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질문

1 정신현상학을 읽으려 하는데, 칸트, 피히테, 셸링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합니다. 칸트의 경우 인식되는 건 현상이고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했다는 부분 정도만 알고 있으며, 피히테의 경우 '자아'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부분만 알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어도 될까요.? 칸트, 피히테 셸링은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해설서를 같이 찾아볼 계획입니다.

  1. 정신현상학 한국어 번역본 (임석진 역, 한길사)에 대한 말이 많은데, 어떤 분께서는 원문에는 있는 부분이 빠진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그리고 임석진 역본으로 정신현상학을 읽어도(연구 목적이 아니라면) 문제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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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2에대해. 애초에 정신현상학 번역본은 임석진 선생님것(1, 2)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않나요? 물론 그리고 저 또한 임석진 선생님의 것으로 공부하였는데, 큰 문제없었습니다.
1에대해. 칸트, 피히테, 셸링의 해설서를 읽을 것이 아니라,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같이 읽는게 더 나으실겁니다. 애초에 목적이 정신현상학 독서이면, 칸트, 피히테, 셸링과 헤겔 사이의 상호관계는 해설서를 통해 접하시는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칸트, 피히테, 셸링 각각의 해설서를 보면서 정신현상학을 독서한다는 것은 무리한 계획이 아닐까싶네요. 저같은 경우엔 한자경 선생님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와 ' 강순전 선생님의 '정신현상학의 이념'을 같이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구요. 제가 공부할땐 없었는데, 지금은 전대호 선생님의 '정신현상학 강독'있으니 같이 참고해보시면 좋을듯합니다.

1.칸트, 피히테, 셸링과 관련한 지식을 알면 알수록 헤겔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지만, 『정신현상학』이 목적이라면 원전과 관련 이차 해설서를 읽으면서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적어도 피히테와 셸링은 (독해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정말 필요할 때만 찾아보면서 공부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만은 간략하게나마 철학적 논의 구도를 알고 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오트프리트 회페의 『임마누엘 칸트』(이상헌 역, 문예출판사, 2004) 추천합니다. (이 책도 처음부터 다 꼼꼼히 읽으실 필요 없고, 칸트 철학의 윤곽만 파악하신 후에는 접어두고 헤겔 읽으시면서 필요할 때마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원문이 워낙 난해하기도 하고, 그 판본은 임석진 선생님이 헤겔을 '아주 쉽게' 읽히도록 할 목적으로 번역을 하셔서 의역이 굉장히 많습니다(첨가된 부분이 아닌 빠진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문과는 달리 번역자에 의해 임의로 단락 구분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세부적인 구절 해석이 아니라 『정신현상학』의 얼개를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 없다고 봅니다. 그 외에 임석진 선생님이 1982년에 번역한 지식산업사 판이 있는데, 좀더 원문에 충실하고 적절히 의역도 첨가해서 활용하기에 괜찮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도 학술적으로 무가치한 번역이라고 보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뭐 올해 이종철 선생님의 새 번역본이 나온다고 하니, 기다렸다가 그걸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헤겔과 관련해서 한 분이 질문을 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 『정신현상학』 번역본과 헤겔 해설서 관련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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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저는 임석진 교수님의 『정신현상학』 번역(특히, 한길사에서 나온 2006년 번역)이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이 번역을 통해서는 마치 헤겔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스럽다는 입장이에요.

물론, 헤겔 전문 연구자를 목표로 헤겔을 공부한다면야 당연히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 불만스러운 점들이 많을 것이고, 또 당연히 독일어 원문을 바탕으로 헤겔을 읽어야겠죠. 그렇지만 저는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으로도 헤겔 철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봐요. 실제로, 제가 서강대 대학원을 다닐 당시에 헤겔 연구 수업을 개설하신 교수님께서는 헤겔을 전체적으로 독해하기 위해 수업에서 독일어 원문이나 영어 번역이 아니라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을 장려하시기도 하셨고요. (번역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그때마다 알려주셨죠.)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은, 원문을 생략했다기보다는, 원문을 자의적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번역으로 많이 지적되어요. 가령,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서 가장 자주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죠.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G. W. F. 헤겔, 『정신현상학』, 제1권, 한길사, 2006, 220쪽.)

여기서 '융통자재(融通自在)'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대자적이면서 대타적인'이라고 번역되어야 하고, '상생상승(相生相勝)'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즉자대자'라고 번역되어야 해요. 그런데 임석진 교수님은 헤겔의 철학을 무리하게 동양철학과 연결지으려고 하셔서, '융통자재'와 '상생상승'이라는 용어들을 자의적으로 끌어들이신 거죠.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은 단순히 번역이 '맞냐/틀리냐'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내용에 대한 임석진 교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일 것이냐/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장이 1:1 직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건 무리에요. 물론, 대부분의 국내 헤겔 연구자들이 동양철학과 헤겔의 철학을 연결지으려는 임석진 교수님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지만 (그리고 저 역시도 임석진 교수님의 해석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지만), 저는 종종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에 대한 비판이 너무 1차원적인 층위에서 "그 번역은 독일어랑 안 맞아." 정도로 이야기되는 것 같아서 좀 불만이에요.

사실, 중간중간에 저런 이상한 번역들이 들어가 있기는 해도, 독일어 원문과 임석진 교수님의 번역을 실제로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틀렸다'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문장들이 대부분이에요. 개인적으로, 임석진 교수님이 문장 나누기와 단락 나누기를 자의적으로 하셨으면서도 원문 쪽수를 기입해 두지 않아서, 번역문과 원문을 대조하기 어렵게 하셨다는 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번역된 문장이 원래 문장과 전혀 다른 의미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저는 "그렇게까지 크게 다르지는 않더라."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특히, TheNewHegel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1982년에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임석진 교수님의 초기 번역은 더 직역에 가까워서, 저로서는 독일어를 정말 '수준급으로' 잘 하면서 헤겔의 철학을 '수준급으로'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번역보다 더 잘 번역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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