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겔주의는 '현상/사물 자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자 한 칸트의 시도가 심각한 철학적 문제에 빠진다고 비판합니다. 한편으로,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결코 알 수 없는 '사물 자체'를 상정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사물 자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입장 사이의 모순은 종종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aporias concerning the "thing-in-itself")'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2) 이러한 문제는 초창기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로부터 지적되어 소위 '두 세계(two worlds)' 이론과 '두 관점(two perspectives)' 이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늘날의 칸트 해석 논쟁에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사물 자체' 개념이 지닌 문제를 지적한 인물은 야코비였습니다.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은 '야코비의 딜레마(Jacobi's dilemma)'라는 이름으로 사물 자체 개념이 지닌 한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 야코비의 딜레마: 우리의 감성을 촉발시키는 대상은 현상(appearances)인가 사물 자체(things in themselves)인가? 야코비는 그 대상이 사물 자체일 수 없다고 논증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범주를 사물 자체에 적용하는 활동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대상은 현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현상은 자신이 (이른바) 유발한 바로 그 경험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칸트의 체계가 비일관적이라고 결론내린다.*
즉, 칸트는 우리의 인식을 촉발시키는 대상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가 인식을 촉발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촉발'이란 현상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대상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가 인식을 촉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촉발'이란 인과의 범주가 적용되는 현상의 영역에서만 성립합니다.)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도는 모순을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야코비는 칸트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나는 사물 자체에 대한 가정 없이는 칸트의 체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 나는 그 가정을 가지고서는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Jacobi, Werke, vol. II, p. 304)
(3) 헤겔주의는 칸트가 '사물 자체'라는 불필요한 형이상학적 대상을 상정한 나머지 잘못된 모순에 빠졌다고 지적합니다.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는 애초에 우리의 인식과 동떨어진 대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발생하지조차 않습니다. "왜 우리가 굳이 '사물 자체'라는 이상한 대상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 바로 헤겔주의가 제기하는 근본적 의문입니다. 헤겔주의는 사물 자체를 다음과 같이 바라봅니다.
- 사물 자체: 우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여하튼 인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기는 하는 대상
헤겔주의는 칸트가 사물 자체에 대해 해명하는 방식이 종교인들이 '신'에 대해 해명하는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평가합니다. 가령, 우리는 종교인들이 '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종종 접하곤 합니다.
- 신: 우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여하튼 인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기는 하는 분
인식의 영역 너머에 결코 알 수 없는 대상을 상정한 채 다시 인식의 영역 속에서 그 대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입장은 모순에 빠질 뿐입니다. 애초에 '알 수 없는 대상'을 상정해버릴 경우 그 대상을 알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맙니다. 따라서 헤겔주의는 "여하튼 사물 자체가 인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긴 한단 말이야!"라는 주장이 대단히 공허하다고 지적합니다.
(4) 소위 '헤겔주의'라는 이름을 지닌 진영은, 상이한 강조점을 내세우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동떨어진 실재를 부정합니다. 가령, 분석철학에서 헤겔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 철학자 중 한 명인 로티는 '직관적 실재론(intuitive realism)'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실용주의자는 이런 것[직관적 실재론]을 공허하다고 여긴다. 실제로, 실용주의자는 '주관적인 것(the subjective)'에 관한 네이글[직관적 실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많은 담론들을 언어의 그물망 한 가운데 있는 빈 공간 주위에 선을 그리는 행위로, 그러면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뭔가가 있기는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행위로 여긴다.(Rorty, Consequences of Pragmatism, p. xxxvi)
마찬가지로, 대륙철학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헤겔의 철학을 새롭게 독해하고자 하는 지젝 역시 실재가 우리에게 비밀처럼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오히려 그는 카프카의 『심판』 제9장에서 등장하는 문지기와 시골 사람의 이야기를 비틀어 우리에게 아무런 실재도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비밀'이라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즉 오랫동안 기다리고 난 후에 시골 사람은 버럭 화를 내며 문지기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이 나쁜 놈아, 넌 마치 어떤 커다란 비밀을 향한 출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듯이 행세하는구나. 문 뒤에 비밀이라곤 없고, 이 문은 오직 나를 위해서, 오직 내 욕망을 잡아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 말이야.' 그러자 문지기가 그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그것 보쇼, 이제 당신이 진짜 비밀을 알아냈지 않소. 문 뒤엔 오직 당신의 욕망이 끌어들인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