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정신현상학』 역주 관련 질문

Herb님께서 말씀하셨듯 2004년에 출간된 임석진 역 한길사 판의 경우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당시 역자이신 임석진 선생님께서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기보다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옮기겠다는 의도를 갖고 작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통일이 필요한 철학적 개념어들이 그때그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거나, 과감한 의역으로 인해 문장 전체의 의미가 원문 문장과 상당한 차이를 지니게 되거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동양철학에 대한 역자 선생님의 취향이 깊이 반영되어 "의식은 융통자재하고 상생상승한다"처럼 옮겨진 부분들이 꽤 많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말미암아 이 책은 헤겔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학술적으로 활용하기에 다소 불편한 역본으로 간주되었죠.

반면 동일한 역자의 82년 지식산업사판 번역본은 위의 번역처럼 동양철학 관련 문제(...)는 없고 원문에 비교적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기억으로는 딱딱하고 불가해한 원문에 대한 윤문이 꽤 들어가 있습니다. 난해한 헤겔의 문장들을 자연스럽고 이해가 되는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판본은 절판된 지 오래라는 점입니다.

원문에 대한 충실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현재 김준수 선생님 번역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다른 전공자 분들도 대체로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문헌학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비판본인 펠릭스 마이너의 Gesammelte Werke 판을 대본으로 삼았고, 중요한 개념어들에 일관적으로 통일된 번역어들이 할당되었으며, 문장이나 대명사의 애매성 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다수의 번역 가능성들을 명기해놓고 대안적 번역들이 각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김준수 역은 다른 역본들에 비해 강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겔 책은 독일인들도 읽다가 집어던지는 책입니다. 독-한 번역이라는 필터를 통해 한 번 더 꼬여 있으면 그 어려움은 더하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제 경험상 그 어려움은 헤겔이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 헤겔이 암시적으로 적수로 겨냥하는 당대의 철학자들, 책 전체, 나아가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잡고 있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맥락(특히 헤겔의 경우 여기서 오는 어려움이 심합니다) 등 내용적인 요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의 제안은, YOUN님 말씀처럼 이런 내용적인 부분들을 친절하게 채워줄 수 있는 해설서를 한두 권 정도 읽는 것입니다. 전문 연구자의 수준에 올라서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차 문헌들이 그런 어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다른 주저인 『논리의 학』에 비해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해설서들이 꽤 나와 있습니다. YOUN님께서 추천해주신 한자경 선생님의 책 외에도, 예컨대 다음과 같은 해설들을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훌게이트 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외의 헤겔 해설서 등에 관해서는 다음 글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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