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wo Faces of Democracy』 - 1장

우리 세미나 첫 시간에 사용한 발제문 겸 요약문입니다.


1장 Introduction: The Challenge of Imagining Democracy Today(1-18)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가진 고전적 순간을 떠올려 보면, 두 가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하나는 인민이 말하고, 듣고, 토론하고, 주장하고, 투표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폭군이나 엘리트를 향해 시위하고 저항하는 그림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두 그림은 민주적 삶에 대한 두 묘사라고 부를 수 있다. 둘은 민주주의 핵심 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각각은 민주적 정치 형태에 대한 본질적 직관을 포착한다. 전자는 정당한 민주적 질서의 삶에 핵심적 활동인 대중적 토의와 숙의의 이념을, 후자는 민주적 정치 배열을 위협하는 노력에 대항하는 이념을 표현한다.

우리는 분명 민주주의의 두 얼굴이 포괄적 수준의 민주적 직관 및 가치상 연결되어 있음을 확언할 수 있지만, 그 연결의 성격과 연결의 기저에 깔린 윤리적 제반 구조에 대한 이해는 부실하다. 이 이해의 부족은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를 개념화하려는 학자들의 노력 속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해 부족을 자아내는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저항이라는 민주주의의 한 얼굴이 반민주적인 우익 운동과 연결되곤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민주적 정당 내에서 우파의 정치에 대한 마초적이고 일관된 ‘적대주의적(antagonistic)’인 접근법을 충족해야 한다는 요구에 설득된 자들의 목소리가 증대되고 있으며, 좌파 중에서도 상호 협력과 존중이라는 전통적 방향과 달리 세계를 정치적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증대되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한 얼굴인 저항의 얼굴은 최근 미국 현실 정치판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학계에서 그 얼굴이 대두된 것은 지금보다 훨씬 이전이다. 학계에서는 샹탈 무페와 같은 자들이 대립과 저항이 모든 정치적 삶의 본질적 성격을 구성한다는 ‘경합주의(agonism; agon=conflict or contest)’를 펼친다. 그녀 이론은 이론적 힘을 얻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지적 움직임은 롤스와 하버마스의 이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 두 사상가는 서양 정치 질서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적절하며, 정치 이론의 주된 업무는 민주적 정당성의 기초를 개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너무 매여 있다고 인식되었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두 사상가는 이성과 토의 등에 기반해 자유 민주주의 질서의 이상화된 버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 얼굴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이상화된 이론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현재의 부정의에 무감각하고, 현 상황에 대한 과장된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허황된 이론에 반발하여, 구체적 현실의 부정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반성하고 그에 투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러한 ‘이상적 이론’을 공격하는 ‘현실주의자’의 목소리가 증대됐으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를 겪곤 했다. ‘현실주의’ 이론 중에서는 그나마 (앞서 언급한) 경합주의가 비교적 명확한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게 됐다. 현실주의의 구체적 형태 중 하나인 경합주의는 정치적 삶의 갈등적 요소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이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가 개념상으로 ‘친구’와 ‘적’의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공적 의식이라는 민주주의의 한 얼굴이 세력을 잃고 그 반대인 투쟁이라는 다른 얼굴이 전면으로 떠오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밀물과 썰물처럼 당연한 흐름일 수 있지만, 현 상태에 대해 완전히 안락할 수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립과 저항이라는 민주주의의 얼굴은 정치적 우파가 채용해 그 자신의 반-민주적인 움직임을 정당화하는 경로로 사용되고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보증하는 경연(contestation)이 민주적 규범에 대한 찬동을 좀먹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러한 적절한 물음이 너무나 학문적이어서 풀뿌리 수준의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현재의 부정의를 다루는 현장의 운동가들이 보기에 민주주의의 두 얼굴을 조율하는 문제는 단지 이론가들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당면한 상황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시선이 옳겠지만, 더 넓게 보면 다른 한쪽의 얼굴이 부상한다. 집단 내부의 구조나 전략, 그리고 다른 우선 사항을 긍정하는 그룹과의 관계의 성격에 대한 물음은 광범위하게 토의되어야 하기에 다른 한쪽의 얼굴이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건강한 민주주의는 확보되지 않는다.
이런 실천적 이유도 있기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두 얼굴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이 책은 두 얼굴과 각각이 담지하는 직관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명석하고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핵심적인 규범적 찬동을 잘 이론화해야 한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갈등과 경연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경합적 민주주의 이론과 이성과 토의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숙의 민주주의 이론을 다룰 것이다. 두 관점(이론)의 특성, 장점, 한계를 평가하고, 필요에 따라 각 관점을 수정하여 두 관점이 긴장과 조화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관계 속에서 현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안을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뚜렷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얼굴(관점)을 연합시키는 시도(into alignment)는 어느 한쪽에 교묘히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한다. 많은 이들이 숙의 모델에 개시상(initial)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노력의 성공 여부는 우리 노력이 어디에서 시작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숙의에서 시작하는 우리 노력이 결과적으로 두 가지 얼굴과 둘이 함축하는 직관과 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통합되는지에 달려있다.
특히, 우리의 시작점에 있는 하버마스는 누군가에게 매우 의심스럽다. 그는 숙의라는 민주주의의 한 측면의 전형으로 비판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숙의에 관한 그의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아닌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 시작하여 그의 사유 핵심에 있는 것을 다소 수정하여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접근법은 ‘숙의’ 민주주의 접근법이라기보다는 ‘의사소통적’ 민주주의 접근법이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숙의적 관점과 경합적 관점을 해체하는 민주주의를 개념화하는 기초를 개발할 것이다.
오늘날 ‘숙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투표나 정치적 행위를 취하기 이전에 각자의 입장을 상호간 정당화하고, 논의하고, 토의하는 민주적 과정의 특징에 집중하는 넓은 운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민주주의의 한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또 그 결과 담론장 바깥에 있는 다양한 집단이나 이슈를 권력이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방식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러한 비판 맥락에 더해 오늘날의 주요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적당히 정의롭다고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느낌에서 민주주의 이론 내에서 경합적 전환이 일어났다. 민주주의의 다른 측면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두 측면의 지위 역전과 함께, 숙의를 의심 없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 예전보다 숙의와 경합이라는 두 측면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우리가 얻을 수 있냐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책은 어느 한쪽에도 편향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둘을 공통의 규범적 핵심에서 뒤엉켜 있는 것으로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우리는 ‘의사소통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계획은 두 적대자를 협상하는 작업이나, 유사한 가치를 공유하는 중간점으로 수렴시키려는 작업과 구분된다. 이하는 이어지는 장에 대한 요약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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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요즘 그렇지 않아도 랑시에르랑 스테판 화이트의 책을 이차 문헌으로 해서 논문을 쓰고 있어서 그런 지 올려주신 글이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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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렇군요! 저도 랑시에르에 관심이 있어서 좋은 결과가 있은 후에 저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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