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아주 명료하지만 크립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이 책이 곧 번역된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역자는 이윤일 선생님이라고 하네요. 저는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윤일 선생님의 페이스북에 이 책 내용 중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정리해 놓은 게시물이 있어서 관심이 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에 대한 데리다의 평가인데요.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아주 명료한 반면, 크립키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네요. 해당 부분을 직접 찾아 보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자신이 "매우 진지하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의 그라마톨로지가 언어분석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인정한다(see S. Wheeler 2000: 2). 게다가, 그는 자신이 비트겐슈타인 같은 "후기-분석" 철학자조차 결코 읽고 관계 맺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차 문헌에서 잘 증명된, 그의 작품과의 어떤 유의미한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W]hile Derrida says he is "very serious" and one can readily accept that his grammatology involves something like linguistic analysis, he admits that he found Kripke’s Naming and Necessity bafflingly opaque (see S. Wheeler 2000: 2), and that he never found himself able to read and engage with even a "post-analytic" philosopher like Wittgenstein, despite some significant parallels with his work that are well attested to in the secondary literature. (p. 39)

이 부분에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서, 인용된 사무엘 휠러의 Deconstruction as Analytic Philosophy라는 책을 다시 찾아 보았죠. 여기에 관련 내용이 있네요.

우리는 분석철학을 정의하기 위한 다음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명료한 글쓰기. 그러나 이 기준은 우리의 훈련 상태에 상대적이다. "분열을 가로지르는 소통"에 대한 관심에서, 나는 데리다에게 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의 복사본을 준 적이 있다. 내가 거의 투명하다고 생각하는, 절대적으로 명료하고 훌륭한 텍스트를 말이다. 데리다는 그가 전에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였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그는 하이데거가 매우 명료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크립키가 명료하게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분석철학자이다. 당신이 하이데거가 명료하게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대륙철학자이다.

One might suggest the following criterion for defining analytic philosophy: clear writing. This criterion, however, is relative to one's training. In the interest of "communication across a schism," I once gave Derrida a copy of Saul Kripke's Naming and Necessity, which I regard as a nearly transparent text, absolutely clear and brilliant. Derrida said he had tried to read this before but had not been able to understand what was going on. In contrast, he said, Heidegger was very clear. So: You are an analytic philosopher if you think Kripke writes clearly; you are a continental philosopher if you think Heidegger writes clearly. (p. 2)

두 가지 포인트에서 재미있더라고요. 하나는 데리다가 비트겐슈타인이나 크립키의 맥락에서 자주 독해되는 것과 달리 정작 데리다 자신은 그 두 인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철학자에게는 크립키보다 하이데거가 훨씬 명료할 수 있다는 점이네요.

확실히, '명료성'이라는 건 철학적 전통에 따라 굉장히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대학원 초년생 시절에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다지 명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네요. 콰인도 그랬고요. 뭐,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딱히 명료하게 느껴졌던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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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륙철학 학계에서는 분석철학 기준의 명료함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되게 흥미로운 단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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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90년대 이후에 영어권에서 출판된 대륙철학 관련 논문이나 단행본을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글을 깔끔하게 잘 쓰더라고요. (아마, 로티를 비롯한 이전 세대 학자들의 공헌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국내에서는 유럽에서 '찐' 대륙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 많다 보니, 좀 더 전통적인 대륙철학에 가까운 텍스트가 일반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어권 스타일의 대륙철학 글들을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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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영어권에서만 분석철학 스타일의 글을 요구하나요? 신기하네요. 전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결국엔 대륙철학자들도 그 시대에 철학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 이런 체계들을 만들어냈다. 그 사람들도 지금 분석철학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과 비슷한 문제들을 머릿속에 갖고 있고, 그걸 풀기 위해 이런 체계들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철학사/대륙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현대에 분석철학이 풀려고 하는 문제들에 기여를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분석철학자들에게 닿게 글을 써야한다. 철학적 문제들에 기여를 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철학이 아닌 독문학으로 가야하는 것 아닌가?" 등과 같은 말이었거든요. 물론 따옴표 안에 넣긴 했지만 verbatim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륙철학이 아닌 독일철학으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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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유학파가 아니라서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 다만, 국내에서는 아직 좀 더 전통적인 형태의 대륙철학 강의나 텍스트가 더 많다는 점은 확실해요. 아마 유럽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유학하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도 모르죠. 단 자하비 같은 요즘 현상학자들이 글 쓰는 걸 보면 정말 깔끔하긴 하더라고요. 이분은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교수라 지역적으로는 '유럽권'인 걸 보면, 유럽도 미국식 글쓰기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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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네요. 또 제가 알기로는, 조지 오웰이 나오면서 영어권 학계 전체에 큰 변화를 줬다고 해요. 그 후로 꼭 철학뿐만이 아니라, 법학을 제외한 모든 학계에서는 최대한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를 선호하게 됐다고 하네요. 학계의 목표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지, 아름답게 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정신인 것 같아요. 조지오웰이 1900년대 초충반에 활동했던 걸 생각하면, 1900년 후반대에 가서야 그런 정신이 유럽으로 넘어갔다, 이런 식의 예측도 가능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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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주제네요. 예전에 후기의 글('동일성과 차이')들을 통해서 하이데거를 접하고는 정말 손사래를 쳤었는데, 한참 뒤에 '존재와 시간'을 읽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명료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하이데거를 완전히 다시 봤었어요. 물론 그 텍스트 자체가 워낙 많은 내용들을 밀도있게 다루어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의 것들을 포함하여 온갖 생소한 어휘들이 분석되는 등 짐짓 어지러울 수 있는 논의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논증을 천천히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경험이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철학적 글쓰기의 모범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당장 떠올려보자면 그보다도 저에게는 오히려 Timothy Williamson의 글이 훨씬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분석철학적 명료함과 대륙철학적 명료함이 구별될 수 있다면 어떤 철학(사)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사실 엄밀한 논증에 입각한 논리적 글쓰기는 약간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당장 후설이나, 혹은 조금 더 뒤로 가자면 칸트나 볼프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요 (진정 그 내용이 명료하고 엄밀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그러한 명석함을 갖추고 있지 않나 싶기는 합니다). 헤겔도 '정신현상학'이나 '논리의 학' 본문의 문체는 끔찍하지만, 일례로 '논리의 학' 서문이나 서론, 그리고 신기하게도 본문 내에서도 Anmerkung은 무척이나 명료하게 적혀 있거든요 (그냥 제 느낌입니다.....). '엔치클로페디'도 그런 면에서는 정말 읽기가 수월했구요. 만악의 근원인 저 '사변적 명제'가 무엇인지는 더 탐구해보아야 할 주제일 듯합니다만, Intelligibility를 기준으로 삼아서도 한 저자가 그토록 상이한 문체를 동시에 구사한다는 사태는 새삼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적어도 20세기 초반 이래 대륙철학판에서 '로고스'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제기되고 이후로도 철학적인 호응이 꾸준히 잇따른 뒤에, 분석철학적 명료함은 사실 그쪽에서는 불가능한 것, 혹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논리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심오한 진리는 대체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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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재와 시간』이 '명료'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더라도 굉장히 '깔끔'하고 '체계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철학적 글쓰기의 모범"이라고 하신 것도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저한테는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과 『그라마톨로지』가 꽤나 명료한 글이었어요. 대학교 2학년 때 한 학기동안 『그라마톨로지』 강독 수업을 들었고, 3학년 때 같은 교수님께 『존재와 시간』 강독 수업을 들었는데, 저는 『그라마톨로지』가 훨씬 잘 이해되더라고요. 또, 그 뒤에 읽게 된 『목소리와 현상』은 더 잘 이해되었고요. 비록 데리다도 하이데거처럼 후기로 가면 글을 난해하게 쓰게 되지만, 적어도 전기 저작들은 정말 '분석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썼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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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은 정말 괴롭던데, 오히려 그 글들이 명료하게 느껴지셨다는게 대단하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이 되긴 했지만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읽을 때의 충격(과 분노)이 아직 새록새록하거든요 ㅋㅋㅋㅋㅋㅋ...

여담이지만 학부 때 그런 강독 강의들을 들을 수 있었다는게 정말 부럽습니다. 언급하신 것과 같은 글들을 혼자 파헤치다보면 정말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면벽수련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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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자로 불리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글이 읽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명료함 그 자체를 문제시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푸코와 데리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미국의 주디스 버틀러도 글의 난해함으로 악명 높은데, 그 점에 대해 저자 자신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젠더 트러블』의 비판자와 옹호자 모두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는 것에 주목했다. [...] 문법이 사고, 특히 사고 가능한 것 자체에 부과하는 규제를 고려해볼 때, 공인된 문법이 급진적 관점을 표현하는 최고의 전달수단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그러나 문법을 비틀거나 진술상의 의미에 꼭 필요한 주어-동사의 필수요건을 암시적으로 문제 삼는 형식은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는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 형식은 독자에게 더 많은 수고를 하게 하고, 때로 독자들은 이런 요구 때문에 불쾌감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쾌감을 겪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라'는 합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불평은 지적인 삶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쩌면 이같은 언어적 어려움을 경험함으로써 파생되는 어떤 가치가 있지는 않은가?"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개정판 서문,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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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영향을 줬다’라기 보단 당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명료한 글쓰기를 요구하는 방향이었기에 조지 오웰 같은 글쓰기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가 등장하고 그러한 작가들에 의해 간단명료한 글쓰기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가속화된 것이 아닐까 하네요. 조지 오웰을 서고에도 러셀의 책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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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사견입니다만, 콰인의 글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리 '명료'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 러셀의 글쓰기와도 비슷한 느낌인데, 고아한 필치를 자랑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요?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이 비슷한 느낌을 <존재와 시간>을 읽을 때에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 모두 현대 이전 '고전식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에 그런 공통된 느낌을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결국 각자가 '명료하다'고 믿는 필치는 그 시대/세대에 따라 상대적인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데, @Virtuoso 님이 말씀하신 티모시 윌리엄슨이 어느 인터뷰에서 대략

요즘 젊은 철학자들 보면 우리 세대나 선배 세대들보다 평균적으로 글을 더 명료하게 잘 쓴다

는 요지의 언급을 한걸 보고서 '요즘 세대 철학자들 글쓰기가 더 명료하다'는 저의 인상이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윌리엄슨 본인의 글도 @Virtuoso 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빡세죠 ... @Raccoon 님이 번역 연재하고 계시는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를 처음 읽고서 '아니, 이 양반이 이렇게 재미지게 글을 쓰기도 한다고?'라고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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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 제 사견을 한번 더 얹자면, 세계 대전 이전 영국(과 미국) 철학자들의 문체가 상대적으로 "더러운" 것에는 사립 학교에서 열심히 배웠던 고전 그리스어-라틴어 그리고 수사학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W.D. 로스처럼 영국 출신 유명한 고대 철학 연구자들의 글이 전 참 읽기 까다로웠습니다.)

(2) 그리고 상대적으로 요근래 영미 철학 논문의 문체가 깔끔해진 것은, 전 비-영어권 학자들이 영미 학계에 진입하고 활동하면서부터라 생각합니다. (일종의 크레올화라고 해야할까요?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탄생하는 크레올어는 굉장히 문법적으로 단순하고 쉬운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철학자라면 독일어권 출신인 카르납이나 폴란드계인 타르스키가 있을 것이고 (이 두 사람의 영문 논문을 읽었다면 좀 명확해질텐데 전 아쉽게도 읽어본 적이 없네요.) 당장 정확히 생각나는 것이라면 나이지리아 출신 소설가이자 문학 비평가인 치누아 아체베가 있네요. 아체베의 영어 문체는 정말 단순하고 간결한 편입니다. 펑유란의 영문책도 읽기가 쉬운 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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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댓글 쓰신 분들이 지적하셨듯이, 확실히 서양 철학자들의 문체는 고전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칸트는 비판기 이후에도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라틴어로 사유했단 말이 있고, 헤겔은 고대 희랍어로 사유해서 그토록 난해한 문체가 생겨났다고 하죠. 다들 아시겠지만, 번역어도 괴랄한 '즉자 대자적'(an und für sich) 같은 표현은 재귀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희랍어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하죠. 하이데거의 문체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독일고전철학의 문체를 외계어 취급한다고 합니다. 러셀은 귀족 출신답게 매우 우아하고 고상한 영어 문체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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