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2강

이 글에서 이어집니다.
조금 많이 늦어졌네요... 원래 2월달 안에 2강 번역은 끝내려 그랬는데....
3강은 가능한 4월 중순 안에 끝내보도록 하겠습니다

2강

    1. 06

지난 시간에 나는 허구적 담론에서 사용되는 종류의 이름이, 말하자면, “가장된 이름”으로, 허구의 가장의 일부라고 논증했다. 거기서 사용되는 명제는 실제 명제가 아니라 가장적 명제이다; 또는, 달리 말하자면, 문장들은 실제로 명제를 표현하지 않고 단지 가장한다.

나는 또한 우리가 설령 “고유 이름”이라는 단어를 러셀이 논리적 고유 이름(일상적인 것과 반대되는 진정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을 위해 남겨두더라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논증했다: 그런 경우에도, 내가 러셀식의 감각 자료, 또는 시각적 인상 혹은 무엇이든지 적당한 것을 이름한다고 구전하거나 가장할 때 허구에서 발생하는 가정적 이름의 범주가 있을 것이다. 러셀의 예에서 한 언어의 화자는 언어가 자신에게 국한되어 있는 한 이런 이름들을 내성(inspection/introspection)할 수 있는 별개의 의미론적 범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적 이름이라는 의미론적 범주가 있다. 이것은 러셀이 제안하는 그 어떤 단순한 패러다임에 따른 한정 기술구, ‘이야기 속의 대부분의 속성을 만족하는 그것’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가장적 이름 ‘마틸다’와 진정한 논리적 고유 이름 ‘알로이시오’를 사용하여 대조를 이루면서 ‘마틸다는 존재하지 않지만, 알로이시오는 존재한다’와 같은 진술을 할 수 있다. 그들의 분석의 문제는 일상적 경우에서 사람, 행성, 선박, 신발 그리고 봉랍이 이름될 수 있다고 인정할 때 생기는 문제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특별한 경우와 같이 일반적인 경우에도 같은 것을 시도하지 않는가?

어쩌면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한 단어가 무슨 의미론적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모든 문장 사용자에게 내성가능해야 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가장적 이름 또는 허구적 이름을 일상적 이름과 구별되는 의미론적 범주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위의 가정을 거부함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소통이 이루어진 일반적인 허구의 경우, 어쩌면 저자는 그가 가장적 이름을 사용하는지 어떤 실제 대상을 지시하는지 - 그가 허구를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청자는 상황에 대해서 불확실해 하거나 틀린 인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저자 자신도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청자, 또는 시일이 지난 후의 저자는, 이름이 아닌 어떤 것 - 단순한 가장적 이름 - 이 이름이라고 오도된mistaken 인상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이름이라고 오도되게 판단된 경우의 범주, 이러저러한 문장이 명제를 진정하게 표현한다고 오도되게 판단된 경우의 범주를 허용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가 허구가 아니라고 잘못 판단을 내린 채 작품을 읽거나, 허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한 예시는 일부 천문학자가 수성의 섭동을 발생시켰다고 여겼던 가설적 행성 ‘벌칸’을 이름한 일일 것이다. 나중에 수성의 섭동을 발생시킨 행성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 발견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위한 길을 닦았다. 내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천문학자들은 이 이름을 도입했을 때 어떤 행성을 이름했다는 오도된 인상에 빠져 있었으며, 그들이 이름 ‘벌칸’을 포함한 문장을 발화했을때 가장의 경우가 아니라 실제로 명제를 표현했다고 가정한 것은 오도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에 관해 말한 대부분의 것들은,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여러분 스스로 검토해볼 수 있다), ‘오도’라는 용어를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가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자리에 적용될 것이다.

저번 시간에 나는 내가 프레게-러셀 견해가 모세가 존재하거나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찌나 잘못된 분석을 내놓았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이런 진술이 ‘이러저러한 이야기 속에서 대부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독특한 사람이, 존재한다’로써 주장되었다고 분석하는 것이 정확한 논리적 속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비록 지시체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그들의 이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셜록 홈즈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이 이야기 속의 속성들이 만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논증했다. 그들은 작가가 지시체를 결정하는 한정 기술구가 존재한다고 가장한다 말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이 이야기 안에서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이야기는 가정적으로라도 독특하게 특정하는 그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또한 이 견해가 양상적 속성에 대해 어떻게 살피는지 말하고 싶다. 여기서 프레게-러셀 분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나는 N&N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반복해 이 분석이 양상적 맥락에서 더 크게 실패한다고 논증한다. 프레게와 러셀 (그리고 강의 1에서 인용했듯이 이 구체적 예시를 다룬 비트겐슈타인도)은 ‘모세가 존재한다‘가 ‘어떤 단일한 독특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갔다‘와 같은 것 - 성경에서 말하는 그 무엇이든 - 으로 분석된다고 주장하기를 바랐다. 간결함을 위해 문제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갔다는 것뿐이라고 가정하자. 여기서 이것이 가설적, 또는 반사실적으로 작동하는가? 내게는 이 분석이 이 경우에서 특별히 나쁘게 작동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비록 아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세가 존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모세 자신은 존재하면서 단순히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실패했을 수 있다.34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분석은 당연히 실패한다. 어떤 독특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왔을 수 있는데, 그것은 비록 모세가 태어난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어떤 다른 사람이 모세의 자리에서 그런 일들을 해냈을 수 있다. 물론 어떤 형이상학적 원칙이 한 독특한 사람을 어떤 정해진 임무를 수행하게 하도록 만든다고 여기는 역사에 대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나 이 단순히 고유 이름에 대한 분석으로, 또 고유 명사와 존재 진술과의 관계를 통해 이 견해를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된 분석은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제기될 한 가지 반론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실 N&N에서 언급되었지만, 이전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반론을 받아든 것을 보아 거기에서, 적어도 어떤 기준에서건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나는 가끔 양상 논증을 사용하여, 예를 들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그 사람‘을 의미할 수 없다고, 왜냐하면, 내가 말했듯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했다.

이에 대한 한 반론은 러셀의, 기술의 범위scope of a description을 통해 제기되었다. ‘모세‘ 라는 용어가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그 사람 x’를 축약한 것이라고 가정하자.

  1. M = |x LIOE(x)

여기서 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았음이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서 ‘모세’가 위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논증할 수 있다:

  1. <>~ LIOE(M)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1. []~<>~LIOE(|x LIOE(x))

그러나 러셀의 범위scope 개념35을 통해, 러셀의 기술 이론 아래에서 (2)로 표현된 진술은 두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쉽게 지적될 수 있다. 한 해석에서 그 진술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유일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1. <>(Ex)(LIOE!(x) ^ ~ LIOE(x))

(여기에 쓰인 느낌표는 나 자신의 표기법이며, x가, 그리고 오직 x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왔음을 의미한다.)36 이것은 확실하게 모순이다.

그러나 위 기술에 큰 범위를 주게 될 다른 해석 또한 존재한다: ‘독특하게 실제로in fact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 x가 있고, 바로 그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음이 가능하다’:

  1. (Ex)(LIOE!(x) ^ <> ~ LIOE(x))

그리고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4)는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왔고 동시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독특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나는 이렇더라도 내 논증의 세부 사항을 고려한다면, 어쨌든간에 이 반론이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37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더 들여다보지 않도록 하겠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위의 반론은 고유 이름에 대한 기술주의 분석에 대한 유난히 약한 변호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았다’가 아닌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문제시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즉:

  1. ~E(M)

그리고 우리는 양상 맥락에서 위 문장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우리는, 노골적으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라고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1. <>~E(M)

즉, 어떤 상황에선가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런 가정문을 정말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가정문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대체로 인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반사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어떤 상황에선가 존재하지 않았음이 가능하다: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모세’를 ‘독특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이라는 기술구로 분석하는 프레게-러셀 분석을 통해 (7)을 분석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이를 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내가 보기에 틀린 분석에 다다른다. 내가 제안했던 분석은 (7)이 ‘독특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이 가능하다’를 의미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1. <> ~E(|xLIOE(X)) [또는, <>~(Ex) (LIOE!x))]

그리고 이것은 내게 원본의 분석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에 대해 위와 같은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독특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선가 존재하지 않았음이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즉:

  1. (Ex)(LIOE!(x) ^ <>~E(x))

즉슨,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이를테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지 않았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왔을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위와 같이 범위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의 문제는, 그것이 프레게와 러셀의 존재는 개별자의 술어가 아니라는 원칙을 어긴다는 것이다. 존재는 일차적 개념이 아니라 이차적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석은, 적어도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독특하게 이끌고 나온 사람으로서 식별하는 사람이 있고,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그 자체로 아무런 뜻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방법은 광범위한 경우에서 이 논증에 대해 제기된 반대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38 우리는 어쩌면 이 문제가 존재의 경우에서 특수하게 적용될 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특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점이 광범위한 경우에서 대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 점이 ’모세’와 같은 어휘가, 내가 논증하듯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다른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기술구를 줄여쓴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선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았다던가, 그가 어떤 상황에선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할 때 고정적으로 특정한 사람을 지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프레게-러셀 분석은 이 특수한 경우에서 유지되기가 유난히 어렵다.39

따라서 내 견해는 존재를 개별자 - 그것이 러셀의 감각자료건 다른 무엇이건 - 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완벽하게 적합하다는 것이다. 무어는 진작에 러셀의 감각자료 - 1강에서 이미 보았듯이 러셀은 감각자료를 논리적으로 고유한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개별자로 보았다 - 와 연관해서, 러셀이 개별자의 술어로서의 존재에는 아무 의미도 부여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틀렸다고 논증했는데,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것인데, 이는 오류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이 지각하는 모든 감각 자료에 대해서, 그 사람은 언제나 그 감각 자료를 두고 ‘이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고 참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명제 ‘이것이 실제로는 존재한다’ 가 참이며, 따라서 ‘이것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지 않고서 어떻게 위와 같은 문장이 참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1959b: 126)

여기서 나는 러셀과 프레게에 반대하는 무어의 논증에 동의한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개별자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개별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완벽하게 적합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러셀을 따라 러셀의 감각 자료만을 진정한 개별자로 생각하려 했던 무어와 달리 나는 이 점을 그것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내게 이 논증은 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특정한 분필 한 자루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이것은 무어가 러셀에 반대하여 논증했듯이 감각 자료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40

러셀은 만일 존재가 개별자에게도 적용된다면, 이러한 속성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오류의 특성이라고 논증한다. 무어의 논증은 여기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자, 프레게-러셀의 양화 이론의 장치에서 x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정의가 있는 듯하다:

  1. E(x)

즉, x인 y가 존재한다:

  1. (Ey)(y = x)

(x와 y는 모두 대상을 범위로 삼는 변원variable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일관적으로 존재가 단지 (프레게의 용어를 따르자면) 이차적 개념이며 개별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적용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논증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물론, 모든 x에 대하여 y=x 이 되게끔 하는 y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1. (x)(Ey)(y = x)

달리 말하자면, ‘모든 x에 대하여, x가 존재한다’는 양화 이론에서 하나의 정리일 것이며, 아마도 필연적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건, 나는 “어떤 것something”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어서 러셀과 동의한다. 사물은 존재자existers와 비존재자nonexisters 두 가지 종류로 나뉘지 않는다.

(12)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이다. (12)의 필연성은 다음과 같이 쓰여질 수 있다:

  1. [] (x)E(x)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이 필연적 존재를 가진다‘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1. (x)[]E(x)

물론 무어가 이 분필 자루, 또는 심지어 이러한 러셀 식의 감각 자료가 어떤 경우에선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가 거부하는 것은 이 두 번째 문장이다. 따라서 존재는 자기-동일성이라는 술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럴 경우 (13) 뿐만 아니라 (14) 또한 참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자기-동일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14)를 (13)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즉 (x)[]P(x)를 P(x)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양상 체계가 제안된 적이 있다. 사실 이 두 진술이 동치라는 것이 보여질 수 있는 양상 체계, 그러니까, 그 역도 성립하는 체계도 있다41. 나는 Kripke(1963)에서 이런 추론에 담긴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논의했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그것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겠다. 다음과 같은 관찰에서 다른 종류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와 같은 노선에서, 모세에 관한 명제를 표현하고, ‘모세’라는 이름을 이름으로써 사용할 때, 지시되어지는 대상, 그러니까 모세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참이 될 수 있는가? 만일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아마도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다른 노선을 택한다면, 그런 명제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거나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42

만일 그런 방식으로 모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면, 우리는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는 그 명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그 어느 가능세계에서든 모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근원적인 혼동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정적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주어졌을 때 말할 수 있었을 것과,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는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후자의 상황이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모세’라는 이름이 있고, 다른 상황에서 우리의 언어의 일부분이 되는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언어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정한 가정적 상황에 대하여, 그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의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진술이 그러한 상황에서 거짓이라고, 설령 우리가 이러한 상황들 중 일부는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없었을 상황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음에도, 말할 수 있다. (만일 이런 명제에 대한 견해를 취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표현될 명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제로 이런 언어를 가지고 실제로 이 명제를 가진다. 바로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가정적 상황에서, 우주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따라서 그 무엇이든 표현할 무언가가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명제가 존재했을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이 대답하도록 남겨두겠다.

어쨌든,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그런 상황이 주어졌을 때 말했을 것과, 우리가 그런 상황이 실제로는 주어지지 않았음을 믿으면서 또는 알면서 특정한 상황에 대해 말했을 것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14)처럼 보편 양화된 변원 대신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면, ‘모세는 존재한다’가 필연적이라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다른 혼동에 의해 (14)와 비슷한 무언가를 다시 가지고 올 것이다.)

어쩌면 더욱 흥미로운 문제는 허구의 이름을 사용한 양상 진술, 이를테면 ‘셜록 홈즈가 존재했을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한가?’와 같은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양상논리학자는 그의 체계를 지어가면서 이 문제,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사태들에서 그는 존재했을 수 있다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 이로써 발생하는 양상 논리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현재 나의 입장은, 물론, 모든 이러한 허구적 이름에 대한 견해와 불일치에 있을 것이다. 그 양상논리학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 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 주장은 물론 옳지만, 그는 이런 방식으로 주장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셜록 홈즈가 있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가? 물론, 정확히 소설에서 기술한 대로 일들을 해낸 위대한 탐정이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참이다. 물론, 내 견해에서, 만일 ‘셜록 홈즈’에 대한 진술이 가장된 명제를 표현한다면 - 또는, 명제를 표현한다고 가장한다면 - 우리는 가장된 명제를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셜록 홈즈가 존재했을 상황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한 성취를 이뤄냈고, 코난 도일이 그에 대해서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양상논리학자가 말하는 바처럼, 셜록 홈즈가 가능하지만 실제적이지 않은 개체라고 가정하지 않는가?

확실히 누군가가 이야기 속에서 홈즈에게 귀속된 행위를 했을 수 있다. 실로, 많은 적절한 시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실제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셜록 홈즈였을 수는 없다.

‘셜록 홈즈’라는 이름을 도입하면서, 우리는 그 이름을 어떤 특정한 일들을 해난 특정한 사람을 이름하지, 이러한 일들을 해낸 그 누구든지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셜록 홈즈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홈즈는 어쩌면 왓슨에게, 그는 그토록 위대한 탐정이 아니며, 그의 형인 마이크로프트는 자신과 같은 정도로 해냈을 것이지만 경쟁을 피해 다른 분야로 갔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셜록 홈즈’이러한 일들을 해낸 - 그 누구든지 -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이름에 의해 이름된 독특한 사람이 없으며, 실제로 어떤 가능한 사람이 이름된 것도 아니다.

이런 혼동은 부분적으로 내가 N&N에서 비판했던, 형이상학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의 동일시에 기인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다양한 반사실적인 상황에서 말했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셜록 홈즈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믿음의 원천은 셜록 홈즈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밝혀졌을 수는 있다. 그것은 인식론적인 문제이다. 만일 셜록 홈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밝혀진다면, 그 이름이 허구적이라는 나의 가정은 틀렸다. 어쩌면 도일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기사나 일련의 역사적 보고43를 썼고, 사람들이 그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고 여기리라고 한 치도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틀렸으며, 셜록 홈즈가 베이커 가에 살았다는 따위의 내용을 가진 진정한 명제가 없다는 내 인상은 잘못되었다. 나는 단순히 이 부분에서 틀렸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런 명제들이 가정되었을 뿐이라는 - 그리고 이런 명제들이 없다는 - 점에서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우리가 어떤 가정적 세계에서 그런 명제들이 참일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 데 있어서 잘못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정적 세계에서 참일 어떤 명제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존재 양화된 이야기만 - 어떤 사람 x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는 이야기 - 에서만 그러한 명제들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셜록 홈즈가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내 견해는 상관없이 유지될 수 있다.

나는 내가 대부분의 경우에서 동의하는 양상논리학자를 아직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는 공평성을 위해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허구에서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도 주장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논리학자는 “양상 논리에 대한 의미론적 고려Semantical Considerations on Modal Logic” (Kripke 1963)에서의 솔 크립키Saul Kripke이다. 그는 인쇄된 증명을 읽을 때부터 이 특정한 진술에 회의적이었지만, 그것을 빼내기에는 증명에서 개정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았다고 내게 밝히기는 했다. 44

더욱 놀라운 점은, 나는 이것을 특정한 술어에도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빈 술어empty predicates는 비존재에 관한 담론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이름과 달리 별 문제가 없다고 가정되었는데, 아주 널리 쓰인 예시 중 하나는 ‘유니콘’이다. 또는 ‘용’, ‘키메라’와 같은 것 - 다양한 신화적인 종 - 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니콘은 없지만, 첫째, 물론 유니콘이 있었고, 우리가 잘못 여기고 있었다고 드러날 수 있으며, 둘째로, 유니콘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어떤 특정한 결정된definite 상황에서 유니콘이 있었을 것이라고, 심지어 아무런 논증 없이도 일반적으로 가정되었다. 나는 첫 번째 가정에 대해서는,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했던 그림에서는 아니지만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유니콘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내 학설에서는 어떠한 결정된 가능성도 묘사하지 않는다.

다음 두 가지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드러날 것이냐는 인식적 문제가 있다. 둘째,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가정이 맞다는 것이 주어진다면, 유니콘이 존재했을 수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 유니콘이 존재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여기서 셜록 홈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용된 학설을 거부한다.

유니콘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주로 진술되지 않고 전제되었던 약정적 그림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신화에서 유니콘에 대해 들은 것이라고는 그것들이 흰 말로 보인다는 것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뻗어 나온 특정한 뿔이 하나 있다는 것뿐이라고 가정하자. 아마도 그 외에도 몇 가지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들을 일단 치워 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림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아마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유니콘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일단, 반사실적으로, 정확하게 흰 말처럼 생겼고 뿔 하나가 있는 동물이 있었다면 유니콘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니콘이 없다고 가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유니콘‘이라는 말이 유니콘에 관한 전설에서 차지하는 역할role이 무엇인가? 첫째, 특기할 만한 중요한 사항은 유니콘은 동물의 한 종 - 가설적, 또는 신화적 종species -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원리에 따라서, 위와 같은 모습을 띈다고 내가 기술하고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 적어도 신화의 가장의 일부이다.

이러한 종의 어휘에 대한 논리는 아마도 적절한 실제 종에 대한 이름의 논리와의 비교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다. 우리는 호랑이를 유사한 방식으로 “검은색 가로 줄무늬와 연한 배를 가진 황갈색의 고양이를 닮은 대형 육식 사족보행 동물” (축소판 옥스퍼드 영어사전) 이라고 특정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양이를 닮은’을 ‘고양잇과의’ 또는 ‘고양잇과에 속한’ 대신 ‘큰 고양이처럼 보이는‘이라고 받아들이자. 왜냐하면 확실히 ‘호랑이‘의 첫 번째 정의는 어떤 특정한 생물학적 분류에 속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호랑이가 실제로 이러한 과에 속하는지 조사해야 했다: 그들은 선험적 추론으로 그러한 일들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아마도 밀이 그랬던 것처럼, 호랑이를 이러한 기준을 만족하는 임의의 동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럴 수 없다. 왜 그런가?

첫째로, 이렇게 생긴 그 어떤 동물이건 호랑이라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만일 정확히 이렇게 생긴, 그러나 다른 내적 구조를 가진 파충류가 있었다면(사실, 데이빗 루이스가 유대류 호랑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런 종의 동물은 그들이 얼마나 호랑이와 닮아 있든 간에 호랑이가 아닐 것이다. 마치 황철석이 얼마나 금과 비슷하게 생겼든 간에, 다른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호랑이는 자연종natural kind이며, 호랑이이기 위해서는 그 자연종에 속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렇게 생긴 어떤 동물이건 정의에 의해 호랑이인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완벽하게 닮아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것들이 없다고 바라거나 믿을 수 있다. 유사성이 낮으면 낮을 수록 종을 그 외양에 의해 특정하는 것이 더욱 간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한 논리적 보증은 없다 - 만일 표면적 외관만이 문제시된다면 확실히 그렇다.

둘째로, 호랑이가 이러저러하게 생겼다는 것은 ‘호랑이’라는 어휘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단순히 다리 셋 달린 괴물같은 호랑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 이 발견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이하고 예상을 벗어나겠지만 - 우리가 호랑이를 특정한다고 여겨 왔던 표면적 특성에 관하여 틀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호랑이가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신비한 종류의 굴절 또는 반사 작용 따위가 있어서 - 물론, 이는 매우 그럴 듯하지 않으며, 현실적인, 과학적으로 묘사하기 어렵지만 - 우리가 다리 개수를 두 배로 착각하게끔 하기 때문에, 호랑이는 실제로 네 개의 다리가 아닌 두 개만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랑이가 사실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호랑이는 사족 보행이 아니라 이족 보행을 한다는 것일 것이다. 비슷하게, 만일 우리가 어떤 광학적 환상이 작용했고 금은 사실 노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다는 것을 - 금이 발견된 지역에서 단순히 노란색으로 보였을 뿐이었다고 - 발견했다면 우리는 금이 없었다고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금은 특징적으로 초록색이지 노란색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것이다.45

이러한 고려 사항들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 담론에서 자연종 어휘는 고유 이름과 같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 ‘이 본래의 표본에 의해 주어진 그 종류’로서의 실체, 종 또는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지시한다고 - 결론짓게끔 이끌었다. 우리는 확실히 추가적인 조사가 없다면 이 종에 속한 개체를 특정할 것이라고 믿을 어떤 표면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 어떤 표면적 특성이 실제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틀렸음이 드러날 수 있으며 (경계선에 대한 조건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아주 틀렸다면,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화학 원소임이 드러났다’이 아니라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조건들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확실히 아주 중요하고 거창한 방식으로 틀렸을 수 있다.), (b) 같은 종류가 아닌 동물들 - 그러니까, 예를 들어 본래의 표본과 내적 구조에서 닮지 않은 것들 - 은 얼마나 호랑이와 유사한지, 얼마나 우리가 처음 호랑이를 봤을 때 그들과 구분하기 어려운지와 상관없이 호랑이가 아니다. 우리가 내적 구조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호랑이’라는 말이 ‘이러저러한 생물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을 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탐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랑이이기 위해서는 이것과 같은 종의 동물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그리고 아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46

‘유니콘’ 또는 ‘용’과 같이 어떤 종에 대한 가장된 이름은,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바로 같은 논리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여기서 우리는 이런 종을 특정하는 대신 특정되었다고 가장한다는 것이다. 이렇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주어진다고 할 때, 일단 ‘유니콘’ 그리고 ‘용’ 두 어휘 모두 신화적이라고, 그 두 종 모두 진정으로 특정되지 않았다는 가정이 맞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특정한 상황 하에서 유니콘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하나의 뿔을 가진 흰색 말처럼 보이는 동물이 있을 수 있다. 호랑이의 예시를 생각해보라. ‘남극에 호랑이가 있었을 수 있는가?’ 남극에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이 있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남극에 호랑이가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런 가설적 동물들이 호랑이이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 한 가지를 만족해야 하는데, 바로 그것들이 같은 종이라는 것, 같은 내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조건을 더할 수 있다: 그것들은 유니콘처럼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유니콘이어야, 유니콘과 같은 내적 구조를 가져야 한다. 불행히도, 이야기에서는 유니콘의 내적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며, 따라서 다른 가능세계에서 어떤 가설적 동물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지도 않았다. 많은 가설적 동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유니콘이 용이 만족한 기술을 만족했을 수 있다. 용은 어쩌면 유니콘의 경우보다 더 명료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유니콘에 대해서는 말의 내적 구조를 귀속시킬 수도 있으나, 용이 어떤 특정한 내적 구조를 가진다고는 가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모든 다양한 용과 유사한 가설적 종이 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용은 단일한 자연종 - 이런 가정은 이야기의 부분이다 - 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니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 어떤 종이 용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용이 있을 특정한 가능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47

심지어 유니콘과 아주 닮은 동물들 - ‘바보의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 이 있고, 그것들이 자주 유니콘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이야기의 한 부분일 수 있다. 확실히, 이것은 이야기에 일관적으로 삽입될 수 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생긴 오직 한 종의 동물만 있다는 것은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니다. 확실히, 그럴 필요는 없다.

둘째로, 인식적 상황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물론, 유니콘이 실제로 있었다고 드러날 수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가? 어쩌면 ‘글쎄, 이러이러하게 생긴 동물이 있었다고 드러났을 때, 그 때가 바로 유니콘이 있었다고 드러난 때일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평행적인 셜록 홈즈의 경우에서 말한 것에 주의하라: 이야기 속에서 기술된 모든 일들을 해낸 위대한 탐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참된 보고였다는 점을 증명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의 캐릭터는 허구적이며. 어떤 죽었거나 살아 있는 인물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참일 수 있다. 유사하게, 만일 ‘유니콘’이라는 말이 허구에서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호랑이’라는 말과 같은 논리를 지닌다면, 우리는 ‘이 신화 속의 종은 허구적이며. 어떤 멸종했거나 현존하는 실제 종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적입니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개별자의 경우와 같은 정도로 타당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실제 종과의 관련 없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떠올려 유니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우리는 - 이 허구적 동물이 실제 세계의 무언가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 그가 그러한 실제 동물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고, 셜록 홈즈의 유비적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만일 그가 ‘바보의 유니콘’에 대해 말했다면 더욱 명료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럴 경우 그러한 실제 동물은 유니콘과 바보의 유니콘 둘 모두와 일치할 것인데, 우리는 그가 실제로 둘 중 어느 동물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 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schm-유니콘schmunicorn’이라는 어휘를 도입하여, ‘만일 실제로 있다면, 다음과 같은 표면적 특성: 하나의 뿔을 가지고 흰 말처럼 보임’에 의해 특정되는 동물 종의 구성원 의미하게 할 수 있다. 즉, 어떤 것은 이러한 표면적 특성을 가진 종이 존재할 때 그리고 그때에만 어떤 것은 schm-유니콘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어휘를 진지하게 여겼던 중세인들마저 이런 방식으로 ‘유니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생긴 단 하나의 종이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러한 것이 ‘유니콘’이라는 말에 있어 분석적이라고, 유니콘이 아닌 어떤 다른 종이 정확히 이렇게 생겼다고 드러날 수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이런 내용을 가지는 신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갈라하드 경이 유니콘을 만났을 것으로 되어 있고, 그들이 실제로 이것이 일어났다고 믿었다고 가정하자. 내가 생각하기에, 중세인은 만일 세계 어딘가에 갈라하드 경이 만난 그 표본과 종이 다르지만, 그것처럼 생긴 동물 종이 있다면, 그것은 유니콘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것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유니콘’이라는 말으로 단순히 ‘이렇게 보이는 종의 일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유니콘이 아니지만 이러한 표면적 특성을 가지는 다른 종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적 가능성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유니콘이 하나의 뿔만 가진다는 가정이 틀렸다고 드러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유니콘이 두 개의 뿔이 있지만 또 다른 하나는 너무 작고 주된 뿔 아래에 숨겨져 있어 그 어떤 기사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드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이 경우에,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깊숙한 곳에 하나의 뿔을 가진 말과 유사한 (적어도 유니콘이 말과 유사한 만큼 말과 유사한) 또 다른 동물종이 있더라도, 그들이 유니콘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유니콘에 적용한 기술이 이러한 다른 동물들에 더 정확하게 적용된다고 드러났지만, 중요한 점에서 잘못 기술되었을지언정 그 동물들이 그들이 기사들이 마주쳤다고 믿었던 그 동물은 아니다.48

만일 이것들이 중세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인식적 가능성이라면, 중세인들은 ‘유니콘’이라는 말로 ‘이러이러한 표면적 특성으로 특정되는 독특한 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어휘를, ‘호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만났다는, 이러이러한 표면적 특성을 통해 특정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가정적 표본을 바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오류의 가능성은 양방향 모두에, 유사품, 바보의 유니콘의 가능성과, 우리가 종 자체에 대해 잘못 기술했을 가능성 둘 다에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긴 그 어떤 종이라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유니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대신, 만일 우리가 ‘유니콘‘이라는 말을 중세 시대 사람들 - 그 전설을 퍼트린 사람들 - 이 썼던 방식대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유니콘이 존재했었을 수 있었다고 증명하기 위해 유니콘처럼 생긴 이 종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화와 어떤 역사적 연결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 종을 ‘유니콘‘이라고 부르는 것이 간편하다고 여길 수는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동물을 실험실에서 합성해 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유니콘‘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중세인들이 말했던 것과 바로 같은 동물을 만들어 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49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유니콘이 실제로 없다는 것, 그것이 실제로 신화이 주어졌을 때, 유니콘이 존재했을 다른 상황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논증한다. 둘째로, 인식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물론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신화에서의 기술과 일치하는 동물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제로 유니콘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여기서 어쩌면 누군가, ‘너는 “유니콘이 없다는 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없다 -- 이미 유니콘이 존재했다고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유니콘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슨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여기서 대답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유비되는 셜록 홈즈에 대한 문제와 같은 종류의 문제이다. 만일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어떤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정말 여기서 배제하고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것만은 말하겠다: 우리는 밴더스내치가 존재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유니콘이 존재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이끌릴 것이다. 우리는 밴더스내치에 대해 무엇을 전해들었는가? 흉측하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흉측한 동물은 아주 위험한 것이거나, 어쨌든간에 기피되어야 한다는 것50 외에 우리는 밴더스내치에 대해 그 어떠한 표면적 특성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다. 이것이 시에서 그들에 관해 알려준 모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어떠한 가설적 동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밴더스내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떤 상황 아래에서 밴더스내치가 정말로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아예 불명료한데, 왜냐하면 밴더스내치가 무엇일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야기가 어떠한 종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어휘를 아예 거부하지, 이것이 여러 가정적 상황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서 심지어 어떻게 보일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모양새는 주로 그것이 어떤 종에 속하는지에 대한 좋은 참고가 되어 왔다: 우리는 호랑이의 사진을 보고 그 종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완벽한 유사물은 사실상 매우 그럴듯 하지 않으며, 더 좋은 사진을 가질수록 우리는 유사물과 헷갈릴 가능성이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전의 상황과 기실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밴더스내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드러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내용의 루이스 캐럴에 대한 가설적 이야기 (사실 이야기는 아니고 연재만화였다) 를 읽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여겨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밴더스내치에 대해서 그대로 보고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이는 사실이라고 밝혀질 수는 있다. 우리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하라: 사람들이 그가 상상의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여겼음이 놀라웠다고, 그가 어렸을 적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갔을 때 그는 그것들을 조심하라고 당부받아 왔었고, 그가 살던 지역에서 그것들은 그렇게 불렸다; 비록 그 용어는 이제 그런 방식으로 쓰이지 않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과 대조적으로, 밴더스내치가 실제로 있었다고 밝혀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 밴더스내치가 실제로 있지는 않다는, 밴더스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따위로써 그러한 발견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밴드서내치가 없다는 것 - 밴더스내치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는 것 - 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밴더스내치가 존재했었을 상황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밴더스내치’라는 어휘는 단지 가정적인 종의 이름이며. 실제로 어떤 종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아래에서 밴더스내치가 있었을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비록 ‘용‘이나 ‘드래곤‘과 같은 어휘에 대해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들을 특정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들었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것들과 똑 닮은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내적 구조를 탐구하여 다른 가능세계에 존재할 가설적 유사물과 구별할 수 있다 (역주: 이 부분은 논증이 이해가 안 돼서 그냥 직역하였음.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there will be no actual ringers around, we can then investigate their internal structure to distinguish them from hypothetical ringers that might have existed in other possible worlds.) 그러나 만일 이런 탐구가 ‘유니콘’ 또는 ‘용’이라는 어휘가 단순히 가장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면, 어떤 가설적 종도 이름되지 않았다. 그리고 ‘유니콘임’이라는 술어의 지위는 탐정 소설 속의 가설적 고유 이름인 ‘셜록 홈즈’, 또는 (이 예시는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이러한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아무도 본 적 없는 가설적 색깔의 이름 ‘플라겐타’와 매우 유사할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대안적 번역: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상항에서 무엇이 플라겐타 색을 띌 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가장이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는데,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다 말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내가 중심 내용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에 진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 시간으로 미루겠다. 지금은 간략한 개요 정도만 말하겠다.

부정 존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기 전에, 여러 의미 하에서, 내가 보기에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고 참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셜록 홈즈가 어쨌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나는 그가 존재하는 경우, 진술 ‘셜록 홈즈가 실제로 존재한다’가 참인 경우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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