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론의 두 가지 측면: 형이상학적 유명론과 초월론적 유명론

Ⅰ. 들어가는 말

보편자 논쟁은 주로 문장의 재기술 가능성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모든 문장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있다고 보는 철학자들은 유명론을 지지하고, 어떤 문장은 보편자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 없이는 의미가 설명될 수 없다고 보는 철학자들은 보편자 실재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문장의 재기술 가능성이 보편자의 존재나 부재를 곧바로 정당화한다는 생각은 논리적 비약이다. 본고는 우선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중심으로 보편자 실재론이 유명론에 제기하는 핵심적 비판을 요약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유명론’은 보편자 실재론에 비해 엄청난 이론적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고 지적할 것이다(Ⅲ). 마지막으로.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받아들이더라도 언어 독립적 대상의 존재까지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초월론적 유명론’1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할 것이다(Ⅳ).

Ⅱ. 보편자 실재론의 도전

속성이나 관계에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문장이 과연 개별자에만 개입하는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있는지는 보편자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물론, 상당수의 문장이 개별자에만 개입하는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가령, “지혜는 플라톤의 특징이었다.”라는 문장이 “플라톤은 지혜로웠다.”라는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보편자 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도 동의한다(Jackson, 1997: 89 참고). 문제는 보편자에 개입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이해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 단칭어를 포함하는 몇몇 문장들과 추상적 대상에 대한 양화를 포함하는 문장들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문장들이다. 보편자 실재론은 두 종류의 문장들을 바탕으로 ‘지시 논증(reference argument)’과 ‘양화 논증(quantification argument)’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논증을 제시한다.

1. 지시 논증

프랭크 잭슨(Jackson, 1997)은 추상적 단칭어를 포함하는 몇몇 문장들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문장들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될 경우 진리값에 변화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즉, 문장에 사용된 추상적 단칭어가 보편자를 지시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추상적 단칭어를 개별자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여 억지로 재기술하고자 하는 시도는 종종 문장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가령,

(1) 빨강은 색깔이다.
(1′) 빨간 모든 것은 유색이다.

고전적 유명론은 (1)과 같은 문장이 (1′)과 같은 문장으로 재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기술은 일반화될 수 없다. 특별히, (1)과 같은 문장이 (1′)과 같은 문장을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1′)과 같은 문장이 반드시 (1)과 같은 문장을 함축하지는 않는다(Armstrong, 1978: 60 참고). 가령, 빨간 모든 것이 지닌 위치를 ‘L’이라고 해보자. 이제 ‘빨간 모든 것’은 ‘L-위치한 모든 것’과 공외연적이다. 여기서 “L-위치한 모든 것은 유색이다.”라는 문장은 참인 반면, “L-위치함은 색깔이다.”라는 문장은 거짓이다. 즉, “L-위치한 모든 것은 유색이다.”가 참이라는 사실로부터 “L-위치함은 색깔이다.”가 참이라는 사실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두 문장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2) 빨강은 파랑보다 분홍과 유사하다.
(2′) 빨간 모든 것은 파란 모든 것보다 분홍인 모든 것과 유사하다.

(2)와 같은 형태의 문장을 (2′)과 같은 형태의 문장으로 재기술하려는 고전적 유명론의 시도 역시 성공적이지 않다. (2)가 참이면서도 (2′)가 거짓인 상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별히, 색 이외의 다른 요소를 비교의 기준으로 고려하는 상황에서는 (2′)의 진리값이 (2)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빨간 공, 파란 공, 분홍인 코끼리를 서로 비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빨간 공은 분홍인 코끼리보다는 파란 공과 더 유사하다. 따라서 (2)는 개별자와 관계없이 참인 반면, (2′)는 개별자가 지닌 어떤 요소를 비교의 기준으로 고려하는지에 따라 거짓이 되기도 한다. 두 문장은 서로 논리적 동치 관계가 아니다.

2. 양화 논증

반 인와겐(van Inwagen, 2004)은 추상적 대상을 양화하는 문장들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는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지닌다.”와 같은 형태의 관용구가 사용된 문장들이 속성의 존재에 개입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장들은 표준적 양화 언어로 재기술하더라도 속성을 정의역으로 갖는 속박 변항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지닌다.”와 같은 형태의 관용구가 사용된 문장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속성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다. 가령,

(3) 거미는 곤충의 몇몇 해부학적 특징을 공유한다.

여기서 ‘해부학적 특징’이라는 표현은 속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적절한 재기술이 제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3)과 같은 문장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부학적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의 존재에 개입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사실은 (3)을 표준적 양화 언어로 번역한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3′) 어떤 x에 대해서, 곤충은 x를 지니고, 거미는 x를 지니고, x는 해부학적 특징이다.

(3′)은 (3)을 재기술하는 표준적 양화 언어이다. 여기서 (3′)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속박 변항 x의 정의역에는 ‘해부학적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추상적 대상의 영역이 대응한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은 변항의 값이다.”(Quine, 1961: 15)라는 존재론적 개입의 공식에 근거하여 (3′)이 ‘해부학적 특징’이라는 속성의 존재에 개입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3′)의 원문인 (3) 역시 속성의 존재에 개입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유명론은 이러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 (3)을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가령,

(3″) 거미는 해부학적으로 유관한 어떤 방식으로 곤충과 비슷하다.

그러나 유명론은 (3″)을 받아들일 수 없다. (3″)은 다시 ‘해부학적으로 유관한 어떤 방식’을 양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비슷할 수 있는 방식”이나 “사물들이 유사할 수 있는 측면”과 같은 형태의 관용구를 포함한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방식’이나 ‘측면’에 대응하는 추상적 대상이 속박 변항의 값으로 요구된다. (3″)과 같은 형태의 재기술은 속성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추상적 대상에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3)과 같은 형태의 문장을 (3″)과 같은 형태의 문장으로 재기술하려는 시도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Ⅲ. 형이상학적 유명론의 한계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이 모든 종류의 유명론을 논파한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고전적 유명론이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유명론은 논란이 되는 문장들을 재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켜 보편자 실재론의 도전에 대응할지도 모른다. 유명론이 제시할 수 있는 재기술의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지 않는 이상, 보편자 실재론이 유명론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두 입장 사이의 논쟁은 보편자 실재론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되지 않는 언어를 제시하고, 유명론이 해당 언어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전개된다. 보편자 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조차 유명론적 재기술의 가능성이 원리적으로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가령, 반 인와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이 입장[보편자 실재론]을 위한 충분한 옹호(adequate defense)를 제시하길 희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입장을 위한 충분한 옹호란 그러한 문장들에 대해 유명론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재기술을 위한 모든 가능한 후보들을 검토하는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고, 나는 그렇게 하길 희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명론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재기술에 대한 질문은, 만일 대답되어질 수 있다면, 오직 연장된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로서만, 곧 수많은 철학자와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잉크를 포함하는 과정의 결과로서만 대답될 것이다.(van Inwagen, 2004: 118-119)

그러나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이 쟁점이 되는 상황에서는 유명론이 보편자 실재론에 비해 근본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유명론은 보편자 실재론이 제기한 물음에 수동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즉, (a) 두 입장 중에서 입증 책임은 유명론에게 있다. 보편자 실재론은 적어도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둘러싼 논쟁에서만큼은 아무런 입증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b) 속성이나 관계가 사용된 일상적 언어는 무한히 많다. 당연하게도, 보편자 실재론은 무한히 많은 문장들로부터 유명론에 대한 반대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게다가, (c) 유명론은 체계적 의미론을 제시해야 한다. 무한한 반대 사례가 체계적 의미론을 통해 어떻게 일관적으로 재기술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유명론적 명제가 단순한 임시방편이 되어버리고 만다. 각각의 문제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입증 책임의 문제: 보편자 실재론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 속성이나 관계에 대한 문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애초에 문제 삼지 않는다. 속성이나 관계에 대한 모든 문장이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되어야 한다고 먼저 주장한 진영은 유명론이다. 유명론은 속성이나 관계를 존재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해야 하고, 속성이나 관계에 대한 문장을 개별자에 대한 문장으로 재기술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하며, 유명론적 재기술에 대해 제기되는 모든 반대 사례에 대답해야 한다. 적어도 일상적 언어를 재기술하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입증 책임이 전적으로 유명론에 놓인다(Armstrong, 1978: 19 참고). 이러한 상황은 보편자 실재론에게는 근본적으로 유리하고, 유명론에게는 근본적으로 불리하다. 즉, 보편자 실재론이 유명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단지 하나 이상의 반대 사례만 제시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유명론이 보편자 실재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반대 사례를 유명론적 문장으로 재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무한한 반대 사례의 문제: 유명론은 이미 제시된 반대 사례들과 앞으로 제시될지 모를 다른 모든 종류의 반대 사례들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이러한 반대 사례는 끝없이 많이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여 속성이나 관계에 대한 문장을 무한히 많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유명론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반대 사례 이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기초적 물리 속성들이 있다.”나 “획득 형질은 절대 유전되지 않는다.”와 같은 형태로 속성을 양화하고 있는 문장들에 대해서도 유명론적 재기술을 제시해야 한다(Armstrong, 1997: 105-106 참고). 더 나아가,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 이외에도) 다른 어떤 새로운 반대 논증이 등장하더라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한한 반대 사례가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한, 유명론이 재기술을 위해 짊어져야 하는 엄청난 이론적 부담을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체계적 의미론의 문제: 각각의 반대 사례에 대해 단순히 각각의 재기술을 발견해내는 것만으로는 유명론을 옹호하기에 부족하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모든 반대 사례에 대해 재기술을 발견해내더라도 유명론이 설득력을 지닌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임시방편으로 재기술을 발견해내는 작업은 어느 이론에서든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유명론이 진정으로 일상적 언어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재기술을 발견해내는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유명론은 일상적 언어를 일관된 방법에 근거하여 재기술하는 체계적 의미론을 제시해야 한다(Lewis, 1999: 16-17 참고). 일상적 문장과 유명론적 재기술 사이의 동치 관계는 사실상(de facto)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상(de facto) 성립해하는 것이어야 한다(Hofweber, 2006: 162 참고). 따라서 유명론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무한한 반대 사례에 대해 무한한 재기술을 제시하는 작업조차 훨씬 넘어선다. 무한한 반대 사례에는 무한한 재기술이 존재하고, 무한한 재기술은 체계적 의미론에 근거하여 도출되며, 체계적 의미론은 개별자에 대한 언어로만 성립된다는 대단히 과감한 주장들을 모두 정당화할 때에야 비로소 유명론은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둘러싼 논쟁에서는 유명론이 정당화해야 하는 사안들이 보편자 실재론이 정당화해야 하는 사안들에 비해 훨씬 많다. 일상적 언어에 대한 유명론적 재기술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명론적 재기술이 엄청난 입증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유명론적 원칙은 정작 유명론적 재기술에서는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속성이나 관계 같은 추상적 대상에 대한 이론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으려는 입장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문제에서 더 큰 이론적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보편자의 형이상학이 단순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려는 입장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종류의 더 복잡한 형이상학을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형이상학적 유명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Kügler, 2017: 273-274 참고). 유명론적 재기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보편자 실재론 이상으로 대단히 과감한 주장들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초월론적 유명론의 대응

그러나 유명론이 반드시 지시 논증이나 양화 논증과 대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의 재기술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곧바로 보편자의 존재나 부재에 대한 논쟁으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편자’가 언어 독립적 대상을 의미하는 상황에서는 두 논증으로부터 보편자를 도출하려는 입장이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즉,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조차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는 문장들, 우리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재기술들, 우리가 타당하다고 여기는 추론들에 의존하여 성립한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기 위해서라도 특정한 언어적 실천(linguistic practice)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적 실천에서 ‘속성’이나 ‘관계’라는 대상이 자연스럽게 가정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언어적 실천 바깥에 ‘보편자’라는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속성이나 관계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초월론적 유명론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은 모두 일종의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을 전개하고 있다. 특별히, 지시 논증과 양화 논증을 둘러싼 논쟁에서 ‘최선의 설명’이란 ‘최선의 재기술의 방법’이다. 즉, 두 입장은 일상적 언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기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하고, 상대편이 성립시킨 재기술의 방법에 대해 반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하고, 반대 사례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재기술의 방법을 다시 발견해내고자 한다.2 우리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지닌 논리적 성격으로부터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이 모두 인정해야 하는 이론적 한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연역 불가능성: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에서는 전제의 참으로부터 결론의 참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즉, 가설 H가 참일 경우 관찰된 현상 O가 참이 된다고 하자.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관찰된 현상 O가 실제로 발생하였다는 사실로부터 그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 H가 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O, H⊃O, ∴H”를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지닌 일반적 형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이 연역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최선의 가설을 성립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가설이 참인 것으로 반드시 보증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에 따라 진행되는 보편자 논쟁에서는 재기술의 방법들이 연역적으로 참인 것으로 보증될 수가 없다.

관찰 의존성: 무엇을 관찰된 현상 O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들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 따라 도출된 가설 H는 관찰된 현상 O에 대한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거부될 수도 있다. 가령, 보편자 논쟁에서 관찰된 현상 O에는 일상적 언어 현상이 대응한다. 우리가 일상적 언어에 대해 어떠한 직관을 지니고 있는지, 일상적 언어 속에 어떠한 문장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일상적 언어를 어떠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 등이 재기술의 방법에 대한 평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가설 다양성: 관찰된 현상 O를 설명하는 가설 H는 수없이 다양할 수 있다. 가설들 사이의 비교를 위해서는 설명력, 정합성, 단순성 등 다른 외적 기준들을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들을 도입하더라도 각각의 가설들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갖는 상황에서는 어떤 가설이 다른 가설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위를 지닌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전개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이론이 “O, H⊃O, ∴H”에서 가설 H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뿐이다. 보편자 논쟁에서 역시 일상적 언어에 대한 다양한 재기술의 방법들이 원리적으로는 얼마든지 최선의 설명으로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보편자 논쟁에서 서로 대결하는 입장들은 ‘연역 불가능성’, ‘관찰 의존성’, ‘가설 다양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어떠한 입장도 자신이 제시하는 재기술의 방법이 일상적 언어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할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연역 불가능성). 오히려 각각의 입장이 일상적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관찰 의존성)과 각각의 입장이 추론을 전개하는 방식(가설 다양성)에 따라 각각의 입장이 존재론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대상은 달라진다. 가령, 속성이나 관계 같은 추상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주장 역시 일상적 언어로부터 전개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 의존하고 있다. 일상적 언어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 이해 없이는 추상적 대상의 존재를 도출할 수조차 없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존재론적 개입은 언어적 실천에 상대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초월론적 유명론(transcendental nominal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Kügler, 2017: 274-275 참고). 언어적 실천은 존재론적 개입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2. 초월론적 유명론은 사소한 입장인가?

누군가는 초월론적 유명론이 사소한 입장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가령,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이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통해 특정한 대상의 존재나 부재에 개입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는 별달리 대단한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언어적 실천이라는 사실로부터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통해 상정된 대상이 언어적 대상이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추론은 언어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더라도 추론을 통해 도출된 대상은 언어 밖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어적 실천과 대상을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가령, 다음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4) 빨강은 형태이고 연장이다.
(4′) 빨간 것은 형태화되어 있고 연장되어 있다.

지시 논증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4)가 (4′)으로 번역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세상의 모든 빨간 것이 형태화되어 있고 연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빨강 자체는 형태도 아니고 연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자에 대한 문장만 사용하는 외계인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생명체는 (4′)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4)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자에 대한 문장밖에 갖고 있지 못한 외계인들에게 (4′)이 참이라는 사실로부터 (4)가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빨간 것’, ‘형태화된 것’, ‘연장된 것’과 구별되는 ‘빨강’, ‘형태’, ‘연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개별자에 대한 문장을 중심으로 수행되는 외계인들의 언어적 실천 바깥에 ‘보편자’라는 언어 독립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가 (4)와 (4′)의 차이를 언어적 실천 바깥에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언어적 실천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외계인들에게는 (4)와 (4′)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설명 자체가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즉, 지시 논증은 우리가 (4)를 일상적 언어에서 거짓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4)와 (4′)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은 우리의 언어적 실천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가리켜 보이지 못한다. 우리는 (4)와 (4′) 사이의 차이를 외계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언어 바깥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대상에 의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외계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나는 단지 [나의 언어적 실천 속에서] 이렇게 하고 있어.”(Wittgenstein, 2009: §217)일 뿐이다. ‘빨간 것’과 구별되는 ‘빨강’이라는 대상은 우리의 언어적 실천에서만 유의미하게 지칭된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적 실천 속에서 (4)와 (4′)를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빨간 것’이라는 대상과 ‘빨강’이라는 대상 사이의 차이가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3. 초월론적 유명론은 과격한 입장인가?

누군가는 초월론적 유명론이 과격한 입장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가령, 속성이나 관계가 언어적 실천 바깥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구성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적 속성들, 인과적 제약들, 실재의 저항들, 발견되지 않은 대상들, 물리적 법칙들을 너무나 쉽게 무시해버린다. 적어도 우리는 세계가 우리의 기대, 희망, 바람, 예측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연 초월론적 유명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에게 종속시키는가? 가령,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5) 밝혀지지 않은 기초적 물리 속성들이 있다.

양화 논증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5)가 속성의 존재에 개입한다고 지적한다. (5)는 “어떤 x에 대해서, x는 밝혀지지 않았고, x는 기초적이고, x는 물리적이고, x는 속성이다.”와 같은 형태로 재기술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월론적 유명론은 양화 논증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부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즉, 어떠한 속성이 우리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초월론적 유명론에서도 얼마든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속성’과 ‘보편자’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5)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3

속성: 일상적 언어가 대개 속성의 존재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언어적 실천에서 속성을 수없이 많이 지칭한다. 여기서 ‘속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추상적 대상이란 결코 우리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존재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5)와 같은 형태의 문장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언어적 실천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이상, ‘밝혀지지 않은 기초적 물리 속성’이라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언어적 실천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거나 완전히 다른 언어적 실천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5)를 이야기하면서도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자기모순일 뿐이다. 속성에 대한 문장을 포함하는 언어적 실천은 우리에게 속성의 존재에 개입할 것을 강제한다.

보편자: 일상적 언어가 보편자의 존재에 반드시 개입해야만 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여기서 ‘보편자’라는 용어는 언어적 실천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언어 독립적 대상을 의미한다. 보편자 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보편자’라고 일컬어지는 언어 독립적 대상이 존재해야 속성에 대한 언어가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정반대이다. 즉, 우리는 보편자의 존재를 미리 확인한 다음에야 (5)와 같은 문장을 언어적 실천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5)와 같은 문장을 언어적 실천에서 이미 받아들인 다음에야 속성의 존재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제 받는다. 우리가 ‘밝혀지지 않은 기초적 물리 속성’에 개입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5)를 언어적 실천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보편자는 (설령, 이러한 대상이 언어적 실천 바깥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강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초월론적 유명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자의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아니다. 대상의 존재가 언어적 실천에 의존한다는 사실로부터 대상의 존재가 우리 마음대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언어적 실천이 우리가 개입해야 하는 대상의 존재를 강제한다. 물론, 우리의 언어적 실천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진화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교육학 등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언어적 실천이 생물학적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사회적 교육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등은 열린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가 이미 특정한 언어적 실천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아무 문장에나 동의할 수 없다. (가령,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서는 “빨강은 형태이고 연장이다.”라는 문장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특정한 언어적 실천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대상의 존재를 자의적으로 구성할 수 없다. (가령,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서 “밝혀지지 않은 기초적 물리 속성들이 있다.”라는 문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속성의 존재에 개입해야 한다.) 우리의 자의성을 제한하는 것은 보편자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적 실천인 것이다.

참고문헌

Armstrong, D. H. (1978) Nominalism and Realism,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Armstrong, D. H. (1997) “Against ‘Ostrich Nominalism”, Properties, D. H. Mellor and A. Oliver (e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01-111.
Devitt, M. (1997) “’Ostrich Nominalism’ or ‘Mirage Realism’?”, Properties, D. H. Mellor and A. Oliver (e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93-100.
Hofweber, T. (2006) “Inexpressible Properties and Propositions”, Oxford Studies in Metaphysics, Vol. 2., D. Zimmerman (ed.), Oxford: Clarendon Press, 155-206.
Jackson, F. (1997) “Statements about Universals”, Properties, D. H. Mellor and A. Oliver (e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89-92.
Kügler, P. (2017) “Ontological Relativism as Transcendental Nominalism”, Realism – Relativism - Constructivism, C. Kanzian, S. Kletzl, J. Mittererand and K. Neges (eds.), Berlin: De Gruyter. 269-278.
Lewis, D. (1999) “New Work for a Theory of Universals”, Papers in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8-55
Quine, W. V. O. (1961) “On What There Is”,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2nd edition, New York: Harper & Row, 1-19.
van Inwagen, P. (2004) “A Theory of Properties”, Oxford Studies in Metaphysics, Vol. 1., D. Zimmerman (ed.), Oxford: Clarendon Press, 107-138.
Wittgenstein, L. (2009)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th edition, G. E. M. Anscombe, P. M. S. Hacker and J. Schulte (trans.), Malden, MA: Wiley-Blackwell.

  1. ‘형이상학적 유명론’과 ‘초월론적 유명론’이라는 용언는 퀴글러로부터 차용한 것이다(Kügler, 2017 참고).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초월론적 유명론은 퀴글러가 주장하는 초월론적 유명론에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는다. 가령, 필자는 (a) 형이상학적 유명론이 약화된 형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는 퀴글러의 지적에 동의하고 (b)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퀴글러의 비판에도 동의하며, (c) 존재론적 상대주의를 통해 유명론을 해석할 수 있다는 퀴글러의 주장에도 동의하지만, (d) 선개념적인 것에 대한 퀴글러의 옹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2. 물론, 재기술을 시도하는 쪽은 대부분 유명론이고, 반대 사례를 제시하는 쪽은 대부분 보편자 실재론이다. 그러나 보편자 실재론도 종종 “a는 F이다.”라는 일상적 언어를 “a는 F-ness를 가진다.”와 같은 형태로 분석하기도 한다(Devitt, 1997: 97 참고).

  3. ‘보편자’와 ‘속성’이라는 용어의 구분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루이스처럼 예화(instantiation)와 풍부성(abundance)을 기준으로 두 용어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철학자도 있다(Lewis, 1999: 10-13 참고). 그러나 데빗처럼 두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철학자도 있다(Devitt, 1997: 93 참고).

5개의 좋아요

막 필레보스 콜로키움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글을 읽게 되니 저 개인에게는 너무나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언어 독립적인 보편자의 존재를 믿느냐의 문제는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와 관련있지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는 논변으로 증명되는 것이기보다는 개인의 지평에 달린 문제 같아보입니다. 플라톤이 이런 사실을 다 알고 프로타르코스와 대화할 때 먼저 확인하게 하는 게 너는 이데아를 받아들이니 안 받아들이니 였거든요. 이에 프로타르코스가 깝치면 쳐맞는 수가 있다고 대답하고 나서는 이후 대화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플라톤이 이런 놈은 말하자면 유명론자니까 이 놈이랑은 끝없이 변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필레보스를 아페이론으로 끝낸 것 같기도 합니다. 덕분에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네요. 좀 더 정형화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마워용~

2개의 좋아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몇몇 부분들에 대해 단견이나마 제 생각을 간략히 남겨보고 싶습니다.

사실 1990년대가 아닌 2020년대 현재에 (잭슨, 데빗 등 스타일의) 보편자 논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콰인주의 메타형이상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재론, 반실재론 진영을 막론하고 말이죠. (사실 콰인 자신조차 잭슨, 데빗 등의 논쟁에 얼마나 호의적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본문의 논증에 대해 콰인주의 측에서는 이하와 같이 답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씀해주신 내용은 잭슨, 반인와겐 등이 따르는 콰인 전통의 (메타)형이상학적 입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에서 콰인은 '-이 존재한다'라는 말의 올바른 쓰임을 판단하는 준거는 우리가 쓰는 언어로부터의 '의미론적 상승(semantic ascent)'에서 비롯된다고 논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존재론적 개입' 개념이 '언어적 실천에 상대적'이라는 언급은 사실 해당 전통에 대한 반박이라기 보다는 해당 전통과 의견의 일치가 이뤄지는 부분 같습니다.

콰인주의자가 결별을 고할 지점은 바로 이 곳일 것 같습니다. 왜냐면 (4)를 옹호하는 콰인주의 실재론자는 (4)를 포함하는 이론이 (4')를 포함하는 대체 이론에 비해 이론적으로 더 강력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4)와 (4')의 이론적 강력함을 견주는 단계에서 '보편자'에 대한 개입 여부는 아직 따지지 않습니다. '의미론적 상승'은 최선의 강력한 이론이 선택된 다음에나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IBE를 통해서 (4)를 추론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4')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4)에서는 설명해낼 수 있다고 볼 겁니다. 이를테면 '빨강', '형태', '연장' 등 각 속성 간의 법칙적 관련성은 (4)에서는 직접적으로 설명되지만, (4')에서는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4')가 아닌 대안적인 재서술 방안을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마 '형이상학적 유명론'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4')를 이해못하는 외계인들에게 우리의 콰인주의자는 "저런, 더 강력한 이론을 파악할 수 없다니 안됐네"라고 반응할 것 같습니다. 이는 '무리수'를 이해하지 못했다던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에 대해 지금의 우리가 보내는 시각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돌아오자면, 이는 다시금 콰인주의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4)와 (4')를 견주는 과정, (5)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모두 보편자의 존재를 미리 상정하지 않습니다. 콰인주의의 관점에서 존재론에 대한 논의는 최선의 언어(즉 콰인에게 있어서는 1차 언어)와 최선의 이론이 결정된 뒤, 그 다음에야 '의미론적 상승'을 통해 이뤄질 뿐입니다.

2개의 좋아요

헤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심지어 신학자들까지) 모두에 대한 선생님의 독해는, 이데아·보편자·본질·물자체 등 전통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일체 거부와 함께 "놀이가 놀이하는" 데 집중하고 해석학을 존재학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실용주의 사유기획에 일관되게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글의 결론을 보면서도 콰이어티즘이 니힐리즘으로 떨어지진 않을까 여전히 우려가 남긴 하지만, 선생님의 천착이 풍성한 의미의 열매를 맺어가기 바랍니다.

거의 딴소리에 가까운 응용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실재·유명 토론할 때마다 제가 들고 싶어하는 반례인데요, 개개의 자기라는 유일한(unique) 존재는 초월 유명론에 의하면 "빨강"과 마찬가지로 없는 것일까요? 가령 '오바마'는 '오바마임 자체'가 아닌 '오바마로 이름 붙여진 것(몸)'을 지칭하는 수단일 뿐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기엔 우리가 우리의 누구임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잘 살고 있고, 그렇기에 애초에 일상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어딘가 동일하게 있는 보편자인 나가 없다면 개별자인 내 몸을 촉발시켜 말하게 하고 있는 이 일관된 주체는, 유명론에 의하면 과연 누가 되는 걸까요? 바꿔 말해, 언어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그 불가사의한 "우리"의 존재는 어디서 보장되는 걸까요?

깊은 문제의식과 노력이 담긴 알찬 논고에 감사드립니다!

1개의 좋아요

댓글로 좋은 의견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1)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저도 동의합니다. 특별히, 저는 윤리학에서 말씀하신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마크 롤랜즈라는 철학자가 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생각엔, 자신의 삶을 도덕적 이유에 따르게 하느냐, 이기적 이유에 따르게 하느냐 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합리적인 선택이다.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아 규정적인 선택이다. 즉, 어떤 이유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유형의 인간이 되고 싶은가 하는 그 인간상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이다.(마크 롤랜즈,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SF영화로 보는 철학의 모든 것』, 신상규·석기용 옮김, 책세상, 2014, 262-263쪽.)

(2) 콰인주의 실재론

사실, 저는 이 글을 적으면서 제가 콰인의 '존재론적 상대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초월론적 유명론'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 퀴르거는 이 입장이 결국 (콰인과 퍼트남이 제시한) '존재론적 상대주의'라고 지적하기도 해서요. 여하튼, 말씀해주신 것처럼, 최선의 언어나 최선의 이론이 결정된 뒤에야 의미론적 상승을 통해 존재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콰인주의적 지적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우리의 언어와 외계인의 언어 중 무엇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최종적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가 속성에 대해서도 언어 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구인인 우리에게는 속성이 너무나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4)를 이해 못하는 외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요. 물론, 저는 속성에 대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구인'이기 때문에, 외계인들을 향해

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강력한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언어가 정말 다른 이론에 비해 객관적으로 강력하다는 근거를 대보라고 누군가가 요청한다면, 저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처럼

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언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생겨먹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언어를 강력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거죠.

(3) 자아의 동일성

저는 자아의 동일성 문제에 있어서 데넷의 입장을 지지해요. '나'라고 지칭되는 대상이 어딘가에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다중 도안(multiple draft)'의 연속을 '나'라고 부른다는 입장이에요. 더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누구인지는 매 순간 끊임없이 쓰여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거죠. "집에서 편하게 늘어져 있을 때의 나가 진정한 나야!", "배고파서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의 동물적 본성이 나야!",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의지적 모습이 나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에요. 이런 입장들은 '진짜 나'라는 숨겨진 대상이 어디에 존재하고, 나머지는 다 '거짓된 나'인 것처럼 평가하지만, 사실 '나'라는 존재는 저 모든 것들을 관통해서 매 순간 다시 쓰이고 있다는 게 제가 지지하는 견해에요.

2개의 좋아요

(3)번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에서 계속 등장하는 '매순간'이란 표현이 선생님 사유의 키워드라는 느낌이 듭니다. '존재와 행위의 변증법'으로 요약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요. 그 의의를 수긍하면서도, 그러한 다원주의적(?) 자아관 속에 여전히 최상위 결정자로서의 행위자(agent)는 누구인가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유일신의 통치"와 종교다원주의 간의 융화가 까다로운 주제인 것처럼요. 매 순간 내가 새롭게 쓰이고(passive) 있다면, 그렇게 쓰는(active) 내가 결국 있다는 것 아닐까요? 게으르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운동하러 가는, 그 변혁과 자기고양을 일으키는 의지의 주체는 분명 경험상 존재하면서도 다중의 개별자 지평에 속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주체가 어딘가에 없다면 결국 우리는 물리적 화학작용에 의해 자기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상투적 음모론으로 귀결되는 듯 하거든요. 이렇게 유명론이 갖는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도 계속 많은 고찰을 보여주시길 기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