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회의주의는 정확히 무엇인가?

(1)

(2)

<여씨춘추>의 별류는 소지(작은 지혜)와 대지(큰 지혜)를 구분한다.

이 예시에서도 들어나듯, 부분적인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지식을, 다른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를 지적한다.

(3)

이처럼 소지/대지를 구분하는 논의는 <장자> 외편/잡편에도 등장한다. 다음은 [칙양]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지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라고 부르기에 적합합니까?"
웅대하고 공정한 조정가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중략) 만일 그것을 조각조각 잘라서 양자택일적 논쟁[변]을 벌이는데 사용한다면, 그것을 (묵가가 양자택일적 논쟁에서 사용하는) 개와 말(이라는 예시)처럼 다룬다면, 그것은 훨씬 더 부적절해진 것이다."

(그레이엄의 번역을 가져왔다.)

(4)

명가/후기 묵가의 추론을 정확히 (오늘날 논리학에서)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귀납인가? 연역인가? (사실 둘 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후기 묵가의 논증 몇 개는 문장의 형식적 유사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형식 논리학이다. 다만 중국에의 구문론적 관점에서만 형식적으로 유사할뿐, 의미론적으로 전혀 다른 값이기에 제대로 된 추론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장자가 명가/후기 묵가에 대한 맹렬한 비판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 그러한가?

소지/대지의 구분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지식(소지)를 결합해(?)/추론해(?)에서 보편적 지식(대지)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대지를 알려 노력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의 지식이 소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대지처럼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이는 장자 잡편의 <서무귀> 등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제다.)

(근데 이건 인식론적 폐쇄원칙[epistemic closure]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으로 확장할 수 없다는 주장인가? 아니면 일반화된 지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하나의 지식을 보편적 명제로 확장할 수 없다는 주장인가? 애당초 이 둘이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는가?)
(정확히 말하면, 장자의 도가 모순적인 이유는, 모든 상황에서 좋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나무는 목재로 쓰이지 않기에 좋다. 하지만 목재로 쓰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나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에서 좋은 것, 즉 좋은 것의 '도'는 무엇인가?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곧기도 한 것. 분할되지 않은 것. 이것이면서도 저것인것이다.)

(근데 이게 공손룡의 견백론애 대한 정확한 비판인가? 견백론은 사실 일종의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상식적인 주장을 뭉갰다는 점에서 궤변으로 불릴뿐, 그 자체로는 오류가 있는 추론인지 아리송한 지점이 있다.)

(5)

장자의 소지/대지 구분은 납득이 간다. 그리고 적어도 순자와 <여씨춘추>와 같은 후대 문헌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이상, 당대 학술계에서 어느정도 논의되던 주제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논의가 왜 후기 묵가/명가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여씨춘추>에서는 명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순자와 장자는 이와 같은 논의가 명가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을 꽤 명확히 밝힌다.

만약 좋은 논문을 쓰고자 한다면, 이 부분을 소상히 밝혀야 할듯하다.

5개의 좋아요

묵가와 명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소략하여 잘 모르겠지만, 작은 앎과 큰 앎에 대한 논의는 <추수>에 나오는 하백과 약의 대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추수>의 내용에 기초해보자면 장자는 큰 앎과 작은 앎 모두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대목이 그렇습니다. 번역은 제가 직접 한 것입니다.

河伯曰: “然則吾大天地而小毫末可乎?”
하백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천지를 크다고 여기고 털끝을 작다고 여기는 것은 옳습니까?”

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以其至小求窮其至大之域, 是故迷亂而不能自得也. 由此觀之, 又何以知毫末之足以定至細之倪! 又何以知天地之足以窮至大之域!
(상략) 헤아려보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들이란 알 수 없는 것보다 적고, 살아가는 시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시간보다 적다네. 지극히 작은 지혜를 가지고서 지극히 큰 대도의 경지를 궁구하니 이러한 이유로 미혹되었더라도 스스로 깨칠 수 없게 된 거야. 이로부터 보자면 또 어찌 털끝이 지극히 작은 한도를 가진 것으로 확정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천지가 지극히 광대한 영역의 한계가 됨을 알겠는가 !

<별류>를 보면 작은 앎을 통해서 큰 앎으로 추론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논하고 있지만, <추수>를 보면 작은 앎과 큰 앎 두 가지를 모두 부정하는 것을 '위대한 지혜'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추수>를 비롯하여 장자는 수 많은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라서 더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겨놓지만요.

3개의 좋아요

(1) 이 구절이 저는 왜 큰 앎과 작은 앎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이 부분의 논지는 오히려

라는 제 주장에 부합하는 내용이 아닌가요?

저는 중간보다 북해의 신 약의 마지막 답변에 초점을 맞췄는데요. 일단 작은 앎과 큰 앎은 인식 대상의 규모로 보았습니다. <별류>나 <추수> 모두 이러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별류>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 반신불수의 환자에게 적용되는 처방이 완전히 죽은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서 반신불수의 환자는 '작은 앎을 적용하는 대상'에 속할 것이고, 완전히 죽은 사람은 '큰 앎을 적용하는 대상'이겠죠. <추수>에서도 보면 하백이 천지와 털끝이라는 양 극단의 사례를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털끝과 천지는 어떤 규모의 차이를 보이는 대상입니다.

이에 대해서 약은 "털끝이 지극히 작은 한도를 가진 것으로 확정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천지가 지극히 큰 영역으로 궁구하기에 충분한 것이겠는가!"라고 답변합니다. 여기에서 "털끝이 지극히 작은 한도를 가진 것으로 확정할 수 있겠으며"는 작은 것에 대한 모종의 앎이 절대적인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았고, "천지가 지극히 큰 영역으로 궁구하기에 충분한 것이겠는가"는 큰 것에 대한 모종의 앎 역시 절대적인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주장은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1. 작은 대상에 대한 앎은 절대적이지 않다.
  2. 큰 대상에 대한 앎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3. (1과 2가 맞다면) 작은 대상에 대한 앎을 통해서 큰 대상에 대한 앎으로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3과 마찬가지로) 큰 대상에 대한 앎을 작은 대상에 적용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통찰(깨닫기?)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지혜'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방식으로 논하자면 만달라님이 "우리의 지식이 소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대지처럼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장자의 논지 안에 포함되겠지만, 장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분적인 진리값만 가진다고 평가하지 않을까요?

3개의 좋아요

(1) 저와 소지/대지에 대한 해석이 다르신듯합니다.

저는 소지가 "개별 사례에 옳은 지식"으로 보았고 대지가 "보편적으로 옳은 지식" 혹은 "항상 옳은 지식", 곧 도라 보았습니다.

(2)

따라서 <별류>의 환자 해석은 저에게 반신불수에게만 적용 가능한 "소지"를 잘못된 추론을 통해 "대지"라 착각하여, 죽은 자에게도 (사실상) 동일한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 믿는 사례입니다.

<추수>의 '털끝만큼 작은 것'과 '천지만큼 큰 것'에 대한 지식은 제 정의에 따르면 모두 '소지'로, 어느쪽 지식도 '대지'라 착각하여 상대 대상에 적용되면 안 된다는 것이 요지라 생각됩니다.

2개의 좋아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저도 좀 더 봐야겠네요.

(1)

곰곰히 생각해보면, 류(類)가 핵심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류>는 제목이 말하듯, 류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의 구절을 보면, 작은 사각형과 큰 사각형은 "사각형"이라는 류로 같고, 작은 말과 큰 말은 "말"이라는 류로 같지만, 작은 지와 큰 지는 동일한 "지"임에도 다른 류라 주장합니다. 아마 이는 작은 지와 큰 지가 지라는 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라기보단, (지금 논의의 맥락에서) 작은 지와 큰 지가 "지"라는 류에 속하다는 점보다는, "X"라는 공통된 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X는 무엇일까요?
아마 지식의 대상 아닐까 합니다. 작은 지식의 대상과 큰 지식의 대상이 동일한 류가 아니라는 것이겠죠. [이건 좀 고민해봐야할 주장 같네요.]

여하튼, <여씨춘추>의 핵심은 맥락에서 중요한 류를 파악해서, 그 류에 적합한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대지이고, 그러지 못한 것이 소지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2)

흥미로운 건 장자에서는 류에 대한 언급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논의하는 컨텍스트와 유의미한 것은 제 기억상 <제물론>에 한 두문장 나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대로 <순자>에서는 류에 대한 언급이 좀 나오는 편입니다. 후기 묵가에서도 굉장히 테크니컬한 정의와 함께 등장하고요.)

그럼 통상 순서가 후기 묵가 - 장자 - 순자 - 여씨춘추일텐데, 장자에게만 류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셈입니다.

제 생각에는, 후기 묵가가 기준에 따라 지식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했었는데, 장자는 이 기준(류)의 상대성을 주장한 듯 합니다. 단순히 (인간이 합의하에 만들었기에) 자의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장자 입장에서는 어떤 사물이든 류가 변할 수 있으므로 (곤이 붕이 된 것처럼 말이죠) X가 A라는 류에 속하기에 항상 A'가 맞다라는 형태의 주장은 언제든 틀릴 가능성이 있는 소지인 셈입니다.

이제 장자의 입장을 반대하며, 순자는 '류'가 마음 독립적으로 있는 세상이 분할되는 (나름의 객관적인) 방법이라 여긴 듯합니다. <여씨춘추>는 여기에 조금의 장자 느낌을 더해서, 이러한 류를 제대로 아는 것은 어려우니 조심하라는 권고를 하는 것 같고요.

여하튼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2개의 좋아요

댓글을 읽다가 智와 知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智는 일종의 인식 능력을 의미하고, 知는 인식 행위 및 인식 행위를 통해 알게 된 지식에 가까워 보입니다.

大智와 小智에 대한 고유의 주는 다음과 같은데요.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처는 許維遹, 『呂氏春秋集釋』, 中華書局, 2009, 681쪽입니다.

"大智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서 하나를 보면 나머지 세 방면으로 반추한다. 小智는 열을 들어도 그 중 하나만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부류가 될 수 없다." [大智人之所不知, 見一隅則以三隅反, 小智聞十裁通其一, 故不可以爲類也.]

최소한 고유는 智와 知를 구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大智와 小智의 차이를 무엇으로 봤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일단 고유의 견해에 따르자면 大智와 小智는 추론 능력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는 중간에 《논어》의 구절을 원용해서 "하나를 보면 나머지 세 방면으로 반추한다"고 한 내용에 기반합니다. 고유는 어떤 하나의 지식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지식의 이면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大智라고 보았던 것 같네요.

한편, <별류>에서 주목했던 것은 작은 지식에 기초한 추론으로 큰 지식을 획득하는 것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주석으로 달았던 《순자》 <불구>에서 "5촌 길이의 직각자로 천하의 모든 사각형을 그려낼 수 있다." [ 五寸之矩, 盡天下之方也] 라고 말한 대목과 비교해보면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순자는 작은 지식으로부터의 추론 가능성을 긍정하지만, 최소한 <별류>의 저자는 이러한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죠.

<별류>에서 작은 사각형과 큰 사각형이 서로 동류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작은 사각형을 통해서 알게 된 사각형에 관한 지식은 큰 사각형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큰 지혜와 작은 지혜를 구별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