독점 형태. 또는 그 협정"을 뜻합니다. 즉 '카르텔'은 원래 상업과 경제학 용어죠. 재계에서 통용되는 이 용어를 교육계와 학계에 적용해서 '그들만의 리그' 또는 '그들만의 성채'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새로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용어가 현재 오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내년도 R&D 예산 삭감'입니다(관련 기사: ‘R&D 예산 삭감’ 파장…과학·기술계 “연구 현장 파괴 행위”). 저는 정부와 언론이 '카르텔'이란 용어를 이런 식으로 남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2. 번역은 정말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한데 제가 볼 때, 관건은 바로 번역자의 '한국어 실력'입니다. 한국어 어법에 맞는 명료하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한 번역이 좋은 번역 아닐까요? 물론 헤겔의 원문 자체가 명료하고 세련된 문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악문(惡文)에 가깝죠. 하지만 헤겔 텍스트의 내용을 한국어로 가장 분명하고 깔끔하게 가져왔을 때, 그 번역은 좋은 번역이 될 것입니다. 안 좋은 번역의 경우에 그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번역자의 '한국어 실력'이 안 좋은 경우가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직역과 의역의 선택 문제, 사어(死語)에 가까운 옛날식 표현, 일본식 한자어 같은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한국어 구사력의 문제라고 봅니다. 번역자가 현대 한국어를 제대로 못해서 생기는 문제인 거죠.

  3. '일본식 한자어'로 여겨지는 어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즉자(卽自)'와 '대자(對自)'가 있죠. 이처럼 한국인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헤겔 철학의 이해에 장애가 된다는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여러 헤겔 연구자들이 이 단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준수 번역본 외에 『정신현상학』의 다른 번역본들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그 결과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식 한자어'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즉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한국어에서 전부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철학(哲學)'이란 말도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만든 말입니다(관련 논문: 「‘철학’이라는 일본어 어휘의 조선 전래와 정착」). 하지만 표준 한국어로 볼 수 없는 일본어 투 어휘를 배척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따져보는 부지런함이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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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x 님의 의견에 대다수 동의하는데요. 몇 가지만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2번과 관련하여:
한국어 구사력이 번역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한국어 구사력의 문제와 직역/의역 선택의 문제는 결이 좀 다르다고 봅니다. 예컨대 "자연스러운 한국어 직역"이 "부자연스러운 한국어 직역"보다 당연히 낫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절대적 기준으로 두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자연스러운 한국어 의역"이 "자연스러운 한국어 직역"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을 함축합니다. 원어와 한국어의 통사적 구조와 의미론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원초적 간극이죠. 따라서 한국어 구사력 문제가 번역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직역이냐 의역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는 한국어 구사력 문제만으로는 다루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연스러운 한국어"에 대한 희생을 일정 부분 감내하고 직역을 시도할 유인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3번과 관련하여:
저도 '즉자/대자' 같은 용어들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요. 그런데 저는 문제가 발생하는 본질적 이유는 "즉자/대자" 같은 용어들이 (2번에서 서술한 것처럼)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용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지, 일본식 한자어를 차용해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지적해주신 것처럼, "철학"같은 용어는 일본식 한자어임에도 현대 한국어 화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처럼요. 번역어 선정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경우 일본식 한자어냐 아니냐 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때마다 참 아쉽습니다. 일본식 한자어나 번역투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한국어 화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면 경우에 따라 오히려 이것이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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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타래의 특정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닙니다. 그냥 번역에 대해 제가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직역과 의역 모두 의미를 옮기는 것입니다. 직역이 의미를 더 잘 옮기는 경우가 있고 의역이 의미를 더 잘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어느 경우든 다른 한쪽보다 의미를 더 잘 옮길 수는 없습니다.

직역을 하면 번역글이라는 느낌을 주기가 쉽습니다. 메뉴얼이나 규정집이나 통신문이나 신문 기사 등의 글이 아니라면 번역글은 번역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최대한 직역을 하려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번역의 평가와 관련해서 '자연스러운'은 불필요한 용어입니다. '자연스러운'은 한 부류의 느낌을 가리킵니다. 부정확한 번역도 얼마든지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어 구사가 완벽한 이가 쓴 글인것처럼 느껴지는 글도 얼마든지 오역 투성이 일 수 있습니다.

문체가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형식적 요소인 글이 있습니다. 그런 글은 문체가 주는 느낌도 살려 번역하려는, 100% 성공할 수는 없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니체, 아도르노, 헤겔의 글을 가독성을 좋게 한다고 신문 기사 문체를 써서 번역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어떤 부류의 글은 정확히 번역한다는 것은 실현하기 힘든 것, 즉 이상입니다. 그런 부류의 글일 수록 번역본이 여럿 있는 것이 좋고 풍부한 역주가 달려야 하고 번역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학술 용어든 이해가 어렵다면 그 용어의 의미가 어려운 것이지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가져온) 한자어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순 한글 용어라면 한자 용어보다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생소함이 '조금' 덜 할 수만 있을 따름입니다.

인문학이 업인 분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할텐데, 모든 글이 투명유리같아야 하는 것은 아닌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잘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어려운 글은 잘난체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쓴 글이다, 정말로 아는 사람들은 글을 쉽게 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번역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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