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두 가지 쟁점에 관한 단상

최근 올빼미에서 있었던 논쟁을 계기로 해서, 평소 번역과 번역에 대한 여러 입장들에 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서 글을 썼습니다. 논쟁이 과열되어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갈까봐 개인 블로그에만 글을 올리고 여기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reflex님, Herb님 등 여러 선생님들께서 생각해볼 만한 논점들을 제시해주신 것을 보고, 올렸던 글에서 논의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지점들을 추려 (블로그에 썼던 비건설적인 수사들을 모두 걷어내고) 올빼미에 올려봅니다.


I. 일본식 한자어냐, 일상적 한국어냐?

우리 철학계에는 일본식 한자어가 범람하고 있고, 이들을 바탕으로 한 한자 조어도 빈번히 만들어지고 있다. 예컨대 철학 번역서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타자”, “존재”, “본질”, “규정”, 그리고 이들을 조합한 “타자존재”, “본질규정” 등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많은 경우 이러한 일본식 한자어들을 차용하는 일이 정당화되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일단, 일본식 한자어들이 이미 한국 사회 내에 뿌리 깊게 정착되어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철학 개념들뿐만이 아니라 “이성”, “근대”, “사회”, “개인”, “현상”, “경제”, “과학” 등이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들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 단어들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궤도가 방송에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 이야기하는데 “과학”이 너무 낯선 일본식 한자어라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없다. 뉴스에서 저출산을 “사회현상”이라고 칭할 때 “사회”와 “현상”에 언어적인 이질감을 느껴서 뉴스를 알아듣는 데 실패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이 단어들이 현재 우리 언어 속에서 다른 단어들과 널리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단어 “cancer”가 게를 뜻하는 라틴어 “cancer” 및 그리스어 “karkinos”에서 왔다는 점을 모르더라도 영어권 화자들이 이 단어를 암이라는 뜻으로 잘만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단어 “cancer”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어 및 라틴어와의 통시적 관계가 아니라 다른 현대 영단어들과의 공시적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과학”이나 “현상”도 사정이 다를 바 없다. 그 기원과는 상관없이, 이 단어들의 의미는 이들이 속한 현대 한국어 단어들의 관계망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타자”, “존재”, “본질”의 경우도 매한가지이다. 일본에 비해 그리 길지는 않지만 해방 이후 70년 가까이 되어가는 철학 번역과 수용의 역사 속에서 이 역어들은 다른 철학 용어들과 형성한 그물망 속에서 의미를 획득해 왔으며 나아가 철학 밖에서도 두루 쓰여 왔다. 그런 까닭에 현재 철학계 내에 있는 사람들은 “타자”, “존재”, “본질”, “규정”의 번역어가 낯설다고 느끼지 않는다. 물론 철학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용어들이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용어가 일본식 한자어 조어여서라기보다는 이들이 그 말이 쓰이는 철학적 맥락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x를 x이게끔 하는 속성”이라는 본질의 고전적인 정의를 알고 나면, “본질”이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한자를 몰라도 서양 고전 철학의 맥락에서 본질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 단어들이 단순히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용어들을 모조리 대체할 것을 강제한다면, 학술 소통상의 상당한 혼란과 비효율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다.

물론 널리 통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하는 편이 나은 번역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1) 그런데 그 이유란 이 번역어들이 단지 어려워서나 일본에서 건너와서가 아니라, 가능한 대안들이 기존의 용어보다 원어의 뜻을 현대 한국어 속에서 더 잘 표현해준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개변이 이루어질 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논증해야 하며 활발한 학술적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요컨대 우리는 번역어를 선택함에 있어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는 번역어를 계속 사용하는 데서 오는 효율과, 낯설더라도 언중들이 일상적으로 이해 가능한 번역어를 도입하는 데서 오는 효율 중 어느 것이 더 큰지를 잘 판단하고 양자를 잘 조정해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딱딱한 한자어가 한국어 일상어에 비해 실용적으로 지니는 강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자어 번역어에 흔히 가해지는 비판 중 하나는, 단어를 보고 무슨 뜻인지 한 눈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컨대 “the given”의 번역어인 “소여”는 “주어진 것”에 비해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혹자들은 이 점을 들어 “소여”를 일상적 한국어인 “주어진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이 번역어로서 “소여”보다 단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이 지닌 의미상의 단순성은 문법적 단순성을 희생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단순 명사인 “소여”에 비해 “주어진 것”은 관형사와 명사의 결합이다.

이 단어가 단순한 형태로 단순한 문장 속에서만 출현한다면 “주어진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the given”은 단순한 형태로만 쓰이지 않고 “the immediately given”, “the sensually given”, 아니면 독일어에서는 “Grundgegebenheit”처럼 쓰이기도 한다. “소여”를 채택할 경우 “직접적 소여”, “감각적 소여”, “근본소여성”이라는 번역을 쓸 수 있다(원한다면 저 ‘적’을 빼서 “직접소여”, “감각소여”처럼 옮겨도 된다). 반면 “주어진 것”을 사용할 경우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음”처럼 번역해야 한다. 문제는 저 뒤의 번역어들이 상당히 길 뿐만 아니라 문법적으로 한 층 더 복잡하다는 점이다. 이 단어들은 이미 부사+관형사+명사라는 세 가지 문법적 구성성분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단어 수준에서 문법적 복잡성을 늘릴 경우 문장 구조가 복잡해질 때 난처한 상황들이 발생한다. 예시를 보자.

Stripped of any epistemologically foundationalist role attributed to the given by the likes of Russell, can we not say that it is just the ‘this’ of the ‘this shade of red’ that distinguishes it from, say, ‘that shade of red?’ (Redding, 2007, p. 54, 인용자 강조)

Like McDowell, Brandom regards much contemporary analytic philosophy as vitiated by the myth of the given which, despite analytic philosophy’s official break with Kant, appears in the mainstream as the ‘official’ Kantian idea of a non-conceptual component of experience. (Redding, 2007, p. 58, 인용자 강조)

이제 “주어진 것”을 번역어로 써서 이 문장들을 옮겨보자.

러셀의 동류에 의해 주어진 것에 귀속되는 인식론적으로 토대론적인 역할을 모두 벗겨내면, 우리는 예컨대 ‘붉음의 이 색조’를 ‘붉음의 저 색조’와 구별하는 것이 ‘붉음의 이 색조’에서의 ‘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맥도웰처럼 브랜덤은, 분석철학과 칸트의 공식적인 단절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비개념적 구성성분에 대한 ‘공식적인’ 칸트적 발상으로서 주류에 나타나는 주어진 것의 신화에 의해 동시대 분석철학이 훼손되었다고 간주한다.

두 문장 모두에서 원문에 없는 불필요한 중의성이나 오해가 발생한다. 첫째 문장을 보면, 러셀의 동류가 준 어떤 것에 이러저러한 역할이 귀속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러셀의 동류가 주어진 것에 이러저러한 역할을 귀속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둘째 문장에서도 “주어진 것”이 하나의 단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평범한 한국어 화자들은 저 문장성분이 의존명사 “것”에 두 개의 관형어(“분석철학과 … 주류에 나타나는”과 “주어진”)가 결합된 것으로 파악할 것이다. 이제 이 문장에 “the given” 대신 “the immediately given”이 들어갔다고 가정해보자.

러셀의 동류에 의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귀속되는 인식론적으로 토대론적인 역할 […]

분석철학과 칸트의 공식적인 단절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비개념적 구성성분에 대한 ‘공식적인’ 칸트적 발상으로서 주류에 나타나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의 신화에 의해 […]

‘주어진 것’은 의미상으로는 ‘소여’보다 명확할지는 모르나, 문법적으로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복잡한 문장 속에서 원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중의성을 초래하여 텍스트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제 저기에 “직접적 소여”를 넣어보자.

러셀의 동류에 의해 직접적 소여에 귀속되는 인식론적으로 토대론적인 역할 […]

분석철학과 칸트의 공식적인 단절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비개념적 구성성분에 대한 ‘공식적인’ 칸트적 발상으로서 주류에 나타나는 직접적 소여의 신화에 의해 […]

이제 학술용어로 한자어를 쓸 때의 장점이 명백해진다. 한자어는 별다른 형태변화 없이 다른 한자어와 쉽게 결합할 수 있으며, 쉽게 명사화할 수 있는 까닭에 문법적 복잡도를 감축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한자어는 문법적으로 복잡한 문장들을 구사해야 하는 학술적 글쓰기에서 전문용어로 활용하기에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측면을 지닌다.

II. 의역이냐, 직역이냐?

먼저, 모든 철학자들이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하고 원문과 일대일 대응할 수 있는 번역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칸트학회의 칸트 전집 번역을 둘러싸고 발생한 논쟁의 쟁점 중 하나가 가독성이었다는 점에서 드러나듯, 한국어 화자가 보기에 번역문이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읽혀야 한다는 기준은 번역을 하는 철학자들에게도 확실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한편 의역보다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선호하는 철학자들이 퍽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 어떤 이들은 직역을 위해 한국어 문장으로서의 다소간의 부자연스러움을 감내한다. (즉 모두가 직역이 곧 가독성의 저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하면서까지 직역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철학적 내용을 한국어로 논의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원문을 한국어로 그대로 옮겨 놓는 일은 불가능하더라도, 핵심적인 문장 구조나 개념어들이 한국어에서도 잘 표현될 수 있도록 옮기는 편이 의미상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한국어로 논의하는 데 용이하다. 예컨대 헤겔의 『논리의 학』의 「존재」 장에 나타난 맨 처음 문장을 보자.

Seyn, reines Seyn,─ohne alle weitere Bestimmung. (Hegel, 1985, p. 68)

저 문장은 애초에 독일어로 온전한 문장이 아니다. 직역을 하는 역자는 저 문장을 다음처럼 옮길 것이다.

존재, 순수 존재,─속행하는 모든 규정들 없이.

그런데 의역이 직역보다 단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번역은 나쁜 번역이다. 한국어로 말이 안 돼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이들은 설령 원문이 말이 안 되더라도, 한국어로는 온전한 문장이 되게 다음처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존재, 순수 존재,─이 순수 존재는 속행하는 모든 규정들을 결여한다.

위 문장보다 아래 문장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은 명백하다. 의역을 직역보다 단적으로 우위에 놓는 사람들은, 그런 이유에서 원문을 위가 아니라 밑처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자연스러운 독일어를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윤문할 경우 저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논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헤겔이 첫 문장에 파격구문을 사용했다는 사실, 즉 첫 문장을 일부러 완전한 문장이 안 되게 썼다는 사실이 감춰지기 때문이다. 헤겔이 첫 문장을 비문으로 만든 이유는, 계사와 술어를 결합해 완전한 문장을 만들 경우 그 문장이 더 이상 순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F이다.”의 형식으로 문장을 구성할 경우 주어에 오는 존재는 “F”라는 술어에 의해 규정되는 규정적 존재가 된다. 이런 의도에서 헤겔은 일부러 문장을 완성하지 않은 것이다(Movia. 2002, p. 11 참조). 그러므로 이 파격구문과 관련된 철학적 주제들을 한국어 화자들의 논의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종종 자연스러움을 희생하더라도 원문을 곧이곧대로 옮기는 일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것이 극단적이고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다른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도록 하자.

Die Besonderheit für sich, einerseits als sich nach allen Seiten auslassende Befriedigung ihrer Bedürfnisse, zufälliger Willkür und subjektiven Beliebens, zerstört in ihren Genüssen sich selbst und ihren substantiellen Begriff[.] (Hegel, 1989, §185, 인용자 강조)

누구나 저마다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시민사회는 한편으로 온갖 방면에 걸쳐 특수한 욕구나 자기 나름의 생각 또는 주관적인 호감을 거리낌없이 만족시키려는 나머지 이러한 향유 속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실체적 개념을 파괴한다. (Hegel, 임석진 역, 2008, p. 359, 인용자 강조)

특수성 그 자체는 한편으로 자신의 욕구와 우연적 자의 및 주관적 선호를 모든 측면에서 거리낌 없이 표출하여 충족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충족을 향유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실체적 개념마저도 파괴한다. (Hegel, 서정혁 역, 2020, p. 365, 인용자 강조)

각 인용문에서 강조된 부분들은 같은 독일어 표현에 대한 각기 다른 번역이다. “Die Besonderheit für sich”를 임석진 선생님은 “누구나 저마다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시민사회”로, 서정혁 선생님은 “특수성 그 자체”로 번역했다(이하 경칭 생략). 또 원문의 “als sich … subjektiven Beliebens”에서 “als”를 임석진은 “~하려는 나머지”, 서정혁은 “~으로서”로 번역한다. 전자는 의역이고 후자는 직역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는 서정혁의 번역은 딱딱하고 임석진의 번역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만일 자연스러움과 가독성을 제일의 기준으로 둔다면, 서정혁의 번역보다 임석진의 번역이 낫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독성과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원문에 변형을 가하는 의역은 학술적 논의에 활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컨대 저 “Besonderheit”는 헤겔의 다른 저작인 『논리의 학』에서도 사용되는 범주이고, 『법철학』과 『논리의 학』이 맺는 연관성은 헤겔 연구에서 상당히 흥미롭고도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법철학』 내 논리학적 범주의 사용에 대한 연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연구를 하려면 텍스트 내에 저 개념이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서 그 의미와 사용 맥락을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은, “Besonderheit für sich”를 “누구나 저마다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시민사회”로 번역할 때보다는, 해당 표현을 딱딱하더라도 “특수성 그 자체”로 번역할 때 보다 수월하게 한국어로 진행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논의에서는 일견 사소해 보이는 “als”와 같은 접속사 해석도 입장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als”에 대한 두 번역본의 상이한 해석을 따랐을 때 두 가지 이해가 따라 나온다. (1) 특수성은 욕구, 생각, 호감을 만족시키려 한다. (2) 특수성은 욕구, 자의, 선호의 만족이다. “특수성은 만족을 행하는 것이다”와 “특수성은 만족이다”는 상당히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실제 헤겔 연구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예컨대 만족이 특수한 것이라는 주장과, 만족은 보편적인 것이고 특수성이 이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갈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의역이 직역보다 좋다는 주장을 그대로 뒤집어서 직역이 의역보다 낫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은, 의역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학문적 논의라는 어떤 특정한 용도에 활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임석진의 의역은 다른 곳에서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의미가 확연히 변하더라도 딱딱한 독일어 문장에 적극적으로 해석을 가하고 윤문을 하고, 읽기 편하게 여러 보충어들을 덧붙여준다면, 임석진의 번역은 헤겔 철학을 잘 모르는 입문자가 『법철학』을 구해서 읽었을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물론 직역보다 의역을 함으로써 정확하게 원문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다른 한편 서정혁의 직역은 앞서 논했듯 헤겔 연구자들이 같은 책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를 위해 참고하고 인용할 때 훌륭한 대본이 되어줄 수 있다. 의역과 직역 모두 장단이 있고 저마다의 쓰임이 있는 것인 까닭에, 나는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원문을 있는 그대로 옮긴 번역은 있을 수 없더라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있을 수 있다.

III. 철학 텍스트는 왜 어려운가?

우리는 앞서 한자어의 채택이나 직역이 진입장벽을 높이고 어려움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어려움을 줄이고 학술적 대화를 쉽게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장치들이라는 점을 살펴봤다. 그러므로 일본식 한자어를 모두 없애거나, 딱딱한 직역을 모두 윤문하여 의역으로 바꾼다고 해서 철학 텍스트의 난해성이 경감되지는 않는다.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철학 텍스트가 난해한 주된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철학 텍스트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철학 텍스트의 내용 자체가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그만큼 복잡한 사태에 대해 고민했고, 그러한 사태를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 그만큼 복잡한 개념틀을 고안했으며, 그 과정에서 선대 철학자들의 작업들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투자했다. 물론 당시의 문학적인 경향이나 글쓰기 스타일 등으로 인해 문체가 불필요하게 어려운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간명하게 글을 쓴다고 해서 전문적이고 복잡한 주제가 일반인들도 아무 힘 안 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철학 바깥의 사람들이 철학 텍스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복잡한 논의영역에 들어설 수 있기 위해 철학이라는 학문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를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근한 사태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다음의 구절을 참조할 수 있다.

이론가들은 오랫동안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사고공간, 즉 상징공간에 ‘진입비용’을 치르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진입비용은 아무나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려면 학문전통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경만, 2015, p. 120)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과정에서 번역어와 같은 많은 지적 유산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은 맞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자산 속에 남아 있는 슬픈 역사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걷어낸다고 해서 우리의 고유한 번역어를 만들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구에서 일본에, 다시 일본에서 우리에게 가해졌던 상징폭력에 이미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불가역적이다. 그리고 이런 상징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일본식 번역어를 받아들인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번역, 나아가 철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재창조를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우리의 ‘일본 식민지적 잔재’를 부정하고 걷어내려는 일보다는 이미 우리가 속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한자문화권, 나아가 다른 나라의 철학 연구자들과 경쟁해서 그에 뒤처지지 않는 연구 성과를 내는 일이다. “지금까지 진화해온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의 망을 통해 형성된 계보나 전통 ‘안’에서 논쟁해 창의적 이론을 정립하는 것만이 고통스럽지만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김경만, 2015, p. 129). 내가 보기에 이미 한국 철학계는 식민지배와 6.25 전쟁이라는 고난 속에서도 해외의 여러 철학들을 수용하고 소개하고 내용을 심화시키며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가꾸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결국 해외의 철학적 지식들을 잘 수용하고 소화해서 우리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철학을 향유할 길을 넓혀주기 위해서는, 번역어의 기원을 문제삼거나 딱딱한 직역을 부드러운 의역으로 바꾸는 일보다도 철학자들로 하여금 좋은 연구와 해설을 생산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하고 고무할 방법이 필요하다.


1)“an sich”와 “für sich”의 번역어인 “즉자”와 “대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an sich”와 “für sich”는 평범한 문맥에서는 “그 자체로”, 혹은 “혼자서”, “있는 그대로”와 같이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헤겔은 이 일상어에 색다른 의미를 불어넣음으로써 이 용어들을 전유하여 자신의 철학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종래의 일본인 역자들은 이 두 단어를 각각 “자기 곁에 즉해서”와 “자기에 대해서”라는 뜻의 “즉자”와 “대자”로 축자번역했고, 이 표현이 한국 학계에서도 두루 사용되어왔다. 두 용어가 단순한 일상어가 아니라 특별한 뜻을 갖는 철학적 개념이라는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런 번역어가 갖는 장점은 분명히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an sich”와 “für sich”를 독일어 일상어 표현의 의미와 혼용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용어들이 사용된 실제 문맥을 보면, 해당 표현을 헤겔 고유의 철학적 개념어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일상적 독일어 표현으로 읽어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나아가 두 가지 선택지가 모두 가능한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므로 “즉자”와 “대자”가 학계에서 널리 쓰여왔더라도, “an sich”와 “für sich”의 일상어적 성격을 살리면서도 철학적 의미를 불어넣어 쓸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있다면 도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체적”과 “독자적”이라는 일부 연구자들의 제안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경만. (201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Movia, G. (2002). Über den Anfang der Hegelschen Logik. In A. F. Koch & F. Schick (Eds.),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Akademie Verlag.
Redding, P. (2007). Analytic Philosophy and the Return of Hegelian Thought. Cambridge University Press.
Hegel, G. W. F. (1985). Wissenschaft der Logik: Die Lehre vom Sein. In F. Hogemann & W. Jaeschke, (Eds.), Gesammelte Werke, Bd. 21. Felix Meiner.
Hegel, G. W. F. (1989).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In E. Moldenhauer & K. M. Michel (Eds.), Werke in zwanzig Bänden, Bd. 7. 2. Auflage. Suhrkamp.
Hegel, G. W. F. (2008). 『법철학』 (임석진 역). 한길사.
Hegel, G. W. F. (2020). 『법철학: 베를린, 1821년』 (서정혁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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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소여"라는 번역어가 참 괴랄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중에 헤겔의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다보니 상기해주신 이유대로 왜 역자들이 "소여"라는 역어를 포기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급진적 의역주의자들은 "주어진 것" vs "소여" 의 선택구도가 애초에 직역의 1대1구도를 고집했기 때문에 생긴 잘못된 프레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참 아름다운 예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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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인 견해에 동의합니다. 다만,

an sich-fur sich의 경우 굳이 하나의 단어로 번역을 했어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 자체로'와 '그 자체에 대해' 땅으로 옮겼을 때 큰 문제가 생기는가, 적어도 전문가들과 교양 대중이 이러한 (어떤 의미에서, '직역'인) 번역에 의해 이해력을 상당하게 상실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즉자성-대자성 쌍은 이미 학계에서 관용어처럼 굳어진 것이니 이제 바꾸기에는 어렵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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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네요. Herb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존재, 순수한 존재 - 모든 추가 규정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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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 동의하며, 특히 문제 III은 종종 학문 공동체 바깥에서 간과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의역+일상적 한국어)를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 전문적인 논의에서 권위있는 대본이 될 필요성이 있는 고전 번역과 달리, 2차 저작의 경우에는 과감히 문장 구조를 부수고 가차없이 윤문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주신

같은 경우, 저는

인식론에서 '주어진 바' 개념에 대해 러셀 같은 사람들이 부여했던 토대론적인 역할은 다 제껴보자. 그렇다면 ' 붉은색 색조'가 ' 붉은색 색조'랑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저 ' 붉은 색 색조'에 나오는 '' 덕분 아닐까?

같은, 좀 근본없는 번역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최소한 영어 철학 저작에서 나오는 'the given'의 번역어로 '소여'를 꼭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존재", "본질"만큼 현대 한국어 언중 사이에 널리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는게 하나의 이유고, 또 영단어 "existence", "essence" 자체가 라틴어 외래어인, 현대 영어 언중 사이에서도 '오, 좀 있어보이는 단어네?'라는 느낌인 반면 'the given'은 그렇지 않다는게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사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김진성 선생님의 <형이상학> 번역 원칙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합니다. :star_struck:)

(덧. 혹시 "the given"이 뭔가 독일어 개념어의 직접적 번역어인가요? "Gegebenheit" 같은 말이라던지?)
(덧2. 아, 찾아보니 "das Gegebene"군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건 결국 라틴어 "datum"이랑 같은 의미네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주어진 바'가 최선이라면, 차선으로는 '데이터'가 어떻겠냐고 과감히 질러 보고 싶습니다 :cowboy_hat_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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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the given’ 자체가 제가 이해하기로는 datum의 영역어이고, 저는 그래서 ‘소여’를 별 문제 없는 낱말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주어진 바’”와 같이 따옴표 강조를 해서 한 단어임을 밝힌다면 @wildbunny 님이 보여주신 역례와 같이 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몇 영어 개념어들은 ‘굳이 이걸 the+분사로 명사화 해야 해…?’라고 생각하는지라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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