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시민적 지위, 또는 시민 세계에서의 모순의 지위 : 이것이 철학적 문제이다.(PI, Ⅰ, §125)
voiceright님은 「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카벨의 해설에 대한 코넌트의 해설에 대한 나의 해설 」의 댓글에서 나의 비트겐슈타인 독해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즉,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그 언어 게임이 "혼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voiceright님은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과 무관하게 단지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자 하였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나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네 가지 논제로 답하고자 한다. (1) 『논고』에서 『탐구』로의 이행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기 철학이 지닌 모순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2) 『탐구』는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을 각각 '지시', '해석', '사적 언어'로 연결하려는 시도가 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3) 오늘날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계승자들은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의 문제에 주목한다. (4) 언어 게임의 모순을 '해소하는(dissolving)' 작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보여주는(showing)'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는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논고』에서 『탐구』로
『논고』에서 『탐구』로의 전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나의 독해를 정당화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제시된 자신의 전기 철학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요소 명제의 상호 독립성'과 '진리 함수 논리' 사이의 모순 관계 때문이었다. 즉,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을 바탕으로 성립한 전기 철학이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출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논의가 바로 유명한 '색깔 배제 문제(color-exclusion problem)'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당혹스럽게 만든 사안은 그가 자신의 철학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다음 두 가지 전제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이다.
- "P는 빨갛다."라는 명제와 "P는 푸르다."라는 명제는 상호 독립적이다.
- "P는 빨갛고 P는 푸르다."라는 명제는 모순이다.
즉, 두 명제가 상호 독립적인 상황에서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의 거짓이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두 명제의 논리적 곱이 모순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두 명제의 논리적 곱이 모순인 상황에서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의 거짓이 도출된다. 따라서 두 명제가 상호 독립적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의 상호 독립성 주장과 진리 함수 논리를 모두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의 전체 기획에 심각한 결함을 발생시키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전기의 대표작인 『논고』에서는 "P는 빨갛다."라는 명제와 "P는 푸르다."라는 명제가 요소 명제라는 사실을 부정하려 하기도 했고, 이후에 쓰인 「견해」에서는 진리 함수 이론을 수정하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로 폭로된 뒤에야 비로소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2. 『탐구』에 머물러서
『탐구』에서도 모순은 철학의 근본적 문제로 강조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언어 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을 해소하여 언어 게임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즉, 우리는 때때로 언어 게임의 과정에서 일종의 자승자박을 범한다. 이러한 자승자박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 게임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사실은 우리가 하나의 놀이를 위한 규칙들을 확립한다는 것, 즉 어떤 하나의 기술(技術)을 확립한다는 것이며,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 규칙들을 따를 때 사정이 우리가 가정했던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규칙들에 자승자박 당한다는 것이다.(PI, Ⅰ, §125)
언어 게임의 모순은 의미의 환각을 만들어낸다. 논리학에서 '폭발 원리(law of explosion)'가 보여주듯이, 모순을 인정하는 체계는 어떠한 종류의 허황된 결론이라도 모두 함의하고 만다. 소위 '회의적 역설(skeptical paradox)'이란 바로 모순을 지닌 언어 게임에서 발생한다. 한 마디로, 모순을 지닌 언어 게임은 도대체 유의미한 규칙 따르기를 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언어 게임에서는 마치 규칙처럼 보이는 허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해석이든지 허용되는 언어 게임은 사실상 언어 게임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역설은,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일치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PI, Ⅰ, §210)
따라서 우리는 언어 게임이 모순을 지닌 상황에서 해당 언어 게임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그 언어 게임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로소 언어 게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형성된다.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언어 게임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에 우리가 하는 말은 바로, "그건 내가 뜻했던 것이 아닌데……."이다.(PI, Ⅰ, §12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