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철학자 하이데거?!


머리를 싸매고 있는 하이데거와 불트만, 둘은 각각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와 신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1) 얼마 전에 하이데거를 전공하는 대학원생 J 씨에게 하이데거 철학의 현대적 의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J 씨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하이데거가 정말로 맞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평가하지 않기로 했어요. 오히려 하이데거 철학을 어떻게 우리가 전유해야 하는지는 유석 씨가 더 많이 찾아보셨잖아요. 솔직히, 하이데거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이데거 해석하기에도 바쁜 것 같아요. 다들 하이데거의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내적 논의만 하더라고요. 외적 논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2) J 씨와의 대화를 하이데거를 전공하는 다른 대학원생인 S 씨에게도 말해주었더니, S 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게 다 하이데거 이 인간이 오만해서 그런 거잖아요. 자기가 한 말을 풀어줘야 하는데, 오만한 놈이라서 ‘니들이 알아서 이해해라!’라는 태도로 글을 쓰잖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다른 철학하는 사람들이 하이데거를 굳이 주목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신학 하는 사람들은 하이데거를 여전히 많이 읽는 것 같지만 말이에요.”

(3) 이야기를 듣고 보니, S 씨가 말한 것처럼, 확실히 하이데거는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닐 수 있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가 하이데거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범주화하는 것과 달리, 하이데거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딱히 비판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단순히 종교적 ‘소속’으로만 따지자면 평생 가톨릭 신자였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가톨릭 신학생으로 자신의 학문적 커리어를 시작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의 초기 사유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정이 아주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하이데거는 체계로서의 ‘가톨릭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또한 결혼할 무렵에는 개신교도였던 아내로 인해 가톨릭 신앙생활에도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에서 출교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죽을 때도 가톨릭 장례 절차에 따라 묻혔다.) 내가 최근에 읽은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의 논문에서는 초기에 하이데거가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전통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이다.

“그[하이데거]의 첫 번째 걸음은 본래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에 의해, 그리고 특별히,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경험된 원래성을 향한 탐구에서, 종교성을 향한 현상학적 접근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적 전통을,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그리고 플라톤적) 형태의 철학적 전통을, ‘그리스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원래의 기독교 신학을 향한 길’을 형성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장애물로 여겼다.”(Thanassas, 2012: 35)

(4) 게다가, 하이데거는 아주 명시적으로 자신의 작업이 갖는 신학적 의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하이데거의 친구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신교 성서신학자 중 한 명인 루돌프 불트만이 하이데거에게 기초존재론이 전제하고 있는 사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하이데거는 그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이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에르케고어 같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업이 “학문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존재론적 정초”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에르케고어는 현존에 대한 더욱 급진적 이해의 형성을 위해 철학적으로 본질적이다. […] 나의 작업은 세계관이나 신학을 향한 열망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작업은 학문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존재론적 정초를 향한 접근과 의도를 당연히 포함한다(may well contain). 이것이 당신에게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Kisiel, 1995: 452 재인용)

(5) 어떤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그리스도교 신학에 반대하였다는 근거로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것은 나무로 된 쇠와 같은 것이요,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에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맥락을 살펴보면, 하이데거가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그리스도교 신학을 폄하하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그리스도교 신학은 신학만의 고유한 의의와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 말을 한다. 신학이 자신의 “위대한 참된 사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굳이 철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지적이다. 즉, 하이데거는 철학이 신학보다 더 근본적이거나 더 근원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에 선행하는 ‘그리스도교 철학’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문제의 구절의 전체 맥락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것은 나무로 된 쇠와 같은 것이요,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적으로 경험된 세계, 다시 말해서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인 것이다. 철학의 도움으로 자칭 쇄신이라 일컫는 것을 통해서 어떤 신학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그래서 시대적 요구에 좀더 구미를 맞출 수 있으리라는, 아니면 아주 이것으로 대신해 버리자는 막연한 속견이 횡행하는 것은 다만 신학의 위대한 참된 사명을 더 이상 스스로 믿지 못하게 된 시대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본래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대해서 철학은 다만 미치광이짓일 뿐이다.”(Heidegger, 1994: 32)

(6) 그러나 신학을 존재론적으로 ‘정초’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연구자들 중에서는 종종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라는 개념을 의인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치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에티엔 질송과 존 맥쿼리가 하이데거의 ‘존재’를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해석한다. 가령, 질송은 “하이데거의 존재는 유대-기독교의 신의 단지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Gilson, 1962: 402/Macquarrie, 2006: 39 재인용)라고 주장한다. 또한 맥쿼리는 “만약 신이 초인격적이고, 신이 실체 이상의 하나의 사건이고, 어떤 관점에서 적어도 시간 내적이라고 기꺼이 이야기한다면, 광의의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유신론적이다.”(Macquarrie, 2006: 183)라고 주장한다.

(7)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유신론적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존재’는 전혀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란 일종의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는 주어지는 것(Gabe)으로서 줌(Geben)으로부터 밀쳐내어지지 않는다.”(Heidegger, 2008: 32) 즉,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는 모습이 그 대상이 나에게 존재하는 모습이다. 가령, 똑같은 참나무가 예술가에게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한 ‘정물’로 주어지고, 목수에게는 책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주어지고, 생물학자에게는 자신의 연구를 진행시키기 위한 ‘표본’으로 주어진다고 해보자. 이때 참나무는 ‘정물’로서, ‘재료’로서, ‘표본’으로서 존재한다. 주어짐의 방식이 다양해지면 존재함의 방식 역시 다양해진다. 따라서 ‘참나무’라는 존재자는 단순히 고정된 기성품처럼 우리 눈앞에 놓여 있지 않다. 누가 바라보는지에 따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무엇을 위해 바라보는지에 따라 존재자는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8) 하이데거의 입장이 지닌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이후로 유럽을 지배한 실증주의 사조를 고려해야 한다. 근대 이후로 가속화된 학문의 ‘수학화’와 ‘자연화’ 경향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학문의 영역으로부터 제거해 버리고자 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어야 하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물리학적으로 법칙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실증주의의 기본 입장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종교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도덕 등 인문학 전반이 더 이상 ‘학문’이라고 여겨질 수 없었다. 시, 소설, 미술, 음악, 역사, 철학은 수학을 통해 객관화될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이었다. 인문학이란 기껏해야 ‘취향’으로서의 의의만 지닐 뿐이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적’ 영역에 비교할 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 대한 고민 따위는 근대인들에게 더 이상 ‘진리’의 자격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9) 그러나 하이데거는 실증주의가 제시하는 존재의 기준이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수리물리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대상들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입장이 얼마나 허약한 가정 위에 성립하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즉, 실증주의는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에 빠져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자의적인 기준으로 무엇이 존재하는지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의 분석형이상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실증주의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정이란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일의성: ‘있다’ 혹은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객관적 기준에 따라 단일하게 규정된다.

이와 같은 입장에 반대하여 하이데거가 내세우는 테제는 ‘존재의 다의성(plurality of Being)’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이데거는 젊은 시절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라는 브랜타노의 논문을 읽고서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란 우리가 어떠한 태도, 관점,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무엇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무한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유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실제로, 오늘날 분석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크리스 맥다니엘은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gical pluralism)’를 내세우기도 한다.

존재의 다의성: ‘있다’ 혹은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원적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된다.

(10)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다원주의적 관점은 ‘진리’의 문제에 대한 다원주의적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통적 철학에서 진리란 사유와 존재 사이의 대응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눈은 희다.”라는 사유는 눈의 실제로 흴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가 우리 자신의 태도, 관점,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무엇이 ‘참이다’라고 할 수 있는지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오늘날 한국인은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라는 7가지 색깔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 동양에서는 무지개가 흑, 백, 청, 홍, 황이라는 5가지 색깔을 갖는다고 말했다. 영어권에서는 무지개 색깔을 6가지(빨, 주, 노, 초, 파, 보)로 분류하고 있고, 독일과 네덜란드 등에서는 5가지(빨, 주, 노, 초, 파)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슬람권에서는 4가지 색(빨, 노, 초, 파)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 중 무엇이 ‘실제로’ 무지개 색깔인지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개 색깔은 단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어질 뿐이다. 다양한 분류법 중에서 어느 하나만 진리이고 나머지는 거짓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분류법들은 무지개가 우리에게 ‘탈은폐(Entbergung)’되는 각각의 방식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진리’이다.

(11) 하이데거의 사유가 그리스도교 신학을 존재론적으로 ‘정초’한다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이 말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토대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종교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실존의 구조를 하이데거의 사유가 철학적 언어로 해설하고 있다는 비신화론적 주장도 아니다. 이 말은 단지 그리스도교 신학이 근대의 수리물리학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이데거의 사유를 통해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였다.” “예수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는 신학적 진술의 참/거짓을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술이 거짓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수리물리학을 기준으로 신학적 진술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존재’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피상적인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신학적 진술은 신학적 진술의 맥락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누군가가 정말 예수를 통해 자신의 삶이 구원받는 경험을 하였다면, 그의 믿음에 대해 “너의 믿음은 수리물리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허구적인 것이야.”라고 비난할 권한이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런 비난이 ‘도덕적으로’ 다소 무례하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난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2) 덧붙이는 이야기이지만, 하이데거의 수제자인 가다머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관심을 꽤 깊게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부시절에 서강대 종교학과의 K 교수님께 과제를 제출하러 연구실에 방문했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K 교수님이 나에게 철학 중에서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싶냐고 물어보셔서, 해석학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가다머를 만난 일화를 말해주셨다. 가다머가 살아 있었을 당시에 K 교수님이 가다머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당신은 왜 해석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나?”

라고 가다머에게 물어보았더니,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하다가 해석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라고 가다머가 대답하였다고 했다. 가다머가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들어서 좀 놀랐다. 아쉽게도, 가다머 관련 다른 자료들에서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어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전적으로 그날 K 교수님의 증언과 나의 기억에만 달려 있다.

참고

Heidegger, M., 『형이상학 입문』, 박휘근 옮김, 문예출판사, 1994.
Heidegger, M., 『사유의 사태로』, 문동규·신상희 옮김, 길, 2008.
Kisiel, T., The Genesis of Heidegger’s Being and Tim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Macquarrie, J., 『하이데거와 기독교』, 강학순 옮김, 한들출판사, 2006.
Thanassas, P., “Phronesis vs. Sophia: On Heidegger‘s Ambivalent Aristotelianism”,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66(1), 2012, pp. 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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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을 존재론적으로 정초한다는 말이 가지고 의미가 흥미롭네요. 별개로, '신학적진술'과 '신학적 맥락'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신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도 답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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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가 철학적 해석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기독교 신학보다는 고전 문헌학과 예술 비평에서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가다머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에 문학에 심취했었고, 독일의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인문학 전반에 관심을 갖고 온갖 수업에 다 들어갈 때, 신학자 불트만의 수업도 들었고, 그 이후에도 불트만과 교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다머의 정신적 대부는 역시 하이데거였습니다. 가다머의 주저인 『진리와 방법』은 예술, 역사, 언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정신과학에서 진리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으니 신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다만 가다머의 해석학을 기독교 신학과 관련 지을 여지는 있는 것 같고, 그런 연구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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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게오르게에 대한 관심 덕분에 하이데거에게 끌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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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무슨 책인지는 기억 안나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을 '종교적 사유의 세속화'라고 평가한 게 기억이 나네요. 존재의 종말인 죽음으로부터 존재의 의미,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묻는 사고방식 자체가 상당히 종교적인데, 하이데거는 이걸 철학의 언어로 해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읽었던 거 같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에 대해 논하고 있고, 특히나 기독교에서 종말이 믿음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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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reflex님과 Weif님의 견해가 둘 다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다머의 관심사를 단선적으로 요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즉, 가다머가 (a) "신앙적/신학적 관심 때문에 해석학을 연구하게 되었다."라거나 (b) "문헌학적/비평적 관심 때문에 해석학을 연구하게 되었다."라는 주장 중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것은 다소 과장이겠죠. 가다머에게는 성서, 문학, 예술, 역사 등에 대한 복합적인 관심이 있었고, 그 관심들이 결국 그를 해석학의 길로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그 중에서 신앙적/신학적 관심의 영향이 꽤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가다머도 종교적 '소속'으로만 따지자면 루터파 개신교인이었죠. 물론, 교회에 잘 출석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진리와 방법』만 보더라도, 그가 당대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으로 대표되던 20세기 개신교 신학을 꽤 깊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진리와 방법』 제2권에서 '적용'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2000년 전에 쓰인 성경의 내용이 매 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에서 어떻게 진리로 선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소위 '변증법적' 신학의 고민들이 다루어지잖아요. 심지어, 『진리와 방법』 제3권에서는 이런 해석학적 고민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과 상당히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강조되기도 하고요. (가다머가 명시적으로 부각시키진 않지만, 사실 가다머가 제3권에서 삼위일체론을 언급하면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칼 바르트와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과도 일맥상통하죠.) 그 외에도, 가다머는 독일계 미국 신학자 폴 틸리히에 대한 논문을 쓴 적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Weif님의 설명처럼, 그리스도교 성서 해석학과 교의학의 영향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아주 짙게 배여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합니다. 또, 가다머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관심으로부터 해석학에 이르렀다고 추측하는 게 아주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 점이 적어도 가다머의 다른 전기적 텍스트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고요. 사실, 일반적인 가다머 전기문들에서는 오히려 reflex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설명이 더 널리 퍼져 있긴 하고요. 그래서 K 교수님의 증언은 저에게 '충분히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흥미로운 일화 정도의 의미만 지닙니다. 제가 기독교인이다 보니, 저는 이렇게 하이데거나 가다머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신앙적/신학적 측면에 눈길이 가기는 하지만, 사실 이건 존재론이나 해석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사항까지는 아니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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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f님과 YOUN님의 글을 읽어보니 가다머 해석학과 기독교 신학의 관련성이 꽤 클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일단 '해석학'이라는 학문의 출발점이 성서 해석학이고, 하이데거의 철학에도 신학적 요소가 다분한 게 사실이니까요. 아도르노 같은 사람은 『본래성이라는 은어: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하여』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안 좋은 의미에서 기독교(가톨릭) 신학의 현대적 변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가 가다머 해석학의 배경에 문학, 문헌학, 예술이 있다고 했던 건 그의 자전적 기록인 『철학 수업 시대: 회고』에 나오는 내용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 빠졌었고, 마부르크 대학에선 문학사, 미술사, 신학, 철학 수업을 두루 들었는데, 결국 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가다머는 1960년에 펴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책의 연구는 해석학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해라는 현상 및 이해된 것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현상은 정신과학적 방법론의 고유한 문제만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신학적 해석학과 법학적 해석학도 있었다. 이 해석학들은 학문의 이론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학문을 통해 양성된 판사나 목사의 실천적 활동에 상응했고 또 기여했다. -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이길우 외 옮김 (문학동네 2012), 「서론」, 9쪽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 전개되는 해석학은 결코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라, 그 방법적 자기의식을 넘어 정신과학이 진정 무엇이며, 또 정신과학을 우리의 세계경험 전체와 결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이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 목표는 전래의 문헌학적·신학적 해석학이 지향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이해의 기술론이 아니다. - 『진리와 방법 1』, 12쪽

전 이런 의미에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신학적 해석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고전 문헌과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자연과학의 진리와 구별되는 정신과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가다머 해석학의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가다머는 자신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철학자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수행합니다.

후설이 우리에게 의무로 제기한 현상학적 기술의 철저성, 딜타이가 모든 철학적 사유에 제기한 역사적 지평의 넓이, 그리고 특히 이 두 동인이 관통하는, 수십 년 전 하이데거로부터 받은 자극이 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나는 수행이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이 토대의 구속력이 흐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 『진리와 방법 1』, 14쪽

전 개인적으로 하이데거 못지 않게 후설이 가다머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추기: 가다머와 하이데거 이전에 딜타이도 예술에 대해 논했던 해석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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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논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기보다는, 댓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각자가 이것저것 첨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Weif님의 댓글과 내용이 1:1로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았던 것이라고 봅니다.

라는 물음에 대해 단적으로 답하자면, 저는 기본적으로 Weif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가다머가 철학적 해석학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애초에 ‘해석학‘이라는 것 자체가 신학에서 다루어지던 분야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슐라이어마허는 성서 해석학을 법률, 문학, 역사 텍스트로 확장시켜 ’일반 해석학‘으로 만드는 작업을 기획했고, 딜타이도 ’정신과학 일반의 방법론‘을 정립하는 작업을 지향하였으니, 성서 해석학과 구별되는 일반 해석학이 20세기 초반에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식의 해석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건 가다머 이후라고 보는 입장이기는 합니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을 출판할 때만 해도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었으니까요. (원래 이 책 제목이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이었는데,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출판사 측에서 만류해서 ’진리와 방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20세기 초반 인물들이 신학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문학, 예술, 법률, 역사 등에 대한 관심만으로 해삭학을 연구한다는 건, 시대적 정황상 가능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a) 애초에 해석학은 신학을 보조하기 위한 분과로 주로 연구되었고, (b) 신학과는 별개의 학문으로서의 일반 해석학은 당대에 아직 제대로 정립되었다고 보기도 힘들고, (c) 그 ‘일반 해석학’을 고민한 인물들조차 신학자들이었고, (d)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온갖 비평 방법론이나 해석 방법론은 성서 해석학이 그동안 쌓아올린 성과를 참조하고 있을 정도로, 성서 해석학은 다른 모든 방법론적 해석학을 대표하는 지위를 지니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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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를 잘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르게 보면 입증할 수 없기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쉽게 이걸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써 특히 요즘의 세태를 보면 더더욱 그렇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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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하기로 논지는 이렇습니다.

  1. 하이데거는 존재가 다의적이라고 주장했다.
  2. 존재가 다의적이라는 말은 진리가 주체의 태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3. 신학적 진술은 실증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다의적 차원 중 하나에 속한다.
  4. 따라서 신학적 진술을 참이라 믿는 사람을 실증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존재의 다의성, 즉 진리의 상대성에 무지해서 그런 것이다.

결국 신학적 진술은 '나에게' 참이기 때문에 비난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신학적 진리를 상대화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신학을 정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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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의미의 정초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달리기 선수와 수영 선수 중 누가 더 훌륭한 체육 선수인지 객관적으로 따지려고 한다면,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빠지는 셈이 되죠. 서로 다른 종목을 일괄적으로 비교할 기준이 없을 뿐더러, 설령 임의로 기준을 세운다고 해도 과연 그 기준만으로 한쪽이 다른 쪽보다 ‘객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는지도 문제시 되니까요. 즉, 비교가 정당하게 성립하는 영역이 있고, 비교가 정당하게 성립하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비교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비교할 수 없는지 선을 잘 긋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죠. 칸트가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자연과학,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을 ‘정초’하려고 했잖아요? 저는 하이데거도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일한 기준으로 서로 다른 존재 영역을 재단하려는 실증주의에 맞서서, 우리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말할 수 없는지를 정초하려 한 거죠. (*‘실증적 차원’과 ‘다의적 차원’이 서로 대립한다기보다는, 존재의 다의적 차원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학문 분야들 중에 실증적 학문들이 속합니다. 문제는, 그 실증적 학문들이 종종 자기 분야를 넘어서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한다는 점이고, 하이데거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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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된 글입니다. 상당부분 동감이 되기도 하구요. 인용하신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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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한다."라는 진술에서의 '존재'는 "차불휘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에서의 '존재'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그리고 신의 존재는 어떤 방식의 존재인가요?

여담으로 질문을 하나 더 하자면, 존재 명제 ∃ (n : ℤ), ∀ (m : ℤ), n + m = m + n = m에서, 정수 n이 존재하는 방식은 앞의 두 사례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철학이나 신학을 안 배운 사람들은 "참나무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도적으로 많은 이들이 서로 거의 비슷하게 이해하는 '참나무의 존재 방식'이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신의 존재 방식은 사람마다 너무 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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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방식'이라는 용어가 다소 형이상학적인 표현이라 오해를 낳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을 따로 떼어 놓으니 저 말이 마치 마치 스콜라 신학에서 제시된 위격의 다섯 가지 개념 '탄생할 수 없음', '아버지됨', '친자관계', '숨 쉼', '발현'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이네요;;)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기술되거나 판단될 수 있는 대상만으로 존재를 한정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하이데거는 "참나무가 존재한다."라는 진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신은 ~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적극적인 신학 진술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물리학이 존재/비존재의 기준이 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1) "철학이나 신학을 안 배운 사람들은 "참나무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라는 주장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딱히 거부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들이 굉장히 광범위하기 때문에, 나무들을 범주화하는 방식에 따라 "참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하기는 하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요.) 다만, 저로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논의를 세분화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2) "압도적으로 많은 이들이 서로 거의 비슷하게 이해하는 '참나무의 존재 방식'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엇이 그런 존재 방식인지는 실증적 탐구의 대상이 될 것이지만요. (심지어 현상학에서도 이런 존재 방식을 찾아내고자 하는 작업을 '본질 직관'이라고 부릅니다.)

(3) "신의 존재 방식은 사람마다 너무 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물론, 종교현상학자들 중에서는 신이나 종교적 경험에 관해서도 일정한 보편적 패턴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요.

그러나 우리가 세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존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단일한 기준을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주장에 대해 동의하는 것과 하이데거의 논지에 동의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인 것으로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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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다만 존재의 다의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아래의 두 물음에 자세히 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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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아마 그 고민은, 하이데거 존재론의 범위를 넘어서, "신은 존재한다."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신학자들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네요. 여기에도 여러 가지 대답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기독교 철학자들은 물질적 대상의 존재 방식과 신의 존재 방식을 완전히 구분하기도 하고, 다른 철학자들은 '보증된 믿음(warranted belief)'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서 그 두 대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적어도 인식론적으로는 동일한 층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죠.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 주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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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제가 여유가 더 생기면 신의 존재 방식에 관한 여러 철학적 주장을 살펴보고 싶네요.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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