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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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1. 20

저번 시간에서 나는 ‘햄릿은 존재한다'와 같은 진술이 거짓이 아닌 참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경우에 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했다. 오늘 나는 그 설명에 쓰인 개념들의 응용에 관해 말할 것이지만, 우선 짤막하게 저번 시간의 내용을 되짚고 넘어가겠다.

저번 강의에서의 주된 내용은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이었다. 그 사이 들은 몇몇 논평을 듣자니, 나는 내가 말한 것이 전부 정확하게 이해되었는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가지로, 내가 그토록 그 반대를 견지하려고 애썼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존재의 어떤 약한 의미, 또는 어떤 종류의 흐린 영역, 아니면 “허구 속에서의" 존재, “상상 속에서의"존재 또는 그와 비슷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에 관해 말할 때, 그 이점이 무엇이 되었든 상기한 그 무엇이든지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햄릿은 허구 속에 존재한다'를 ‘허구적으로, 햄릿은 존재한다'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뜻에서, 허구적으로,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 또한 물론 참이다. 이것들은 이야기 안에서의 일에 관한 보고이다. 이런 종류의 쓰임에서, ‘햄릿은 존재한다'는 존재에 관한 별개의 영역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되고, 진술 φ이 ‘이야기는 φ이라고 말한다' 또는 ‘이야기는 어떤 뜻에선가 φ임을 암시한다'에 걸맞는 진리 조건을 가진 채 사용되는 생략된 진술로 여겨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 햄릿은 존재하지만, 그러나 또한 이 뜻에서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다 - 이 뜻에서 ‘햄릿은 실제 사람이다’이야말로 참이다.

그러나 내가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첫째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양화 - ‘많은 영국 허구에서의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었다' 또는 (만일 사실이라면)‘그 어떤 문예 비평가도 다루지 않는 17세기 허구적 캐릭터가 있다'(그리고 아마도 문예 비평가들의 열성적인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일 것이다) 와 같은 - 에 관해; 또한 우리가 하는 많은 종류의 대상 진술, 예를 들어 특정한 문예 비평가가 데스데모나를 존경한다는 것과 같은 진술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허구 속에서 참이 아니며, 그 어떤 특정한 영역에서도 참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참이며, 사람을 그 존재가 경험적으로 주장되는 종류의 개체와 연결시킨다. 유일하게 허구적 캐릭터가 그 외의 것과 다른 종류의 존재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방식은 국가가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존재를 가진다고 말할 때와 같이, 더욱 추상적인 개체들이 더욱 구체적인 것들과 다른 종류의 존재를 가진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만일 이것이 존재의 다른 뜻이라고 간주된다면,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도 또한 다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혼동을 야기한 것은 여기에서 ‘실제real‘라는 말을 사용한 방식이다. 나는 허구적 사람과 “실제” 사람을 대조했다. 만일 허구적 사람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쨌든간에 더욱 약한 종류의 존재가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허구적 캐릭터에 관해 말할 때 ‘실제’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사용거나, 이런 비교를 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더 올바른 비교는 ‘실제 오리’와 ‘장난감 오리’ 사이의 대조일 것이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그러나 장난감 오리가 실제 오리가 아닌 것처럼 - 그러나 물론 이것은 장난감 오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67 - 나는 허구적 사람이 ‘실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그러나 이것은 물론, 그가 그 자체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미로서 실제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 장난감 오리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장난감 오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사실 장난감 오리마저 아닐 수 있는 것처럼, 햄릿은 실제 허구적 캐릭터이며, 반면에 곤자고와 몰로는 둘 모두 그 어떤 종류의 개체이건 실제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저번 시간에 설명했던 몰로에 대한 견해가 맞다면 몰로라는 허구적 또는 전설적 개체는 없으며, 어쩌면 실제로 곤자고라는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는 있을지언정 그런 허구적 캐릭터는 없다. 만일, 내가 지금, ‘스나조’라는 약정적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의 이름으로서 도입한다면, 물론 이는 내가 방금 전에 꾸며낸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한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는 없고, 그러한 허구적 캐릭터 또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뜻에서 실제 개체와 허구적 개체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을 도입하는 것은, 적어도 내가 제시하는 그림에서는 어떤 의미에선가 언어의 파생적 또는 확장적 사용이다. 우리가 ‘햄릿’이라는 이름을 처음 도입할 때는 오직 지시의 가장만 있을 뿐이며, 지시체는 없다 - 마침표. 그러나 우리는 곧장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에 의해 지시체를 찾아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원한다면 ‘이 이야기는 허구적 캐릭터에 대해 말한다‘라고, 또는 우리가 햄릿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햄릿’이라는 말이 실제로(단지 “이야기 속에서“가 아니라) 지시체를 가지는 확장된 용법과 ‘햄릿’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을 원래의 그림 - 햄릿이 존재하지 않을 - 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 개체와 허구적 개체 사이를 대조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 사람과 같이, 허구적 작품이 아니라면 우리 주위에 있을 그런 종류의 개체가 있다. 또한 허구(또는 신화)의 산물인 종류의 개체가 있다 (이를 K 종류의 개체라고 하자). 어떤 이야기가 K 종류의 약정적 개체에 관해 쓰여졌을 대, 우리는 “K 종류의 허구적 개체”, 또는 “허구적 K들”에 관해 말한다 - 예를 들어, 허구적 사람들, 허구적 오리들, 또는 무엇이든지. 그러나 또한 허구적 엘프들, 용들, 밴더스내치들 따위 또한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허구적 개체는 대체로 실제 사물과의 연상을 통해 영감을 얻어 만들어지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이야기 속에서 그것들이 어떠할지에 대한 구체화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햄릿’, ‘프로도’와 같은 특정한 허구적 개체를 지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호빗, 밴더스내치와 같은 특정한 허구적 종에 대해서도 지시할 수 있다.

허구적 절차는 또한 되풀이될 수도 있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고, 연극 속에서 연극이 상연될 수 있다. 이것이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 등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허구적 개체와 대조하면서 실제적 개체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더욱 또는 덜 흐리게 존재하는 개체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몇몇 점에서 ‘실제 오리’와 ‘장난감 오리’의 경우와 같다. 이것은 이 패러다임에 만족한다. 우리가 ‘실제 개체’라고 부르는 개체는 우리가 그 어떤 이야기도 듣기 전에 이미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모방하고 이야기를 말할 때, 우리는 같은 종류의 허구적 개체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허구적 허구적 개체는 이야기 자체가 이야기에 대해 말할 때 온다. 그리고 비록 웬만해서 이런 반복은 너무 멀리까지 가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무한히 계속해 나갈 수 있다.

나는 언어가 지시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물론, 만일 허구적 작품 또는 이야기가 사람과 같은 첫째 종류의 일반적 개체라면, 지시체가 추가로 제공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나폴레옹에 관한 소설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또는 조지 워싱턴이 체리나무를 베는 이야기에서의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쓸 때, 우리는 이 이름이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이름이 나폴레옹, 또는 조지 워싱턴 본인을 지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일반적 사람에 대해 그의 어떤 (실제) 속성을 존경하지만 다른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이야기에서 비춰진 나폴레옹을 존경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을 존경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반대 모두 가능하다. (그리고 물론, 실제로, 나는 실제 또는 이야기 속에서의 그의 몇몇 속성에 대해서 존경하지만, 다른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허구적 캐릭터의 경우에서, 술어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그것들이 등장하는 허구적 작품에 의해 참이 되는 방식이고, 또는 “철저히 밖에서의out-and-out" 뜻에서이다. 허구적 캐릭터 프랭크 프랭클린은 F.R.리비스에게 한 뜻에서 존경받았지만 다른 한 뜻에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저번 질의응답 시간에 좋은 예시가 나왔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만일 한정어 ‘허구적으로’ 없이 이 술어가 철저히 밖에서 이해된다면 그것은 소설이 최초로 쓰여진 년도에 창조되었다. 만일 이 술어가 한정어 ‘허구적으로’와 같이 쓰였다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그 해에 창조되었으며, 이 둘은 다른 년도일 수 있다.

나폴레옹의 경우, 물론, 어떤 술어든 (말이 된다면)68 주로 역사적으로 적용되는 술어로서, 철저히 밖에서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고, 서술이 이야기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이번 시간에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들을 지시의 문제가 아닌, 지각적 동사perceptual verbs와 시각의 대상objects of sight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허구적 캐릭터의 문제보다, 더 많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매우 복잡한 분야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가진다. 그럼에도, 내 생각은 내가 허구에 관한 대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서술에 관해 말해 왔던 것이 지각에 관한 철학적 논쟁의 특정 측면(특히, 에이어의 초기 저작에 대한 오스틴의 비판의 한 측면)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이 논쟁은 허구의 경우에서라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인식론의 문제와 뒤섞여 있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의 여지 없이 아는가? 외부 세계는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 말이다. 나는 이 복잡한 문제 전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인식론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려 하지 않으며, 만일 어떤 철학자가, 예를 들어, 우리는 절대 한 책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떤 인식론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고, 의자의 존재가 그 외의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뜻한다면, 그는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와 같은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69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어쩌면 과하게 요약해서 말해서 무어가, 예를 들어, 그가 감각-자료를 도입할 때 다루는 문제와 같은 종류이다. (그는, 물론, 인식론적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특정한 크기, 특정한 약간 날카로운 모서리각과 꽤나 곧게 뻗은 선으로 둘러싸인 모야을 지니는, 특정한 흰 색깔을 가지고 있는 한 조각의 무언가를 보았다. [그는 실제로 어떤 봉투를 보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 한 조각의 흰 색깔, 그리고 그것의 크기와 모양이 내가 실제로 본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것들, 색깔과 크기와 모양을, 감각자료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감각에 의해 주어지거나given 떠오른 것 - 나의 뜻에서, 주어진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내가 감각 자료라고 부르는 것을 감각상sensation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예를 들어, 특정한 한 조각의 색깔은 감각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각상’이라는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내가 그러한 색깔을 보았을 때, 우리는 확실히 내가 감각상을 가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가 감각상을 가진다고 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내가 그 색깔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다.

(Moore 1953: 30; 원문 강조, 각주 생략)70

그리고 나서 무어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보는 것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들어선 사람들 중 일부분은 여기서의 문제가 시각적 인상을 가지는 것, 또는, 말하자면 어떤 특정한 경험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법한지, 그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서 기술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인 것 마냥 말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아마 내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것들 중 그 무엇과도 관련이 없겠지만, 나 자신은 시각적 인상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거의 없다. 내게는 이 문제가 문젯거리로 보이지 않으며, 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가진다. 그러나 그 대답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이 문제는 이 시각적 인상, 또는 ‘감각자료’라고 불리는 다른 종류의 특별한 개체이건 상관없이,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보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각주 3을 보라)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무어는 단지 시각의 대상이 어떤 특별한 것이라는 꽤나 일상언어적 논증을 제시하려 한다. 그는 감각 자료가 물질적 대상, 또는 물질적 대상의 표면적 부분일 수 없다고 결론짓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 색깔 조각을 볼 때, 나는 봉투가 직사각형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사다리꼴 조각을 볼 수 있으며, 각각의 사람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다르게 생긴 조각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투는 단 하나의 모양만 가지고, 우리는 각각 다른 모양을 가지기 때문에, 색깔 조각은 봉투가 아니다. 무어는 이런 종류의 논증을 사용했다.

바로 이 종류의 논증이 내가, 특히 Austin(1962)과 Ayer(1940, 1967, 1969)에서 이루어진 에이어와 오스틴 사이의 유명한 논쟁에서 고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이어는 (1940: 19ff) 동사 ‘보다’(사실, 그는 ‘지각하다perceive’를 쓴다)는 두 가지 “꽤나 일상적인” 뜻을 가진다고 썼다. ‘보다’의 한 뜻에서 보인 것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만,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보다’의 또 다른 뜻에서 보인 대상은 (그 어떤 뜻에서도)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에이어의 두 번째 ‘보다’의 뜻의 명백한 예시는, 아마 진전섬망 상태에서 분홍색 쥐를 “보는”71, 또는 (청각으로 유비하자면) 목소리를 “듣는” 환자일 것이다.72

우리는 결국 이런 예시들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나는 에이어가 실제로 제시하고 오스틴이 논의하는 다른 예시들에 더욱 관심이 있다. 한 예시는 하늘에 있는 별을 보는 것이다 (Ayer 1940: 22-23). 명백히 에이어의 ‘보다’의 한 뜻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거대한 천문학적 대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것들이 존재해야만 하지만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경우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6펜스 동전보다 크지 않은) 하늘에 있는 작은 반점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에이어의 두 번째 뜻일 것이다). 여기서 보인 것은 어떤 뜻에서도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 예시로 돌아올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것이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어의 견해에 반대해서, 오스틴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말했지만, 주된 지점은 그가 에이어의 ‘보다’의 두 뜻 중 하나가 애초에 일상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보다‘와 ‘지각하다‘, 또는 그 무엇이든지에 있어서 보여진 대상이 그 어떤 뜻에서도 존재할 필요가 없지만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73. 그는 에이어의 볼드체 처리된 절의 사용을 강조하면서, 에이어가 이것으로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에이어가 어떻게 자신이 이런 조건들의 연언으로 ‘보다‘의 단일한 뜻을 특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단숨에 ‘이것은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와 ‘이것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이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가져야만 하는가?

(Austin 1962: 96, 각주 1; 원문 강조)

한 각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시에 대해 논의한다:

유령을 보는 경우는 어떠한가? 만일 내가 조카 조세핀이 언젠가 유령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비록 내가 이어서 내가 유령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유령이 그 어떤 뜻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뜻에서, 조세핀이 본 유령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유령이 그 어떤 뜻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견지하고자 한다면,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 나는 그들이 자신이 유령을 본다고 생각한다고, 그들이 유령을 보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Austin 1962: 95, 각주 1; 원문 강조)

아마도, 그는 분홍색 쥐와 환청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에이어가 제시한 또 다른 예, 다시증을 가진 사람이 그의 눈앞에 두 조각의 종이가 있다고 말하는 예시(Ayer 1940: 20-21)를 다루면서, 오스틴은 꽤나 다른 견해를 취한다. 그는 이 진술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인 무언가를 의미하도록 발화될 수 있지만, 이것이 ‘보다’의 다른 뜻을 도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진술은 우리가 ‘보다’를 일상적인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이 아니다. ‘보다’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록 우리는 무엇이 뜻해졌는지 이해하지만 달리 좋은 것이 없어서 실제로는 적합하지 않음에도 사용된다(Austin 1962: 89-91).

유비적 관계에 놓여야 할 오스틴이 제시한 또 다른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동물원을 구경하면서, 한 동물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사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또한, 내 사진첩 속 한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사자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자’라는 낱말이 두 가지 뜻을 - 한 의미는 한 동물을, 또 다른 한 의미는 한 동물의 사진을 -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명백하게 아니다. (이 경우) 모호함을 잘라내기 위해, 나는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에 더욱 적합한 낱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아는 한 그런 상황에서 제기된 문제는 없다.

(Austin 1962: 91)

나는 이 예시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이 예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후의 각종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에이어는 오스틴에 대한 답변 중 하나에서 이 예시를 언급하고, 이 예시가, ‘이것은 사자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는...이다(원문은 is)’가 항상 동일성의 의미로 사용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Ayer 1967: 137, 아래에서 인용함) 그러나 내게 만일 ‘이것’이 동물의 사진을 지시한다고 여긴다면 이 예시를 잘못 해석했다는 것은 꽤나 명백해 보인다. 우리는,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사자이고, 나는 이것을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고, 그 이유는 ‘이것’이 사진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것’은 그림 속에 묘사된 동물을 가리킨다. 또한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은 사자이고 나는 이것을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맞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동물원에 있는 그것이 사자인 것과 정확히 같은 뜻에서 사자이다. 내가 ‘이것은 내 사촌 허비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이것은 내 사촌 허비의 사진이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을, 이 사람이 내 사촌이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여러 사람들 중에 그를 꼭 집어 가리키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오스틴과 그에게 답변하는 사람들 모두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74

여기서 어떤 종류의 ‘...는...이다’가, 어떤 종류의 ‘이것’이 사용되고 있는지는 나중에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오스틴은, 반점의 문제에 관해 말할 때, 그 답은 단순히 그 반점은 별이라는 것, 또는 그 별은 반점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1962: 99). 왜 우리는 ‘보다‘의 두 가지 다른 뜻, 또는 심지어 두 가지 다른 대상에 관해 말해야 하는가? 그는 몇 가지 예시를 제공한다:

그러나 언어적 사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전혀 이것이 아니다. 적절한 설명은, 단순히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고, 식별되고, 분류되고, 설명되고, 이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은 무엇을 찼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나는 도색된 나무조각을 찼다‘라고, 또는 ‘나는 존스네 집의 정문을 찼다‘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대답은 모두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차다‘가 두 경우에서 다른 뜻에서 사용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내가 찬 것은 - 단지 한 가지 ‘뜻’, 일상적인 뜻에서 - 도색된 나무조각이라고 기술될 수도, 또는 존스네 집의 정문으로 식별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의 도색된 나무조각은 존스네 집의 정문이었다. 비슷하게, 나는 ‘나는 은색 반점을 본다’라고, 또는 ‘나는 거대한 별을 본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보는 것은 - 이 낱말이 가지는 단 하나의 일상적 ‘뜻’에서 - 은색 반점으로 기술될 수도, 매우 거대한 별로 식별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은색 반점은 매우 거대한 별이기 때문이다.

(Austin 1962: 98)

오스틴은 일맥상통하는 몇 가지 다른 예시를 제공한다. 나는 이들 중 단 하나만 더 인용하겠다:

‘나는 하찮게 보이는 검은색 바지를 입은 남자를 보았다’ ‘나는 히틀러를 보았다’ 두 가지 다른 ‘보다’의 뜻이 있는가? 물론 아니다.

(Austin 1962: 99)

따라서 같은 대상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같은 대상이 동시에 수평선상에 있는 반점이기도 하고 별이기도 하다. 내가 인용한 예시들은 확실히 여기서의 ‘...는...이다’는 동일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내가 인용하지 않은 일맥상통하는 다른 예시들이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처리되어야 할 특정한 지점들이 남아 있다. 첫째로, 우리는 그가 어떻게 별과 반점이 같을 수 없다는 에이어의 주장을 해결할 지를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히틀러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다르게 들릴 뿐인 속성뿐만 아니라, 실제로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각각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별은 거대하지만 반점은 조그마하다. 더욱이, 오스틴은 우리가 반점은 별이라고 말할때 우리는 동일성의 ‘...는...이다‘를 사용한다는 가정과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주석을 덧붙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우리가 ‘그 매우 거대한 별은 반점이다‘라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저 수평선상의 하얀 점은 내 집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내가 흰색 점에 산다는 결론을 허가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Austin 1962: 98, 각주)

그러나 ‘...는...이다’가 동일성을 뜻한다면, 이는 당연히 대칭적 관계일 것이다: 만일 그 반점이 그 별이라면, 그 별은 그 반점이다. 또한 만일 ‘...는...이다’가 동일성을 뜻한다면, 내가 하연 점에 산다는 결론을 허가해 줄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여기에서는 다른 종류의 ‘...는...이다’가 쓰였다.

내가 본 후속 논의에서, 여기서의 ‘...는...이다’는 동일성의 ‘...는...이다’일 수 없다는 데는 옹호자와 비판자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어는, 오스틴에 반대해서, 여기서의 ‘...는...이다’는 하얀 점의 예, 그리고 그 반점은 6펜스보다 크지 않지만(더 이상 6펜스가 발행되지 않나 보다. 적어도 나는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별은 지구보다 몇 배는 크다는 사실 에서 보여주듯이 동일성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는데, 어떻게 동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Warnock(1971)이 오스틴을 옹호했다. 그러나 워녹마저도 오스틴에게 여기서의 ‘...는...이다’가 동일성을 표현한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고했다. 만일 워녹이 맞다면, 우리는 그의 말이 오스틴에 대한 전적인 옹호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했듯이, 오스틴이 평행한다고 여겼던 아주 많은 예시들에서 사용된 ‘...는...이다’는 명백하게 동일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반점과 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어쨌든간에, 두 개의 개체가 있든가 하나의 개체만이 있다. 만일 그들이 동일하지 않다면, 별이 아닌 무엇이 반점인가? 이것은 실제로 내게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다음이 워녹이 이에 대해 말한 것이다:

별이 단지 반점인 것이 아니라, 반점이,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맨눈으로 지금 여기서 보여졌을때 별이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바이다.

(1971: 4, 원문 강조)

물론, 이는 참이다. 별은 실제로 반점으로서 보여진다. 그래서 그 반점이 별인가? 물론, 우리가 ‘그 별은 반점으로서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반점은 별로서 보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그 둘이 다른 개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데, 예를 들어 (나는 이 예시가 여기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기를 바란다) ‘슈퍼맨은 클락 켄트로 위장한다’는 참일 수 있고, ‘클락 켄트는 슈퍼맨은 슈퍼맨으로 위장한다’는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그의 실제 정체이며, 그는 단지 평범한, 온화한 성격의 기자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클락 켄트는 슈퍼맨으로 “보여지지” 않지만 슈퍼맨은 어떤 의미에선가 클락 켄트로 “보여진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는 클락 켄트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a는 b로서 보여진다’는 어떤 개체가 그 자신과 가질 수 있는 일종의 내포적, 불투명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만일 반점이 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에이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 첫째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는...이다’가 동일성을 표현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내 삼촌 제임스이다’라고 말하거나, 지도를 가리키면서 ‘여기는 피레네 산맥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1967: 137)

(에이어가 언급하지는 않지만)이는 사실 오스틴의 예시를 다시 가지고 온 것이었으며, 이 문제에 관한 나 자신의 견해도 이와 같다. 물론 나는 사진 속의 사람이 내 삼촌 제임스라는 것을 뜻하지, 어떤 기이한 뜻에서의 ‘...는...이다‘에서 사진이 내 삼촌 제임스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물론 동일성의 ‘...는...이다‘가 아닐 것이지만, 그런 교훈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만일 우리가 지도를 가리키면서 ‘여기기는 피레네 산맥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피레네 산맥인 표상된represented 산맥을 말하는 것이며, 그 지도가 피레네 산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어쩌면 에이어에게 거슬리는 부분은 제임스 삼촌이나 피레네 산맥 모두 우리의 시야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관련이 없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반점이 별인 경우는 더 복잡한데, 왜냐하면 사진 또는 지도의 경우처럼 두 가지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점을 그 별의 표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지각에 대한 이론을 은밀히 전제하는 것이 될 것이지, 일상적 사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식에 의하자면, 오직 한 가지 대상만이 있는데, 바로 그 별이다. 문제는 한 가지 명칭appellation 하에서 우리가 귀속시켰던 속성이 다른 명칭 하에서 귀속시켰던 속성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반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별과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별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만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동일성의 법칙을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S.K.]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생김새를 그런 종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럴 수는 있다 -, 우리는 일관되게 대상과 대상의 생김새인 것을 동일시할 수 없다.

(Austin 1967: 137, 인용자 강조)

여기서, 내가 추측하기에, 그는 반점은 어떤 생김새이거나, 별이 보여지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실제로는 라이프니츠의 법칙을 위반하고 있다. 반점은, 어쨌든간에, 저기 멀리 수평선상에 있지만, 사물들이 보여지는 방식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개체가 되었든간에, 저기 멀리 수평선상에 있지 않다.

따라서 오스틴의 비판자와 옹호자 모두 ‘그 반점은 그 별이다’의 ‘...는...이다’가 동일성을 뜻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거슨은 에이어에 대한 답변에서, 에이어가 오스틴이 동일성의 ‘...는...이다’를 염두에 두었다고 여기는 것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말한다. (Forguson 1969 참조). 내게는, 만일 오스틴이 제시한 유비(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히틀러의 경우)는 만일 ‘...는...이다‘가 동일성을 뜻하지 않는다면 오도적이고 관련 없는 것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반점과 별이 다른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두 가지 다른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보다 좋은 설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더 좋은 견해를 가질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허구와 신화의 경우와의 일종의 유비가 성립할 수 있다. 먼저 환각이나 환청을 포함하는 경우에 대해 다루고 나서 별과 반점으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한 가지 가능한 제안은 이렇다: 우리는 언어에 - 동사 ‘보다‘의 사용을 물리적 대상이 없음에도 어떤 대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확장한다면 - ‘환각적 대상’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종류의 보여진 대상을 추가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오스틴의 유령처럼, 우리가 누군가 무엇을 보았다고 기술할 때, 그 보여짐은 대상을 가져야만 한다고 견지하기를 바란다면 추가되어야만 한다. 비슷하게, 분홍색 쥐를 보는 진전섬망 환자는 어떤 환각적 대상을 본다. 그것들은 실제 동물이 아님에도,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에게 이야기 속 속성들을 귀속시킬 수 있게끔 하는 것과 같은 규약convention에 바탕하여 분홍색 쥐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런 사용에서, 맥베스는, 비록 환각적 단검이지만, 단검을 보았다. 그 단검은 그의 시각적 인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스틴이 어쩌면 귀신을 보는 것에 관해 말할 때 암시하고자 했던 것과 같이, 특수한 종류의 개체이다.75

이러한 제안에 따른다면 (그리고, 내게는 이것이 우리의 사용에 일치하는 듯하다), 특정한 허구적 캐릭터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처럼, 주어진 환각적 대상이 실제로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물론 경험적 문제이다. 누군가 들어와서 자신이 진전섬망 비슷한 것을 앓고 있고, 눈앞에 단검이 보인다고 말한다고 하자. 우리는 “그런 환각적 단검은 없다. 그는 단순히 거짓말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만일 그가 정말로 거짓말하고 있고, 단순히 진전섬망을 앓는 것을 가장하고 있다면 말할 수 있다. 만일 환각적 코뿔소가 없었다면 - 그 누구도 그런 환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면 - 우리는 환각적 코뿔소는 존재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허구적 캐릭터의 경우만큼 우리의 언어 사용에 깊게 뿌리내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이유는 여기서 ‘내가 단검을 본다’와 같이 무언가를 ‘본다’고 하는 것은 이미 꽤나 특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는 그 무엇도 보지 않는다고, 그는 단지 그렇게 상상할 뿐이라고 말할 동등하게 적절한 사용법이 있다. 이 사용법은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지시보다는 이 경우에 더 자주 적용되었다. ‘거기에는 실제로 아무 단검도 없다. 맥베스는 단순히 환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다시 논의되던 원래 경우로 돌아가자. 여기서, 물론, 보인 별은 전혀 환각적이지 않은 실제 사물이다. 그러나 유비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전에 논의한 허구의 경우처럼, 우리는 두 종류의 서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저히 밖에서의out-and-out 뜻이 있고, 이야기에 따르는 서술에 유비되는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귀속되는 뜻이 있다. 이 구분은 환각적 대상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는 환각적이다’, ‘이러저러한 의학적 문제 때문에 보이게 되었다’는 철저히 밖에서의 사용이고, ‘특정한 모양을 가진다’, ‘초록색이다’는 “이야기 속에서”의 서술에 유비된다.

그러나 나는 이 구분 중 일부는 별과 반점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나는 전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강의에서 가능한 한 해결책을 발전시켜보려 한다.

왜 반점은 별이 아닌가? 반점이 별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증이 있을 것이다. 오스틴이 관찰하는 바처럼, 내가 집에 산다는 것에서 내가 흰색 점에 산다는 것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1962: 98, 주석1, 위에서 인용됨). 워녹은 내가 내 집에 대한 판매 공고를 올릴 수는 있지만, 흰색 점을 팔려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그쪽을 향해 걸어갈 때, 내 집은 커지지 않지만, 흰색 점은 점점 커진다. 등등.

이것 모두가 참인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 하얀 점’이라는 어절을 다시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이것은 대상에 대한 시각적 기술이기 때문에, 다른 술어도 그런 방식으로 - 그 대상이 나타나는 바에 따라 - 이해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야기한다. 그러나 적절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가 보기에 우리는 올바르게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친구와 함께 있고, 수평선상에 가지각색의 점들이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에게 ‘나는 저기 하얀 점들 중 하나에 살고, 내 삼촌은 초록빛이 도는 점들 중 하나에 산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하얀 점’을 이러한 기술을 위해 도입하였을 때, 우리는 특수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흰색 점에 산다고 올바르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그러나 나는 저기에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컨트리 라이프’라는 잡지[이 잡지를 워녹이 예시에서 사용했다]에 판매 공고를 올렸고, 내가 보기에 누군가 이를 낚아챌 것 같다‘라고 또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갈 때 하얀 점은 점차 커지지만, 내 집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여기서, 물론 술어 ‘커지다‘는 겉보기에 따라 적용되고 있다. 내 집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이를 철저히 밖에서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내 집은 물론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치 소설가가 쓴 것처럼 읽어야 한다: ‘내가 이 집 방향으로 확대해서 보았을 때 이것은 점점 더 커지더니, 끝내 불쑥 충격적이고 두려운 것으로서 내 앞에 드러났다 ...’ 이는 완벽히 괜찮고, 그러한 뜻에서, 물론, 내 집은 점점 더 커진다.

이 모든 것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쩌면 누군가는 그 반대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데, 이는 조금 더 어렵다. 어쨌든간에, 내 집은 같은 크기인 채로 머무른다. 그 흰색 점은 어떠한 뜻이 되었건 같은 크기인 채로 머무르는가? 여기서, 다시, ‘그 하얀 점’이라는 절이 우리가 대상에 대해 시각적으로 서술할 것이라는 추측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만일 실제로 그러하다면, 물론, 그 흰색 점은 점점 더 커진다. 그것은 같은 크기인 채로 머무를 수 없다.

다음과 같은 매우 특수한 상황을 보라. 우리는 아이에게, 흰색 점에 더 가까이 가면서: ‘저 흰색 점이 보이니? 저 점은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저 흰색 점은 크기가 고정된 물리적 대상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마 아이에게 ‘크기가 고정된 물리적 대상’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조금 더 어린이에게 적합만 말로 재구성하려 할 것이다.) 당신은 아이에게 시각에 대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런 매우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특히 우리가 저 흰색 점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다른 방식으로 기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얀 점에 대해. 비록 겉보기로는 점점 더 커지지만 그것이 크기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말해야 하는 상황은 매우 그럴듯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하얀 점’이라는 절로 시작할 때 우리는 사물들이 보이는 바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런 방식에 따라 다른 술어를 적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간에, 그 집이 그 하얀 점과 실제로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 대한 그 어떠한 이유도 제시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게는, 오스틴과 달리, 우리는 내가 하얀 점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오스틴은 그 반점이 그 별이라는 주장된 사실으로부터 우리가 ‘그 매우 거대한 별은 반점이다’라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그 반점이 별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거대한 별이 반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물론, 동일성은 대칭적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는...이다’는 동일성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가 적절한 종류의 행성간 우주선을 타고 별에 다다른 뒤, 다시 별에서 떠나 지구로 향하고 있다고 하자. 누군가는, 어쩌면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 거대한 별이 이제는 단순히 반점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거대한 별이 반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 멀리 있는 내 집은 하연 점이고, 프레디 삼촌네 집은 저 초록색 점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 제안은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보다’의 본래적 뜻, 환각을 가지는 사람에 대해 그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뜻에서, 누군가가 보는 일반적 대상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사용법은 보여지는 대상의 특수한 영역에 대해 말하면서 확장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시각적 기술에 따르는 적용과 철저히 밖에서의 적용으로 나뉘는 술어의 두 가지 적용을 또한 허용한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외재적 대상을 본다면, 술어는 두 가지 방식 모두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무어가 봉투를 볼 때 그가 사다리꼴의 무언가를 본다고 말한다면, 술어는 시각에 따라 적용되고 있다. 여기서 그 사다리꼴의 무언가가 그가 보는 봉투가 아니라는 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미묘함은 존재한다. 한 가지 예로, ‘무언가가 보여지는 방식‘이라는 절 자체는 여러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첫째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방식의 특수성에 의해 내게 보여지는 것과 다를 수 있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무언가가 보여지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있는 작은 반점은 내 돋보기에서 확대되어 6펜스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 용법에서 나는 확실히, 비록 반점은 6펜스보다 작지만, 내가 돋보기, 또는 어떤 특수한 관측 기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6펜스보다 더 크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나는 6펜스보다 큰 반점을 보는데, 왜냐하면 나는 돋보기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술어를 구분해야 한다: 술어에 대한 철저히 밖에서의 해석 (‘나는 매우 거대한 별을 본다’); 대상이 정말로 보이는 방식 (6펜스보다 작은); 그리고 돋보기를 통해 내게 보여지는 방식 (6펜스보다 크지만 별만큼 크지는 않는). 이것은 모두 일관적인 용법이며, 술어는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의 허구와의 유비에 있어서, 사정은 나폴레옹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경우와 더욱 비슷하다. 나폴레옹은 역사적으로 적용되는 철저히 밖에서의 속성을 가지는데, 어떤 것들은 그에 대해서 오직 이야기 속에서 귀속되었다는 뜻에서만 참이다. 여기서 별은 천문학적 대상으로서 철저히 밖에서의 속성을 가지지만, 또한 (나폴레옹이 이야기 속에서 가지는 것과 유비되는)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에 따른 속성 또한 가진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이것이 지각에 대한 문제와 얽힌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지만, 그 중 일부에는 이것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허구와 지각 사이의 유비는 내가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방향으로도 견지될 수 있을 것이다.

유령의 예시에 대해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말해 보겠다. 누군가 유령을 볼 때, 그가 본 유령이 반드시 있는가? 여기서 ‘유령'이라는 단어는 ‘신'이라는 단어 비슷하다. 여기서 ‘신'은 ‘신화적 신'으로 의미가 확장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지금 (어쨌든간에, 우리의 사회에서. 아주 예외적인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받아들여지는 그 어떠한 견해에서도, 다른 뜻에서의 ‘신' 중에 아주 일부분의 신들만 존재한다. 주로, 하나 또는 그보다 적은 신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일반 명사로 사용할 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단지 ‘신화적 신'을 뜻하도록 사용된다. 이런 뜻에서, 물론, 다신교의 신은 실제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신화적 개체들이 정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신'을 의미하는 다른 뜻에서의 ‘신'에서, 이는 참이 아닐 것이다. 같은 것이 ‘유령'의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다. 만일 내 조카 요제핀이 유령을 보았다면, 그가 본 특정한 환각적 대상이 있다. 만일 당신이 “유령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유령’이라는 단어를 단지 이러한 방식으로 쓸 것이다.

비록 말할 수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이 남아 있지만, 나는 아마도 이 종류의 지각의 문제의 세부 사항을 계속해서 설명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이 종류의 문제는 다른 지각의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환각적 대상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시각적 인상 또는 그 비슷한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검의 시각적 인상은 대거가 아니고, 환각적 단검 또한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단검도 아니다. 내가 설명한 뜻에서, 멕베스가 본 환각적 단검이 있다: 우리는 확장된 개체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허구적 개체를 지시하는 경우에서 가장 친숙한 이러한 확장된 영역에서, 우리가 ‘햄릿은 존재한다'가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한 가지 뜻에서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햄릿이 독백했다는 것이 참인 것과 같이, 햄릿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로 참이라고 말한다. 다른 뜻은 햄릿과 같은 허구적 캐릭터가 정말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햄릿과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 햄릿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뜻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종류의 용법이 원래의 문제를 만들어낸 용법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이 용법은 어떤 뜻에선가, 햄릿이 존재한다고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용법보다 우선한다.

나는 이 강의에서 이 용법의 문제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기를 바랐으나, 조금의 시간이 남기는 했지만 (단지 몇 분 가량) 다른 주제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지는 않다. 따라서 명백히 사람들이 불만족스러워하는 주요 문제인 이 문제를 오랫동안 미뤄 왔는데, 나는 이를 다음 시간에 논의할 것이다. 나는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들에 관해 무엇이 참인지 다른 어떠한 것에 비해서도 더욱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내 이론에서 이 문제는 쉬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데, 왜냐하면 ‘햄릿'을, 말하자면, 원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이름하는 것의 가장을 도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햄릿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든, 우리는 단순히 명제를 표현하는 것을 가장할 뿐이다. 따라서 햄릿이 존재한다는 진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 모두가 참이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가 저번 시간에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마치 우리가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정말로 어떤 명제가 표현되었을 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햄릿이 어떤 상황에서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을 수 없다. 더 안 좋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지만, 내게는 우리가 단칭 존재 진술을 할 때 뿐 아니라 술어를 사용하는 어떤 경우에서도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유니콘은 없다'라고 말할 때, 내 견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특정된 어떤 종류의 동물이 있음에도, ‘유니콘'이라는 단어의 외연이 비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런 종류의 진술에서, 외연이 비어 있는 ‘유니콘'이라 불리는 그 어떤 특정된 동물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다음 시간에 논의할 문제이다. 76

+이래놓고 5강으로 딴 얘기만 주구장창 하시는 크립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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