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3강

이어집니다.
Fictional Entities에 대한 Creationism. 사실상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인데 드디어 이야기가 나오네요.
드디어 절반!

3강

많은 사람들이 러셀의 빈 고유 이름, 특히 허구와 신화의 고유 이름에 대한 이론을 의심스럽다고 여겼다. 한 예시는 더글라스 래키가 편집한 러셀의 논문집에서 찾을 수 있다. 래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러셀과 마이농 사이의] 논쟁 속에서 러셀은 자주 상식의 사도로, 마이농은 멋대로 개체를 상정하는 거친 존재론화주의자로 비춰졌다. 그러나 마이농의 이론은 “페가수스는 나는 말이다”가 참이라고 말하는 반면, 러셀은 이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신화를 안다면, 마이농에 동의할 것이다.

(Russell 1973: 19)

이 반론은 많은 사람이 반복적으로 제기해 왔었던 것이며, 내 기억이 맞다면 첫 번째 강의 이후에 있었던 질의응답 시간에서도 나온 적이 있었다.51 예를 들면, 리처드 카트라이트는 Cartwright(1960)에서 ’파프터는 털이 없다’는 파프너에 대한 진술이라는 것이 참이며, 비슷하게 파프터가 실제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의 비존재에도 불구하고 파프너에 대한 진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힌티카Hintikka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데카르트에 대한 유명한 논문(Hintikka 1962)에서 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만일 논리적 추론이라면 틀린 것일 것이라고, 왜냐하면 이 논증은 ‘내가 생각한다’에서 ‘나는 존재한다’를 이끌어내지만, 햄릿이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햄릿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나는 ‘나는 독백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더욱 그릇된 추론이라고 여긴다. 이 때문에, 힌티카는 우리가 선제presupposition에서 자유로운 논리, ‘Fa’에서 ‘Fx이게끔 하는 x가 존재한다, 즉,

  1. (Ex)(Fx)

이 다음과 같이 표기되는 a가 존재한다는 보충적 전제 없이 따라나오지 않게끔 하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Ex)(x = a)

여기서, ‘a’는 아무튼간에 빈 이름일 수 있다. 그렇다면 ‘Fa’는 ‘F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를 함축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페가수스는 날개가 있다‘는 ‘날개를 가지는 무언가가 있다‘를, 그것이 참임에도 ‘페가수스는 날개 달린 말이다‘가 날개 달린 말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듯이 함축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런 논리의 이점, 또는 광범위한 빈 이름의 경우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논리는 지금 “자유 논리Free logic”라 불리며, 철학사에서 분명한 역할을 한다. 나는 그것들이, 만일 우리가 콰인과 같이 발명된 술어로 이름을 분석하지 않고 단칭어로 취급할 때 우리는 날개 달린 말이 있다거나 신이 있다는 등의 거짓이거나 논란이 있는 결론을 바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52 나는 그것들이 이 목적에 있어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단지 힌티카가 제시한 그 논증만을 검토하고자 한다.

우리는 햄릿이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주장이 어떤 의미에선가 참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어떤 학생이 OX문제에서 ‘햄릿은 독백했다‘에 X를 쳤다면 그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쓰임 아래에서, 우리는 허구적 이름을 포함한 진술이 그 허구적 개체 또는 허구적 이름이 등장하는 적합한 이야기 속에서 참이라면 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진술은 암묵적으로 ‘이야기 속에서‘라는 한정어qualifier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될 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은, 그리고 이런 문제는 러셀에게 중요했던 만큼 우리에게도 - 즉 나에게도 - 중요하다. 왜냐하면 러셀은 그의 이론을 따른다면 이런 진술은 한결같이 거짓일 것이라는 반론에 부딪혔을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내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그 진술들은 가장된 명제를 표현하거나 단지 명제를 표현하는 것처럼 가장할 뿐인데, 그 진술들은 사실 참이라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 속의 내용에 대한 보고를 할 때,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두 모순적인 이야기 속에 등장하여, 두 가지 상이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허구적 캐릭터의 예를 참조하여 보여질 수 있다. 이 경우에서 우리는 단순히 ‘존스’ - 그 전설 속의 캐릭터의 이름이 존스라면 - 가 ‘맥주를 좋아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 A에서 존스는 맥주를 좋아했지만, 이야기 B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경우에서 우리는 한정어 없이 무엇인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보통 이런 쓰임은 어떤 이야기가 해당되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진술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페가수스는 날개가 있다’ 또는 ‘존스는 맥주를 좋아한다’라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하는 대신, 말하자면, 이야기의 정신 안으로 가서(into the spirit of the story) 그런 진술을 할 수 있다. 어쨌든간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진술을 한다면, 보편적인 규칙 상 그 진술이 이야기 속의 내용에 대한 참인 진술인 경우 참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원한다면 이것이 한정어가 괄호쳐진 형식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것을 특수한 쓰임이라고 여긴다면, ‘햄릿은 독백한다’는 적합한 이야기에 따르면 햄릿은 독백하기 때문에 물론 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햄릿은 독백하지만,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 따라나오는가? 확실히 이야기 속에서 햄릿은 생각했을 것인데, 따라서 아마도 ‘햄릿은 생각한다’는 ‘햄릿은 존재한다’를 함축하지 않을 것이며, 힌티카가 말한 것처럼 무효한 형식의 논증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결론은 꽤나 불합리하다. 만일 우리가 전제를 그 진리 조건이 이야기 속에서 말해진 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 결론에서도 그래야 한다. 그렇다면, 햄릿이 존재한다는 결론 또한 물론 참인데, 왜냐하면 이야기에 따르자면 햄릿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이것이 단순히 이야기이건 아니건, 햄릿이 이야기 밖에서 존재하는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힌티카의 논증은 그의 방식대로 구성된 코기토에 대해 아무런 공격도 되지 못한다.

이런 논증은 또한 러셀에게도 아무런 공격이 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햄릿’을 한정 기술고로 분석하고자 한다면 - ‘그 우울한 덴마크 왕자’(다른 덴마크 왕자들은 행복하다는 가정 하에서. 어쩌면 이는 그 나라에 대한 설득력 있는 가정이다)라고 하자 - ‘햄릿은 생각한다’ 또는 ‘햄릿은 독백했다’의 러셀 식 분석은 ‘어떤 독특한 우울한 덴마크 왕자가 있었고, 모든 우울한 덴마크 왕자는 생각한다’ 또는 ‘독백했다’가 - 또는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그리고 그것 또한 이야기에 따르자면 참이 될 것이다 -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혼돈의 원천이 되는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결론에 대해 전제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경향이다.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 적어도 여기에서 -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이 단 하나라는 것이다. 전제 ‘햄릿은 생각한다’는 단지 명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명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참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야기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반면 ‘햄릿은 존재한다’는 이야기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그 경우 거짓인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로, 햄릿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위에 제시된 것과 같은 진리 조건을 가지는 진술로 받아들일 경우,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글쎄, 물론 이야기에 따르자면 언급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존재한다. ‘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참이 아니다. 실제 삶real life에서 허구적 캐릭터, 상상적 사물들, 벌칸에 대한 실수 등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속에서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문예사 속의 이야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예를 들어 맥베스의 단도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단지 그의 마음 속 환영에 불과했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이 경우에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두 번째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유사하게 햄릿이 실제로 그의 아버지의 유령을 보았는지, 아니면 그런 유령은 없는지 여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 사이에서 토론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이 경우 이야기에 따르자면 무엇이 참인지 물을 것이며, 그들은 진지한 물음을 제기할 것이다. 누군가 햄릿은 단지 그가 유령을 봤다는 것을 상상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는 아주 진지하게, 그 이야기에 대한 보고로서 ‘햄릿은 존재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는 상반된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햄릿의 아버지의 유령은 진짜였지만, 맥베스의 단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도록 기울어져 있다.

<햄릿>에서, 햄릿은 연기자들에게 왕을 위한 연극, 모두 알다시피, <곤자고의 살인>을 진행하도록 부탁한다. 이야기에 대해 보고함에 있어서 우리는 햄릿은 실제 사람이지만, 곤자고라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곤자고는 단순히, 아마도 유명하다고 가정되는 연극 속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이름의 연극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에 따라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 따라 말하는 것 사이의 모호성에 주목하라. 실제 삶에 따르자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연극은 없지만,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런 연극이 있다.53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단일한 의미 아래에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유 이름에 단순한 긍정적positive 속성을 붙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허구의 예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일상 언어를 유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러셀 식의 패러다임을 따라 학교의 영문학 시험에서 ‘햄릿은 독백했다’에 ‘X’표시를 친 사람은 정당하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이며, 그는 러셀의 분석이 이 진술이 거짓임을 보여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진술이 거짓임을 보인다면 그것은 러셀의 분석이 잘못 적용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햄릿’을 ‘그 우울한 덴마크 왕자’와 같은 한정 기술구로 대체하고 심지어 러셀의 방식대로 분석했더라면, 그 진술은 거짓이 아니라 참이 될 것인데, 이야기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보고로서 말이다.

좋다. 이 의미에서 햄릿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오류를 저질렀다. 카트라이트(1960: 636)는 그의 논문에서, 파프너가 털이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파프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 마치 파프너에 대해 두 가지 평행하는 진술이 있는 것처럼 - 말하고자 할 때 비슷한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진술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에 속한다.54 우리는 그 둘을 뒤섞어서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털이 없는 무언가에 대한 예시가 있다고 - 적어도 이런 유형의 논증에 바탕해서 -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졌는가? 분명히 빈 이름을 사용하는, 이야기 안에서 해석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긍정적으로 들리는 진술은 없는가?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될 수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종류의 예시로: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이다’. 두 번째 종류의 예시로: ‘이 문예 비평가는 데스데모나를 존경하고 이아고를 경멸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를 숭배했다’ 와 같은 것이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실제로 있는 것을 주체로, 확연한 빈 이름 또는 이름을 대상으로 하는 관계적 진술relational statement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예시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둘 모두 우리가 방금 제시한 패러다임, 그러니까 특정한 이야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 진리 조건이 이야기에 의해 주어진 보고로서 분석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야기에서 햄릿이 허구적 캐릭터라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이야기를 오독하는 것일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곤자고는 허구적 캐릭터이지만, 햄릿은 아니다. 이 점에서 헷갈린 멍청한 학생은 어쩌면 OX 문제(나는 영국에도 이 끔찍한 것들이 있는지는 모른다)에서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였다’에 ‘O’라고 답변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답일 것이다. 그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무엇 참인지 보고하고자 한다면 여기에 ‘X’, ‘곤자고는 허구적 캐릭터이다’에 ‘O’쳐야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진술은 우리의 패러다임에 따라 분석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물론, 그 어떠한 이야기에서도 이러이러한 문예비평가가 데스데모나를 존경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꽤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 문예비평가가 그러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in rerum natura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몇 가지 가능한 시도를 그려 보겠다. 첫째로, 우리는 허구적 캐릭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의 기묘한 문법적 술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햄릿은 허구적 인물이었다', 또는 (메타언어적으로 말하자면) ‘”햄릿" - 이름 “햄릿" - 은 허구적 인물의 이름이다'는 사실 ‘허구 속에서 “햄릿"은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로 다시 분석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분명 허구적 캐릭터라는 개념과 연관을 가지지만, 이러한 용어의 확장된 사용에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예를 들어, 하나보다 많은 이름을 사용하면서, ‘팔스타프와 이아고는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두 캐릭터이다‘라고 (충분히 미쳤다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이를 이름에 관한 문장으로: “’팔스타프‘와 ‘이아고‘는 적합한 이야기 속에서, 문예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두 캐릭터의 이름이었다.’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억지를 부린다면 우리는 이렇게 해낼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 허구적 캐릭터는 있지만, 자신의 이모할머니와 결혼한 허구적 캐릭터는 없다’와 같은 형식의 존재 진술을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아마도 억지로 이것을 이야기들에 대한 진술과 이야기 속에 있는 이름들에 대한 진술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명백하게 동치인 진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복잡한 분석을 생각해낼 수 있다. 그런 분석들은 물론 모든 허구적 캐릭터가 이름되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럴 필요성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이름되지 않은 허구적 캐릭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진술은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라고 부르는 개체의 영역에 관한 진술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둘째 문제, 즉 내포적 동사에 관해서 더 많은 수가 두어졌었는데, 나는 그 모두에 관해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몇 가지 사용되거나 사용될 수 있는 주요한 공격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특정한 문예 비평가가 데스데모나를 존경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여러 가지 대답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콰인의 글에서 제시되었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나는 어떤 슬루프를 원한다‘는 불투명한opaque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슬루프를 가지기를 원한다‘, 즉 어떤 슬루프의 소지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하고, 같은 문장이 투시적transparent 의미에서는 ‘내가 원하는 어떤 슬루프가 있다‘를 뜻한다.

오직 후자의 의미에서 ‘원한다’는 사람과 슬루프를 연결시키는 관계적 용어이다. 다른, 그러니까 불투명한 의미에서 이것은 사람과, 구상적concrete이든 추상적이든, 실재적이든 관념적이든 무엇인가를 연결시키는 관계적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나는 나 자신이 슬루프를 가지기를 원한다’에 의해 쓰임이 설명되는 줄여진 동사이며, 여기서 ‘가지다’와 ‘슬루프는’ 여전히 평소와 같이 일반 용어general term이나 단순히 불투명한 성분 ‘~을 원하다’가 덮어씌워져 있을 뿐이다. 이 점이 욕망의 대상의 특성에 대해 염려하는 철학자들에게 보여야 한다.

(Quine 1960: 155-56)

나는 콰인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이를 욕망의 대상의 문제에 대해 염려했던 철학자들에게 적용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특히 마이농주의적 또는 독일 ‘전-현상학적‘ 전통55에서 어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할 때 가정되는 욕망의 대상을 포함하는 이런 종류의 지향적 대상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무슨 분석이 이루어졌는가? 첫째로, ‘나는 어떤 ...을 원한다’는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을 가지기를 바란다’ 또는 단순히 ‘나는 어떤 ...를 가지기를 바란다’, 또는 콰인이 정말 바랐던 것처럼 확연하게 명제적 태도로 보이게 만들자면, ‘나는 내가 어떤 ... 를 가진다는 것을 바란다’와 같은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어떤 슬루프를 원한다’는 이 패러다임에 따르자면 ‘나는 내가 어떤 슬루프를 가진다는 것을 바란다’로 분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분석이 있다. 하나는 ‘나는 x가 슬루프고 내가 x를 가지게끔 하는 어떤 x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Ex)(슬루프임(x) ^ 내가 x를 가짐)이기를 바란다.

즉, 존재 양화사의 범위를 ‘나는 어떤 슬루프를 원한다’의 ‘어떤’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분석은 ‘x가 슬루프고 나는 내가 x를 가진다는 것을 바라게끔 하는 어떤 x가 있다’:

(Ex)(슬루프임(x) ^ 나는 내가 x를 가진다는 것을 바람)

이다.

이것은 러셀에 의해 도입된 논리에서의 한정 그리고 비한정 기술구에 대한 범위의 구별이며(Rusell 1905), 여기서 꽤 명료하게 드러난다. 첫 번째 해석은 내가 원하는 특정한 슬루프가 있을 것을, 또는 심지어 내가 어떤 의미에서건 존재하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내가 내가 가지는 어떤 슬루프가 있을 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인용하고 있는 단어와 대상은 아니고, 그의 1956년 논문 “양화사와 명제적 태도”에서의) 콰인의 용어를 따라 말하자면, 첫째 해석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슬루프-없음-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콰인이 우리의 현재 문제에 대해 이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을지 모른다(그리고 물론 의심한다). 조금 더 확실하게 그것을 의도했던 것은 처치의 논평에서였다:

우리가 옹호하는 프레게주의 의미 이론에서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지를 수색했다’는 특정한 관계가 존립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관계는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트로이가 순전히 전설 상의 도시였고 그 유적지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지를 수색했을 수 있기 때문에),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지라는 특정한 개념 사이의 관계이다.56 이것은, 그러나,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지를 수색했다’가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지의 개념을 수색했다’와 같은 뜻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첫 번째 문장은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지의 개념 사이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참이지만, 둘째 문장은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지의 개념이라는 개념 사이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다.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지의 개념 사이에 성립한 관계는 수색되는 것은 아니며, 또는 적어도 - 동사 수색하다 가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견해에서 - 그렇게 말하는 것은 틀렸다.

(Church 1956: 8, 주석 20)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누군가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를 숭배했다’라고 말할 때, 그의 진술은 그리스 사람들과 ‘제우스’라는 표현의 뜻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프레게가 내포적 문맥을 분석한 것과 비슷한, 명제적 태도에 의해 더욱 명시적으로 주어진 방식대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처치가 여기서 말하는 동사 ‘수색하다’의 경우에서, 우리는 명제적 태도의 형식을 가지도록 동사를 대체할 수 있다: ‘슐리만은 그가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하도록 애썼다.’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분석에 있어야 할 것이다.57 그러나 이런 분석이 주어질 수 있든지 없든지, 처치는 그대로 이 패러다임을 적용할 것이다.

처치는 또한 ‘트로이 유적지’를 내포적(‘간접적oblique’)이라고 간주하는데, 따라서 트로이 유적지가 사실 다른 도시의 유적지였다면 우리는 그 다른 용어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58 어쩌면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예시가 더욱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해밀턴 부인은 아프로디테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Church1956: 27, note 71). 그는 또한 ”’페가수스의 신화’, 그리고 ’젊음의 샘을 위한 폰세 데 레온의 탐색’은 모두 이탈릭체로 표시된 이름이 간접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설명되어야 한다.”(Church 1956: 27, 각주 71) 이라고 말한다. Church(1951: 111-12, 각주 14)에서 그는 ’나는 페게수스에 대해서 생각한다’, ’폰세 데 레온은 젊음의 샘을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바바라 빌리어스는 다이애나보다 덜 정숙했다’와 같은 문장들을 러셀의 기술 이론보다 프레게 식의 이론에서 더 잘 다루어지는 예시로 사용했다.59 이 예시들은 직접적으로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를 숭배했다’와 같은 문장들과 관련지어진다.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실제로, 비록 콰인은 처치가 그러듯이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조를 사용하지 않지만, 여기에서의 동사를 내포적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콰인이 이 이론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되기를 의도했는지, 모든 이런 종류의 가정적 내포적 대상에 대한 진술에 대한 설명이 될 것으로 의도했는지, 또는 욕망에 관한 특정한 경우에서만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꽤 확신이 없다. 그는 단지 욕망의 대상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철학자들이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언급한다.

우선 콰인에 대해서 말하겠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단지 슬루프-없음-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뿐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특정한 슬루프가 없다면, 당신은 이것을 ‘그 어떤 슬루프든지 상관없이.’를 덧붙임으로써 구어체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슬루프를 원한다, 그 어떤 슬루프든지 상관없이.’ 이것은 이 진술의 모호성을 제거해 줄 것이다. 내게는 이러한 모호성의 제거는 존경과 숭배를 포함하는 평행적인 경우에서는 좋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 보인다.

빈 이름 대신 명시적으로 비한정 기술구를 사용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신을 숭배했다.’ 그들은 신을, “그 어떤 신이든지 상관없이” 숭배할 수 있었는가? ‘이러저러한 문예 비평가는 어떤 허구적 여성을 존경했다’ 그 어떤 허구적 여성이든지 상관없이?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가 실제로 그 어떤 허구적 여성이든지 상관없이 존경했더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그가 단지 허구적-여성-없음-상태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건 (어쩌면 실제-여성-없음-상태) - 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60 그 문예 비평가가 ”그 어떤 허구적 여성이든지 상관없이” 존경했다는 진술은 여전히 ’모든 x에 대하여, 만일 x가 허구적 여성이라면, 그는 x를 존경했다.’의 형식을 가진 진술이지, 슬루프의 경우와 같이 내적 존재 양화사가 따라오는 명제적 태도에 대한 진술(위의 (1)을 보라)가 아니다.

사실, 여기에 콰인의 분석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인다. 또 다른 난점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우리는 ‘존경하다‘와 ‘숭배하다‘와 같은 동사를 명제적 태도가 따라오는 적절한 ‘that’절로 분해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모르겠고, 또한 그것이 불가능해다고 생각하는 데 기울어져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분해될 수 있다면, ‘그 비평가는 어떤 허구적 여성을 존경했다‘ 또는 ‘그리스 인들은 어떤 다신교의 신을 숭배했다‘의 해석에는 모호성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그러한 모호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사람들이 어떤 다신교의 신을 숭배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숭배했던 어떤 특정한 신이 있다는 것이지, 다신교 신에 대한 일반적인 무언가를 말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을 ‘원하다’의 경우에도,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다신교도가 어떤 신을 만나고자 할 때, 이것이 그가 그 어떤 신이든지 상관없이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 - “신을 만난 적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 - 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어느 특정한 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두 번째 해석은 내게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무슨 신을 만나기를 원했냐는 질문의 답이 ‘제우스’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독법에 대한 분석은 콰인의 패러다임 하에서 주어질 수 없다. 내가 이미 강조한 바처럼, 나는 콰인이 그의 주장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의도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조금 더 지금의 문제에 적용가능하기를 의도했던 것은 처치의 분석이다. 예를 들어 ‘숭배하다’와 같은 단어는 한 주체와 프레게적 뜻Sinn을 관계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다신교도가 제우스를 숭배한다고 할 때, ‘숭배한다’라는 단어는 그와 ‘제우스’라는 낱말의 프레게적 뜻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처치가 말하듯이, 이것은 그가 프레게적 뜻을 숭배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교도와 프레게적 뜻의 프레게적 뜻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분석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여기에 이 분석을 적용하는 것에는 많은 골칫거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이는 ‘숭배하다’라는 동사가, 일반적인 동일자의 대체가능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내포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존경한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슈미트가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하자. 만일 히틀러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면, 내가 보기에 슈미트는 정말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존경한다. 그리고 내게 후자의 진술에 내포적인, 또는 불투명한 진술과 투시적인 진술 사이와 같은 모호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존경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만일 그가 히틀러가 그렇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면, 그가 히틀러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으로서 존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그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존경했다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그는 히틀러를 그렇게 묘사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위의 진술이 거짓이게 되는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어쩌면 ‘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존경한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물론 참이고, 또한 슈미트가 히틀러를 태평하고, 성스러우며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히틀러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으로서 존경받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존경하고 있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모호성 없이 참이다. 이 반론은 처치가 간접적이라고 분류하는 모든 맥락에 (위에 언급된 몇 가지를 포함해서) 모두 성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존경하다’와 ‘숭배하다’의 경우에는 성립한다. 만일 존경하거나 숭배하는 누군가가 실제로 있다면, 동일자의 대체가능성은 적용된다. 만일 로마 사람들이 칼리굴라를 숭배했고, 칼리굴라가 단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로마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존경했다. 어마도 그들은 칼리굴라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칼리굴라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를 숭배하지 않았을 것읻. 그러나 그들은 어쨌거나 평범한 사람을 숭배했다.

여기서 우리는 ‘숭배하다‘가 명백하게 빈 이름에 뒤따라올 때도 이러한 대체를 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를 숭배했고, 제우스가 리비우스가 열 번째로 언급한 신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리스 사람들은 리비우스가 열 번째로 언급한 신을 숭배했다. (물론, 그들은 제우스를 숭배했을 때 그를 특별히 리비우스가 열 번째로 언급한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예시에 대한 뜻-지시체 분석이 올바랐다면, 이런 추론은 철저하게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추론이야말로 옳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어떤 대상과 프레게적 뜻, 동사 앞에 놓인 절의 프레게적 뜻 사이의 관계라면, 이 추론은 올바르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당연하게 ‘제우스’와 ‘리비우스가 열 번째로 언급한 신’은 서로 다른 프레게적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론은 잘못되지 않았고, 설령 누군가 대체가 성립하지 않는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 나는 어떤 내포적 동사의 경우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는 이론을 대체성이 성립하는 경우에도, ‘제우스는 리비우스가 열 번째로 언급한 신이다‘와 같이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경우에도 적용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대상의 명백한 비존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체가 실패한다는 뜻에서의 내포성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같이 가야 할 명료한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내가 이 문제에 대한 참된 서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겠다.

양화 및 동일성에 대해 완전한 장치를 가지고 있는 일상 언어에, 허구적 캐릭터와 같은 허구적 개체에 대한 존재론을 귀속시키는 것이 모든 점에서 옳은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모든 가능한 진술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완전한 장치’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두 개념이 허구적 개체에도 어쨌거나 적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아, 그렇다면 너는 결국 마이농에 동의한다는 것인가! 오직 이차적인 종류의 존재existence를 가지는 개체가 있다be고 말이다.’ 아니, 나는 그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실제 세계에 특정한 허구적 캐릭터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개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인가?’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나는 옛날에 해리 프랑크퍼트 교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성경에 대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 대다수가 유명한 이교의 신 몰로에 대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쨌건간에 그런 유명한 이교의 신이 있다고 들어 왔다.) 종종, 성경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독해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우상숭배의 길에 빠졌을 때 숭배했던 사악한 이교도 신 몰록에게 인신공양을 한 건에 대해 계속해서 비난받는 것으로 널리 여겨졌다. 많은 이교도의 신전에 그러한 신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성서학자들은, 다음 두 이론 중 하나를 받아들였다. (적어도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그러하다. 어쩌면 더 있을 지도 모른다.)

하나는 ‘몰로Moloch’는 히브리어에서 ‘왕’을 의미를 가지는 ‘멜레melech’의 오기이며, 몰로에게의 인신공양은 사실 왕에게의 인신공양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왕’은, 몇몇 학자들에 따르자면, 어쩌면 히브리 사람들이 숭배했던 같은 유일신교의 신, 즉 야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애초에 이교의 신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름이 나중에 와서 그러한 이교의 신이 있었던 것 마냥 오기되고 오해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론은 ‘몰로’가 숭배되었던 신의 이름이 아니라, 한 가지 인신공양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인신공양이 ‘몰로 인신공양’이라고 불렸고, ‘~에게’로 잘못 번역된 조사는 ‘~로서’와 같은 무언가로 정정되어야 한다: ‘그는 몰로로서 그의 아들을 바쳤다’(히브리어 성경에서 특정한 종류의 인신공양이 ‘burnt offerings’, ‘sin offerings’ 등으로 불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 견해는 오토 아이스펠트의 견해이다.61 그의 견해에서 ‘몰로’가 애초에 신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라.

이 두 가지 견해 모두에서, 우리는 몰로라는 신이 없고, 그런 신이 있었다는 가정은 오류에 기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프랭크퍼트 교수는 농담 섞인 말투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그런 신은 없었다. 너는 이교의 신성을 믿지 않지 않았는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몰로라는 신이 있었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명백하게 이 세계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한 전설 상의 캐릭터가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긍정 또는 부정의 답변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신’의 다른 뜻, 그러니까 실재하는 숭배할 만한 실재적인 초자연적 존재여야 하는, 그러한 신이 정말로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같지 않다.

따라서 내 견해는 일상 언어는 허구적 또는 신화적 개체의 영역을 양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존재핮지는 않는다: 즉, 그들은 사고의 대상인 그 무엇이든지 이차적인 뜻에서 존재한다는 마이농적 개체는 아니다. 반면에, 이러이러한 허구적 캐릭터가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는 경험적인 문제이다. 그의 할머니와 결혼한 허구적 또는 전설 상의 캐릭터가 있는가? (물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한 유명한 캐릭터가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쓰여지거나, 적어도 구전되거나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전해진 적합한 허구 또는 전설의 작품에 의해서 참이다. 만일 그러한 허구적 작품이 있다면, 그러한 허구적 캐릭터가 있다.

소설과 극은 어떤 약한 마이농-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세계에는 실제로 많은 소설이 있어 왔다. 그것들은 그것을 창조하는 특정한 원고, 서적, 공연과 같이 구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참이다. 내 견해에 의하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트웨인이 <허클베리 핀>을 쓰면서 소설과 허구적 캐릭터 모두를 존재하게 한 것과 같이, 몇 가지 허구적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이다. 허구적 캐릭터들이 한 가지 뜻에서 존재하지만 다른 뜻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허구적 캐릭터 허클베리 핀은 그 소설이 그렇듯이 단연코 존재하며, 나는 이 주장을 실제로 소설이 존재했다는 내 인상이 틀렸을 때만 포기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존재는 수와 같이, 경험적 사실과 독립적으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진 추상적 개체의 존재와는 다르다.

‘햄릿’과 같은 이름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거나, 무언가를 지시한다고 가장한다고 말해져 왔고, 또한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한다고 말해졌다. 만일 적합한 허구적 작품이 쓰였다면, 그러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햄릿이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존재하고, 만일 내가 언급한 이론이 맞다면 몰로라는 허구적 또는 신화적 신은 없다. ‘몰로’는 마치 ‘벌칸’이 어떤 행성을 지시한다고 잘못 생각되어 왔던 것처럼, 허구적 신을 지시한다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따라서 허구적 또는 신화적 캐릭터의 빈 이름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를 숭배했다’는 그렇다면 물론 그리스 사람들과 특정한 다신교이의 신 사이의 일반적 이항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비슷하게, ‘리비스는 테스를 존경했다’는 어떤 비평가와 어떤 특정한 허구적 여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것이다.

또한 곤자고의 경우와 같이 허구적 캐릭터에 관한 가장이 있을 수 있다. 극 <햄릿> 중에는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극이 있었다(적어도 그렇게 가정하자).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곤자고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극 중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극 중에서는 곤자고라는 허구적 캐릭터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실제 세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비록 극중에서 곤자고라는 허구적 캐릭터가 잇다고 가장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없다. 그러나, ‘곤자고’라는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는 있다(그러나, 각주 3을 보라)62. 이것은 극 <햄릿>의 존재에 의해 참이다. 그리고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셜록 홈즈의 경우, 우리가 ’셜록 홈즈’라고 부르는 가능한 개체는 없기 때문에, ’곤자고’라고 불리는 가능한 허구적 캐릭터는 없다. 왜냐하면 많은 극이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쓰여졌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중 무엇이 이 극 <곤자고의 살인>인지, 또는 그 중 무엇이 이 허구적 캐릭터 곤자고를 가지고 있는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혼돈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허구적 캐릭터는, 그렇다면, 추상적 개체이다. 이는 더 구상적인 활동인 이야기를 말하기, 극을 쓰기, 소설을 쓰기 등에 의해, 내가 정밀하게 진술하려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당연한 직관적 특성을 가지는 기준 아래 존재한다. 그것은 한 나라가 사람들 간의 구상적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추상적 개체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상적 활동에 의해 존재한다. 어떤 나라에 대한 특정한 진술은 어쩌면 사람들의 복잡한 활동들로 분석해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렵거나, 개방적 구조open texture의 문제 때문에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나라에 관한 진술은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그리고 오직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참이다.63 나는 같은 것이 허구적 캐릭터에 관해서도 올바르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것들은,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마이농적 개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나라가 그렇듯이 사람들의 특정한 활동들에 의해 존재한다. 물론, 허구적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19세기 런던에 살았던 허구적 사람들은 실제로 19세기 런던에 살았던 사람들에 부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되는 혼란스러운 이중 서술이 있다. 왜 그런가? 예시를 하나 들어 보겠다. 우리가 햄릿에 대해 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서술이 있다. ‘햄릿’을 빈이름이 아닌 어떤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햄릿은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토론되어져 왔다.’, 또는 ‘햄릿은 우울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햄릿이 허구적 캐릭터라는 것이 주어진다면, 여기서 우리는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토론되어져 왔고 우울한 허구적 캐릭터가 있었다고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술어는 다른 뜻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 술어, ‘~는 우울하다’는 암시적으로 한정어 ‘허구적’, 또는 ‘이야기 속에서’와 연결되어 있다. 반면 물론, ‘~는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토론되어져 왔다.’는 이 암시적 한정어가 없다. 진술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이다’를 보자. 이것은 허구적 작품 자체에서는 참이 아니다. 허구에서의 쓰임에 따라 술어를 사용한다면 - 즉, 적합한 허구적 작품에서의 묘사에 따라 허구적 캐릭터에 술어를 적용하는 규칙에 따라 - 우리는 햄릿은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사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뜻에서 모든 허구적 사람은 허구적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성에 의하여) 그 어떤 허구적 사람도 그 자신의 허구적 작품에서 허구적 사람이라고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64 그러나 술어를 실재의 수준에서 - 즉,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 우리는 적용한다면 우리는 햄릿은 정말로 허구적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모든 허구적 사람은 허구적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서술을 제대로 이해지 못한다면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베이커 가에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 베이커 가에 사는 허구적 사람들 또한 있다고 결론지으려 할 지도 모른다. 있기는 한다. 그러나 베이커 가에 사는 허구적 사람들은 실제 사람이 베이커 가에 사는 것과 같은 뜻으로 베이커 가에 살지는 않는다. 한 경우에서 그는 술어를 직접적으로 적용하고 있고, 다른 경우에서 그는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묘사되었다면 참이 되는 규칙에 따라서 술어를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술어의 이 두 가지 용법 때문에 여기에는 모호성이 발생한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고려하라. 내가 ‘프랭크 프랭클린’이라고 부를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자. 나는 또한 이 허구적 캐릭터 외에도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F. R. 리비스 또한 이 이야기의 캐릭터라고 하고, 프랭크 프랭클린이 F. R. 리비스에게 존경받는다고 하자. 즉, F. R. 리비스가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프랭크 프랭클린은, 햄릿이 레어티스에게 찔린 허구적 캐릭터인 것과 같은 뜻으로, F. R. 리비스에 의해 존경받는 허구적 캐릭터이다. 그러나 F. R. 리비스는 이 이야기를 읽고, 그 캐릭터를 전혀 존경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비록 위의 뜻에서 프랭크 프랭클린은 정말로 F. R. 리비스에 의해 존경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F. R. 리비스에게 존경받는’이라는 절을 직접적인 뜻에서 사용하면서, 프랭크 프랭클린은 F. R. 리비스에게 존경받지 않는 허구적 캐릭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호성에 관한 사실이 인식되어저야 한다. 이야기 속의 이름은 실제 사람을 지시할 수도 있다, 즉, 정말로 사람을 지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나폴레옹에 관하여 허구적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나폴레옹이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없다; 여기 허구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은 실제 사람이다. 허구 속에서, 나폴레옹에 관한 한 이야기처럼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조 시대 안에서 평생을 살다 죽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 여러분들 중 몇몇이 스티븐 빈센트 베네이의 글 “The Curfew Tolls”를 알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에서 나폴레옹은 이른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평생을 왕정 아래 살았고, 그의 군사적 영광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혼자만의 몽상에 삶을 바친다.

아마도 당신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왕정 시대 안에서 평생을 살다 죽었다'라는 진술을 그냥 들었다면, 당신은 이를 철저히 거짓이라고 여겼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허구적 캐릭터에 관한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실제 나폴레옹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실제 사람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술어를 나폴레옹에 귀속시키기 위하여 명시적인 한정어 ‘이야기에 따르면'을 덧붙여야 한다. 또는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명료한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다면, 당신이 내가 일상적 담화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을 위해 어떤 종류의 존재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되었으면 한다. 소위 과학적 언어65가 반드시 이러한 개체를 포함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이 쓰는 작품, 또는 단지 이 작품들의 구체적 인쇄물 등등에만 양화한 채 잘 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의논하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담화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구조 속에는, 내가 보기에 우리는 이러한 존재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이농적 존재론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특정한 허구적 그리고 신화적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실이다. 그 어떤 허구적 캐릭터도 사람들이 허구를 지어내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어떤 다신교의 신도 다신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개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유적 경험적 사실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구상적 활동에 의해 존재한다.

우리는 허구적 캐릭터들과 다른 모든 것들 간의 동일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쩨, 조금 더 직설적이고 사소한 종류의 것으로, ‘제우스가 그 사람이 숭배한 그리스 신이었는가?’ 답은 그렇다일 수도 있고, 아니다일 수도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제우스를 숭배하고, 제우스가 또한 다른 사람이 숭배한 신이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은 신을 숭배했다. 동일성의 대체성은 여기서 성립할 것이다. 처치가 생각했던 것처럼 동사 ‘숭배하다'의 대상이 앞서 나오는 절의 프레게적 뜻이라면 대체성은 성립하지 않을 것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다른 종류의 질문이다 - 제우스와 주피터가 같은 신이었는지 - 같은 다신교의 신이었는지 - 두 가지 다른 종교에 있는 유사한 신인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비록 단순하게 두 서로 다른 허구적 신이 있다고 주장해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진지한 문제로 다뤄저야 하는 한 답은 전설을 역사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주어질 것이다. 만일, 말하자면 로마의 전설은 그리스의 것에서 비롯되었고, 이름은 어떤 특정 시점에서 또는 점진적으로 단순히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었다면, 이들은 두 개의 다른 종교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신이 아닌 같은 신이다. 만일, 반면에, 두 종교가 독립적인 기원을 가진다면, 이들은 정말로 두 개의 다른 종교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신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동일성 문제는 말이 되는 것으로 보이며, 질문들의 답은 종종 한 캐릭터가 다른 것과 같은 것인지를 추적하는 역사적 연구의 주제이다.66

마지막으로, 어찌 되었든간에, 내 견해는 햄릿이 존재한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 되게 하는 뜻을 제공한다. 적어도, 우리는 ‘햄릿과 같은 허구적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허구적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하며, 반면에 곤자고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몰로흐라는 허구적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 서로 다른 이유로 말이다. 곤자고는 실제로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이지만, 실제 허구적 캐릭터는 아니다. 몰로흐는, 아마도 - 적어도 성경에서는 원래 - 허구적 허구적 캐릭터조차 아니다. 그러한 허구적 캐릭터, 또는 이교도의 신, 전설적 대상이 있다는 생각은 단순히 혼돈에 의한 것이었다(적어도 내가 언급했던 두 이론 중 하나라도 맞다면 그렇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이름 ‘햄릿'이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이것이 정말로 무엇을 지시한다고, 마이농적인 뿌연 곳이 아니라 정말로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지시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햄릿'과 같은 이름들을 추상적이지만 실재하는 개체들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주어진 속성을 가지는 그러한 개체가 있는지에 관한 존재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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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logic'에서의 'free'는 그 의미가 'empty'에 가깝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빈 논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빈(Wien) 학파의 논리'처럼 들리는 게 문제네요. 참고 문헌을 이따가 여기에 올릴게요.

Classical logic requires each singular term to denote an object in the domain of quantification—which is usually understood as the set of “existing” objects. Free logic does not. Free logic is therefore useful for analyzing discourse containing singular terms that either are or might be empty. A term is empty if it either has no referent or refers to an object outside the domain.

Nolt, John, "Free Logic",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21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21/entries/logic-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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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으로는 "자유 논리"가 딱히 이상하지 않은 것 같아요. free logic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K. Lambert의 서술을 참조할만 합니다.

The expression 'free logic', coined by the author in 1960, is an abbreviation for 'logic free of existence assumptions with respect to its terms, singular and general, but whose quantifiers are treated exactly as in standard quantifier logic.' ( Lambert, Karel. "Free logics." The Blackwell guide to philosophical logic (2017): 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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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는 이 인용문이 제 의견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해요. 빈 논리는 항에 대한 존재 가정이 {없는, 포함되지 않은} 논리니까요.

자유라는 말은 다른 맥락에서 쓰는 것을 저는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 "The media are free of government censorship."이라는 예문에서는 'free'를 '자유롭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죠.

'free variable'은 저도 '자유 변수'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아마 '자유 논리'를 계속 쓸 것 같아요. 'Free logic' 에서의 'free'가

여기서의 'free'와 아주 다른 맥락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특히 인용하신 SEP문서에서 말하듯이, free logic이 domain을 아예 비워둔 채 empty term만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empty term을 포함하는 문장에 진리치 참을 할당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 참인 명제의 부분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요구에서 free하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이라, 오히려 '빈 논리'가 empty term만을 다룬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제게는 보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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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쪽 분야에 관해서 많이 읽고 있는데, 저는 늘 번역자료를 만나는 타이밍이 좋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올려주시는 요약문 잘 읽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나중에 올릴게요. 그리고 철학 스택 익스체인지에서 'free logic'에서의 'free'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해 볼게요. 제가 아는 해외 박사 후 연구원에게도 여쭤보겠습니다.

어쨌든 번역자마다 특정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지에 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 @2357 님의 의견도 존중합니다.


롱맨 영한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free of'는 '…에서 자유로운', '…의 제약이 없는' 말고도 '<좌석∙방 등이> 비어 있는', '<병∙차별∙고통 등>이 없는', '…을 포함하지 않은'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Longman, n.d.)

'어떤 제약이 {없음, 포함되지 않음}'은 '그 제약에서 자유로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에 따라 'free logic'에서의 'free'도 '자유'로 번역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유'라는 단어만 'free'의 번역어로 고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free'의 의미가 다양함을 고려해, 주어진 맥락마다 'free'를 적절한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지적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그래도 '빈 논리'는 '비어 있거나 빌 수도 있는 단칭 항[singular term]을 포함하는 논리'를 적당히 간추린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자칫 생길 수 있는 오해는 빈 논리에 대한 설명으로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여담을 하나 하자면, 나라인포테크의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주의: HTTPS를 이용하지 않아 연결이 안전하지 않습니다.)는 "'~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와 같은 표현은 영어에서 온 표현으로 되도록 쓰지 않음이 바람직합니다."라는 도움말을 제시하는군요.

참고 문헌

방금 질문서를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수정하고 싶은 내용을 @2357 님이 알려 주시면 제가 반영하겠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침에 일어난 뒤에 적을게요.


  1. 영어 위키백과의 'free logic' 항목은 중국어 백과의 '自由逻辑' 항목, 스페인어 백과의 'lógica libre' 항목, 이탈리아어 백과의 'logica libera'에 해당합니다. 덧붙여 말하면, '逻辑'는 'logic'의 음역어입니다.
  2. 제가 아는 해외 박사 후 연구원도 @2357 님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3. 철학 스택 익스체인지의 두 댓글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Jo Wehler 님은 "That’s exactly what you propose."라고 말하면서도 'free'가 'unrestricted'를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Mauro ALLEGRANZA 님은 'free'가 'free of existential presuppositions'를 뜻한다고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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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하는 번역인데도 단어 선택에 있어서 @chabulhwi 님보다도 덜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ㅎㅎㅎ
여하튼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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