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춘추』 「별류別類」 번역

만달라님이 『여씨춘추』 「별류別類」의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해주셨는데요. 「별류」를 읽어보니 아주 흥미로운 것 같아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전체 편이 짧아서 한 번 전체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해석했는지 궁금하거나 혹은 오역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知不知上矣。過者之患,不知而自以為知。物多類然而不然,故亡國僇民無已。夫草有莘有藟,獨食之則殺人,合而食之則益壽;萬堇不殺。漆淖水淖,合兩淖則為蹇,溼之則為乾;金柔錫柔,合兩柔則為剛,燔之則為淖。或溼而乾,或燔而淖,類固不必,可推知也?小方,大方之類也;小馬,大馬之類也;小智,非大智之類也。
스스로 잘 모르고 있음을 아는 것이 으뜸이다. 오류를 범하는 자들의 문제는 잘 모르고 있으면서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사물은 대체로 이렇지 않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라를 멸망에 빠지게 하고 백성을 죽이게 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풀 중에 족두리풀이 있고 덩굴풀이 있는데, 이 중에서 하나만 먹으면 사람을 죽이지만 섞어서 먹으면 병을 낫게 하여 더욱 장수하게 되고, 뱀이나 벌레의 독에 물렸을 때 오두를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1] 옻은 액체이고 물도 액체이지만 두 액체를 섞으면 고체가 되고, 축축하게 하면 건조해진다. 구리는 유약하고 주석도 유약하지만 두 유약한 것을 섞으면 단단해지고, 뜨거운 불로 가열하면 액체가 된다. 어떤 것은 축축하게 했더니 건조해지고, 어떤 것은 뜨거운 불로 가열했더니 액체가 되니, 유형(범주)은 진실로 일정하지 않은데 어떻게 추론을 통해 알아낸단 말인가? 작은 사각형은 큰 사각형과 동류이고,[2] 작은 말은 큰 말과 동류이다. 하지만 작은 지혜는 큰 지혜와 같은 유형이 아니다.

[1] 족두리풀, 덩굴풀, 오두 모두 독을 지닌 약초이다.
[2] 『순자』와 『묵자』의 내용도 참조할 수 있다.
『순자』「불구」, “五寸之矩, 盡天下之方也.”
『묵자』「경하」, "一法者之相與也盡,若方之相召也。說在方。
『묵자』「경설하」, "一方盡類,俱有法而異,或木或石,不害其方之相合也,盡類猶方也。"

魯人有公孫綽者,告人曰:「我能起死人。」人問其故。對曰:「我固能治偏枯,今吾倍所以為偏枯之藥則可以起死人矣。」物固有可以為小,不可以為大;可以為半,不可以為全者也。
노나라 사람 중에 공손작公孫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진실로 반신불수를 치료할 수 있는데 지금 내가 반신불수를 치료하는 약을 배로 늘리면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사물은 작은 것에 적용할 수 있지만 큰 것에 적용할 수 없고, 부분적인 것에 적용할 수 있지만 온전한 것에 적용하지 못한다.

相劍者曰:「白所以為堅也,黃所以為牣也,黃白雜則堅且牣,良劍也。」難者曰:「白所以為不牣也,黃所以為不堅也,黃白雜則不堅且不牣也。又柔則錈,堅則折。劍折且錈,焉得為利劍?」劍之情未革,而或以為良,或以為惡,說使之也。故有以聰明聽說則妄說者止,無以聰明聽說則堯·桀無別矣。此忠臣之所患也,賢者之所以廢也。
검을 살피는 사람이 말했다. “[주석의] 백색은 견고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구리의] 황색은 질김을 드러내는 것이다. 황색과 백색이 섞이면 견고하고 질기니 뛰어난 검이다.”
비판하는 사람이 말했다. “백색은 질기지 않음을 드러내고 황색은 견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황색과 백색이 섞이면 견고하지 않고 질기지도 않다. 또 유연하면 구부러지고 견고하면 쪼개진다. 검이 쪼개지고 구부러지면 어떻게 날카로운 검이겠는가?”
검의 실정은 바뀌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은 뛰어난 검이라 간주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검이라 간주하는 것은, 해석으로 인해 그런 것이다.[3] 그러므로 총명으로 해석을 듣는다면 망령된 해석이 멈출 것이고, 총명으로 해석을 듣지 않는다면 요임금과 걸왕조차 구별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충신의 걱정거리이며, 현자가 버림받는 이유이다.

[3] '說'을 해석으로 번역하였는데, '주장'이나 '이론'으로 번역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문의 '聰明'은 그대로 총명으로 해석하였는데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義,小為之則小有福,大為之則大有福。於禍則不然,小有之不若其亡也。射招者欲其中小也,射獸者欲其中大也。物固不必,安可推也?
의義를[4] 조금 행하면 복이 조금이 있고 크게 행하면 복이 크게 있다. 하지만 재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서 조금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 과녁에 활을 쏘는 자는 아주 작은 표적에 적중시키길 바라지만, 짐승에 활을 쏘는 자는 큰 짐승에 적중시키길 바란다. 사물은 고정 불변하지 않은데 어떻게 추론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4] '義'는 (보통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지칭한다.

高陽應將為室家,匠對曰:「未可也。木尚生,加塗其上,必將撓。以生為室,今雖善,後將必敗。」高陽應曰:「緣子之言,則室不敗也。木益枯則勁,塗益乾則輕,以益勁任益輕則不敗。」匠人無辭而對,受令而為之。室之始成也善,其後果敗。高陽應好小察,而不通乎大理也。
고양퇴高陽魋가 저택을 만들려고 할 때 장인이 대답했다. “아직 안될 것 같습니다. 목재가 여전히 살아있는데[5] 그 위에다 뭔가를 덧칠하면 반드시 휘어지고 말 것입니다. 살아있는 목재로 집을 만든다면 지금 비록 좋더라도 후에 장차 필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고양퇴가 말했다. “그대의 말에 따른다면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더욱 마를수록 굳세고, 덧칠하는 것은 더욱 마를수록 가벼워진다. 더욱 굳센 것을 가지고 더욱 가벼운 것에 맡긴다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장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였다. 저택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는 좋았지만 그 후에 과연 무너지고 말았다. 고양퇴는 작은 부분을 살펴보길 좋아했으나 큰 이치에 통달하지 못했다.

[5] 목재가 살아있다는 말은 목재가 아직 덜 말라서 물기가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驥驁·綠耳背日而西走,至乎夕則日在其前矣。目固有不見也,智固有不知也,數固有不及也㉟。不知其說所以然而然,聖人因而興制,不事心焉。
기오驥驁, 녹이綠耳 등 명마는 아침에 태양을 등지면서 서쪽을 향해 달려가지만, 저녁이 되면 태양이 그 앞에 있게 된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지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술수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일반 사람들은 어떤 해석이 그렇게 되는 근거는 모른 채 그렇다고 간주한다. 성인은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원칙[6]을 제정하여 멋대로 마음을 쓰지(생각하지) 못하게 하셨다.

[6] '制'를 원칙으로 번역했다. 『여씨춘추』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어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성인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보자면 구체적 행위 규범으로서의 법이나 제도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별류」의 전체 내용을 인식론적으로 보자면 추론의 법칙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陳奇猷, 『呂氏春秋新校釋(下)』, 上海古籍出版社, 2002.
許維遹, 『呂氏春秋集釋』, 中華書局, 2009.
张双棣 등, 『吕氏春秋译注』, 北京大学出版社,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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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참 감사합니다. 올해 지금껏 읽었던 글 중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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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별도의 서지사항을 안 적어서 제 번역으로 착각하신듯 하네요. 전 김근역 <여씨춘추>(글항아리)에서 인용해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다들 관심있을 줄은 몰랐는데 @.@ 번역까지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2) 사실 전 이 편의 사례를 소개하는데만 (어쩌면 지엽적인 부분이지요.) 제가 집중했는데 전체적인 맥락은 <장자>(의 부분)와 <순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둘 다 편명이 기억나진 않지만, (외편 어딘가에서) <장자>에서도 대지/소지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자신이 아는 것의 범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말하고 있죠.
<순자>의 경우, (어쩌면 이런 회의주의/국소론에 대한 반박일 수 있는데), 성인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만물의 범주/유형을 알면 세상을 적절히 다스리는데 부족함이 없다 말하고 있죠.

(3) 번역에 대해서 첨언하면, '설'의 경우 해석이나 이론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설명' 정도의 뉘앙스가 적절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해석이나 이론은 지나치게 테크니컬? 학술적인 뉘앙스를 가진듯해서요.
'제'의 번역어는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봅니다. 별류 자체는 인식론적이지만 다른 챕터에는 정치적인 내용도 많고, <여씨춘추>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텍스트인지 아닌지에 따라 견해가 좀 갈릴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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