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공학의 최근 연구 동향”, 슈테펜 코흐 외

지난 16일, Analysis 지에 다음과 같은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슬슬 접하고 있으실 듯합니다만, 개념 공학은 분석적 전통의 철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최근의 전위적 시도입니다. 개념 공학자들은 철학자들이, 개념을 단지 분석할 뿐 아니라 개념을 수정하는 ‘공학적’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의 담론을 연 것으로는 허먼 케플런(Herman Ceppelen)과 데이비드 챠머스로 주로 지목이 되고 있죠. 특히 책에서 지적하듯, 케플런의 책 Fixing Language는 개념 외재론이 어떻게 개념 공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을지를 열심히 탐구하며 개념 공학의 문을 연 문제작이기도 합니다.

해스랭어(Sally Haslanger)를 비롯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념 공학은 최근 @YOUN 님이 옮긴 “사회적 전회” 담론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 철학자들이 이 작업에 착수한게 벌써 거진 십 년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리뷰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네요.

다만 개념 공학 담론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제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개념 공학이란 개념 분석이 되거나, 단지 동음 이의어의 도입 작업이 되는 데에 다름 아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이런 의문이 이어지다보니 처음 이 동향을 접했을 때보다는 관심이 다소 적어졌네요.

여러분은 개념 공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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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도 살짝 언급되다시피 흔히 개념공학의 선구자로 카르납의 "elucidation"이 언급되고는 하죠. 아마 철학사적 관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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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납이 여기에서의 선구자로 항상 언급되는 게 참 재미가 있죠 (ㅋㅋㅋㅋ). 통념 속에서나 철학사 속에서 카르납(을 비롯한 비엔나 철학자들)은 아주 보수적인 철학자로 언급되곤 하지만, 후대의 계승을 보자면 꽤나 급진적인 시도를 한 사람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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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맥락에서 약간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나온 말이지만, “철학이란 개념들을 형성하고, 창안하고, 만드는 기술”이라는 들뢰즈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물론, 들뢰즈 같은 사람들은 이전에 없었던 사유를 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 자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주목한 반면, 개념 공학은 기존 개념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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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모든 철학자들이 해온 작업이 넓은 의미의 개념공학에 속할 수 있겠죠. 자신이 내세우고자 하는 철학적 함축을 담은 개념어를 제시하고, 이 책이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서 실제 세계 속에서 사용된다면 (의미론적 외재주의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그 개념어의 의미와 내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오늘날만 해도 여러 도덕적/윤리적/정치적 이유에서 공적인 언어사용이 사실상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making a proposal about which concept we should have" (p.1)라는 명목이 딱히 새롭다기 하기는 어렵네요.

살짝 아연해지는 부분은, 개념공학자들이 이것을 "작정하고" 한다고 대놓고 드러낸다는 것이죠. 개념공학자들이 특정한 규범적 개념들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개념들의 내포와 의미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킨 뒤(engineering), 이러한 개념사용을 세계에 유통시켜 (implement; p.4), 세계를 변화시키겠다 ("conceptual engineering is ultimately about changing the world" (p.3) 라는 야망(?)이 제게는 좀 오싹합니다. 이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를 차치하고, 당장 떠오르는 문제는 1. 과연 특정한 개념사용에 대한 통일된 규범성(should)이 주어져 있느냐 하는 물음과, 2. 설령 그러한 통일된 규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학적으로 수정된 언어사용을 implement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물음이죠. 예를 들어 만장일치의 통일된 규범성이 있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규범성에 맞는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뇌를 개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조금 극단적인 비유였지만, 사람들의 언어사용을 통제하고자 하는 야망에 있어서는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들은 "통제"라는 "개념"을 쓰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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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Herb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고요, 나아가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 개념 공학은 Orwellian Dystopia에서 등장하는 'Newspeak'의 현실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비슷한 시도가 '언어공학(linguistic engineering)'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도된 적이 있었죠. 바로 모택동 치하의 중국에서였습니다. ji Fengyuan이 자신의 저서 "Linguistic Engineering"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죠. 소개글에서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When Mao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won power in 1949, they were determined to create new, revolutionary human beings. Their most precise instrument of ideological transformation was a massive program of linguistic engineering. They taught everyone a new political vocabulary, gave old words new meanings, converted traditional terms to revolutionary purposes, suppressed words that expressed "incorrect" thought, and required the whole population to recite slogans, stock phrases, and scripts that gave "correct" linguistic form to "correct" thought. They assumed that constant repetition would cause the revolutionary formulae to penetrate people's minds, engendering revolutionary beliefs and values.

In an introductory chapter, Dr Ji assesses the potential of linguistic engineering by examining research on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thought. In subsequent chapters, she traces the origins of linguistic engineering in China, describes its development during the early years of communist rule, then explores in detail the unprecedented manipulation of language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of 1966-1976. Along the way, she analyzes the forms of linguistic engineering associated with land reform, class struggle, personal relationships, the Great Leap Forward, Mao-worship, Red Guard activism, revolutionary violence, Public Criticism Meetings, the model revolutionary operas, and foreign language teaching.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1949년에 정권을 잡았을 때, 그들은 새롭고 혁명적인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가장 정확한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도구는 거대한 언어 공학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단어를 가르치고, 옛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며, 전통적인 용어를 혁명적인 목적으로 전환하고, "잘못된"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를 억압한데다, "올바른" 언어적 형태에 "올바른" 생각을 부여하는 슬로건, 판에 박은 문구, 원고를 전 국민들이 암송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계속적인 반복이 혁명의 공식을 인민의 정신에 침투시키고, 혁명적 믿음과 가치를 낳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론에서 Ji 박사는 언어와 사상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언어공학의 잠재력을 평가한다. 다음에 나오는 장들에서는 중국의 언어공학의 기원을 추적하고 공산주의 통치 초기 동안의 언어공학 발전을 설명하며,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전례 없는 언어의 조작을 상세히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토지개혁, 계급투쟁, 개인적 관계들, 대약진운동, 마오쩌둥 숭배, 홍위병들의 행동, 혁명적 폭력, 대중 비판 모임, 모범극(樣板戱), 외국어 교육과 관련된 언어공학의 형태를 분석한다.

물론 이런 현실이 이제 올거라는 말은 아니고요, 개념 공학이란 것이 위험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언어가 인간의 정신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위 논문에 나오는

"conceptual engineering is ultimately about changing the world" (p.3)

라는 표현과 위에서 소개한 "Linguistic Engineering"을 소개하는 글의 다음 표현이 비슷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 같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Their most precise instrument of ideological transformation was a massive program of linguistic engine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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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Herb 선생님 의견에 동의해요. 어찌보면 이 개념공학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Newspeak"의 초기형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오싹한 기운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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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관점에서의 말씀들이 여럿 달렸네요. 특히 @Herb 님의
[quote="Herb, post:7, topic:3271”]
살짝 아연해지는 부분은, 개념공학자들이 이것을 "작정하고" 한다고 대놓고 드러낸다는 것이죠. 개념공학자들이 특정한 규범적 개념들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개념들의 내포와 의미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킨 뒤(engineering), 이러한 개념사용을 세계에 유통시켜 (implement; p.4), 세계를 변화시키겠다 ("conceptual engineering is ultimately about changing the world" (p.3) 라는 야망(?)이 제게는 좀 오싹합니다.
[/quote]
라는 말씀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일단은 이 야망은, 본문에 잘 나오듯, 단지 도덕철학 분야에서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진리 개념을 재구성한 샤프의 시도가 그 예시이고요. 물론 가장 대표적으로는, 해스랭어의 작업에서 보여지듯, 윤리적, 정치적 영역에서 개념 공학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들이 정말로 오싹한 것인가, 생각하면 살짝 갸우뚱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속도’ 개념을 방향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조작한 물리학자들의 작업도 실제로는 개념 공학의 일부일 거거든요. 또, (개념 공학이 가능한 작업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러한 작업이 충분한 실천론적 토론 이후에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개념 공학이 ‘오싹한’ 시도로 취급됨 직하다면, 모든 실천철학적 작업들이 이런 ‘오싹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한편 @FrancesYates 님의 코멘트는 다른 이유로 흥미롭네요. 개념 공학의 시도는 (가상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행해질 언어 제약 정책과는 어쩌면 정반대 방향을 갖는 시도여서 그렇습니다. 언급하신 ‘언어 공학’이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의 사용을 제약하는 것이라면, 개념 공학은 어떠한 언어적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는 작업이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념 공학의 이상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실제로 제기하신 기시감이 들 법도 하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다시, 해슬랭어의 작업에서처럼) ‘여성’을 재정의해서, 사회적 억압을 받는 특정한 생물학적 집단만을 여성으로 간주한다면 성별에 관한 많은 담론들이 당연한 말, 또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는 말로 간주될 텐데, 어쩌면 혹자에게는 이러한 결과가 사상 억압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있겠지만요.

다만 앞의 속도 개념 사례에서도 언급했듯, 이런 일이 문제적인지는 의문스럽다는 게 한편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학문적 활동에서 개념 공학이 목표 삼는 작업은 아주 일반적이고, 자격 있는 활동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말이죠. 중요한 것은 개념의 조작 자체보다는 이를 변증하는 과정일 것이고, 정당화가 충분히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수용되지 않음에 따라) 학문적 활동으로서 개념 공학은 정치적으로 무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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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현재의 개념공학이 곧 디스토피안 사회를 위한 공학적 시도를 꾀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고요, (가능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위한) 일종의 전전단계로서 현재의 개념공학이 기능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과거의 예들을 보자면, 사람을 해방시켜줄 줄 알았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소련에서 변질되어 굴라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죠. 또, 주로 미국에서의 논의이지만, 비판적 인종 이론이나 pc같은 것이 사회에 얼마나 혼란과 갈등,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지도 우리가 잘 아는 바죠.

그렇기에 조금은 의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도 같습니다.

언급하신 ‘언어 공학’이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의 사용을 제약하는 것이라면, 개념 공학은 어떠한 언어적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는 작업이어서 그렇습니다.

덧붙임: 마오쩌둥 치하에서 진행되었던 언어공학이 특정한 언어적 표현을 제약하는 것만에 그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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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공학이 오싹한 기획인가는 저 역시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개념공학"이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할 것 같은데요. 올려주신 논문이 하는 바가 "provide a rationalizing description of conceptual engineering practice" (p.2)이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들이 직접적인 도움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2단계로 구분해서 보고 있어요.

  1. "making a proposal about which concept we should have" (p.1)
  2. "conceptual engineering is ultimately about changing the world" (p.3)

재밌는 것은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개념공학의 예시들은 1번과 관련된 반면, 오싹해지는 지점은 2번과 관련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약한" 개념공학(1번)은 무해하고 실제로 이미 행해지고 있지만 ("속도"의 예시), "강한" 개념공학(1+2번)이 "정치적으로 무고"한지는 상당히 의문스럽습니다.
(저자의 descriptive/normative consideration (p.2) 역시 이러한 구분에 상응한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theory of target/theory of engineering(meta-semantics)를 구별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별 역시 1번과 2번의 구별에 상응한다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개념공학의 "대상"을 다루고, 후자는 수정된 개념을 "어떻게" implement하여 세계를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루죠. 그리고 후자를 정당화하고 rationalize하기 위해 메타-의미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구요.)

물론 2번을 목표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괴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컨대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규범적 개념들을 통해서 실제 사회의 도덕적/정치적 진보를 이끄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오싹하다고 느끼진 않죠. 그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가 "이들 철학자 무리가 나의 도덕적/정치적 신념을 결정하려 든다"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만약 어떤 철학자가 나의 도덕적/정치적 신념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쾌감을 느끼겠죠. ("속도"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 역시 같은 이유라고 봅니다. "속도"의 정의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의 규범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당했다고 느끼기는 어려우니까요.)

"강한" 개념공학이 오싹해지는 지점은 따라서 단순히 개념을 propose/revise/redefine하는 것을 넘어서 이것을 implement (사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중립적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개념사용을 regulate 하는 것이죠)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지점이죠. 외재주의적 의미론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결론이구요. 이 결론에 따르면

In effect, to change the meaning of a word from m1 to m2, speakers must collectively (mis)use that word as if it means m2 until, after some time, the meaning shifts.(p.5)

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Cappelen이 "강한" 개념공학의 실현가능성을 회의하는 것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더군요.

Cappelen is not optimistic about the engineer’s prospects. Firstly, the factors relevant to determining meaning are ‘too complex, messy, nonsystematic, amorphous, and unstable for us to fully grasp or understand’ (ibid.: 72). Secondly, the factors ‘are not within our control’ (ibid.). In other words, according to the Austerity Framework, our control over the inten- sions of words is limited and consequently, our conceptual engineering am- bitions are as well. It is in this sense that, on the Austerity Framework, there ‘isn’t really any engineering’. (p.4)

반면에 "강한" 개념공학의 이념을 여전히 가져가고 싶은 이들은, 본문에 소개된 것처럼, 다른 메타-의미론을 찾거나 아니면 의미론이 아예 불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싶어할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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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히 개념 공학에 대해 소개해 주신 카르납 선생님께 우선 감사한 마음이고요, 친절하게 제게 답해주신 것이나, 제가 반론이나 반박을 제시한 것은 모두 정상적인 의견교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car_nap 선생님께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오해는 없으시길 부탁드려요. 좋은 소재를 소개해 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