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5강

이어집니다.

포기했었던 6월 내 초벌번역 완료가 뭔가 다시 가망성이 보이는 느낌...? 이 있습니다. 아 물론 전체적으로 뜯어고치는 데 또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5강

1973.11.27

나는 내가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순서를 다시 배열하기로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원래 마지막에 놓으려고 했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두세 개의 강의가 더 주어졌을 때보다 훨씬 답답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하니, 강의가 단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내용을 이 지점에 두기로 결정했다.

나는 지난 두 개의 강의에서 무엇에 대해 말했는가? 주로 나는 ‘햄릿’과 같은 이름들에 대해 말하는 원래의, 또한 고전적이기도 한 패러다임 - 즉, 그것들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거나, 또는, 내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지시체를 가진다고 단순히 가장할 뿐이라는 패러다임 - 에서 벗어나는 가능한 방식을 논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들이 지시체를 가지는 두 용법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의 용법,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 말해졌는지에 관한 보고로서, ‘햄릿'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사람을 지시하지만 ‘곤자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용법이다. 그리고 둘째로,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이 인정될 때, 우리는 그렇다면 ‘햄릿'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어떤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하고, ‘제우스'라는 이름은 실제 허구적 인물 또는 전설 상의 신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몰로'라는 이름은, 만일 내가 이전에 설명했던 이론들이 맞다면, 그 어떤 그러한 개체도 지시하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신화적 신, 또는 전설 상의 신을 지시한다고 여겨졌을 뿐이다. 어쨌거나, ‘제우스'와 ‘햄릿'과 같은 이름은, 원래의 패러다임에서 비었을 것인 반면,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그것들은 지시 대상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햄릿'이라는 이름이 지시 대상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용법이다.

나는 이러한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가 허구적 대상과 관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언어에서의 다양한 진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볼 수 있게끔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어쩌면 이것은 지각의 경우와 우리와 지각적 대상 간의 관계까지 확장될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지각의 경우에서 더욱 중요했던 것은 술어가 허구적 캐릭터들에 적용될 때, 두 가지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관찰이었다. 첫째로, 허구적 캐릭터들으로서 참인 속성을 가지는 “철저히 밖에서의" 방식이 있다 -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작가에게 이러이러한 시간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둘째로, 술어는 이야기 속에서 말해진 것 - 그 이름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 - 에 따라,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 허구적 캐릭터가 실제로 창조된 년도가 아닌 특정한 년도에 만들어졌다고 할 때와 같이 허구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 나는 같은 것이 우리가 지각적 대상의 서로 다른 기술에서 서로 양립불가능한 술어를 적용하는 다양한 경우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77,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지각적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언어 형식만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어쨌든간에, 여기서 ‘햄릿’과 같은 빈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논의하지 않은, 문헌에서 언급되었던 세 번째 방식이 있다. 따라서 지금 이에 대해 논의하겠다. 이는 주로 고유 명사가 아니라 한정 기술구와 연관된 논의에서 제안되었다. 도넬란의 한정 기술구에 대한 논문이 특히 이 경우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Donnellan 1966을 보라). 또한 그 전에 레오나드 린스키의 논문(Linsky 1963)이 있었고, 다른 선행 문헌 또한 있었다.78

린스키가 제시하고 도넬란이 발전시킨 예시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 미혼인 여성을 두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고 말한다고 하자. 러셀의 견해에 따르자면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거짓일 것이다. Frege(1892)79와 Strawson(1950)의 패러다임에서, 그가 말한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며, “진리값을 결여한다”. 두 견해 모두에서, 해당 기술구는 그녀가 남편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거나 선제한다. 도넬란은 이렇게 말한다:

러셀과 스트로슨 모두 선제나 함축이 거짓일 때, 화자가 말한 것의 진리값이 영향을 받는다고 여겼다. 러셀에게 그때 만들어진 진술은 거짓이고, 스트로슨에게는 진리값이 없다.

(1966: 283)

도넬란의 러셀과 스트로슨에 대한 기본적인 반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 둘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거짓이거나,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쨌든간에, 누군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던 누군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는 그 사람이 그녀에게 상냥히 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확실히 ‘그녀의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은, 만일 그 사람이 그녀에게 정말로 상냥했다면 참이다. 따라서, 고전적인 러셀의 패러다임에서, 그리고 또한 프레게와 스트로슨의 견해에서, ‘그녀의 남편’과 관련된 발화는 지시체가 없을 것이다.80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반대로, 이것은 명백하게 지시체를 가지며, 그 여성이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이라는 절은 여기서 화자가 말하고 있던 그 사람을 지시한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오늘 논의하고자 하는 견해이다. 물론, 이것이 참이라면, 이것이 ”빈” 지시어가, 여기서는 한정 기술구가, 지시체를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뜻이 될 것이다.

도넬란은, 이런 종류의 예시에 근거해서, 한정구의 지시적referential 사용과 속성적attributive 사용 사이의 구분을 도입한다. 속성적 사용은, 대충 말해서 우리가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와 같은 종류의 절을 추가하고자 할 수 있는 사용이다. 이것은 엄격한 묘사는 아니겠지만 대강의 느낌은 줄 수 있을 것이다.81 (도넬란이 제시한) 한 예시로, 우리는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의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스미스를 죽인 사람은 미쳤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넬란에 따르자면, 우리는 맥락과 우리의 동기에 따라 두 가지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살인 사건이 너무나도 소름끼쳐서 우리가 그것을 저지른 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 미쳤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살인자는,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 그가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실제로 살인자인지 아닌지, 우리가 그렇게 믿는지 믿지 않는지와 상관 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간에 우리는 살인자는,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 그가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여기에다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라는 절을 넣을 수 있다: ‘스미스를 죽인 사람은,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 미쳤다’ (또는 ‘미쳤음에 틀림없다’).

반면에, 우리는 피고인의 행동에 주목하고, 그리고, 그가 스미스를 죽인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그를 지시하면서 그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쓰임에서 우리는 삽입 어구 ‘(그러니까, 저 사람)’을 끼워넣을 수 있다: ‘스미스를 죽인 사람 (그러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물론, 이 절을 반대로 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사람 - 그러니까, 스미스를 죽인 사람 - 은 미쳤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해 그가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말한 것은, 만일 사실 그가 무죄일지라도 참이다. 심지어 살인자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해 참되게 말할 수 있고, 그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만일 스미스는 사실 자살한 것이었고, 그 사람은 올바르지 못하게 기소되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프레게-스트로슨의 이론은 ‘스미스를 죽인 사람’이라는 절의 지시체가 비었다고 할 것이지만, 우리는 지시체가 없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피고인석에 앉은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이다.

속성적 사용에서, 만일 살인자가 없었다면, 지시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만일 우리가 ‘스미스를 죽인 사람은, 그것이 누구가 되었든간에,미쳤다’고 말했고, 사실 스미스는 소름끼치고 미친 방식으로 자살했다면, 이 경우에 전통적인 조건은 만족되지 않았고, ‘스미스를 죽인 사람’이라는 절은 지시체가 없다.82

도넬란의 그림을 지지하는 아주 좋은 예시는 아마도, 그 주인공을 주로 (또는 어쩌면 항상) ‘메시아’라고 부르는 복음과 비슷한83 가상의 종교적 작품일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이, 그것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참된 설명을 제공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그가 정말로 메시아인지, 또는 메시아가 정말로 있다면, 그렇게 묘사된 누군가가 정말로 메시아일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가 없다고 가정하자. 만일 그 작가가 ’메시아’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여러 적합한 속성, 행위 등을 귀속시켰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그 작품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으로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방향으로 기울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도넬란은 비록 러셀의 이론, 그리고 스트로슨의 이론 또한, 그가 기술하는 대로라면, 속성적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지시적 사용에는 정확한 이론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용이 있으며, 러셀은 기껏해야 한 종류에 대해 정확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스트로슨에 대해서는, 도넬란은 그가 지시적 사용에 대한 한정 기술구의 이론을 제고앟려 하지만, 그가 도넬란이 지시적 사용의 본질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종종 실패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간에, 그는 러셀의 이론이, 만일 정확하다면, 속성적 사용에 완전히 적용될 것이지만 지시적 사용의 분석으로는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견해를 시험해보고, 또 다른 예외를 만들어내지는 않는지 보고자 한다. 물론, 도넬란은 러셀이 해당 절이 외연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경우 - 예를 들어, 문제의 그 여성이 남편이 없을, 결혼하지 않았을 경우 - 를 주로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의 논증은 비록 그것이 화자가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해당 기술을 만족하는 단일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에도 똑같이 잘 적용된다. 따라서, 미혼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 집중하는 대신,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라는 말을 기혼 여성과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라고 착각한 채로 말할 수 있다.84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 그녀의 남편이라고 여겨진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넬란이 제시한, 착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개체가 지시된 조금 더 미묘한 다른 예시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실제 왕이 아닌 단순 참칭자라고 여기지만, 경제성을 위하여 ’그 왕‘을 참칭자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동체의 언어 사용을 들 수 있다. 해당 사용이 허위적이라는 것은 대화의 참여자들에게 있어서 공통된 상식이다.

내게 있어서 도넬란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시험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데, 왜냐하면 견해가 명백히 일관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또한 그의 노선 중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나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그가 러셀을 반박했거나, 러셀의 이론이 해당 주제에 있어서 포괄적인 설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 사이의 모호성ambiguity이 있지만, 이것이 의미론적 모호성이나 통사론적 모호성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문장에 있어서 애초에 모호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화용론적 모호성“이며, 한정 기술구가 맡는 역할의 구별은 화자 의도의 함수이다.

‘의미론적 모호성‘, ‘화용론적 모호성‘, ‘구문론적 모호성‘과 같은 것은 구체적으로 벼려지기 전까지는 부분적으로 단순한 구호와 같아 보이며, 내게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맞다면 의미론적 모호성은 없고, 그렇다면 한정 기술구를 포함하는 문장에 대한 분석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두 가지 분석이 있었다면, 이것은 내가 “의미론적 모호성“이라고 부를 무언가일 것이다.

‘경찰이 오고 있다‘라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아마도, 단 한 가지 분석만 있을 것이다 - 또는 그렇다고 가정하자 (어쩌면 ‘경찰‘이라는 말은 하나보다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고로써, 또는 안도의 표현으로써, 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도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화용론적 모호성이다. 한 범죄자가 공범에게 - 예를 들어, 도둑이, 도둑질하는 와중에 ‘경찰이 오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경찰이 오고 있다고 강한 뜻에서 주장하고 있다 여겨질 필요는 없다. 물론 그는 이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는 어쩌면 청자가 경찰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거나, 청자가 그, 그러니까 화자가 경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등의 상황에서도 이를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둘 모두 상대방이 경찰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논의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이 경찰이 오고 있음을 안다는 것을 알지만, 도둑은 이를 ‘자, 우리는 이걸 훔치는 데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 경찰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떠나야 한다’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문장 ‘경찰이 오고 있다’의 아주 특수한 사용이다. 이는 그라이스의 의미에 관한 논문 (Grice 1957)에서 제시된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자는 경찰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유도하기를 의도하지 않으며; 그는 또한 그가 경찰이 오고 있다고 믿는다는 믿음을 유도하기를 의도하지 않으며 - 또한 이러한 어떠한 반복에 있어서도 그렇다. 내가 따라가지 못한 재정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그라이스가 말하는 것의 반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많은 검토와 이해가 필요하다. 어쨌든간에, 이것은 확실히 원시적인 그라이스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례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수한 사용이라 하더라도, 또한 우리는 도둑이 ‘경찰이 오고 있다‘를 말할 때 더 많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이제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자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경찰이 오고 있다‘라는 절의 대안적 분석을 요구하게끔 하지는 않는다. 비록 여기서, 어떠한 화용론적 요소로 인해 꽤나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해당 절은 단일한 의미론적 분석을 가지고 있다.

도넬란이 의미한 것이 한정 기술구의 사용은, 마치 도둑의 경우처럼 단지 화용론적으로 모호하고, 의미론적으로 모호하다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러셀이 속성적 사용에서는 올바른 분석을 제공하였지만 지시적 사용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애초에 이런 뜻에서 쓰임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문장이 정말로 모호하다면, 우리는 하나의 모호한 문장에 대한 서로 다른 독해를 제공한다. 만일 모호하지 않다면, 오직 한 가지 독해만 있으며, 러셀은 완전히 올바랐거나 완전히 틀렸다. 우리는 그가 어떤 경우에 있어서 올바르고 다른 경우에서 틀렸는데, 동시에 해당 문장이 의미론적으로 모호하지 않다는 견해를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한 가지 독해만이 제공되는 문장이 특수한 대화의 원칙에 의해 특수한 맥락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는 주장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호성이 없으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독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도넬란이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를 의미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일단 이것을 치워두고, ‘의미론적 모호성’과 ‘화용론적 모호성’이라는 절보다 더 명료한 질문을 하나 제기하려 한다: 도넬란이 제시한 논증이 러셀의 한정 기술구에 대한 분석에 반대되는 논증인가? 나는 여기서 러셀의 분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말하자면, 이러한 러셀에 대한 비판의 장점을 논의하기 위한 일종의 방법론적 장치로써 도넬란의 이론과 비교할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서 러셀의 분석을 정립하려는 것이다. 도넬란의 방법론이 러셀에 반대하는 올바른 논증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다른 올바른 논증이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이 이에 대해 말해져야 하는가? 첫째로, 만일 도넬란이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상냥하다는는 화자의 진술이 (그녀가 남편이 있는지, 그녀의 남편이 있다면 정말로 그녀에게 상냥한지와 상관없이)참 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올바랐다는 강한 논지를 폈다면, 물론 이는 러셀에 대한 반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또한, 내가 보기에, 해당 진술이 의미론적으로 모호하다는 뻔한 논증을 가질 것인데, 왜냐하면 해당 기술구의 진리 조건은 러셀이 제시한 진리 조건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셀이 제공한 진리 조건이 어떤 경우에서는 적용되고 다른 경우에서는 다른 진리 조건이 적용된다면, 이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미론적 모호성의 예시일 것이다. 그러나 도넬란은, 사실, 화자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 아닐지라도, 그가 그녀에게 상냥하기만 하다면, 그녀의 실제 남편이 그녀에게 상냥한지는 상관이 없다고, 이 사람이 그녀에게 상냥하기만 한다면 해당 문장은 참인 것을 표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물론 이것은 화자가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상냥하다고 말했을 때, 사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지 않음에도 그는 참되게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상냥하다고 말했다는 이상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문제의 가정 하에서,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도넬란은 이러한 결과를 얻고 싶어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는, 조금 더 소극적으로, 우리는 무슨 진술이 만들어졌는지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슨 진술이 만들어졌는지는, 우리는 ‘그녀의 남편‘이라는 절을 지시적으로 그 사람을 지시하도록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에서 보고될 수 없다. 대신해서 우리는 화자는 그가 지시하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하여 참되게 말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심스러운 견해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다. (Donnellan 1966의 section VIII을 보라)

이러한 견해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러셀과 철저하게 양립불가능하지는 않는다. 도넬란의 견해가 어느 정도로 강해야만 정말로 러셀에 대한 반박이 되고, 지시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줄 수 있을 지를 탐구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방법론적 구분을 도입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경찰이 오고 있다’의 경우처럼, 화자가 그의 말로써 무엇을 의미했는지(위의 아주 원시적이고 뻔한 예시에서는, 여기에서 벗어나자! - 그는 경찰이 오고 있다고 누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와, 특정한 화자에게 특수한 상황에서 발화되었을 때에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이 예시와 다른 모든 경우에서, 경찰이 오고 있다는 것)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로, 나는 Grice(1975)85에서 온 (비록 나는 조금 다른 형태로 도입했지만) 방법론적 원칙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라이스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그의 저술에서 (a) 화자가 말하는 바의 다양한 함축을 규약적 의미의 이론, 화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이론에 넣는 것, 그리고 (b) 주어진 고정된 약한 의미를 통해 화자의 말에서 추론할 수 있는 언어의 여러 일반 원리를 적용하여 다른 함축을 도출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예시는 연언의 경우 - ‘그리고’의 경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어에서, 논리와는 달리 ’그리고’라는 단어는 단순 연언과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무언가 사이에서 모호하거나, 실제로는 일원적으로, 시간적 순서를 함축하고 있어서, 우리가 ‘나는 아침에 일어났고, 그리고 양치를 했다‘고 말할 때 나는 단지 둘 모두를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먼저 아침에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논증했다. (물론 이 경우에서 우리는 이 순서를 다른 이유에서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먼저 양치를 했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그러나 같은 점에 대해 다른 예시가 주어질 수 있다) 그라이스는 이러한 것들이 ’그리고’의 의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의 의미는 단지 (일반적인 논리의 진리-함수적 뜻에서의) 연언이며, 화자가 (적어도 이러한 경우에 대하여)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 서술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언어에 관한 원칙이라는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래서, 당신이 양치를 했다는 사건이 두 번째로 온다는 것은 ’그리고’라는 단어의 의미의 부분에서가 아니라, 이런 일반적 원칙의 적용에서 온다.86

내가 여기서 특수한 방식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방법론이다. 내 생각에, 다음은 특정한 예시가 특정한 의미론 이론에 대한 반론이라는 견해 모두에 대한 시험이어야 한다. 우리가 E 종류의 예시 또는 E 종류의 언어 행위가 특정한 종류의 의미론 이론, 또는 영어 문장에 대한 특정한 분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고 하자. 이러한 논증에 대한 시험은, 아마도 우리 자신은 아닌, 해당 의미론 이론이 제공하는 분석이 정확한 어떤 가설적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영어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아니라면, 그 공동체는 영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해당 의미론적 이론이, 이러한 이론이 올바른 언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관적이라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이 방면에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어서, 가정된 가설적 언어에서, 반례가 될 언어적 특징이 실제로 발현되게끔 하는, 모든 언어에 적용될 일반적 대화상의 원리가 있는지를 시험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예시는 해당 의미론적 이론이 영어에 대한 올바른 분석을 제공한다는 논제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분석이 만족된다고 가정된 가설적 언어에서 또한 이러한 특징이 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짤막한 예시를 들어 보겠다. 아마도 정말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를 정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동일성은 이름 간의 관계여야만 한다고, 즉, 대상과 그 자신 간의 관계가 아니라 메타언어적 관계라고 논증했다. ‘대상이 그 자신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도대체 대상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이것이 동일성이 대상과 그 자신 간에 성립하는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는 메타언어적 이론을 옹호하는 좋은 논증인지 시험하기 위해, ‘동일성*’이라고 부르는, 단지 각각의 대상을 그 자신과 관계시키는 관계가 도입된 가설적 언어를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가정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렇게 가정된 외연을 가진 관계를 가질 수 없는가? 어찌 되었든, 대상과 자신의 관계로서의 동일성에 대한 결정적 반론이라고 간주되는 헤스페로스와 포스포로스에 관한 모든 철학적 문제는 이 가설적 언어에서 동일성*에 관한 문제로서 제기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일상적 동일성이 그러한 관계가 아니라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게끔 하는 특징은 이러한 가설적 언어에서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동일성 진술에 대한 철학적 문제의 해답이 무엇인지 알지 않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 이것이 동일성이 어떤 사물과 그 자신 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논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87

나는 이것을 러셀의 이론이 올바른 이론으로서 도입되었다고 가정된 가설적 언어의 경우에 적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가정은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와 비슷하게(도대체 뭘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견문이 짧아 모르겠음, 역주.)), ‘그 φ는 ψ한다'로써 ‘단일하게 φ하는 있고, 그것은 ψ한다.’를, 내가 이미 이전 강의에서 도입했을 기호로써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φ!x ^ ψx)

(다시 말하자면, φ!x는 내 표기법에서 x가 φ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88 어떤 논증이 만일 러셀의 이론에 반대하는 논증이라면, 이 가설적 언어는 영어와 어떤 구체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분될 것이다. 나는 이 언어가 영어와 구분될 것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도넬란이 언급한 경우에서 영어와의 구분이 있을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언어를 ”러셀 언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내가 “극단적 러셀 언어"라고 부를 언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이 언어에서 ‘그the’로 시작되는 한정 기술구는 아예 쓰여지지 않고, 그 대신 항상 러셀 식의 확장자로 대체하여 사용된다. 따라서 ‘그 φ는 ψ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φ하고, 단일하게 φ하며, 그것은 ψ한다’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줄임말인 ‘그the’조차 도입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더욱 러셀주의적인 언어일 것이다.

도넬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중 한 가지 경우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 파티장 한구석에 있는 사람을 보고, ‘저기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89라고 말한다. 도넬란은 이때, 설령 그 사람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 사실 그는 샴페인 잔에 물을 담아 마시고 있는 금주주의자라고 하더라도 - 이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참인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지시와 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 방에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이 없거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방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한정 기술구는 마치 그것이 단순히 이름이었던 것 마냥, 꼬리표였던 것 마냥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참되거나 거짓된 것을 말하고 있다. (해당 진술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한 문제는 회피된다. 우리는 그 사람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하여 참이거나 거짓인 말을 하고 있다.)

러셀 언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첫째로, 만일 저기 구석에 누군가 있고 당신이 그 사람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러셀 언어에서도 똑같이 ‘저기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러셀 언어의 화자라는 것은, 물론, 당신에게 해당 기술구를 만족하는 단일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오류불가능성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이 만일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저기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때, ‘저기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확실히 규칙에서 어긋난 행동은 아니다.

극단적 러셀 언어에서는 당연히 더 복잡한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언어에 한정 기술구가 없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특정하기 위하여 ‘저기에 있는 누군가가 샴페인을 마시고 있고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물론, 이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누군가‘, 또는 ‘어떤 특정한 누군가‘(또는, 철학계 안에서는, ‘x가 존재하여‘)와 같은 절에는, ‘저기 방의 한구석에 샴페인을 마시는 특정한 누군가가 있고, 그는 스미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와 같은 경우에서처럼 ‘가중된arch’사용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영어에서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사용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정 기술구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용법은, 일반적인 경우에서도 더욱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는 우리가 러셀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해당 상황에서의 다른 특징이 이를 보여주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누군가 참인(거짓인) 것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러셀 언어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먼저 다른 경우에 대해 말해 보겠다. 당신은 약간 떨어져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스미스라고 여긴다. 사실 당신은 오해하고 있다. 그 사람은 존스다. ‘스미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물었고, 당신은 ‘그는 낙엽을 쓸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말해지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스미스라고 잘못 여겨진 사람, 즉 존스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러한 예시가 여러 고유 이름에 대한 이론의 반례라고 여겨야 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스미스‘라는 고유 이름이, ‘스미스‘라고 불린 사람이 세계에 단 한 명밖에 없더라도 해당 이름이 복합적으로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스미스‘는 존스의 이름으로써 사용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내게는 뻔하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여느 곳에서 그렇듯 화자는 (자신의 언어로) ‘스미스’를 존스가 아닌 스미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그들이 스미스와 존스를 헷갈렸기 때문에 이 경우 그들은 어떤 뜻에서 존스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존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화자 지시체speaker’s reference”라고 부를 것, ‘그가 이러이러한 고유 이름을 사용했을 때 누구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가?;와 같은 문제의 대답을 따로 구분해 내야 한다. 질문 ‘화자의 언어에서 이 이름의 지시체는 무엇인가?‘의 대답에 대해서는, 그의 언어에서의 “의미론적 지시체semantic reference”라고 부를 것이다.화자가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존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즉, 화자 지시체는 존스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개인언어idiolect에서 이름 ‘스미스’는 때때로 스미스의 이름이지만 특정한 경우 아래에서는 존스의 이름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물론 아니다. 이름 ‘스미스’는 단지 스미스의 이름이다. 이런 지시체가 내가 “의미론적 지시체”라고 부르는 것이고, 곧 그 이름이 이름하는 그것이다. 화자는 이 경우에 이름 ‘스미스’를 사용해서 존스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그의 청자 모두가 존스와 스미스를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미스에 관해 말하는 데 주의하기보다, 단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데 주의했고, 실제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들의 말을 정정했을 것이다.90

그렇다면 이것이 그들이 이름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고유 이름 ‘스미스’가, 심지어 화자의 개인언어에서도 모호하다는 어떠한 논증도 없다. 물론, 도넬란의 참칭자 예시와 같이, 더욱 미묘한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기꾼이, 상속될 유산을 목적으로 자신을 스미스라고 속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사기임을 알지만 - 어떤 특수한 이유로 - 그 사기꾼을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그가 스미스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를 ‘스미스‘를 사용하여 지시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경우는 - 도넬란의 참칭자 예시와 내가 방금 설명한 예시 모두 - 약간 더 특수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진술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마도 우리가 지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또한 이름이 모호하다는 것을 논증하게끔 해 주지는 못한다. 이 예시는, 대신, 화자의 지시체는 이러한 경우에서 의미론적 지시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자의 개인언어에서의 의미론적 지시체는 보편적으로 가지는 의도를 확정한다. 그는 ‘내가 ‘스미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지시할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람“은 명세되어야 한다)와 같은 보편적인 의도를 형성한다. 특수한 경우에서, 그는 이러한 의도를 만족시키지 않음에도 그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 일차적 의도는 저기에서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또한 그가 저기에서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이 스미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보편적인 의도를 만족시켰다고 여긴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구체적 의도가 보편적 의도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것이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가 구별되는 가장 단순하고 정석적인 방식이다.

이것은 명백히 지시적 표현을 가지는 모든 언어에서 예화될 보편적 원칙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의 의미론적 지시체가 무엇인지와 구분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같아야 할 필요가 없다. 때에 따라서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의도된 지시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미론적 지시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모호할 수 있다. 낙엽쓸기 예시에서 누군가 ‘화자들이 누구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이 스미스라는 (가정된) 사실에 그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에 따라, 그들은 낙엽 쓰는 사람이 아닌 스미스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고도, 스미스가 아닌 낙엽 쓰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고도 대답할 수 있으며,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는, 그 둘 모두에 대해 모호하다고도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론적 지시체는 모호성 없이 스미스이다.

이러한 방법론이 한정 기술구의 경우에 적용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the φ’라는 한정 기술구를 사용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the φ’를 사용할 때, φ를 단일하게 만족하는 그 무언가를 지시하려는 보편적인 의도가 있다91. 우리가 φ를 유일하게 만족한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대해, 우리는 기술구 ‘the φ’를 사용하여 그것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 의도가 만족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차적 의도가 그것이 φ를 만족하는지와 상관없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위와 같이,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보편적 의도에 부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 여기고 있고, 다른 무언가가 ‘the φ’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 모호성 없이, 사실 φ를 단일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없거나 다른 무언가가 만족시킴에도, 저기에 있는 저것에 관해 그것이 단일하게 φ를 만족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 아마도, 우리는 어떠한 뜻에서도 실제로 φ를 만족하는 다른 무언가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의도는 단지 저기에 있는 저것에 관해 말하는 것, 예를 들어, 낙엽을 쓸고 있는 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한정 기술구의 경우에서, 우리가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 - 화자의 지시체가 무엇이었는지 - 에 대해서 더욱 모호성이 없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기에 있는 저것에 대해 말하고 있고, ‘the φ’를 단지 그것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the φ’를 φ가 아닌 다른 것의 이름으로써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대상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만일 그 대상이 ‘the φ’로써 특징지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대상이 ‘the φ’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스미스와 존스의 경우에서, 그들은 존스와 스미스를 헷갈렸지만, 그들은 단지 존스에 대해 말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서, 설령 그곳에 단일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화자들은 그를 다른 어떤 실제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과 혼동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그 사람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고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 기술될 수 있다고 -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이것이 기술구가 ‘이름'이 아니라 ‘기술구'라 불리는 까닭이다. 기술구는 기술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 사이의 구분이 가설적 러셀 언어에도 적용되는가?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화자의 지시체가 (단순한 러셀 언어에서) 그들이 한정 기술구를 만족한다고 생각했던 것,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이 사용했던 한정 기술구를 단일하게 만족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당 한정 기술구를 사용하여 그것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강제로 - 그 언어 안에서 한정 기술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 축약되지 않은 형식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저기에 있는 저것"을 ‘x가 있어서 그것이 φ하고' - 예를 들어, 샴페인을 마시는 - ‘또한 그것이 다른 속성 ψ를 가진다' - 예를 들어, 행복함 -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러셀 언어에서의 한정 기술구에 대한 분석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이것이 올바른 분석이라는 것은 가정되었다. 우리가 한정 기술구를 사용하지 않고 축약되지 않은 형식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이 ...’를 사용하더라도 이러한 구분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우회적 사용의 ‘가중된' 사용이 자연스러운 일상 영어에서, ‘저기 방의 한구석에 샴페인을 마시는 특정한 누군가가 있고, 그는 스미스 씨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스미스 씨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어떤 단일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다른 사람이 방에 있었더라도, 당신은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복잡한 우회적 형식이 명시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참칭자와 같은 종류의 예시들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이것을 청자(또는 독자)들의 연습 문제로 남겨 놓겠다. 그런 예시들이 특별히 문젯거리가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도넬란 본인이 말하듯이 특수하고 재미난 경우들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마 화자와 청자가 술어에 어울린다고 믿는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해당 술어를 만족시킨다고 여겨지는 것과 관련해서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가설적 러셀 언어, 또는 심지어 한정 기술구가 그것의 분석으로 대체된 극단적 러셀 언어에서도, 모든 이러한 구분은 그어질 수 있다고 보인다. 이 구분은 하나의 한정 기술구의 두 가지 뜻 사이의 구분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지시에 대한 보편적 원칙의 특수한 사례들이다. 여기서의 구분은, 화자가 이름 또는 단칭어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보편적 의도에 대응하는 이름 또는 단칭어의 의미론적 지시체와, 화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비록 보편적 의도를 만족하지 못할지언정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구체적 의도에 대응하는 해당 이름 또는 단칭어를 사용할 때의 화자의 지시체 사이의 구분이다.

나는 이것이 도넬란이 지적한 현상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만일 그렇다면, 도넬란은 러셀에 반대하는 논증을 제공한 적이 없다. 러셀에 반대하는 논증이 명백히 없어 보이는 이유는, 내가 말했듯이 도넬란의 주장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러셀의 진리 조건을 실제 진리 조건으로, 러셀의 분석을 올바른 분석이라 가정해서 구성한 언어에서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도넬란이 (성공적으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의 예시에서 해당 진술 자체가 러셀이 제안한 것과 다른 진리 조건을 가진다고 논증했다면, 그가 옳았을 경우 우리의 언어가 러셀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언어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술의 진리 조건이 분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할 때 도넬란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정말로 그녀의 남편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내에게 잔혹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라는 진술이,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었을 때 참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우리는 대신 화자가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은가? 또는, 어쩌면,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뜻한 것은 참이었다고 - 비록 그것은 진술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의 분석과는 같지 않겠지만 - 말해야 하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시피, 도넬란은 이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나는 이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러셀의 이론과 모순되는 언어의 특성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고유 이름에 대해 말한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명료화를 제공할 것이다. 나는 (요즘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N&N에서 든, 괴델이 슈미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업적을 훔친 사기꾼인 예시에 대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괴델‘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반론을 들은 적이 있다(Kripke 1972/80: 83-84). 나는 이 예시를 ‘괴델‘은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 지시체는 그렇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다. 일군의 사람들이 괴델의 정리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분명 ‘괴델‘이라는 이름을 이 업적을 이룬 그 누구든지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괴델이 다른 사람의 업적을 훔친 사기꾼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상관이 없다. 적어도 이런 경우에서, 그들은 ‘괴델’이라는 이름을 정말로 이 업적을 이룬 사람의 이름으로써 사용하고 있고, 이 경우에서는 슈미트일 것이다.’

나는, 만일 특정한 상황에서 ‘괴델’이라는 이름이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된다면, 이것은 단지 화자의 지시체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군가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고 생각한 화자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사람을 그렇게 특징짓지 않았을 것이고, 존스에 관해 말하면서 그를 스미스로 잘못 생각한 화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슷하게, 그들이 ‘괴델의 대각화 장치는 어찌나 경이로운가!’와 같은 무언가를 말할 때, 사실은 스미스가 그러한 장치를 고안했다는 것을 배운다면 그들은 ‘괴델’ 대신 ‘스미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자, 다시 러셀과 도넬란 사이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한정 기술구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고작 도넬란은 러셀에 반대하는 논증을 제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언어가 러셀적인 패턴에 반대되는 도넬란적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도넬란은 어쩌면 우리가 영어와 비교할 수 있는 가설적 대안 언어를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비록 그가 설정한 탈출구 탓에 그렇게 간주되어야 하는지는 불명료하지만)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언어에서 ‘the φ’는 모호하다 - 그가 그의 논문에서 어떻게 말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의미론적으로 모호하다고 하자. ‘the φ는 ψ하다’의 한 가지 독해는 러셀의 방식대로 분석될 것이다. 다른 독해에서 ‘the φ’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 - (가장 단순한 경우에서는) 화자가 φ를 만족한다고 여기는 대상 - 을 지시하며, 이 진술은 그가 φ를 만족한다고 믿는 그것이 ψ 또한 만족할 때 그리고 그때에만 참이다. 92

이 가설적 언어는 도넬란이 지적하는 특성을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애초에 도넬란의 가설이 이러한 특성을 보이도록 짜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필요치 않을 때 모호성을 가정하지 말라는 - 우리는 관계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한 두 별개의 의미를 포함하는 이론 대신, 일원적인 이론과 보편적 언어상의 원칙을 채택해야 한다는 - 격률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 경우에 적용되는 경제성의 원칙에 대해 조금 더 옹호해 보겠다. 한정 기술구를 포함하는 언어, 예를 들어 스와힐리어 - 어쩌면 한정 기술구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가정하자 - 에서 한정 기술구를 오직 속성적으로만 사용한다고 가정하자. 만일 그들이 속성적 기술에는 ‘the’를 사용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들이 ‘ze’를 지시적 기술에 사용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만일 영어서의 한정 기술구가, 은행과 은행이(원문은 bank, 그러나 ‘bank’의 한 가지 뜻인 ‘은행‘이 마침 한국어에서도 동음이의의 적합한 예시라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역주) ‘은행‘이라는 단어의 두 의미인 것처럼 - 모두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잘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 명백히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스와힐리어에서 기술구가 같은 모호성을 보인다는 보고를 듣지 않을 것이라 선험적으로 예상할 것이다.93

그리고 만일 이러한 예상이 옳았고, 그 반대가 보고되었다면 - 즉, 스와힐리어에서의 기술구가 동종의 모호성을 보인다고 - 어떤 일원적 원칙이 발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고는 한정 기술구의 두 가지 사용이 독립적이라는 가정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원적 원칙은 영어와 우리의 가설적 스와힐리어 두 언어 모두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의 자연스러운 일원적 원칙은 거의 확실히 화자의 지시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우리가 저기에 있는 특정한 사람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고 - 또는 저 특정한 사람이 이 여성의 남편이라고 -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적합하지 않은 기술구를 사용한다. 이는 내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가정할 고유 이름의 경우 - ‘스미스가 저기서 낙엽을 쓸고 있다‘ - 와 정확히 일치한다.94

이는 가상의 스와힐리어에서도 불가피하게 같은 언어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게끔 해주는 자연스러운 일원적 원칙을 제공해준다. 나는 단 하나의 일원적 설명을 제시했다. 나와 동의하지 않거나 내가 틀렸다고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러셀의 이론과 합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대안적인 일원적 설명을 제시하거나, 어떻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뜻에서, 그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다른 하나에 기생하거나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설명을 제공할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다.

내가 제공한 설명이 이러한 경우에 대해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러셀의 분석이 만일 올바르다면, 일원적으로 올바르다는 결론을 옹호해준다. 나는 여기서 러셀의 분석이 실제로 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러셀의 견해를 일원적 분석의 명료하고 적합한 예시로써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일원적 분석이 주어져야 하고, 도넬란이 지적한 사례는 화자의 지시체가 의미론적 지시체와 구분된다는 보편적 원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말한 것 중에 모호성 견해 - 또는, 도넬란 유형의 견해로 여겨질 수 있는 그런 견해 - 와 일원적 견해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게끔 해줄 실제 언어 행위에서의 현상은 없다. 여기서의 두 가상의 언어가 실제로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화자의 언어 행위에 드러난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사실 나는 두 경쟁적 견해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게끔 해줄 수 있는 부차적 현상을, 비록 영어에서지만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기치는 실제로 화자의 지시체, 그러니까 특정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지시에 관한 개념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언급한다. 그는 심지어 도넬란 유형의 예시 또한 제시한다 (Geach 1962: 8)95 그리고 그는 이것이 논리에 있어서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중요성밖에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 자신은 N&N의 각주 (1972/80: 25, 각주 3)에서, 여기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논의하던 것을 아주 짤막하게, 도넬란이 지적한 현상은 화용론의 이론에서 중요할지언정 의미론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이것이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대명사화pronominalization에 관한 의미론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음 두 가지 지루한 대화를 보라. 여기서 누군가는 이런 대화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대화 1: (누군가 기혼 여성과 함께 있는 남성을 보고, 그녀의 남편이 아닌 그 사람을 그녀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A가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라고 말한다. B는 그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B는 ‘그는 확실히 그녀에게 상냥하지만, 그는 저기 있는 저 사람이 아니다 - 저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대화 2: 배경 상황은 같다. 다시, A가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상냥하다’라고 말하고, 이번에 B는 ‘그는 그녀에게 상냥하지만, 그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

각각의 사례에서 B는 정확히 동일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는 대명사 ‘그’를 서로 다른 지시체를 가지고 사용하면서 대답한다. 어떤 것이 더욱 올바른가? 내 직관은, A는 두 사례 모두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만, 두 대답은 모두 적절한 상황에서 올바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명사화의 보편적 원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와 같은 대명사에 담긴 대용적anaphoric 지시체는 이전의 화자의 지시체 (혹은 본인의 화자의 지시체)일 수도 있고, 또는 이전 절의 의미론적 지시체일 수도 있다. B가 사용한 ‘그’는 대화 1에서 A의 화자의 지시체를 지시하고, 대화 2에서는 A의 의미론적 지시체를 지시한다.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 낙엽을 쓰는 사람을 보고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는 낙엽을 쓸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저기서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은 스미스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는 확실히 낙엽을 쓸고 있지만, 그는 스미스가 아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에서, ‘그’는 이전 화자의 의미론적 지시체를 지시하고, 두 번째 경우에서 ‘그’는 화자의 지시체를 지시한다.

한정 기술구의 경우, 어쩌면 의미론적 지시체는 정말로 그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는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실제로 화자의 지시체를 지시하려는 선호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두 가지 사용 모두 정당하다. 둘 모두 올바른 대화, 올바른 대답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화자의 지시체라는 개념은 화용론의 개념으로 도입되었지만, 의미론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추가될 것이다. 대명사 사용의 의미론은 이전 화자의 의미론적 지시체가 아닌 화자의 지시체에 의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화자의 지시체라는 개념이 의미론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지시체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의미론적 개념은 아니지만, 대명사화의 의미론에 추가될 수 있다.

또한, 나는 이 예시가 모호성 이론이 설득력이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모호성이 가정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고, 모호성 이론이 보편적 원칙을 제공하지 않는 데 반해 보편적 원칙이 주어졌고, 보편적 원칙이 이러한 모호성이 없는 가상의 언어에도 여전히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여기서 모호성 이론은 난제를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특정한 상황에서 한정 기술구는 당연히 두 의미 중 단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으로 (또는 속성적으로 - 둘 모두 상관없다) 사용된 상황을 가정하자. 이때 모호성 견해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는 오직, 동시에 화자의 지시체이고 의미론적 지시체인 하나의 지시체만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 첫째로, 모호성 이론 또한 당연히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의 개념을 허용해야 한다. 이 개념들은 모든 언어에 적용되는 보편적 개념이라, 모호성 이론이 올바른 언어에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호성 이론은 단지 내가 헛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퀴 하나를 더해 이 구분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복제했을 뿐이다. 이는 ‘the φ’와 같은 표현은 의미론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에서 화자의 지시체가 의미론적 지시체와 구분된다고 말할 때 이 이론은 이 경우 화자의 지시체는 또한 의미론적 지시체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호성 이론에서는 해석의 모호성이 있다. 해석이 확정되고 나면,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는 같다. 지시적 사례에서는 당신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일 것이고, 속성적 사례에서는 실제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그 사람일 것이다. 속성적 사례에서는 실제로 스미스를 죽인 사람일 것이고, 지시적 사례에서는 당신이 스미스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만일 모호성 이론이 올바르다면, ‘스미스를 죽인 사람은 미쳤다’의 예시에서 대명사가 돌이켜 지시할 수 있는 개체는 오직 하나뿐일 것인데, 왜냐하면 ‘스미스를 죽인 사람’의 지시체는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 둘 모두일 것이기 때문이다. 96

만일 내가 생각하듯이, 이것이 올바르지 않고 내가 예시로 든 대화에서 대명사 ‘그’는 그녀의 남편이나 그녀 옆에 있는 사람 모두 돌이켜 지시하도록 쓰일 수 있다면, 이것은 이런 맥락에서 오직 하나의 지시체 - 내가 보기에, 그 여성 옆에 있는 남성 - 만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에 있어 문제가 된다.

만일 내가 맞다면, 이것은 모호성 견해에 문제가 되는 실제 사례일 것이며, 내가 옹호하는 견해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사례는 언어의 특수한 부분이며, 우리는 이런 사례에 의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신 위에서 주어진 비교적 보편적인 논증, 그러니까 영어가 러셀의 이론을 만족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넬란이 설명한 현상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라는 논증;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의 개념은 우리가 어쨌든간에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논증; 화용론적 고려 사항이 적절하다면, 그 어떠한 모호성을 가정하는 것도 단지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논증에 의존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려 사항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증거가 제공되었을 때 입장을 바꾸고 모호성 이론이 올바르다고 결정할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결산해 보자. 빈 용어는 때때로,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할 때 비록 그것 또는 그 무엇도 우리가 쓰는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지 않을지언정 지시체를 가질 수 있다는 논증이 있었다. 이에 반대해서 나는 고유 이름과 한정 기술구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이는 오직 화자의 지시체,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것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그렇고, 의미론적 지시체, 그러니까, 화자의 언어에서 그 이름이 이름하는 것, 또는 한정 기술구가 지시하는 그것에 관심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고유 이름의 경우에서, 한 이름을 그것이 이름하는 것의 이름으로만 사용하려는 화자의 보편적 의도가 만족되었을 때에만 - 오직 그의 보편적 의미론적 의도가 만족되었을 때 - 그가 사용한 이름이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the φ’의 경우에서, 단일한 무언가가 술어 ‘φ’를 만족할 때에만97 우리는 해당 기술이 화자의 언어에서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개념, 화자의 지시체라는 개념은 우리가 화자의 언어, 또는 그 어떤 언어에서의 의미론이 아닌 언어 행위에 대한 개념이라는 뜻에서 화용론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론적 개념이 아닌 화용론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대명사화의 의미론에 있어서 분명히 유의미하다. 따라서, 이 개념은 대명사의 지시체를 설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뒷문으로 의미론에 진입한다. 이것은, 올바르고, 화자의 지시체의 개념에 더 큰 의미론적 중요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가 반대하고 있었던 견해 - 러한 모호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언어 의미론의 일부라는 견해 - 에 더 큰 난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나는 - 긴 논의에 비해 작은 결론이지만 - 이 강의 초반부에 인용되었던 두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고전적으로 빈 용어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지시체를 가지게 되는 세 번째 사례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지시체’를 언어 의미론에서의 지시체를 뜻하는 한 그런 사례는 없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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