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6강

이어집니다.

드디어 군 생활 목표 중 하나였던 Reference and Existence 번역을 끝내내요. 각주를 포함한 완성판은 초고를 다시 쭉 읽어보면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교정한 뒤 요약정리와 함께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번역하는 게 꽤나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영어도 한국어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 해서 보는 입장에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간에 하는 입장에서는요. 가능하면 번역 작업을 하나 더 해보고 싶은데, 혹시 추천하시는 문헌이 있을까요?

6강

1973.12.04

저번 시간에 나는 빈 단칭 기술구가 때때로 지시체를 가질 수 있다는 도넬란의 견해를 논의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론적 장치 - 특정한 언어 현상을 들어 그것이 의미론 이론을 반박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시험대 - 를 개발했는데, 나는 이것 자체만의 내적인 흥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당 의미론 이론이 적용된다고 가정되는 가상의 언어를 상상하고, 이 가상의 언어에서 그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여겼던 그 현상이 나타나는지 살펴라. 이는 사실 영어에 적용되어야 할 시험과 같은 것이지만, 특정 언어 현상으로부터, ‘이로부터 우리는 이 이론이 영어에 있어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라면서 특정 이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덜 성급하게 이끌어내는 심리적 효과는 있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해당 이론이 옳을 언어가 무엇일지, 그 언어가 우리가 생각했던 바처럼 영어와 다를지 본다. 결과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다를 수도 있다. 도넬란에 관한 내 논의는 이 장치를 묘사했을 것이다.

다음 주제로 나아가기 전에, 도넬란의 논문에 대해 몇 마디 말만 남기고 가겠다. 첫째로 나는 구체적으로 도넬란 본인에 관한 다소 유명한 한 가지 논점을 언급할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Partee(1970)와, 내가 믿기로 Stalnaker(1972)에서 옹호되었다. 이 견해는 도넬란의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의 구분이 친숙한 대언de dicto가 대물de re 사이의 구분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저번 강의에서, 비록 도넬란의 구분이 의미론적이거나 모호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구분을 받아들였다. 만일 시간이 충분했다면 나는 이 두 사용이 양립불가능하지 않고 철저하지도 않으며, 중첩된 경우와 경계선에 서 있는 사례를 허용한다고 논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는 것 외에는 여기에 시간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 구분이 철저하다고 여기는 것은 도넬란의 실수 중 하나이다. 러셀과 프레게와 달리, 그는 간접 담화 보고indirect discourse report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진하게 화자가 말한 것에 대한 보고에서, 간접 담화 보고를 하고 있는 사람 또한 기술구를 지시적으로 또는 속성적으로, 또한 반드시 화자가 사용한 방식 그대로 사용한다고 여길 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존스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는 키가 크다고 말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지시적으로도 속성적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존스가 말한 것을 보고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심지어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존스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나는 단일하게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심지어 (‘논리학자’ 대신 ‘독심술사’를 넣어 보라) 이러한 술어는 비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존스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에 대해 그가 키가 크다고 믿는다’와 같은 대물적 경우는 어떠한가? 러셀은, 우리가 알다시피, 이 발화를 한정 기술구의 범위scope 개념을 통해 이를 분석했을 것이다.99 그러나 내적 범위inner scope 해석이 도넬란의 속성적 사용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그리고 여기서 이 구분은 물론 적용될 수 없다), 대물 해석은 도넬란의 지시적 사용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제 지시적-속성적 구분은 적용되지만, 대언적 경우는 둘 모두일 수 있다. 화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 생각하고, 존스는 그에 관해 그가 키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 사용은 지시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화자는 어쩌면,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가 누구일지에 대해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존스가 학계 최전선에 있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키가 크다고, 또한 그 중 특정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 믿는다고는 (그 사람을 만났을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존스는 그가 키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는 존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에 대해, 그가 키가 크다고 믿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화자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의 사용은 속성적이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를 제외하고는, 기술구의 지시체를 결정할 어떤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구분을 간접 담화의 경우, 또는 일반적으로 범위의 개념100에 따라 분석되는 대물과 대언 구분의 사례에 이 구분을 적용하는 것은 틀렸으며, 우리는 이 구분에 대한 별도의 독립적인 논증이 없다. 이 구분을 위한 논증은 다른 곳에서 제시되어야 하며, 이 경우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를 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과, 화자가 말하고 있는 사람인 존스가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을 혼동해서만 적용할 수 있으며,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화자의 지시체에 관해, N&N에서의 고유 이름에 대한 논의와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름의 의미론적 지시체가 화자에서 화자로 연쇄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처럼, 아마도, 기술구의 화자의 지시체 또한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방 한구석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될 수 있다. 만일 그가 다른 방식으로 특정되지 않는다면, 설령 이 기술구가 그렇게 특정된 사람에게 들어맞지 않더라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퍼질 수 있다. 화자의 지시체는 그렇다면 의미론적 지시체의 경우처럼 연쇄적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언어 공동체에서 어떤 특징을 통해 말해지는 사람으로서 특정할 수 있고, 같은 방식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 단순한 화자의 지시체의 경우 이 사슬이 아주 길게 이어질 확률은 작지만, 가능은 하다. 특히 이는 한정 기술구의 경우에서 화자의 지시체가 의미론적 지시체와 다를 때 일어날 수 있다.

고유 이름의 화자의 지시체가 너무나도 관습적인 것으로 되어 버려서 특정 화자의 공동체에서 그것의 의미론적 지시체가 되어 버리는 경우 또한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의미론적 지시체를 결정하는 화자의 보편적 의도와 화자의 지시체를 결정하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 의도를 구분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새로운 화자의 지시체로써 시작했던 것이 반복적으로 채택되면서, 화자의 관습적인 행동으로 굳어 버릴 수 있다. 화자가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러한 행동이 너무나도 관습적인 것으로 되어 버려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이 화자의 “보편적 의도”라 불릴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이 중 몇 가지 경우의 경우 화자의 지시체가 의미론적 지시체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충분히 넓은 공동체에서 일어났다면, 언어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록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화자가 명시적으로 새로운 언어 사용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나는 고유 이름의 지시체에 대한 언어적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제의 해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이 다양한 상황에서 내게 제기한 문제이고, 다소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금 기술된 가상의 사례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할 수 있다.

한 가지 예시는 개럿 에반스의 그 유명한 ‘마다가스카르‘ 사례이다. (Evans 1973: 또한 Kripke 1972/1980: 93, 96-97, 163을 볼 것) 이는 내 ‘산타클로스’ 사례와 비슷하다.101 에반스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실제로는 물론, 그와 비슷한 무언가)는 원래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분의 이름이었지만, 마르코 폴로는 이 이름을 잘못 사용하면서, 그가 아프리카에서의 용법을 따라, 우리가 현재 ‘마다가스카르‘라 부르는 섬의 이름으로써 사용한다고 잘못 생각했다. 그렇다면 원래, 이 사용에서 화자의 지시체만이 있고 의미론적 지시체는 없다. 결국 그 섬을 ’마다가스카르’라 부르는 것이 관습적으로 되어 버렸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이러한 지시가 의미론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었다.102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펼치도록 하겠다. 나는 저번 강의에서 한정 기술구의 관한 문제에서 러셀을 변호하는 인상 - 적어도 한 명의 질문자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 을 남겼다 보니, 여기에서는 러셀의 이론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해 보겠다. 의문은 정확히 화자의 지시체의 전달이 한정 기술구의 사용에 포함될 수 있는 방식 - 적어도 주로 러셀이 변호되는 방식에서 - 에서 떠오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러셀에 반대해서, 한정 기술구는 단일성 조건이 만족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누군가 ‘그 탁자는 예쁘다‘, 또는 ‘그 탁자를 여기에 가지고 오라‘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물론 우주에 단 하나의 탁자만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참인 것으로 보인다.

정석적인 러셀주의적 대답은 화자는 덧붙일 수 있는 술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야 하며, 그것은 또한 ‘그 탁자‘라는 절을 만족할 것이다. 어쩌면 이는 ‘방의 저쪽 구석에 있는 탁자‘ 또는 ‘이러저러한 별도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탁자‘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가적 특성은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이해되고 있다.103

화자의 지시체와 의미론적 지시체에 관한 고려 사항들은 러셀에 대한 옹호와 비판 모두에게 사용되었던 또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비한정 기술구와 ‘그 탁자’와 같은 절의 대용적 사용에 관한 사례들이다. 영어에서의 한정 기술구의 한 가지 특성은, 대명사를 통해 돌이켜 지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적어도 한 가지 예시 때문에, 약간의 회피를 위한 ‘거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신 한정 기술구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 해변가를 걷고 있었고 그는 깡통을 주워들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대신 ‘누군가 해변가를 걷고 있었고 그 사람은 깡통을 주워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우주에 오직 한 명의 사람만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뜻했는지에 관한 추가적 술어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러셀의 비한정 기술구와 한정 기술구에 대한 분석 모두가 반박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누군가 해변가를 걷고 있었고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고 했을 때 이에 대한 분석은 확실히 다음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라고 말할 때 나는 ‘누군가'이라는 절에 의해 지시되는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 혹은 ‘그'는 단순히 같은 지시체를 돌이켜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과 언어학계 모두에서 많이 논의된 경우이다. ‘누군가'과 같은 비한정 기술구는 단순히 존재 양화사로 분석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 이는 이름과 같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누군가를 지시하는 지시적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가? 철학사에서, 예를 들어, 특히 스트로슨은 ‘누군가'는 어떤 뜻에선가 지시해야 한다고 논증하며 (Strawson 1952). 이 견해를 설명하는 찰스 채스테인의 비교적 최근 논문이 있다 (Chastain 1975).104

존재 양화사 견해에서 제시되는 통상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누군가 해변가를 걷고 있었고 그 사람은 돌을 주워들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를 단지 아주 긴 존재 양화로 간주할 수 있다: ‘x는 사람이고 x는 해변가를 걸었고 x는 돌을 주워들게끔 하는 x가 있다':

(Ex)(x는 사람이다 ^ x는 해변가를 걸었다 ^ x는 돌을 주워들었다)

여기서 ‘그 사람'은 우리가 이전에 사용했던 존재 양화사에서와 같은 변항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쓰였다. 여기서 그러한 단일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러셀에 대한 반박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략된 술어가 단순히 x와 동일하다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는 몇몇 논의에서 무시되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물론 러셀의 한정 기술구는 그 자체로 변항을 포함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은 이전의 양화사에 종속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는 안 되는가? ‘그 사람'은 x가 최초의 존재 양화사에 종속된 변항일 때 ‘y가 사람이고 y=x이게끔 하는 그 y’으로 된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기 위해, 우리는 이전의 견해에 반대해서 ‘그'와 ‘그 사람'의 정확히 같은 사용법이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 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땅에서 누군가 밀렵한다면 그는 처형될 것이다', 또는 ‘내 땅에서 누군가 밀렵한다면 그 사람은 처형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시하고 있는 특정한 사람은 없지만, ‘그 사람'의 쓰임은 단순히 최초의 양화에서 사용된 변항을 가지고 온다.105

불행히도 이는 모든 사례를 정리해 줄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 해변가를 걸었고 돌을 주워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니다. 그는 돌을 주워들지 않았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첫 번째 화자에게 대답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와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지금 문제되는 견해에서, 어떻게 그의 말이 이러한 직관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가? 뒤따르는 한정 기술구가 있는 비한정 기술구의 존재 양화사적 분석은 ‘x는 사람이고 x는 해변가를 걸었고 x는 돌을 주워들지 않았게끔 하는 x가 있다'여야 한다.

문제는, 물론, 이것은 첫째 진술과 전혀 모순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둘 모두가 참일 수 있다. 한 사람이 해변가를 걸었고 정말로 돌을 주웠으며, 또 다른 사람이 해변가를 걸었고 돌을 주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치와 같이 모든 이러한 ‘그'의 쓰임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전의 변항을 집어내는 것이라는 견해를 옹호한 사람들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우를 분석해내지 못한다 (Geach 1962). 그들이 제시하는 분석에서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스트로슨의 사례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A: 누군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B: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뛰어내렸다.

(Strawson 1952: 187)

이에 대해서는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이 대답이 첫째 사람이 말한 것과 모순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첫째 사람의 말은 ‘x가 사람이고 x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게끔 하는 x가 있다':

(Ex)(사람임(x) ^ 떨어짐(x))

여기서 B는 ‘그는 떨어져지 않았다; 그는 뛰어내렸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한 분석은 무엇인가? 유비적으로: ‘x가 사람이고 x가 (떨어지는 대신) 뛰어내렸게끔 하는 x가 있다':

(Ex)(사람임(x) ^ 뛰어내림(x))

이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물론 우리는 말해지는 사람이 더 잘 특정되도록 둘째 진술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진'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화자의 대답은 철저히 모순된 진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이 존재 양화사적 분석과, 한정 기술구에 대한 그 어떤 러셀주의적 분석에 반대되고 있다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경우에서 ‘누군가 해변가를 걸었다'는 단칭어, 지시하는 ‘누군가'를 포함한다는 견해를 옹호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이러한 모순을 포함하는 사례를 강조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목표에 가장 적합하다. (스트로슨이 제시한 사례는 모순을 포함하지만, 그는 여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명사를 골라 ‘그’ 또는 ‘그 사람’을 쓸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 주로 이것만이 지적되었다 - 그 자체로는 별다른 증거가 되지 못 한다. 이는 우리가 ‘내 땅에서 누군가 밀렵한다면 ...’으로 시작했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고, 여기서는 명백히 특정한 사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존재 양화사적 분석을 옹호하고자 했다면, 다음과 같은 노선을 취했을 수 있다. 첫째로, ‘누군가 해변가에서 걸었다’의 단칭어 분석은 - 이 점은, 예를 들어 Chastain(1975)에서 명시적으로 표명된다 -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이 해변가를 걷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발언 ‘누군가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을 거짓으로 만들 것이다.106 ’누군가’는 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 - 존스라고 하자 - 을 지시해야 하며, 따라서 이 진술은 만일 존스가 해변가를 걷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이는 올바른 것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군가 해변가를 걸었다’ 라고 말하고, 염두에 두었던 그 사람이 해변가를 걷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에게 ‘글쎄, 누군가 정말로 해변가를 걷기는 했지만, 당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 그것은 틀렸다. 당신이 말한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보일 터이다.

따라서 일정 정도의 절충안은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또는 애초에 이것을 절충안이라고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적 분석을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일부 용어, 예를 들어 ‘누군가‘와 같은 용어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시, 대명사화에서, 또는 ‘그 사람‘의 사용에서 존재 양화가 일어났고, 또한 이를 만족시킨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사람이 있을 때 (즉, 화자의 지시체 - 이 상황에서는, 화자가 그의 존재 양화를 참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그것인 ‘그 사람’의 화자의 지시체), 이 사람은 화자 본인에 의해서건 다른 이후의 화자에 의해서건 대명사를 통해 돌이켜 지시될 수 있다는 것이 규약convention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다 -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뛰어내렸다’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원래 화자의 존재 양화를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원래 화자와 모순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진술은 첫째 진술이 옳았음에도 옳을 수 있는 또 다른 존재 양화일 뿐이지, 원래 화자가 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내가 저번 시간에서 언급한 대명사화 장치를 사용한다면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대명사가 대화에서 화자의 지시체를 지시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이 경우에서, 유비적으로, 대명사는 화자가 비한정 기술구를 사용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을 지시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적 분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화자가, 대화 속에서 ‘그‘로써 돌치켜 지시될 수 있는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직관을 정당화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제안은 꽤나 명백히 옳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나는 다른 문제 또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논의사에서 양쪽 모두가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상당히 이상해 보인다. 논쟁에서 한 쪽은 항상 우리가 시작했을 때 사용했던 같은 변항을 계속 가지고 간다고 말하고, 다른 한 쪽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시하는 단칭어가 있다고 말하며, 이런 경우에서 존재적 분석은 반드시 틀렸을 것이라 말한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올바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이를 의미론적 지시체와 화자의 지시체의 문제로 만드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예상했던 대로, 이 강의에 할당된 시간을 초과할 것 같다. 이 강의를 끝낼 가능성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나는 그냥 그러기로 하겠다. 이것으로 이 개념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말해야 하는 것들을 끝내겠다. 화자의 지시체가 어떻게 의미론적 지시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 한 문장에서만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말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가 이번 강의에서 말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부정 존재자에 대한 마지막 문제였다. 단수 부정 존재 진술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는 지금까지도 나를 혼란케 하고 많은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는 문제이다. 내 견해에서 이 문제는 완화되지 않고 심각해진다. 왜 그런가? 원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을 뜻할 수 있는가? 그는 특정한 누군가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내 견해에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논의사에서 술어를 가지고 부정 존재 진술을 만드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편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북극에는 표범이 없다‘ - 이는 단지 특정 술어의 비어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비슷하게, ‘유니콘은 없다‘ - 이것은 완벽하게 문제가 없다 (이것이 예시로 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럴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비존재가 귀속된, 셜록 홈즈와 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유니콘이 없다‘라는 진술에서 빈 외연을 갖는다고 주장된 특정한 속성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내가 유니콘에 관해 말한 것에 누군가 거부감을 느낀다면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다. 만일 실제 세계에는 예화자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어떤 종류의 가능한 동물이 없다면, 누군가 ‘유니콘이 없다‘라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정말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유니콘에 관한 견해를 막아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밴더스내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정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그 시를 읽은 뒤 동물원에서 밴더스내치를 찾는 아이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그림에서 실제 세계에 예화자를 가지지 않는 ‘밴더스내치’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동물은 없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단지 어떤 동물을 꾸며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밴더스내치에 대해 들은 바는 오직 그것들이 ‘분김는frumious’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뜻하건간에, 그뿐이다. 또한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 또는 ‘기피되어야’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확실히 그 누구도 밴더스내치가 어떤 동물일지, 누군가 밴더스내치가 없다고 주장할 때 어떤 종류의 동물종이 비어 있다고 주장되는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에게 밴더스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종에 대한 허구적 이름으로 도입된 특정한 종류의 술어에도, 단칭어의 경우만큼이나 심각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단칭어의 경우에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오직 이 경우에만 깊은 신경을 쏟았다.

두 가지 제안이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107 이 두 제안 모두 내가 이미 말한 것에서 이어진다.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단칭 존재 진술에서는, 사실 두 가지 아주 다른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논의사에서 이 둘은 동일시되었지만,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첫째로, 우리는 진정한 이름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참되거나 거짓되게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나폴레옹은 실제로 존재했다’ 또는 ‘나폴레옹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라고 (거짓되게) 말한다. 이 경우에서, 내가 전에 강조했던 바처럼, 프레게와 러셀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명백히 합당한 방식으로 그 대상에 대해 말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 상황은 가능하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았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나폴레옹의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폴레옹이 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나폴레옹에 관한 술어가 만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내가 아는 한 그가 해낸 유명한 일들은 여전히 일어났을 수 있으며, 문제의 술어는 여전히 만족되었을 수도, 어쩌면 다른 사람에 의해 더 잘 만족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나폴레옹이 존재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거짓되게 - 논리학지 웨이틀리가 조롱조로, 그렇게 가장했듯이 - 나폴레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나폴레옹은 그에게 ’그래서 당신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라고 꽤나 올바르게 말하고, 어쩌면 꽤나 올바르게, 적합한 곳으로 보낼 수 있다. ’나폴레옹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그가 실제로 가지는 속성만큼이나 나폴레옹에 관한 진술이다. 어떤 뜻에서는, 예를 들어 ’나폴레옹은 존재한다’가 나폴레옹에게 어떤 속성을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서처럼, 존재는 술어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간에 우리는 나폴레옹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에게 어떤 속성을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속성이 귀속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꽤나 불명료한 뜻에서 참인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이것이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나폴레옹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나폴레옹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거나, ’나폴레옹‘을 다른 모든 경우에서처럼 단칭어로써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것 - 나폴레옹 - 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있으며, 그것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108

빈이름이 사용된 경우는 꽤나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내 견해에서 추가적인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명백히 셜록 홈즈에 대해서)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확실히 셜록 홈즈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하고 있지 않다고, 적어도 일견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셜록 홈즈가 - 즉, 그 이야기 속의 사람이 - 정말로 존재한다고 거짓되게 믿는다면, 나폴레옹이 경우처럼 ‘허, 그래서 당신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고?’라고 말할 수 있는, 실제는커녕 가능한 개체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어떤 뜻에서,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은 그 진술이 참인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그 자체로 완벽히 용납불가능해 보인다. 한 진술의 분석은 그 진리값에 의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또는 어쨌든간에 우리는 그렇게 전제한다.109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의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그리고 내가 방금 말한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술어에 관해 꽤나 유비적인 논점이 수립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문제되지 않는 (유니콘과 밴더스내치 경우와는 달리) 빈 술어의 부정 존재자 또한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쩌면 북극에 기린이 없다고 참되게 말할 수도 있다. ‘북극권에 있는 기린’은 빈 외연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일상적 술어이다. 이런 경우는 문제없다. 그러나 ‘유니콘은 없다’는 내 견해에서 밴더스내치 사례와 유비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말했던 것 중 두 가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나는 내가 전에 개발한 허구적 캐릭터에 관한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허구적 캐릭터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이해된다면 이는 올바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허구적 캐릭터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한다. 따라서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 허구적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경우를 몰로의 경우와 잘못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몰로의 경우에서는, 내가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참되게 몰로라는 신은 없다고, 몰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는 햄릿의 경우와 같은 종류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에 있다. 만일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언어의 수준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내가 빈이름이 ‘햄릿’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가장이거나, ‘벌칸’의 경우 (사람들이 사실 이름이 올바르게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올바르게 도입되었다고 생각한 상황) 처럼 오류라고 말할 때, 이는 언어의 한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확장된 언어 수준은 허구적 캐릭터 또는 전설상의 대상에 대한 존재론을 도입하면서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 수준에서는 원래 빈 이름이었던 바로 그 이름을 사용한다. 이는 특히 허구에서의 가장에 관한 경우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언어 수준을 이전의 언어 수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가가 특정 사람을 지시하고 있을 때 그가 단지 그렇게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또는 가장이 그 자체로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이름하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가가 허구적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언어의 확장된 사용 때문에, 이 언어 수준은 종종 무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은 실제 오리가 아니다: 이는 장난감 오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햄릿은 실제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허구적 캐릭터일 뿐이다’ (‘햄릿은 실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허구적 사람이다’로 분석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 대상에 관해 말할 때 완벽한 타당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 햄릿은 단지 허구적 캐릭터일 뿐이다.’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 비록 이러한 종류의 진술을 하도록 하는 유혹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 우리는 사실 담론discourse의 종류를 혼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허구적 캐킥터는 있다. (다시, 이는 방금 언급된 전제에 따라, 신화적 신이 존재하는 뜻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몰로의 경우와 대조된다)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 햄릿은 단지 허구적 캐릭터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첫째로 햄릿과 같은 사람은 없다고 - 그 언어 수준에서 그 이름에 대한 지시체가 없다고 -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그러한 이름의 지시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이 작품은 허구적 작품이다. 따라서 이 때문에 햄릿이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있다. 비록 허구 속에서 어떤 이름은 그러한 사람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지만, 바로 그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한다.

허구적 캐릭터에 관한 존재론이 도움울 줄 수 있으리라 -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할 때,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 캐릭터가 단지 허구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꽤 이상한) 방식이라고 -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 햄릿은 단지 허구적 캐릭터일 뿐이다‘는 해석의 문제만을 설명할 뿐이다. 전반부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후반부는 ‘햄릿‘을 (특정 희곡의 존재에 의해) 정말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 비록 문장의 후반부는 전반부를 설명하려 하지만, 여기서 ‘햄릿’은 이중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110

나는 존재에 대한 부정을 ‘허구적‘ 또는 ‘실재적이지 않음‘을 뜻한다고 여기는 견해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다. 첫째로, 우리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자‘ 또는 ‘나폴레옹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자‘라고 말할 때, 우리는 ‘모세(나폴레옹)이 단순한 허구적 캐릭터였다고 하자‘를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그가 소수일 수 없는 것처럼 단순한 허구적 캐릭터였을 수 없다. 나폴레옹과 같은 위업을 쌓은 누군가에 대한 허구적 작품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이는 나폴레옹 자신이 이러저러한 상황 아래에서라면 단순한 허구적 캐릭터였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로, 내가 이 견해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추가적인 이유는 (나는 나폴레옹에 관한 논점이 이미 충분히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의심의 근원 또한 있다) 만일 내가 말했듯이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존재론을 도입하는 것이 언어의 확정적 사용이라면, 단칭 존재 진술(그리고 그 부정)은 이 확장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존재론이 없더라도, 우리는 완벽한 타당성을 가지고 햄릿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이를 말할 뿐인 일에, 적어도 직관적으로 볼 때 추가적인 개체가 필요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허구적 캐릭터 뿐 아니라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들도 있다. 이 경우에서 물론, 우리는 실제 허구적 캐릭터와 곤자고와 같이 단지 허구적으로만 허구적인 캐릭터를 구분하는 특수한 기호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햄릿과 같은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하지만, 곤자고와 같은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어쩌면 분류sortal가 먼저 주어지고, 그리고 무언가가 실제로 그 분류의 일원인지 여부를 ‘존재한다’를 가지고 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분류에 있어서,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한다’를 무언가가 허구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허구적 사람’이라는 분류가 있을 수 있고, 이 경우 우리는 (햄릿과 같은) 실제 허구적 사람과 (곤자고와 같은) 허구적 허구적 사람을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존재’의 오도적인 사용일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그러한 개체들이 일상적인 뜻에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대상과 추상적 대상 모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러나 이러한 제안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한지 아닌지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개체인지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명백히 용납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111

허구적 캐릭터라는 개념을 언어에 적용하기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A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아마도 샘 존스와 계산서의 사례를 질의응답 시간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나는 식당 사장에게 거짓말하면서, 샘 존스가 결제하러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허구적 캐릭터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샘 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아주 잘 대답할 수 있다.

따라서 단칭 존재 진술은, 한 종류의 개체를 다른 종류의 개체와 분류하는 존재가 아닌 술어로 분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인정하는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전체적인 존재론이 주어졌을 때, 내가 이러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한다.

다른 제안은 메타언어적 분석일 것이다. 어쨌든간에, 누군가 밴더스내치가 없다고 말할 때, 그는 ‘밴더스내치임‘이라는 술어가 그 어떤 동물에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또는 그와 비슷한 무언가 - 술어에 관한 메타언어적인 무언가 - 를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누군가 ‘벌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단지 ‘벌칸’이 빈이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왜 이러한 진술을 메타언어적으로 분석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한 가지 문제는, 다시, 이것이 반사실적 사용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벌칸은 존재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벌칸”이라는 이름은 비었다’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반사실적으로 이름 ‘벌칸’이라는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는 상황을 벌칸이 정말로 존재하는 상황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이름에 관한 경우에서, 나는 모세가 존재하지만, ‘모세’라는 이름이 이름으로써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더더욱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꽤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세와 같이 실제로 이름된 사람이 있는 경우에, 우리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자’, 또는 ‘모세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하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름 ”모세”가 지시체를 갖지 않는 상황을 고려하라’를 뜻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존재했고, 그 누구도 ‘모세’라고 이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쨌든간에, 반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빈 이름의 경우에는 메타언어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진술이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두 가지 분석을 제공한다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즉, 우리는 이름이 정말로 비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누군가는 어쩌면 우리는 적어도 빈 이름의 경우를 미봉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벌칸’이라는 이름이 단지 무언가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상황이 벌칸이 정말로 존재하는 경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염두에 두는 상황이 아니다. 어쨌든간에, ‘벌칸‘이라는 이름은, 한국어에서의 다른 고유 이름들처럼 여러 개의 대상의 이름으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벌칸‘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그것의 특정한 사용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천문학자의 저작 속 한 페이지를 가리키면서 ‘벌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이름의 그 사용은 지시체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 ‘벌칸‘이 다른 무언가의 이름일 수 있었다는 것은 이름의 그 사용이 지시체를 가졌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문제의 그 책과 같은 것은 ‘벌칸‘이라는 이름을 지시체를 가지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정취는 명료하지만 내게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은 방식으로, 만일, 예를 들어 (내 견해에서) 전체 역사가 같지 않았더라면, 또는 적어도 이 가상적 사용이 같은 종류의 지시체를 가지기 위한 충분한 조건이 같지 않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 이름의 (원래 언급된) 그 사용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서 이 이름의 사용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메타언어적 분석은, 다른 것들처럼 여러 문제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벌칸’ 또는 ‘산타클로스’라는 이름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한 페이지에 인쇄된 ‘벌칸’ 또는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을 보고, ‘저것은 이름인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아니다, 그 이름은 지시체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자라나고 있는 아이에게 ‘보라, 산타클로스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누군가 아이에게 그것을 말하기 위해, 그 아이는 산타클로스에 관한 무언가를 알아야만 했다. 그 아이는 단지 어떤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또는 심지어 그 이름의 특정한 사용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니다. 만일 그 아이가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고, 그의 믿음을 나중에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표현한다면, 그는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가 단지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는 그 인류학자와 같은 입장에 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학자는 확실히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지시체가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쉽다. 그러나 그 인류학자는 이 말을 통해 그 어린아이가 배운 것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사실 그는 어른이지만 여전히 산타클로스를 믿으며, 그를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지시하거나, 심지어는 같은 이름으로써 산타클로스를 지시하지만 ‘그래, 그 아이는 분명 “산타클로스”라는 용어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산타클로스”라는 용어를 지시체 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간접적 담화를 이런 방식으로 분석하고자 할 때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누군가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와 같은 신성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또는 ‘제우스가 존재했다고 믿었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무엇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는가? 문제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제우스’라는 이름이 지시체를 가진다 믿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특정한 경우에서는 이것이 참이라고 여기지만, 이는 오직 그리스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한, 그리스 사람들이 다른 이름을 사용하거나, 그들이 어떠한 이름도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가 존재했다고 말할 때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만일 우리가 이러이러한 무신론자 그리스인이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할 때 우리는 이 무신론자 그리스인이 ‘제우스’라는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그 어떠한 이름도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이 진술을 안전하게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와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어떤 이름이 존재하는 개체를 지시한다고 믿었다’라고 분석할 수도 없다. 이는 문제를 돕기보다는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먼저 ‘제우스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에 대한 분석을 먼저 제공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이를 그리스 사람들의 믿음 내용으로써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인이 그 지시체가 존재한다고 믿은, “제우스”와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어떤 이름이 있다‘에서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이 내용을 믿음 맥락의 범위 밖으로 꺼내올 수 없다. (그 외에, ‘제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정말로 ‘제우스’와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어떤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를 뜻하는가?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 수 있는가?) 따라서, 이 분석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가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와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어떤 이름이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리스 사람들은, 만일 ‘제우스’와 같은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면 ‘제우스’라는 이름과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어떤 이름이 지시체를 가진다고 분석되는 그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그들은 ‘제우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과, 일상 진술 속에 메타언어학적 분석이 숨겨져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피하려는 내 일반적 성향 때문에, 나는 이러한 접근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어쨌든간에 우리가 실제로 비지 않은 이름을 사용할 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빈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도, 이름은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고 있다는 반론은 중요해 보인다.

나는 이쯤에서 포기하고 물러나려는 특정한 경향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어떤 분석도 제공하려 해서는 안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신, 일단 내가 추측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진술이 우리의 담론 속에 들어올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해 보려 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중요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 - 어쩌면 이 분야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 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누군가 산타클로스가 누군지를 안다면 그 사람은 산타클로스는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지시체가 없을 때 그리고 오직 그때만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는 곧장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로써 의미하는 것이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후자의 진술은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무엇을 지시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지만 오직 그것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다소 약한 것만을) 아는 사람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강의 이후의 질의응답 시간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질문 하나를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했던 것을 그 사람들조차 이를 잊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가 큰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여기서 나는 실제 신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그리스 사람들의 믿음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또는, 누군가, 예를 들어 존스가 이야기를 읽고 그 속의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들이라고 착각한다면, 존스가 셜록 홈즈가 대단한 탐정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그는 홈즈가 실제 사람이라고 잘못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만일 ‘셜록 홈즈'가 어쨌건간에 단순히 가장적 이름이라면, 존스의 믿음이어야 할 명제 전체는 단지 가장적 명제일 뿐이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단지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이를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을 이용해서, 그가 허구적 대상을 실제 대상과 착각했다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독립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 이야기는 셜록 홈즈가 위대한 팀정이라는 것을 포함한다‘와 같은 경우에 필요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이야기는 무엇을을 포함하는가? 이야기 속에 셜록 홈즈가 위대한 탐정이라는 명제는 없었어야 한다. 나는 이를 통해 (여느 사례에서와 같이) 어떤 종류의 메타언어적 분석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존재한다고, 그리고 참이라고 주장되는 명제의 종류에 관해 말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셜록 홈즈에 관한 참인 명제, 에를 들어 그가 위대한 탐정이라는 명제가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벌칸이 붉다고 생각했던 천문학자는, 먼저, 그가 ‘벌칸‘이라는 이름을 통해 언급하는 벌칸이라는 (아마도, 수성의 섭동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리고 벌칸이 붉다는, 내가 벌칸에 관한 명제라고 말할 명제가 있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이는 내게 약간 모호하고,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한테도 그럴 것이다. 나는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이름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 천문학자는 벌칸이 붉다고 말하는, 벌칸에 관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라는 문장에서, ‘벌칸에 관해‘라는 절은 특수한 종류의 유사-내포적 사용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내가 내 견해를 다른 견해에 비해 선호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그다지 자신이 없는 분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진술은 천문학자가 ‘벌칸은 붉다‘라는 문장이 참인 명제를 표한한다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성급하게 이 진술을 메타언어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내용을 정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견해는 다른 모든 곳에서 메타언어적 분석이 맞닥뜨리는 같은 종류의 문제를 맞닥뜨린다. 따라서: 그는 벌칸이 붉다는 참인 명제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틀렸는데, 그 명제가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참인 명제가 없기 때문에 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로, 그가 벌칸이 붉다고 말할 때, 어떤 뜻에선가 그가 ‘벌칸은 붉다’라는 말을 통해 표현하는 참인 명제가 있다고 잘못 믿기 때문에 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올바르다. 둘째로, 우리는 어쩌면, 비록 성급할지언정 이를 거짓이라고 말하거나, 다른 경우와 동일시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더욱 그럴 수도 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예를 들어, 붉은 행성은 관련된 천문학 이론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을 알기에, 벌칸이 붉다는 것을 벌칸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거부할 수 있다. 따라서 벌칸이 붉다는 명제가 없거나, 그러한 명제가 있다면 이는 거짓이다. 어쨌든간에, 벌칸이 붉다는 참인 명제는 없다. 이때, 우리는 더해서: ‘글쎄, 나는 벌칸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어찌 되었건 벌칸이 붉지 않다는 것은 안다. 나는 그러한 행성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그래도 붉지는 않다.’ 누군가는 비슷하게, 밴더스내치라는 동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찌 되었건 자신은 북극을 철저하게 탐사했으며, 밴더스내치였을 수 있을 만한 그 무엇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북극에는 밴더스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북극에 밴더스내치가 없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부정하고 있는, 밴더스내치가 북극에 있다는 명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정말로 뜻 없는 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밴더스내치는 단순히 북극에 없거나, 또는 그 어떤 곳에도 밴더스내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밴더스내치라는 동물의 종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밴더스내치가 있었을 수 있지만, 밴더스내치가 없다는 것이 사실로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밴더스내치가 있었을 어떤 상황에 관해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쓰임을 확장해서, 예를 들어 ‘밴더스내치가 없다’를 ‘밴더스내치가 (북극에, 또는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는 참인 명제가 없다’를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비슷하게, 우리는 셜록 홈즈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른 채, ‘셜록 홈즈가 있건 없건간에, 그는 여기 방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설명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기도 한첨 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정적이고 충분한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다시 ‘셜록 홈즈가 이 방에 있다는 참인 명제가 없다’라고 말해야 하며, 여기서 화자는 ‘셜록 홈즈‘라는 가장된 이름을 이해하고, 따라서 ‘-다는‘ 절을 통해 이 약정적 명제를 지시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단칭 존재 진술에 적용하려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모세는 존재한다’, 또는 ‘셜록 홈즈는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모세가 존재한다는 참인 명제가 있다’ 또는 ‘모세가 존재한다는 참인 명제가 없다’, 또는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는 참인 명제가 있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 분석은 우리가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는 참인 명제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명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끝인 반면, (내 견해에서) 모세가 존재한다는 그러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명제는 참이라는 것을 안다는 유별난 특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모세가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사람은 그에게 - 모세가 신화 속의 개체라고 (즉, 모세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112 - ’그것은 거짓이다. 너는 틀렸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뜻에선가 그는 거짓이라는 개념의 쓰임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북극에 밴더스내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셜록 홈즈가 이 방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에서 쓰임은 이미 확장되었다. 모세가 존재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가 참인 명제를 발화하고 있다고 믿었고, 나는 그가 실제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부정한 사람은, 그러나, 내 견해에 따르면 - 아마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가 올바른 철학자였다면 - 그 명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발화될 참인 명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 없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 제시된다. 때때로 우리는 ‘거짓이다’를 주어진 종류의 참인 명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다. 존재 진술의 경우, 만일 참인 명제가 없다면, 애초에 그러한 명제 또한 없다. 때때로, 예를 들어, ‘북극에 밴더스내치가 있다‘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실제로 어떠한지를 모를 수 있다. 이 경우 밴더스내치가 있다는 참인 명제가 없거나, 밴더스내치와 같은 동물이 있지만, 그 중 그 무엇도 북극에는 없는 것뿐일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 문제의 명제는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경우를 뭉뚱그리며, 부정 존재에 쓰임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부정 존재 진술은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는 참인 명제가 없다는 것을 말하며, 애초에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정말로 없다.

어째서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말을 사용하지 않는가? 나는 그 이유를, 우리는 철학자들이 아니며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내 분석과 같이 복잡한 것 대신 두 가지 경우를 같은 어구로 포섭할 수 있는 방식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우리는 ‘보라, 북극에는 그 어떤 밴더스내치도 없다’라는 말을, 밴더스내치와 같은 동물 종류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음에도 사용하는 듯 보인다.

또 다른 가능성은, 물론, 내가 이 점에서 틀렸다는 것이고, 나는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견해에 굉장히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본 다른 누구도) 아직 더 나은 견해를 들고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빈이름에 관한 마지막 문제에 대해 러셀이 “지칭에 관하여” 말미에 말했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무엇이 올바른 이야기이건, 우리가 이전에 기대했었던 단순성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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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하고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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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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