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쓴 글에 대한 연장선상입니다. 위의 글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a) 비유와 비유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은 '언어적 의미'와 '비언어적 심상', 이 두 가지를 인지-처리하는 능력이 교차되어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b) 다른 하나는 의성어/의태어에 관한 짧은 감상이었지요.
본 글은 (a)와 연관된 생각들은 좀 더 밀고 나아갈 예정입니다.
(2)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이라는 표현은 '유의미'한 동시에 '모순'적입니다. 예를 들어, '날개가 달린 말'이라는 표현은 마찬가지로 유의미하지만, 문제가 있죠.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날개가 달린 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날개가 달린 말'을 쉽게 '상상'(imagin)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무수히 많은 '날개 달린 말'이라는 이미지를 보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그 이미지가 '날개 달린 말'이라는 점을 쉽게 인지합니다.
한편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쉽게 상상할 수도 없죠.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도무지 (시각적으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3) 어떤 의미에서 이는 '언어적 의미'와 '비언어적 심상'이 구분된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이 문제는 다른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왜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은 '비언어적 심상'이 없는 것일까요? '각이 네 개'와 '삼각형'이라는 두 '비언어적 심상'이 일종의 '모순'인 셈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어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굉장히 고전적인 예시(로 생각나는 것)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빨강이면서 파랑인 공이다." 이 공은 다른 가정을 하지 않는다면, 쉽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빨가면서도 파랑 공이라니. 이 역시도 '빨강'/'파랑'이라는 비언어적 심상이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4) 사실 이 문제를 해석하는 다른 방법도 존재합니다. '각이 네 개인, 심각형'은 그 정의에서부터 서로 모순입니다. 삼각형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각이 세 개'라는 것이니깐요. 즉 '언어적 의미'의 차원에서도 모순인 셈이죠. (하지만 무엇을 '정의'한다는 게 어떤 확정적인 경계가 구획될 수 있을까요?)
(I) 중간 정리
'날개가 달린 말' - 유의미/언어적 의미가 모순이 아님/비언어적 심상이 모순이 아님
'각이 네 개인, 삼각형' - 유의미/언어적 의미가 모순됨/비언어적 심상이 모순됨
'이 점은 빨강이자 파랑이다.' - 유의미/언어적 의미가 모순되지 않음/비언어적 심상이 모순됨
이 세 표현의 차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6) 이 문제를 '가능 세계'와 연결해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살짝 들긴 했습니다.
우리는 '날개 달린 말'이 있는 가능 세계는 상상해 볼 수 있지만,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이 있는 가능 세계나 '점이 빨강이면서도 파랑'인 세계는 상상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가능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언어적 의미 - 명제와 연관된 것이 아닌 일종의 '비언어적 심상'에 대한 직관에 의존한다는 의미일까요?)(사실 가능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쥐뿔 수준이라서 말하기가 어렵네요.)
(7) 아니면 '픽션적 존재자'에 관한 논의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어 보입니다. '픽션적 존재자'는 왜 단순히 '유의미하지만' 지칭되는 대상이 없다고 여겨지는 '부정'(negation)과 구분되는 것일까?
부정 표현, 즉 '없음'에 대해서 우리는 그 언어적 의미는 알지만, '비언어적 심상'에 대해서는 떠올리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제가 도교 문헌을 번역하면서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무는 뭘까요? '무가 아님'은 또 뭘까요? "'무가 아님'이 아님"은 또 뭘까요? 이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굉장히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의미를 안다는 것은, 아이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처럼, 외부 세계에서 주어진 정보를 [어느 정도 자신의 기준에 맞게] 받아드리는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우리가 형이상학적 범주들을 납득할 때처럼요.) 하지만 픽션적 존재자에 대해서는 우리는 직관적으로 어떠한 '비언어적 심상'을 (우리가 실제로 지각한 적이 없더라도) 가질 수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부정 표현'이나 접속사 등의 문법적 단어들, '각이 네 개인, 삼각형'은 모두 언어적 의미를 지니지만, '비언어적 심상'은 가지지 못하므로, '픽션적 존재자'가 아닌 셈입니다. 이 생각을 확장해보면, 이것들은 어떠한 지칭과는 전혀 무관한, 오로지 언어적 의미의 '표현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들인 셈이지요.
(8) '픽션적 존재자'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도덕적 픽션주의'로 이어지는 듯하다. '좋다/옳다' 등의 술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적으로 도덕적 픽션주의보다는, 표현주의를 선호하는 편이다. '좋다/옳다'는 나에게 감탄사나 비방 표현과 같은 범주에 있는 셈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메타윤리학적 입장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