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는 깨달음이라는 지식의 영역이 아닌 지혜(wisdom)의 영역처럼 보이곤 한다.
장자의 <달생>편에는 폭포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수영의 도가 있느냐는 공자의 물음에, 자신은 도를 모른다 말하며, 그저 했을 뿐이라 말한다.
마치 운동을 해야 배우는 것처럼, 자전거를 타야 탈 수 있는 것처럼.
(2)
회의주의는 반드시 허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
사실 삶의 의미를 알고자 갈망하였으나, 더 이상 그런 갈망이 사라진 기분이다. 회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이는 허무라기보단 일종의 '겸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기분이다.
원하던 것은 사실 별 것 아니였으며, 얻을지 몰랐던 것은 슬그머리 기적처럼 굴러들어온다. 내가 좋아하는 에릭 로메르의 교훈이다.
(4)
일어나거라, 깨어나거라, 더 이상 코를 골지 말거라. 이 잠은 너에게 좋지 않구나.
한날 너는 반드시 세상을 떠나, 무덤에 매장될지니. 벌레들이 너의 몸을 파먹을 것이다.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거라.
예정된 너의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단다. 지참금으로 낼 옷을 준비해두었느냐? 왜 너는 스스로를 망치고 있더냐? 칠칠치 못한 녀석, 미처 알지 못했더냐?
너는 자느라 삶을 낭비했다! 이제 너의 차례가 왔는데, 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는 것조차 시작하지 않았구나. 지참금으로 낼 옷 하나 없으니, 어찌할 생각이더냐?
; Bulleh Shah라는 인도 펀자브 지역의 수피 시인이 쓴 시다. 죽음으로 끝내 끝나는 삶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멋진 완성이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결국 우리 삶의 의미를 평가하려면,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있어야 할 것이요, 그 마침표를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마치 모든 불운 끝에 해피 엔딩이 있는 소설과 모든 행운 끝에 베드 엔딩이 있는 소설이 다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