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대단하다!] 두 가지 크로스오버: 이승종의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이승종의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는 시대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철학적 사조를 바탕으로 하이데거의 사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지닐 수 있는 의의를 해명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은 ‘분석적 해석학’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새로운 독법을 통해 유럽의 해석학 전통에 속한 하이데거를 영미의 분석철학 전통에 속한 비트겐슈타인, 타르스키, 콰인, 데이비슨 등과 대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본고는 우선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장을 간략히 요약할 것이다(Ⅰ). 다음으로, 이 책의 중심적 방법인 ‘크로스오버’가 ‘수동적 크로스오버’와 ‘능동적 크로스오버’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활동의 혼합이라고 지적할 것이다(Ⅱ). 마지막으로, ‘능동적 크로스오버’의 필요성이 하이데거의 사유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Ⅲ).

Ⅰ.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현상학의 맥락으로부터 어떻게 등장하였는지를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의 대조를 통해 설명하고(제Ⅰ부), 하이데거의 사유가 당대의 언어철학과 수리논리학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비교를 통해 이야기하며(제Ⅱ부), 이러한 대조와 비교를 바탕으로 하이데거의 사유가 이론철학적 측면(제Ⅲ부)과 실천철학적 측면(제Ⅳ부)에서 오늘날의 진리론과 기술문명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논증한다.1 각각의 장에 담긴 더욱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Ⅰ부는 현상학의 맥락을 중심으로 후설과 전기 하이데거를 대조한다. 후설은 우리 의식의 내용에 대한 탐구와 대상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사조인 ‘현상학’을 성립시켰다. 그는 ‘심리학적 환원’, ‘선험적 환원’, ‘형상적 환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순수하게 주어지는 방식을 기술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외적 대상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괄호 친 상태에서(심리학적 환원) 순수한 의식 체험에만 집중할 때에야(선험적 환원) 비로소 모든 개별적 요소가 제거된 대상의 의미인 ‘본질’ 혹은 ‘형상’을 파악할 수 있다(형상적 환원)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대상의 의미대상의 쓰임이나 대상의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후설의 시도가 허구적이라고 지적한다. ‘환원’을 통해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대상이 언제나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존재한다는 사실(대상의 초월성), 우리가 대상을 결코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지향성의 불완전성),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가 종종 미결정적이라는 사실(대상의 미결정성)이 간과되곤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후설의 현상학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는 존재의 지평을 의식이 구성해낸 추상적 질서 속에 가두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순수의식의 내적 본질과 보편의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거세된 추상과 인공의 세계”(이승종, 2021: 52)라는 지적이 후설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제Ⅱ부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비교를 통해 하이데거의 사유를 분석철학과 연결시킨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환원에 반대하여 대상을 쓰임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 역시 형식언어에 반대하여 의미를 사용의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두 인물은 모두 우리의 인식에서 “인간의 구체적 삶의 상황과 역사적 존재 일반”(이승종, 2021: 86)이 배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철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얼핏 그 자체로는 난해해 보이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비트겐슈타인이 지닌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경우) 20세기 초반의 언어철학과 수리논리학이 지니고 있던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될 수 있다. 즉, 당대의 언어철학과 수리논리학은 의미가 언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 지시, 인과관계 따위로 추상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선입견에 경도된 철학자들은 대응, 지시, 인과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조차 인간의 삶의 지평이 그 배경에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기존의 의미론들의 한계는 그것이 언어에 의한 불러냄 과정보다는 불러냄이 수행되고 난 뒤의 존재자의 지평에서 세계를 언어와 연관지으려 한다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그 이론들은 드러난 전경에만 관심을 쏟을 뿐 그것이 배경과의 총화에 의해 의미를 지님을 간과하였다.”(이승종, 2021: 90)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추상화된 이론 속에서 의미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 당대의 시대정신에 맞서 인간의 삶의 지평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공동전선을 이루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는 언어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을 통해 망각된 고대 그리스의 삶의 경험을 복구시키는 전략을 취한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보다 철학사를 다루는 능력이 더욱 뛰어나다. 이승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사 자체를 꿰뚫는 생생한 역사발굴 작업에 나선다. 그의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역사의 한계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이고 해체적이다. 더구나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아니 철학사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도달할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자신의 해체적, 고고학적 관심을 소급시킨다.(이승종, 2021: 106)​

제Ⅲ부는 진리론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이론철학적 측면을 다룬다. 전통적 진리론은 크게 ‘진리대응론’과 ‘진리정합론’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가지 입장으로 구별된다. 진리대응론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진리정합론은 논리적 정합성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입장은 모두 진리가 인간의 관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진리대응론과 진리정합론의 근본적 문제는 “대응과 정합의 장소에 인간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이승종, 2021: 184) 즉, 무엇이 진리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진실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지와 분리될 수 없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진리’를 강조하는 독특한 진리론을 제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인간의 삶의 지평과 동떨어져서 어딘가에 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진실되고, 적실하고, 확실한 진리는 우리와 무관한 잔리가 아니다.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우리의 삶으로부터 외화外化되는 진리는 그로 말미암아 그 진실성, 절실성, 적실성, 확실성을 잃게 된다.”(이승종, 2021: 190) 오히려 각각의 시대와 문화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진실된 것으로서 드러나는 존재의 모습이 진리이다. 존재가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보여주는 사건이 진리이다. 따라서 존재의 진리는 하나의 고정된 이론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다. 매 순간 우리의 이전 관점이 부정되고 붕괴되는 과정에서 존재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변화하는 일련의 역사적 사태 자체가 ‘존재의 진리’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진리론은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가로지르면서 각각의 시대마다 진리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철학사적 관점에서 해명한다. 이승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존재의 진리의 지평은 초시공간적인 논리적 진공관 속에서 세워진 추상적, 존재자적 구조물이 아니라 역사의 각 시기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상이한 양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해체적 탐구가 온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의 진리의 지평의 생성/변모 과정에 대한 통시적인 계보학적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이승종, 2021: 193)

제Ⅳ부는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실천철학적 측면을 다룬다. 세계를 고정된 이론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플라톤 이후 서양 형이상학의 경향은 오늘날의 기술문명을 낳았다. 현대의 기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이 상정한 이론적 가설과 실천적 목적에 따라서만 규정해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존재의 진리가 망각되고, 역사 속 특정한 시점에서 등장한 자연과학이 세계를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대의 기술을 통해 얼마든지 조종될 수 있는 부품이 되어버렸다. “현대의 기술은 모든 존재자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즉시 가까이 지정된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을 도발적으로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탈은폐되는 존재자들이 그 자리에 현존하는 방식을 하이데거는 ‘부품Bestannd’이라 부른다.”(이승종, 2021: 233) 이제 세계는 현대의 기술이 요구하는 방식대로만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몰아세워지게 되어버렸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주문요청으로 집약시키는 도발적 요청을 ‘몰아세움Ge-stell’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찾고자 했던 현대기술의 본질이다.”(이승종, 2021: 234) 이러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하드웨어(기계) 중심의 기술문명에서 소프트웨어(정보) 중심의 기술문명으로 전환이 일어난 뉴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정보기술을 통해 해석된 세계를 마치 진정한 세계이기라도 한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고, 정보의 과잉 속에 잠식되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생활세계를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뉴미디어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따라잡기 위해 매 순간 발버둥 쳐야 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미디어 기술의 만연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삶의 지평에 대해 성찰하는 ‘인문적 사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Ⅱ. 수동적 크로스오버와 능동적 크로스오버

『크로스오버 하이데거』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하이데거의 사유와 분석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crossover)’이다. 이 책은 엄밀한 텍스트 독해에 근거하여 하이데거의 고유한 사유를 왜곡 없이 해명하고 있으면서도, 분석철학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하이데거의 난해한 언어를 세련된 논증의 형태로 새롭게 체계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수행된 크로스오버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오늘날의 언어철학, 수리논리학, 의미론, 진리론, 과학철학, 기술철학 등에 얼마나 광범위한 통찰을 줄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실, 유럽권의 권위 있는 하이데거 연구자들인 푀겔러, 헤르만, 피갈조차 하이데거의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에만 몰두하여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의의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영어권의 권위 있는 하이데거 연구자들인 호그런드, 로티, 드레이퍼스, 브랜덤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유럽도 미국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이 책이 ‘분석적 해석학’이라는 독법을 통해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의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두 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진 가장 뛰어난 수준의 하이데거 해설들에서조차 이 책만큼이나 엄밀성과 명료성을 모두 갖춘 연구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 책이 내용적 측면에서 크로스오버를 대단히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방법적 측면에서 크로스오버를 다소 애매하게 남겨두었다는 사실은 아쉽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크로스오버’라는 활동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편으로, 이 책은 크로스오버를 우리 사유에 내재된 불가피한 운명으로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크로스오버’란 사유의 과정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지평 융합을 일컫는 이름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크로스오버를 우리 사유가 지향해야 하는 작업으로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이라고도 강조한다. 여기서 ‘크로스오버’란 사유의 과정에서 인위적 노력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목표를 일컫는 이름으로 이야기된다. 두 가지 크로스오버 사이의 세부적 의미와 방법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수동적 크로스오버: 우리의 사유는 본질적으로 ‘크로스오버’라는 성격을 지닌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각각의 시간적 지평을 따라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사유는 매 순간 새로운 형태로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사물이 고정된 형태로 지속하는 과정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사유는 매 순간 새로운 형태로 반복되는 과정에서 동일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반복은 이전에는 없었던 맥락, 관점, 입장, 문제 등을 끊임없이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사유에서 크로스오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간적 지평에서 반복된 사유에는 언제나 새로운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다. “크로스오버는 무책임한 장난질이 아니라 사유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 사유가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의 반복이기 위해서는 크로스오버적일 수밖에 없다.”(이승종, 2021: 19 인용자 강조) 따라서 20세기 초반에 유럽의 해석학 전통에서 활동한 철학자인 하이데거를, 20세기 후반에 영미의 분석철학 전통에서 훈련받은 저자가, 21세기에 한국어로 해설하는 작업에서 크로스오버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석철학을 도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1세기를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국을 맥락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에 대한 모든 독법은 필연적으로 크로스오버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2) 능동적 크로스오버: 우리의 사유가 반드시 ‘크로스오버’라는 이상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하이데거를 비트겐슈타인, 타르스키, 콰인, 데이비슨 등과 교차시키는 작업이 상당히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사유와 분석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가 필연적으로 수행되어야만 하는 연구인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사유를 다른 철학적 전통과 적극적으로 비교하고 대조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누군가는 크로스오버 없이 하이데거를 기존 독법대로 해설하는 것을 선호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크로스오버를 통해 하이데거를 분석적 해석학의 독법대로 해설하는 것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 독법도 그 자체만으로는 당위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 크로스오버를 지향한다. […] 우리는 저마다의 사유를 크로스오버라는 창의적 반복을 통해 새로이 거듭나게 해야 한다.”(이승종, 2021: 19 인용자 강조)와 같은 언명은 다소 의아하게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언명은 분석적 해석학의 독법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독법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어디에서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분석철학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강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2 이 책이 말하는 ‘크로스오버’는 독단적 강령이 아니라 합리적 권유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주장이 어떠한 당위성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적어도,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크로스오버가 왜 (수동적 형태로만 남겨져서는 안 되고) 능동적 형태로까지도 시도되어야 하는지가 이 책 속에서 명시적으로 대답되고 있지는 않다.3

따라서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크로스오버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면서도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이라는 역설에 빠진다. 두 가지 사건이 과연 ‘크로스오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통일될 수 있는 것인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즉, (a) 크로스오버가 사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일 경우 우리가 크로스오버를 인위적으로 일으켜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b) 우리가 크로스오버가 인위적으로 일으켜야 하는 경우 크로스오버가 사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수동적 크로스오버는 (이 책이 분석적 해석학의 독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창의적 반복’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능동적 크로스오버는 (이 책이 분석적 해석학의 독법을 통해 따르고 있는) ‘사유의 불가피한 운명’에 국한되기에는 너무 크다.

Ⅲ. 크로싱 오버 프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유가 매 순간 크로스오버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매 순간 크로스오버되어야만 한다는 역설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는 수동적 크로스오버가 능동적 크로스오버를 요청한다는 사실로부터 하이데거의 사유 자체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모든 독법은 언제나 이미 크로스오버일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의 사유를, 하이데거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이데거의 관심에 따라, 아무런 비교철학적 작업 없이 해설하려는 시도조차 사유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크로스오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크로스오버만으로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의의가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언어놀이’에 매몰되는 연구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해 불가능한 공상인 것처럼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사유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의미 있는 통찰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자신과는 구별되는 다른 사유를 통해 대리되고 보충되어야 한다. 크로스오버를 통해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역설적이게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철학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사유의 불가피한 운명’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수동적 크로스오버뿐만 아니라 능동적 크로스오버까지도 요청하고 있다. 모든 사유가 결국 다른 사유를 통해 대리되고 보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특별히 다른 사유를 통해 대리되고 보충되어야만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즉, 하이데거의 사유에는 근본적 결함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다른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별도의 해설 없이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하이데거의 사유에 능동적 크로스오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입장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고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의 구체적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1) 현상학적 환원: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후설의 방법을 극복하고자 한 하이데거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현존재(Dasein)의 실존론적 구조에 대한 기술로부터 존재론을 성립시키고자 한 전기 하이데거와 철학사에서 일어난 존재사건(Ereignis)에 주목하여 사유를 전개하고자 한 후기 하이데거는 모두 일종의 환원을 수행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언제나 존재자에 대한 서양 형이상학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심리학적 환원), 존재자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선험적 환원), 고정된 이론 뒤편에 놓여 있는 인간의 삶의 지평을 생생하게 그려내는(형상적 환원) 작업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유가 현상학이라고 생각하였다(Heidegger, 2008: 192-193 참조).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해석이 존재한다(이남인, 2004: 465-492; 윤동민: 2021: 403-405 참조). 심지어, 이 책 역시 하이데거의 사유가 철저하게 현상학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이승종, 2021: 266 참조). 따라서 현상학에 머물러 있고자 하면서도 현상학의 핵심적 방법인 환원을 거부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은 자기논박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하이데거 자신의 현상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2) 이분법: 현상학적 환원이 의문시된 상황에서는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수많은 구분들이 무너지고 만다. 무엇이 서양 형이상학의 선입견 속에서 전개되는 사유이고 무엇이 존재사건에 대한 적절한 응답으로부터 전개되는 사유인지를 나눌 수 있는 엄밀한 기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존재적/존재론적, 실존적/실존론적, 비본래적/본래적, 테크네/피지스, 소크라테스 이후/소크라테스 이전과 같은 하이데거의 이분법은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는 암묵적 전제로부터 성립한다. 우리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이론 뒤에 놓인 인간의 삶의 지평을 생생하게 조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더 근본적인 층위와 덜 근본적인 층위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 환원을 비판하는 하이데거가 어떠한 근거로 자신의 구분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인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a)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환원을 정말로 포기하였을 경우 하이데거는 이분법을 상정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b) 하이데거가 이분법을 상정하였을 경우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환원을 포기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하이데거의 이분법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는 어렵다.

(3) 신의 관점: 하이데거는 어쩌면 자신의 이분법을 성립시키기 위해 일종의 ‘신의 관점’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형이상학적 위치를 은밀하게 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존재적’ 층위와 ‘존재론적’ 층위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두 층위를 모두 벗어난 곳에 하이데거의 시선이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이데거가 ‘실존적’ 지평과 ‘실존론적’ 지평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은 현존재를 공중에서 내려다보듯이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4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이라는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정작 현존재의 실존 바깥이지 않은가? ‘테크네’와 ‘피지스’라는 구분은 문명이 아직 기술에 의해 오염되기 이전의 원초적 상태를 마치 직접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정한 상태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소크라테스 이후’와 ‘소크라테스 이전’에 대한 평가는 에덴 이후와 에덴 이전에 대한 신학적 평가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지 않은가? 즉, 하이데거의 사유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삶의 지평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인간의 삶의 지평 자체를 다시 대상화하여 그 지평 바깥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인간의 삶의 지평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삶의 지평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위치를 다시 상정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러한 혐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이데거의 사유를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향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조차 우선 하이데거의 사유에 제기되는 혐의를 극복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크로스오버가 단순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능동적 크로스오버는 하이데거의 사유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으로부터 발생한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그 자체만으로는 자신에게 제기되는 혐의에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능동적 크로스오버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에 근본적 결함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통찰들은 여전히 남는다. 가령, (a) 대상의 의미가 대상의 쓰임이나 대상의 맥락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 (b) 대응이나 지시나 인과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조차 인간의 삶의 지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 (c) 진리가 인간의 삶의 지평과 무관한 추상물이 아니라는 사실, (d) 기술문명에서 발생한 허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인문적 사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통찰들이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에 담긴 수많은 통찰들을 유지한 채로 하이데거로부터 새로운 사유를 향해 건너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승종,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수정증보판, 동연, 2021.

윤동민, 「서평과 답론」, 이승종,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수정증보판, 동연, 2021, 399-406.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이유선, 「『크로스오버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이승종,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수정증보판, 동연, 2021, 362-370.

Heidegger, M., 「현상학에 이르는 나의 길」, 『사유의 사태로』, 신상희/문동규 옮김, 길, 2008, 179-194.

Tugendhat, E., Tra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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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Ⅴ부는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를 둘러싼 이승종과 국내/외 철학자들 사이의 토론을 수록하고 있다. ‘크로스오버’라는 이 책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a) 유럽 해석학과 영미 분석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뿐만 아니라 (b) 서양 학계와 우리 학계 사이의 크로스오버 및 (c) 국내 철학자들 사이의 크로스오버 역시 다루고 있는 제Ⅴ부는 이 책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론’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간결한 요약이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본고에서는 제Ⅴ부를 따로 정리하지는 않겠다.

  2. 투겐트하트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분석철학의 맥락에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히 철학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다소 강한 주장을 종종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존재’의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이 오직 언어-분석적 철학의 틀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Tugendhat, 1982: x)

  3. 이유선 역시 이승종에게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이데거를 단순히 분석철학의 개념으로 명료화하는 작업을 넘어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에도 이승종이 응답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이유선, 2021: 366). 본고의 용어를 사용할 경우 하이데거를 명료화하는 작업은 ‘수동적 크로스오버’이고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에 응답하는 작업은 ‘능동적 크로스오버’라고 할 수 있다.

  4. 실제로, 이승종이 ‘존재적/존재론적’이라는 표현과 ‘실존적/실존론적’이라는 표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삽화는 현존재의 구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그려져 있다(이승종, 2021: 75, 각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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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이렇게 좋은 책이었는지 지금에야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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