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키메라 만들기

(1) 올빼미에서 한참 번역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달까 하다가...논쟁이 너무 뜨거워 보여서 달지 않았던 잡념을 지금 올립니다.

(2)

한국어로 철학하기라는게 가능할까?

난 회의적이다. 한국어로 철학하기란, 단순히 지금처럼 한국어로 된 철학 학술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추측하기론, 이는 특수한 철학적 용어가 아닌 일상 한국어로 철학을 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고대 그리스/고대 중국 혹은 고대 인도처럼 이미 자신들의 일상어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던 곳이 아니라면, 이미 우리의 언어는 오염되어있다.

예컨대, 중국철학에서 중요한 "무"(없음)이라는 개념도, 중국어에 있는 단순한 부정사에서 출발했다. (물론 왜 하필 여러 부정사 중에 무였는지는 지나긴 학술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얼핏 기억하기로는 고대 그리스어 kalon은 매우 일상적인 어휘이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도 나오는 철학적 어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무는 철학적/학술적 용어로 쓰이지 이를 일상어로 쓰지 않는다. (나는 이게 일종의 양층언어 현상이라 생각한다. 현대 영어에도 학술계로 갈수록 고대 그리스/라틴어에서 기원한 어휘가 많은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3)

난 번역이 직역이든 의역이든 뭐든 키메라 만들기라 생각한다. (물론 더 학술적으로 편리한 것,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등등의 여러 가치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철학에서 쓰이는 관념어들은 그 언어권/문화권에서 다른 개념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관관계를 정확히 반영한다면 죄다 음역해야할 것이고, 최대한 반영하려 해도 (역설적으로) 미묘한 차이로 인한 완벽한 오독이 발생한다.

중국 불교의 형성이 이를 보여준다.

첫째 사례는 공이다. 공은 sunyata의 역어다. 중관불교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개념어로, 아주 거칠게 번역하자면, 현상 이면에 있는 형이상학적 본질이 없다는 개념이다.

중국어에서 이는 처음에 무/본무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노자/장자 이후로, 무는 현상 이면에 (그리고 동시에 현상에 영향을 미치면서)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현상 이면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괜찮은 번역이었지만, 동시에 중국 불교를 일종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 완전히 바꿔버린 번역어였다.

(이후 승조와 길장을 거쳐 무는 완전히 형이상학적 실재가 되었고, 여기 다시 도성/불성론이 결합되면서 개별자와 실재 사이의 연관성이 생겼다. [대승기신론 등의 영향이다.] 마지막으로 화엄종은 이 형이상학적 실재가 복잡한 연기-인과의 사슬이라 정의한다.)

둘째 사례는 불성이다.

사실 인도 불교에서조차 불성(그리고 여래장 같은 연관된 용어들이) 어찌 해석되어야할지 이견이 많다.

예컨대, 불성을 인간이 가진 형이상학적 구성물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동시에 그저 "부처가 될 가능성"을 품은 것 정도의 평이한 뉘앙스의 번역도 가능하다.

하지만 동북아에서는 전자의 번역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은 인간이 가진 형이상학적 구성물이라는 뜻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4)

한문 불경의 형성 과정은 복잡하다.
(1) 단순한 의역/직역의 문제뿐 아니라, (2) 번역 과정에서 본문과 주석이 혼입되거나 새로운 주석이 달린 경우, (3) 별개의 텍스트를 하나로 편역한 경우 (연관된 텍스트일수도 있지만 진짜 생뚱맞은 경우도 있다.) (4) 정말 텍스트를 마개조한 경우도 있다.

(5)

이상 낙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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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다만 "한국어"의 규정에 대해서는 좀더 넓게 잡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자어나 다양한 외래어도 이젠 충분히 "한국어"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이전 '한국어'의 모습이 많은 부분 베일에 쌓여있다는 것 역시 '오염되지 않은 한국어'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순우리말 번역어를 좋아하는 척화파 꼴통이기 때문에 사실 "오염"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연설문을 쓸 때는 로망스계 단어가 아니라 순 앵글로-색슨계 단어 위주로 썼다는 점이 깊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진성 선생님의 <형이상학> 번역, 김명석 선생님의 <우리말길> 교과서 등에서 나타나는 기치에 많이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미감이 곧 '한국어'의 규정에 잘 부합하는지는 잘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이를테면

  1. "질료", "논리"
  2. "밑감", "말길"

이 둘을 비교해봤을 때, 철학 전공자가 아닌 보통의 현대 한국어 화자에게 물어봐도 1번보다는 2번이 더 외계어 같다고 말할 것 같다고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오히려 "오염"을 안고 가는 것이야말로 적어도 철학을 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갖고 철학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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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는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네요.

이 링크의 영상에서 도출할 수 있는 여러 결론 중 하나는, '다른 언어권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언어는 드물다.'는 것일 겁니다. 순수 게르만계 어휘로 언어 생활을 하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처럼 순수한 한국어로 언어 생활을 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언급하신 고대 그리스, 고대 중국, 고대 인도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언어권은 다른 언어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혹은 오염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등에서는 여전히 자국어로 철학을 하고 있죠. 제 말은, 언어 생활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일상어로 철학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시로 들었던 중국불교의 형성만 하더라도 완벽한 오독이 발생했지만, 이러한 오독은 새로운 불교의 발전을 촉진시켰죠. 선불교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선불교의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인도 불교의 개념어가 중국인의 일상어로 변해버린 사례들도 많죠. 신유학이나 선불교 모두 '일상어'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운데요. <대혜어록>이나 <이정유서>, <주자어류> 등이 모두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보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특히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일상어와 개념어의 경계는 굉장히 흐릿했던 것 같아요. '理'라는 단어만 하더라도 철학적 개념어로 다뤄지기도 하지만, 실제 그들의 어록을 읽어보면 '~할 리가 없다'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용례가 더 많은 듯합니다.

서구의 충격 이후로 우리의 언어 생활도 보면 철학적 개념어가 일상어에 많이 침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롤 같은 게임에서 게임의 진행 방식을 크게 바꾼 경우 '메타가 변했다'고 하거나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하는 말도 심심치 않게 보이죠. 일상어와 개념어의 경계가 모호해서, 일상어가 개념어로 넘어오고 개념어가 다시 일상어로 넘어가는 이러한 양상 속에서 철학하는 것 자체가 '한국어로 철학하기' 아닐까요?

덧1) 그런데 불성이나 여래장을 동북아의 맥락에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라고 번역되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추가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덧2) 이 글을 읽으니까 옛날에 본 <법보신문>의 연재물이 생각나네요. 링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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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ildbunny @wooya0902

(제가 글을 제대로 쓰지 않아서인지) 두 분 다 제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글을 이해하신듯합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강조하려던 바는 (1) 순우리말 일상어를 통한 철학적 사유의 불가능성이었고 (2) 그 이유로 든 것이 이미 우리 언어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염"이라 썼지만 여기에는 어떠한 부정적 함의도 없었다는 점을 적어둡니다.)

따라서, (이미 오염된) 일상어로의 철학적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순우리말로 철학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다수의 개념어들은 순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이죠.)

(2)

우선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어느 층위에 놓아두신지 궁금합니다. 예컨대, 나무는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책이 될 가능성도 있고, (무슨 일을 겪으면) 우주로 날아가버릴 가능성도 있겠죠.

제자백가의 성은 물론, 후대의 도성/불성 개념을 정확히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에 대해선 온갖 논의가 있습니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모든 가능성"이 아닌 성이 깃든 개체와 밀접히 관련된 특질을 통상 "성"이라 지칭한 듯합니다. (굉장히 서양 고대 철학 느낌의 해석을 하는 모종삼 등의 중국 학계나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성질이라 주장하는 그레이엄 등의 영미권 학계나 이 점은 공통된다 여겨집니다.)

성에 대한 이런 동북아적 이해에 비추어보면, 불성 역시도 단순한 "모든 가능성 중 하나"라기보단, 개체에 내재된/개체와 매우 밀접한 성질-가능성의 의미겠죠. (예컨대 나무의 성이 우주로 갈 가능성이라 여기진 않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무언가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동북어의 맥락에서, 그 무언가가 부처/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 (규범적으로 올바르든, 아니면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든 등등등) 둘 사이의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함의한다 여겨집니다.

한편 인도 산스크리트어에서는 (과문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라는, 보다 평이하고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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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이란 단어에 부정적 함의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오염'은 '더럽게 물듦. 또는 더럽게 물들게 함'을 뜻하니까요. 따라서 한국어가 오염된다는 건 한국어에 다른 외국어가 들어와서 말이 더러워진다는 뜻이 되겠죠. 그런데 이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언어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 화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뜻이 바뀌고 잊혀지는 것이 바로 언어죠. 심지어 최근에 영어도 한국어에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요런 단어들이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실렸다는군요.

chimaek, daebak, manhwa, mukbang, noona, oppa, unni

심지어 근본 없는 영어 표현의 대명사였던 'fighting'뿐 아니라 'Konglish'도 실렸다고 하네요. 이제 우리도 신나게 콘글리쉬를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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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말하려던 바였습니다! 오염이든 전염이든 차용이든 섞임이든 순수한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언어란 그렇게 굴러가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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