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저는 임석진 교수님의 『정신현상학』 번역(특히, 한길사에서 나온 2006년 번역)이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이 번역을 통해서는 마치 헤겔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스럽다는 입장이에요.
물론, 헤겔 전문 연구자를 목표로 헤겔을 공부한다면야 당연히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 불만스러운 점들이 많을 것이고, 또 당연히 독일어 원문을 바탕으로 헤겔을 읽어야겠죠. 그렇지만 저는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으로도 헤겔 철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봐요. 실제로, 제가 서강대 대학원을 다닐 당시에 헤겔 연구 수업을 개설하신 교수님께서는 헤겔을 전체적으로 독해하기 위해 수업에서 독일어 원문이나 영어 번역이 아니라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을 장려하시기도 하셨고요. (번역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그때마다 알려주셨죠.)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은, 원문을 생략했다기보다는, 원문을 자의적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번역으로 많이 지적되어요. 가령,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서 가장 자주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죠.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G. W. F. 헤겔, 『정신현상학』, 제1권, 한길사, 2006, 220쪽.)
여기서 '융통자재(融通自在)'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대자적이면서 대타적인'이라고 번역되어야 하고, '상생상승(相生相勝)'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즉자대자'라고 번역되어야 해요. 그런데 임석진 교수님은 헤겔의 철학을 무리하게 동양철학과 연결지으려고 하셔서, '융통자재'와 '상생상승'이라는 용어들을 자의적으로 끌어들이신 거죠.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은 단순히 번역이 '맞냐/틀리냐'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내용에 대한 임석진 교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일 것이냐/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장이 1:1 직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건 무리에요. 물론, 대부분의 국내 헤겔 연구자들이 동양철학과 헤겔의 철학을 연결지으려는 임석진 교수님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지만 (그리고 저 역시도 임석진 교수님의 해석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지만), 저는 종종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 대한 비판이 너무 1차원적인 층위에서 "그 번역은 독일어랑 안 맞아." 정도로 이야기되는 것 같아서 좀 불만이에요.
사실, 중간중간에 저런 이상한 번역들이 들어가 있기는 해도, 독일어 원문과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을 실제로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틀렸다'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문장들이 대부분이에요. 개인적으로, 임석진 교수님이 문장 나누기와 단락 나누기를 자의적으로 하셨으면서도 원문 쪽수를 기입해 두지 않아서, 번역문과 원문을 대조하기 어렵게 하셨다는 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번역된 문장이 원래 문장과 전혀 다른 의미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저는 "그렇게까지 크게 다르지는 않더라."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특히, TheNewHegel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1982년에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임석진 교수님의 초기 번역은 더 직역에 가까워서, 저로서는 독일어를 정말 '수준급으로' 잘 하면서 헤겔의 철학을 '수준급으로'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번역보다 더 잘 번역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