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수업이 재미없어서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써봅니다.
저에게 있어서 사회적 인간의 정체성은 크게 공학도와 개신교인으로써 압축되는 것 같습니다.
포럼에 가끔 올때마다 글들을 읽는데 솔직히 용어가 잘 안읽히긴 합니다. 철학을 깊게 공부해본적도 없고 제 전공과는 거의 대척점에 있죠.
그나마 개신교인이라서 신학 관련 얘기는 어느정도 알아듣습니다만...다른 글들은 클릭하기 전에 내가 이걸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 먼저 듭니다.
어쨌든 글을 읽다보면 저 두 가지 관점에서 글을 바라보게 됩니다. 공학도로써 나는 이걸 사회에 어떻게 소화시키고 내 관점을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이 관점이 앞으로의 내 일에 있어서 신선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개신교인으로써 내가 가진 진리에 대한 믿음과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다면 이 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고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생각하고 다녀서 공대에서도 좋게 말하면 공부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별종으로 취급받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관점으로 철학을 바라보고 계신가요? 이상 제 정체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철학에 대한 뻘글이였습니다.
(1)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말하자면, 세계관이나 인생관 같은거라 사람들이 표현하는 건데, 이 부분이 바뀌면 사람이 확 바뀐다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제가 바닐라빈 라떼를 좋아하는데, 어느날부터 모카라떼를 마신다고 해서 "확 바뀐다'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누군가는 이 변화가 사소한 변화이지만 정체성의 변화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말이죠.)
그래서 반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상상(사고실험)을 통해 이러한 '중요한 부분'을 대충 구분해 볼 수 있었습니다.
(i) 과연 이 생각/믿음이 바뀌면, 나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까?
이런 중요한 생각들이 몇 개 존재하긴 합니다. 반성해보면, 이런 생각들은 대체로 큰 경험-사건을 통해 믿어지게 된 것 같더라고요.
아주 예전에는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나 굉장히 '큰 진리', (저만의 용어로는) 그노시스라고 부르는 것을 얻고자 했었습니다. 알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어떻게 살지도 알고. 뭐 무협지나 종교의 언어를 빌리자면, "깨달은 자"가 되게 해주는 것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길고 지루한 대학원 수업 끝에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아, 철학을 통해 내가 얻고자 그토록 말했던 '그노시스'는 없구나. 그러니깐, 이 그노시스라는 건 하나의 거대한 것이 아니라, 잘게 쪼개진 질문들을 제가 맘대로 (혹은 예전 철학자들이 맘대로) 한 덩어리로 묶어 놓은 것이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도 따로, 행복도 따로, 윤리도 따로. 다 다른 질문인 셈이죠.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찾아보니 같을 수도 있죠. 하지만어쨌든 질문은 구분되니, 다 따른 답이 있다 가정하고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철학 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는 없다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위에 나왔든, 제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믿음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진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철학을 그만두었습니다. 하하.
(2)
그래도 철학은 저한테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습니다.
(i) 아주 재미있는 취미 생활입니다. 공부하면 재미있어요. 근데 재미보다 고통이 더 크면 미련 없이 그만둘 겁니다. 그러니 취미.
(ii) 또한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내려주지 않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줬죠. 그리고 질문과 답의 후보들도 어느정도 알 수 있었고요. 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노시스 같은 걸 찾아 헤매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톨스토이마냥, 그노시스...그노시스는 도대체 뭐지? 하면서 어디 서울역 지하철에서 객사했을겁니다. (물론 그노시스가 있을 수는 있지만, 찾아가는 과정이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전 비트겐슈타인의 사고 방식을 아주 좋아합니다.
"삶은 철학보다 크다. 철학이 삶에 대해 사고할 수 없다면, 그건 삶의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일뿐이다."
이런 말은 직접적으로 안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하.
좋은 답변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제 주위를 둘러보면)을 보면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때문인지 몰라도 절대적인 삶의 답을 찾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종교는 진리라는 답을 제시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각자의 이유로 거부하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서로 관련이 있는듯 하면서 고유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한 번에 답하려고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어릴 때는 어떤 걸 공부해서 알게 되면 뭔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소소하게 뭔가 어릴 때 꿈꿨던 것을 이루고 나면 허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라깡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면서 실재계는 상징계를 초월해있기 때문에 상징계의 욕망을 채우고 나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싶기도 합니다.
(1)
페소아가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삶보다 상상이 더 흥미롭다"라는 게 참 적절한 말 같습니다. 아직 많이 살아보진 않았으나, 대체로 삶은 좋게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고 나쁘게 생각했던 것보단 좋더라고요.
영원한 줄 알았던 것에도 무뎌지고 지치고, 좋았던 것에도 익숙해지고 나쁜 것에도 익숙해지고 좋든 나쁘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2)
그래도 예상치 못한 기쁨도 있으니 그걸 소소한 행운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보입니다. 예상치 못한 낙담과 허무가 있으니, 예상치 못한 기쁨도 있는 것이겠죠.
저는 개혁파 신학적 관점에서 또 보수신학적 관점에서 기술하보겠습니다. (물론 개신교인의 관점을 원하셨지만 하하)
먼저 신학사 가운데에 철학은 어거스틴(또는 그 전 교부들이 철학적 용어를 씀 ex : 순교자 저스틴 마터[영어식]/유스티노스[헬라식]는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 말함; 소크라테스가 신의 속성을 상정한 것이 원인)은 신 플라톤주의를 가지고와서 이원적 구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다는 테마로 신국론을 저술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더 크다는 기준 또한 명확했던 것마저 플라톤적입니다.
후에 아퀴나스(스콜라신학 또는 스콜라철학이라함; 대표적 인물 아퀴나스, 스투코스, 보캄등등)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사용하여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로인해 자연 가운데에서 구원에 이룰 수 있는 지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자였던 위대한 칼빈은 플라톤의 이론을 사용하여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성경이 말하지 않으면 궁금해하지말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른 차원(플라톤식으론 이데아)즉, 영원(시간의 무한이 아닌 시공간을 넘은 προ καταβολς κοσμου : 만물의 기초 이전에, 에베소서 1:4) 가운데에 계신다고 상정했습니다.
또 후기에 네덜란드에선 다시 한 번 스콜라주의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칼빈의 사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신학계에선 18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 합니다. 그로인해 신학의 본격적인 systematic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 동시에 르네상스의 아류였던 자유주의가 합리주의적 방법론, 변증법, 실존주의, 경험주의 등등 여러 철학들이 기독교의 정통교리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전 모든 철학이 플라톤적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합리주의, 변증법, 실존주의, 경험주의 등등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명 드리려면 길지만… 엄격한 의미까진 아니라서, 단지 형이하학적인 것으로부터 형이상학인 것을 상정하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플라톤적인 것이 기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네덜란드에서 개혁파 신학자였던 카이퍼와 바빙크가(카이퍼는 적극적으로 기독교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바빙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론으로 그들의 신학을 논리적으로 타파했습니다) 등장하여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신학사에서의 철학은 이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신교인에게 철학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공학도는 아니지만 신학도로써 저에게 있어서도 철학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하면, 어떤 논리방식으로 설명하면 될까 ?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매개체이며 또한 마지막으로 바빙크의 말을 인용하여 개신교인에게 철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에 더욱 더 발전 시키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다시 한 번 더 경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사용하여 창조교리(대전제 : 창조는 피조물의 복락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다)에 부합하게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합니다. 모태신앙인지라 기독교적 세계관에 상당히 오랜 기간 갇혀 있었는데 철학 덕분에 다른 방향의 세계관에 눈떠주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 대화 주제는 아니지만요...
저도 교부신학에 대해서는 철학을 기반으로 논증했다라는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를 경계하라 했는데 현재 신학이 이런 발전 과정을 거쳐온 것을 보면 느낌이 묘하네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철학이 필요하다거나 유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찾아다녔던 사람들은 세리, 창기, 병자, 과부 같은 소외 계층들이라, 학술 담론과는 거리가 멀었죠. 당시 유대 사회에도 그리스 문화가 꽤나 침투해 있었고, 예수의 활동 범위였던 갈릴래아에는 세포리스 같은 헬레니즘적인 도시도 있었지만,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가 일정 수준의 그리스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예수의 사역에서 그리스 철학이 크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잖아요.
다만, 아주 특수한 맥락에 놓인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철학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가령 사도 바울처럼 헬레니즘적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로마인들을 상대로 복음에 대해 설명하고 변론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말이에요. 실제로,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및 스토아 학파와 부활 논쟁을 벌이기도 하죠(사도행전 17:16-33). 또 바울 서신들은 상당 부분 당대 그리스의 수사학 기법을 차용하여 작성된 것이기도 하고요.
기독교와 철학적인 관점에서 늘 관심가져주시고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무언가 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때가서 공부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또 철학이나 과학 때문에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져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대학생들을 많이 봤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선 오히려 도움이 안될 수도 있을 겁니다.
양날의 검인 것 같긴 합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대로 철학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수도 있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경험적인 측면에선 "어떤" 그리스도인들, 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종교 동아리 운영을 해보면서 대학생들이 특히 그런 지식적인 부분에서 결핍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