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이상한 공상들

(1)

이 글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2)

이 글을 몇 가지 글에 대한 감상을 토대로 한다. (감상이라 한 이유는 제대로 읽었다 하기 좀 그렇기 때문이다.) SEP의 메타 인식론, 메타-형이상학에 대한 핸드북들, 초내포성, 자연 언어 존재론.

(3)

우연치 않게 초내포성(hyperintensionality)에 대한 데이빗 차머스의 발표 ppt를 읽었다. 의미론에서 지칭이 같더라도, 내포 - 명제의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 알 것이다. (예컨대, 저 별은 금성이야. 저 별은 샛별이야. 이 두 문장은 진리값이 같지만, 명제의 내용은 다른 듯하다.)
의미론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가능 세계 의미론은 가능 세계를 도입해, 명제가 성립하는 가능 세계 각각의 지칭이라는 형태로 이 내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와 같은 해결책으로도 해결되지 않아 보이는 현상이 초내포성이다. 초내포성은 지칭도 같고, 명제의 내용도 같은데 명제가 가진 인지적 중요성(차머스의 표현이다)이 다른 경우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레가 있다.

(a-1) 2+2 = 4
(a-2) 1+3 = 4
(b-1) 사건 A는 40프로 확률로 일어난다.
(b-2) 사건 A는 60프로 확률로 일어나지 않는다.
(c-1) 슈퍼맨은 슈퍼맨이다.
(c-2) 슈퍼맨은 클라크 켄트다.

a-b-c 쌍들은 각각 같은 지칭에 같은 명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각 문장의 인지적 중요성은 달라 보인다.

(4)

(아직 공개하지 않은 미완성의 서문에서) 스테판 스티치는 "어떤 지칭이 옳은 지칭인지 구반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미국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를, 다른 이름인 '바락 오바마'로 부르든, '부락 오바마'로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결국 지칭이 이름표라면, 지칭과 이름표의 관계는 (여러 가지 것들을 구분한다는) 기능만 잘 작동하면 되지, 이름표의 내용은 별 문제가 없지 않는가?

문제는 고유 명사를 넘어가면 생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자연 언어를 생각해보자. 색채는 대표적으로 모호성, 즉 보더라인 케이스가 생기는 현상으로 알려져있다. 예컨대, 우리는 빨강과 노랑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자연 언어 A는 이 색채 스펙트럼을 빨강-노랑으로만 나눈다. 자연 언어 B는 이 색체 스펙트럼을 빨강-주황-노랑으로 나눈다. 오렌지를 본다면, A 언어 화자는 (오렌지의 색깔이 어느쪽에 가까운지에 따라) 빨강이나 노랑으로 말하지만, B 언어 화자는 주황이라 말할 것이다.

테드 사이더는 어떤 개념 구분이 더 "옳은지" 직관적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장하는 듯하다. 지금과 같은 색채 구분에서, 이와 같은 직관은 쉽게 작동하지 않아 보인다. 언어 B가 언어 A보다 '개념을 세밀하게 분할하지만' 두 언어 모두 '개념의 분할이 정합적이라는 점에서' 모두 옳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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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초내포성과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다. 자연 언어 A의 화자들은 빨강/노랑에 다른 행동 규범을 가진다 해보자. 자연 언어 B의 화자들은 빨강/주황/노랑에 각기 다른 행동 규범을 가진다 해보자.

그러면 같은 오렌지를 보더라도, 자연 언어 A의 화자들과 자연 언어 B의 화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연 언어에 따라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명제를 가지고, 이 명제들은 각기 다른 인지적 중요성을 가진 상황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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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자연 언어 존재론(natural language ontology) 같은 분야와 결합되면, 더 파괴적인 결과에 도달하는 듯하다. 자연 언어 존재론은 자연 언어에서 드러나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개념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과 유사하다.)

(그런게 있다면) 형이상학적 사실과 다르게, 자연 언어를 통해 주장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구분은 자연 언어마다 꽤 다른듯하다. 사건(event)와 개체(object)의 구분, 리-기라는 구분. 우리는 이 구분을 정확한 명제 값으로 번역할 수는 있지만, 그 번역이 동등한 '자연 언어의 인지적 중요성'을 가지는지는 의문스럽다.

다시 자연 언어 A-B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렌지를 보았을 때, B 언어 화자는 "저건 오렌지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A 언어 화자는 "저건 빨강색이다." 혹은 "노랑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세밀하게 기술해달라 하면, "저건 노랑색에 가까운 빨강색이다." 혹은 "빨강색에 가까운 노랑색이다." 등의 표현이 나올 것이다.

[중간 어딘가에서 엉킨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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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건 B가 아니라 "사건 A가 60프로 확률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겠지요?

아마 말씀하시고 싶은 바가 (a) 초내포성 문제를 통해 지칭과 내용만으로 문장의 인지적 중요성에 대해 판단할 규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적되듯이, (b) 보더라인 문제를 통해 어떤 지칭이 옳은 지칭인지에 대한 규준도 개념의 지칭이나 내용만으로 확정될 수 없고, (c) 상이한 자연 언어들이 포함하는 각각의 형이상학적 개념들 간의 인지적 중요성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일까요?

저도 보더라인 문제를 재밌게 생각하는데요. 예컨대 에스키모들이 눈의 종류를 훨씬 많이 구분해낸다는 것, 폴리네시아인들이 카누타고 태평양 활보하면서 파도의 종류를 세밀하게 구분해내는 것, 또 비슷하게 독일인들이 빵, 방, 팡의 차이를 잘 구분 못하고 우리가 l과 r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등의 문제들이 있지요.
저는 이에 대해서 대충 해당 언어의 사용이 유용할 때 그 언어가 유의미한 것 같아요. 눈도 잘 볼 수 없는 지방에서 에스키모인들의 화려한 구분은 소설같은 얘기와 같을 것 같고, 카누 안 타는 사람들한테는 폴리네시아인들의 지혜가 전해질 수가 없고, 한국어 배울 필요 없는 독일인에게 빵과 방의 차이가 무의미하고, 마찬가지로 외국어 하나 필요없이 살다 죽은 우리 할머니에게 r, l 차이는 헛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는 결국 각 명제의 사용이 일어나는 맥락, 크게는 문화 작게는 직접적인 화용론적 함축들이 이런 '인지적 중요성'을 결정한다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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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글을 읽고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오타를 냈네요 ㅎㅎ. 둘 다 사건 A입니다.

(2)

아무래도 제가 본문에서 '인지적 중요성'이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쓴 듯합니다. 말씀해주신 견해도, 인지적 중요성은 맞지만, 실용적 관점에서 '지식'(혹은 명제)의 인지적 중요성의 차이인 듯합니다. (따라서 제가 초내포성을 말하면서 말한 '인지적 중요성'과는 다른, 하단에 나오는 실용주의적 침범에 해당하는 사례인듯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초내포성에서의 인지적 중요성이 다르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인지적 차이'라 부르겠습니다)는 말은 같은 지칭-같은 명제일지라도, 인지 과정에서 어떠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확률 문장의 경우도, A가 40% 성공한다고 할 때와 60% 실패한다는 문장을 인지자가 접했을때, 인지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믿음의 강도는 다르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둘이 동일한 지칭-명제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

(a) 초내포성에 있어서 인지적 차이와 (b) 보더라인과 지칭의 문제를 저는 하나로 엮어놓았지만, 통상적으로 다르게 파악할 것 같아서 글 중간에 뭉갠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 (a) 초내포성에 동의하는 학자일지라도, (b) 보더라인과 지칭의 문제는 다른 유형의 문제, 즉 명제의 차이가 있는 문제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a)-(b)를 동일 선상에 있는 문제로 보는 듯합니다. 즉 (b) 문제로 인해서 (a) 문제가 발생한다 보는 셈이죠.
어쩌면 이 문제는 명제 단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를 이루는 요소인) 단어(word)나 개념(concept) 단위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i) 어떠한 개념들은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번역한 지식에 대한 분석에도 나와있지만) 물, 빨강, 버락 오바마 같은 개념들은 더 하위의 개념들로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윌리엄슨은 지식-알다 역시 이러한 분석 불가능한 개념으로 봐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이제 이 개념들에게 남는 것은 (ii) 지칭의 역할, 즉 이름표의 역할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이제 스티치의 문제가 끼어드는 듯합니다. (iii) 그렇다면 어떤 지칭이 올바른 기준인 것인가? 그걸 결정할 방법은 있는가? 사이더나 윌리엄슨은 직관이라 말하는 듯합니다. 스티치는 실험 철학을 통해, 여러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직관에 있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과를 내밀죠.

저는 여기에 보더라인 케이스라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스티치를 옹호하면서도 중간의 길로 가는 듯합니다. 즉, 저희는 인간의 직관-합리성에 부합하는 여러 개념-지칭의 분할들을 가질 수 있다는 의견이죠.

제 의견은 형이상학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퀄리파이션이 추가되어야 할 듯합니다.
(iv) 외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자연과학적 분할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론적/자연 언어적 분할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액체와 고체의 구별이 있습니다. 고체는 인간의 현상적 경험에서 단단하고 자신의 형체를 (별다른 외부의 충격이 없으면) 잘 유지하는 물체입니다. 반면 액체는 흐르고 모양이 변하죠. 문제는 과학적 엄밀성을 기하자면, 이 구분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점도라는 개념을 추가해보겠습니다. 점도는 이제 물체를 이루는 물질들이 서로 얼마나 달라붙는지의 정도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체는 점도가 극도로 높고, 액체는 그보다 낮으며, 기체는 가장 낮습니다. 고체 내에서도 점도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액체 간의 점도의 차이는 현상적 경험에서도 직관적이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유리가 '흐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유리는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한 몇 십년의 시간이 누적되면, 인간이 알 정도로 유리가 흘려내리죠.) 즉 유리는 통상적인 돌보다는 점도가 낮은 셈입니다. 이를 고려해보면, 유리는 액체로 분류될 수도 있죠.
[검색해보니, 이건 잘못된 과학적 설명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유리가 아닌 '피치' 같은 이상한 물질이 있으니 설명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가면 개체(object)와 사건(event)의 구분이 있습니다. 사건은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즉 발생하는 일. 개체는 시간상에 계속 존재한는 것이라는 직관적인 구분이 가능할 듯합니다. 문제는 이 직관 역시 인간의 현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모든 개체는 언젠가 사라지죠. 그렇다면, 신처럼 인간보다 영원히 사는 개체의 현상적 경험에서는 (인간의 현상적 경험에 대한 직관에 기반해 분류한) 개체와 사건의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신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살인 사건과 지구의 멸망은 그냥 다 동일한 무언가일 뿐인 셈이죠.

즉, 인간의 직관 - 인간의 직관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자연 언어/자연 언어 존재론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속(즉 현상적 경험 속)에 성립하는 분할, 즉 통속-형이상학/자연학이라 말할 수 있어보입니다. 한편 이와 대비되는 자연과학을 통해 성립하는 자연과학적 분할이 있겠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외부 세계는 연속적이며, 과학적 탐구란 이 개체 간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인식론적 방법을 찾아서 환원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합니다. 물체의 상태의 연속성을 기술할 수 있는 기준인 '점도'처럼 말이죠.)
(예를 추가하자면, 생물학의 철학에서 계속 나오는 종[species]에 대한 것도, 저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분류이지, 정확한 분류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가장 정확한 분류를 하자면, 유전자의 연속성 같은 기준을 세워 연속적으로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두 개념들이 어느쪽으로 환원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다른 '분할'일뿐이죠. 숫자 1-2-3이 있다고 해서, 이를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인) 분수로 환원할 필요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 분할 개념은 오래전부터 제 머릿 속에 있던 것인데, 아무래도 (라쿤님이 지적하셨듯) 정교화하려면 수학을 좀 더 공부해야할 듯합니다.

(4)

명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할 듯한데 ㅋㅋㅋㅋ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겠네요. 설명을 한다면서, 더 거대한 이상한 곳으로 이끌어 가서 죄송합니다. 좋은 코멘트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코멘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Mandala 선생님 글을 읽고 선생님께서

라고 생각하여 확인차 질문했는데요. 다만

고 생각하시는 것은 지금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어나 개념 단위의 차이를 문장이나 명제 단위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현상학적인 체험(Erlebnis)나 하이데거적인 어떤 "열림(Erschlossenheit) 같은 것을 통해 설명해야할텐데, 요즘 제가 Tugendhat를 읽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주관적인 논의 영역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언어를 유의미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어떤 층위에서는 명제로 의사소통해야만 이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초내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이야말로 전통적인 의미론, 그러니까 화용론을 배제한 의미론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아닌가요? 제 예시들을 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만, 제가 의도했던 바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의미가 쓰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x가 40퍼 성공한다" "x가 60퍼 실패한다"는 것이 같은 명제를 지칭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다르다면, 이것은 화용론적 함축의 차이가 아니고 무엇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고견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글들을 따라가는 것이 가끔 벅차긴 하지만 얘기를 나눌 수록 새로운 선생님 생각이 드러나 더 잘 이해는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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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뤄졌던 토론 하나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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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내포성이 저 같이 얼치기로(...)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다룰 만한 주제가 아닌데, 후하게 평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라가시기 벅찬 이유가 제대로 논리적으로 구성된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것이지, @handak 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2)

우선 초내포성이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듯합니다. 수학적 명제의 초내포성과 확률 명제의 초내포성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설명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의미론(semantic)과 화용론(pragmatics)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영역인지도 논쟁적인 부분이지요. 통상 의미론은 '의미'를 다루는 것이고, 화용론은 언어의 '발화 상황'과 관련된 모든 언어적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에, 둘 사이에는 접점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론은 거의 형식 의미론이라는 점 역시 염두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화용론의 발화 수반 행위는 '의미'와는 구분되는 부가적인 것이라 여겨지기에, 의미론 학자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죠. 한편 발화 상황에서 의미가 바뀌는 여러 경우는 때에 따라 의미론의 영역으로 포함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지표사 같은 경우 (형식) 의미론에 완전히 통합되었죠.
한편 말하신 함축은 좀 애매한 지점입니다. 통상 화용론적 함축은 명제가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다른 (명제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인데, 이 경우, 의미론 학자들은 "우리의 할 일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뿐이다."라고 한정 짓기 때문입니다. (다만 화용론쪽에서 할 말도 있는게, 라이칸이 <현대 언어 철학>에서 지적하듯, 매우 길고 복잡한 비유 문장 같은 것들은 일차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함축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듯한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를 구분할 수 없는 경우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의미에는 쓰임이 있다."를 통해 말하시려는 "화용론"이 정확히 어떤 영역의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지표사 같은 맥락의존적 단어들은 일단 아닌 듯하니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용론적 함축도 확률-초내포성에는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통상 화용론적 함축은 명제가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다른 (명제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인데, 이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듯합니다. (확률 문장을 굉장히 긴 비유 문장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남아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합니다. 하나는 발화 수반 효과이지요. 확률-초내포적 문장은 같은 명제이지만 다른 발화 수반 효과를 지닌다 말할 수 있어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언어철학의 영역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비트겐슈타인적 "쓰임"을 언어를 벗어난 "삶"의 영역으로 확장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실용주의적 침범으로 보는 것이지요. 즉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폭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이 관계 속에서 다른 기능을 한다면 다른 의미를 가진다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비트겐슈타인적 "쓰임"은 제 입장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 각기 다른 전제를 모두 포괄하는 입장처럼 느껴집니다. (i) 하위 언어 단위 (문장, 단어 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일종의 전체론(holism), (ii) 언어 활동과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구분할 수 없다는 입장. 아마 이 두 입장을 결합해서 나온 입장이 (iii) 화용론의 차원으로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일 겁니다.)

여기서 다시 복잡한 문제로 돌아옵니다. 초내포성 문장이 가진 인지적 차이가, 명제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의 차이'인걸까요? 아니면 (구분이 가능하다면) 의미와 구분되는 부수적인 차이인걸까요? (예컨대, 확률 문장의 초내포성은 사실 의미의 문제가 아닌 발화 수반 효과의 차이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확률 문장에 있어서는) 발화 수반 효과에 따른 차이로 파악하는 것도 꽤 괜찮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수학 문장의 초내포성은 이러한 발화 수반 효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수학 문장이 '사실의 진실'이라는 발화 수반 효과 외에 다른 효과가 있을까요?)

제가 여기서 시도하려고 했던 것은 초내포성 일반에 대한 해결책이었습니다.

(3)

우선 초내포성을 여전히 의미론의 영역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화용론의 영역으로 보이던 지표사를 형식 의미론으로 잘 소화했듯, 초내포성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제 기억으로는 차머스의 2차원 의미론이 이러한 시도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용을 잘 몰라 이에 대한 평가는 할 수가 없네요.)

아니면 가능세계 중에 모순이 있는 세계를 허용하는 불가능세계를 도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동그란 사각형과 빨간 파란색은 모순이므로 일반적인 가능 세계에서는 둘 다 그냥 거짓일뿐입니다. 하지만 불가능세계를 허용할 경우, 동그란 사각형은 불가능세계 A에서는 성립하고 B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겠죠.)(이 입장들은 그레이엄 프리스트의 초일관 논리 등의 영역과 결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입장은 어쨌든 지칭을 기반으로 발전한 고전적 의미론 중 가능 세계 의미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지요.

(저는 여기에 별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잘 모르거든요.)

(4)

한편 명제보다 하위 단위인 단어/개념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게 제가 선택한 방법이죠. 크게 러셀식 명제-개념 구조를 옹호하는 입장(Soames의 방식입니다.)이나 프레게식(?)의 지향성을 옹호하는 방식(야블로의 방식이죠.)이 있습니다. (이 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해 뭐라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제가 선택한 방식도 이 둘와 (일단 겉보기에는) 동일한 방향입니다. 단어/개념 그리고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서 초내포적 명제의 차이가 발생한다 보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이 개념을 (다른 곳에서도 말했지만) 굳이 준-언어적인 것들만 허용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비-언어적 형태의 개념으로 심적 심상 등이 있겠죠. (당장 눈을 감고 사과를 상상하면 떠오르는 사과처럼요.)

(5)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희가 의사소통을 하려면 명제, 즉 언어 단위로 하겠죠. 저희가 가지는 심적 심상이든 퀄리아든 뭐든 이걸 그 자체로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뭘 지칭하려고 하는지 상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명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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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뒤늦게 윤님이 작성하신 이 글을 보고 메타-형이상학 관련된 내용을 뒤적거리다가 작성한 글이였습니다. 하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