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오늘날 동북아철학이라고 하면,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평가를 받는 기분입니다. 특히 이는 동북아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형이상학/존재론/인식론의 술어들이 오늘날 철학에 응용되기에는 지나치게 '나이브'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1) 사실 동북아 고대 철학에서는 리/기라는 단순한 구분 외에도 때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견될 만한 (!) 형이상학적 사유의 단초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묵자><장자><순자><공손룡자> 등에서는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들 사상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어느 순간 학자들에게 연구되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2) 제가 아래에 소개할 내용은 <여씨춘추>라는 책의 한 부분입니다. 아마 잘 모르실텐데, 보통 제자백가가 모두 나오고, 유학이 국가 학문이 되기 전 짧은 시기 동안 제자백가 내용들을 모두 종합하려하는, 속칭 "잡가"라고 부르는 책들이 나옵니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책이 <여씨춘추>와 <회남자>입니다. 이 두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많은 경우/혹은 부분적으로 지금은 실전된 여러 학파들의 주장을 원문으로 혹은 요약으로 수록하고 있다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양주 학파의 견해를 대체로 <여씨춘추>와 <회남자>에 나온 견해를 재구성해서 다룹니다.)
(2-1)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에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에 대한 초보적인 고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과론이나 존재론, 자연학,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본적으로 요약본이라는 <여씨춘추>라는 저서의 특성상, 저는 추측하기로는 원래 여기 수록된 내용보다 심화된 내용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제 우리는 그 내용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 서양 철학 혹은 분석 철학을 하시는 분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니 읽고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김근역, 글항아리본 <여씨춘추>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별류 ; (사물의) 유형에 대한 구분
"옷칠도 액체이고 물도 액체인데 이 두 가지 액체를 섞으면 응고되고, 축축하게 만들어주면 건조된다. 금도 유연하고 주석도 유연한데 이 두 가지 유연한 것을 융합하면 단단해지고 불을 가하면 액체가 된다. 어떤 것은 축축하게 만들어주면 건조되고, 어떤 것은 불을 가하면 액체가 된다. [즉, "불을 가함"과 "건조됨"이 항상 동시에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사물의 유형은 본디부터 필연적인 것이 아닌데, 어떻게 유추할 수 있겠는가?
작은 네모는 큰 네모와 같은 유형이고, 작은 말은 큰 말과 같은 유형이지만, 작은 지혜는 큰 지혜와 같은 같은 유형이 아니다.
(중략)
고양퇴가 바야흐로 집을 지으려고 하자 장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직 안 됩니다. 나무가 아직 생것이어서 그 위에 진흙을 바르면 장차 틀림없이 휘어질 것입니다. 생나무로써 집을 지으면 지금은 아무리 좋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고양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대로라면 집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마르면 마를수록 더 야물어지고 진흙은 마르면 마를수록 더 가벼워질 것이므로, 갈수록 야물어지는 것으로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을 맡아 지도록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장인이 아무 말로도 대답하지 못하고 명령을 받아서 집 짓는 일을 했다. 집이 처음 지어졌을 떄는 훌륭했는데 나중에는 정말로 무너졌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