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 수학철학에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튜링 논쟁과 비트겐슈타인-괴델 논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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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도 모순을 충분히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실례로, "도가도비상도" 같은 도가철학의 수많은 구절들을 들 수 있겠네요.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감각질에 대해 "something도 아니고 nothing도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도 형식논리적으로는 모순이죠.

제 주장은 (a) "'철학자'가 모순을 유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b) "'모순을 유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철학자'가 있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의미론을 성립시키려는 대다수의 기획들에서 확인되고요. 제가 보기에, 이 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철학자들 중 상당수는 "일상언어는 의미가 있다."와 "일상언어는 의미가 없다."라는 상반되는 두 입장 사이에서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크립키 이후로 다시 언어철학에 대두된 '비존재의 역설' 같은 것을 떠올려 보세요. "주어가 비존재를 지칭하는데도 어떻게 의미가 성립하는가?"라는 문제가 아직도 언어철학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 비존재 지칭 문장이 (i) 일상 언어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 (ii) 지칭 이론으로 보면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논의가 제가 비판하는 것들입니다.

(2)

비트겐슈타인이 삼위일체를 언급하긴 하였지만, 직접 이 문제에 대해 해설은 하지 않았으니 그가 정확히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논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삼위일체는 무슨 '신비'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길 만한 이론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이론이라면 당연히 삼위일체도 일종의 형이상학으로 비판받아야겠죠. 하지만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를 주장한 건,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 않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과 성령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뒤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숨은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4세기 경에 이르러 '삼위일체론'으로 정리된 거죠. 이런 신학적 의미는 아무런 초논리적 신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위일체의 신학적 의미가 망각된 상황에서야 (혹은 신학적 의미를 좋지 않은 공식 속에 어거지로 담으려는 상황에서야) "하나는 셋이지만, 하나는 셋이 아니다." 따위의 이상한 형이상학적 정식화가 등장하는 거죠.

(3)

전제를 하나 빼서 유의미하게 형이상학을 성립시킬 수 있다면 저는 그 입장을 딱히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형이상학이 딜레마와 모순 상황에서 어떤 전제도 뺄 수 없어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종교'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저는 형이상학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만 알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더 좋은 예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프레이저의 종교학을 들 수 있겠네요. 비트겐슈타인은 프로이트와 프레이저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작업에서 잘못된 생각들만 걷어내면 유용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동의하였습니다. 형이상학도 바로 이런 지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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