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2013) 지시와 존재: 서문 + 1강

Kripke의 Reference and Existence를 번역한 것입니다. 퇴고조차 되지 않은 초벌번역이라 굉장히 엉성할 텐데, 많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용어에 대한 번역어 선택이 일관적이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고, 독해가 잘못되었거나 한국어 글쓰기가 잘못된 경우도 흔할 겁니다. 단순히 문장이 어색하거나 번역어의 선택에 이의가 있는 경우도 많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퇴고하면서, 또 지적해 주신 부분을 반영하면서 천천히 고쳐나갈 생각입니다.

미처 주석까지 복사+붙여넣기가 되지 않아 일단 생략했지만, 크립키가 원체 주석을 많이 다는 사람이니만큼 번역은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그래서 일단 word로 쓰고 있는 것을 google docs로 옮겨서 링크로 올릴까 생각 중입니다.

텍스트를 좀 더 꼼꼼히 읽기 위해 하는 번역이지만, 군 제대하기 전까지 한 권쯤은 끝내고 싶네요...

서문

예전에 나는 무어의 <철학의 몇 가지 주요 문제들Some Main Problems of Philosophy>을 인용하고자 하는 구절을 찾기 위해 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 구절은 거기에 없었지만, 나는 다음과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위스덤 교수가 이 책이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에 틀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은 내가 런던에 소재한 몰리 칼리지에서 1910-1911년도 겨울에 한 스무 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1953년에서야 출판되었다.

나는 이 발견이 나를 조금 기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왜냐하면 나 또한 비슷하게 1973년에 옥스퍼드에서 존 로크 강의로서 치렀던 강의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출판이 아직 어느 정도 관심사가 될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강의는 "지시와 존재"라고 이름붙여졌으며, 그것이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나는 원래 "지금 당신 손에 들린 책"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이제는 실제로 그러할 지를 누가 알겠는가?)이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의 두려움을 안고, 내가 결국에 내 존 로크 강의를 출판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래 전에 쓰여진 (또는 말해진!) 자료를 출판하려 준비할 때는 어려운 결정들이 필요하다. 나는 원본에 대해 꽤나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으며, 필요하다고 보일 때만 개입했다. 비록 나는 대부분의 각주를 나중에 추가했고, 해명할 수 있는 구절을 재배치하며, 지금 와서 너무 길어 보이는(또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을 압축했으며, 심지어 너무 짧아 보이는 곳에서는 덧붙이기도 했지만, 나는 최종 결과물이 강의에서 전달된 것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에 설명된 부정 존재자들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복잡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음에도 그러하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대안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강의의 가장 핵심적인 기여는 허구적 그리고 신화적 캐릭터에 대한 존재론, 그러니까 그들이 허구적 또는 신화적 작품의 존재 혹은 비존재에 의존하는 추상적 대상이라는 이해일 것이다. 나는 저런 것들을 그냥 양화해버리는 자연 언어를 인도로써 삼았다. 따라서 나는 이 개념을 '벌칸', '플로지스톤' 또는 고도로 확장되고 심지어는 아마도 은유적인 의미에서만 '신화론적' 대상인 다른 빈 이론적 이름에 적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잘못 가정된 과학적 개체와 (어쨌든 잘못되었지만 실제로 있었다고 진심으로 믿어졌던)신화의 인물 사이에 원칙적으로 차이가 있을지에 대한 완전한 확신은 없다. 따라서 나는 아마도, 몇몇 사람들이 실제로 내가 그러했다고 추정했던 것처럼, 그것들도 그렇게 취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 언어를 인도로써 쓰는 것이 어쩌면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줄 수도 있겠다.

나는 마이클 더밋이 한 강의에서 단순히 비었다고 간주되는 이름은 사실 허구적 인물의 이름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나는 지금 이러한 기억과, 그의 관점과 내 강의에서 드러난 관점 사이의 관계를 검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이 기억이 정확하다면, 더밋은 이 강의에 영감을 주었다는 공로가 있다. 사실, 내 논문 "빈이름과 허구적 개체Vacuous Names and Fictional Entities"(이 강의들의 선구적 내용으로, 현재 <철학적 골칫거리Philosophical Troubles>에서 출판되었다) 의 토론 세션에서, 더밋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말했던 것은 대부분 명백히 허구로서 의도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인식된 허구와 관련되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에 대해서 말했던 것의 대부분에 대해 동의한다" (이 토론은 1973년 3월에 열렸으며 그후에 "두 번째 일반 토론 세션Second General Discussion Session"로서 Synthese에서 출판되었다).1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프레게에 관한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프레게가 자주 그러듯이, 뜻은 있지만 지시체는 없는 이름의 예로서 허구에서 쓰였던 사람의 이름을 들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 사람을 그것의 담지자로서 보장하는 무언가를 말할 수 없기에 그것들은 부분적인 뜻만 가지며; 반면에 문학 비평에서 허구적 캐릭터를 지시하기 위한 이름의 쓰임은 허구 속에서의 쓰임과 다르고, 여기에서, 그 뜻은 꽤나 구체적이지만, 지시는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Dummett 1973: 160)

비록 독자는 이러한 짧은 진술에 동의하기 어려워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내 입장과 꽤 일치하다.2 그러나, 만약 나의 관점에 대한 그의 영향에 관한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그 전에 그가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을 들었을 것이다.3

비록 이 강의들은 지금껏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녹취록은 몇 년간 옥스퍼드 대학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으며,4 그때부터 이 녹취록은 여러 명의 종사자들에게 전달되었고, 가끔씩은 토론되고 비판되는 것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런 한 가지 경우는 네이선 샐먼의 저작이다. 여러 저작에서5, 그는 내가 내가 제시한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을 더 넓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고 논증했다. 코난 도일이 어떤 개체를 이름하는 것을 가장pretend한다고 말하는 대신, 왜 그가 실제로 어떤 개체를 – 그 허구적 캐릭터를 –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가장은 하나의 실제 사람을 이름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보고 있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샐먼은 또한 이 견해를 허구적 또는 신화적 개체에 관한 다른 경우로 확장하려고 했다. 나는 이 견해를 여기서 평가하지는 않겠다. 나는 아마도 아직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하지 않았다. (샐먼 본인도 자신이 간혹 받는 회의적 반응을 재검토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그의 제안의 몇몇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믿도록 기울어져 있다. 6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의를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강의는 본래 헨리 하디에 의해서 문자화되었고, 나는 그의 작업과 거기에서의 엄격함에 대해 그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많은 동료들, 학생들, 그리고 이 강의들이 주어졌을 때의 청중들이 기여와 논평을 남겼고, 나는 최대한 나의 기억에 바탕해서 연관된 자리에서 그들의 공헌을 표시하려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내가 만일 몇몇 사람이나 공헌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면 그에 대해서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철학적 골칫거리>의 경우처럼, 뉴욕 시립대학교 대학원에 있는 솔 크립키 센터(SKC)은 이 강의를 출판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었다. 특히, 나는 이 소재를 편집하고 도움되는 제안을 준 게리 오스터태그, 그리고 특히 초안을 짜주고, 재작성 과정에서 논평, 조언 그리고 격려를 제공한 로미나 파드로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들의 소재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내가 이것이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고 끝내 설득시켜 준 것이다. 그들 및 다른 SKC의 멤버들, 특히 제프 뵈크너와 모니크 와이테이커와 같이 일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나는 대학원 행정실이 내 작업에 가진 관심에 대해 감사한다. 특히, 나는 내가 책을 끝낼 수 있도록 휴가를 준 프로코스트 체이스 로빈슨과 이아코보스 바실리오 의장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 피터 올린과 두 명의 익명 심사관은 이 강의를 출판하려고 하는 제안은 좋게 받아들여 주었다. 나는 피터, 그리고 심사관 – 본인들은 본인임을 알 것이고, 나도 누군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에게 감사한다. OUP(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의 피터의 직원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주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 발전에 어떻게든 관심을 가져 주시는 아버지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1강

    1. 30

나는 이 강의들의 제목이 어느 정도 그 내용에 대한 암시를 주었으면 한다. 얼마 전에, 다른 곳에서 나는 "이름과 필연"7이라고 불린 강의를 했었다. 작은 문제들을 끝맺기 위해, 나는 여기서 그곳에서 다룬 몇 가지 주제를 이어가려 한다. 나는 여기서 그 강의의 내용을 얼마나 생략할 수 있을지 모른다.8 아마도 청중들이 야유를 보낼 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에 대해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특히 시간상의 이유로 N&N에서 다루지 못했던 두 가지 분야에 대해서 논하고, 몇 가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아마 둘 중에서 비교적 중요할 한 가지는, 어떻게 이름하는 것이 존재와 관련되는지, 특히 빈이름vacuous name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의 지시, 허구적 개체fictional entity, 존재적 진술existential statements, 그리고 그와 같은 것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이다.9 내가 다루고자 의도하는(첫째의 주제에 대한 작업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의도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또 다른 분야는 화자의 지시speaker's reference와 의미론적 지시semantic reference이다.10 "화자의 지시"로써 나는 '존스는 "그 늙고 뚱뚱한 위선자"라고 말할 때 스미스를 가리켰다'와 같은 문장에서 쓰인 지시를 뜻한다. 또 다른 상관된 개념인 의미론적 지시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사용될 것이다: '기술구 "웨이벌리의 저자"는 한국어에서 월터 스콧 경을 가리킨다'. 이 주제는 Donnellan(1996)에서 제기되었다. 이제 이들 중 첫 번째 주요 주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지시체 없는 이름 – 또는, 마이농에게 제기된 문제를 구걸하지 않자면(비록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구걸하겠지만), 지시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이름들 -의 사용보다 더 복잡한 철학적 수수께끼를 가져오는 문제는 없는 듯했다. 우리는 상상 속의 개체에도 또한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한 철학적 입장에 반대하는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거의 결정적인 논증으로 간주되어 왔다. 밀은, 우리 대부분이 아는 바처럼, 고유 이름은 외연denotation을 갖지만 내포connotation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름을 사용할 때, 이름이 의미론적 기능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데 있고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름은 기술구가 대상을 특징하는 속성으로써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를 그 (고유한)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람이라고 기술함으로써 그를 지시한 것이다.11 그러나 우리가 그를 단순히 '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를 불렀을 뿐 그에게 어떠한 속성도 귀속시키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한국어에서 '고유 이름'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반대되는 견해는 프레게와 러셀이 견지하던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에 따르면, 고유 이름은 이러한 측면에서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와 차이가 없다. 고유 이름 또한 고유하게 대상을 특징짓는 속성을 부여하며, 대상은 그러한 속성이 있는 그 대상으로서 선출된다. 이름은 밀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떠한 기술적 내용이나 내포가 없는 단어가 아니다.

여기서 밀과 반대되는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을 지지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존재의 문제이다. 우리는 분명, 예를 들어서, 모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물을 수 있으며, 심지어 원한다면(이 경우에서 그렇게 한다면 틀리게 되겠지만) 우리는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모세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결론짓는다면, 그는 분명히 그 이름을 단순히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의미론적 기능으로 사용하고, 그 대상이 존재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12 그는 단순히 그러한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밀이 맞고, 이름하는 일의 기능이 순전히 지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위와 같은 진술을 하거나 질문을 할 수 있는지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가 이름을 사용할 때, 그는 지시될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덧붙여 물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한 것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결정적으로 모든 밀적인 패러다임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당연하게도, 우리는 – 모세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때처럼 – 우리는 고유 이름을 그것이 지시체를 가지는지 아닌지를 모른 채로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정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 '만약 모세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어떤 책은 – 어쨌건간에 - 르네상스 이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당연하게도, 어떤 이름이 어떠한 지시체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사용할 수 잇다. 이것이 우리가 셜록 홈즈에 대해 이야기하고, 셜록 홈즈를 지칭하는 등의 행위를 할 때, 즉 허구적 담론fictional discourse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을 법한, 상당히 일관되고 공통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들은 대체로 여기에 독립적으로 도달했다. 그들은 두 개의(혹은 네 개의?) 학설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존재는 일차적이 아닌 이차적 개념(이것은 러셀과 반대되는 프레게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말을 속성이나 술어가 예화되거나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유의미하게 사용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호랑이는 있지만 둥근 정사각형은 없다고 – 호랑이는 존재하지만 둥근 정사각형은 그렇지 않다13고 – 말할 때, '존재한다'라는 단어는 여기서, 말하자면, 속성의 속성을, 그들이 예화되었는지의 여부를 표현한다: 그것은 어떤 속성이 예화되었을 때 성립한다. 이것이 프레게가 "이차적"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4 이것이 일차적 개념임을 부정하는 것은 대상이나 개별자에 부가될 수 있는 존재 술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존재하는지 또는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누군가 세계에 있는 대상들을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나눌 수 있겠는가?

러셀은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이라는 강의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5강 이후의 논의에서, 누군가 다음을 물었다:

Q: 개별자에게 존재를 부여할, 당신이 '존재'를 대체해서 쓸 법한 단어가 있는가? 당신은 '존재'라는 단어를 두 가지 관념에 적용하는가, 아니면 그런 두 관념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가?

(Russell 1988a: 211)

즉, 예화된 개념에 대해 적용되는 존재와, 따로 개별자가 존재한다는 진술에서 개별자에게 적용되는 존재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가? 러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러셀: 개별자에게 적용될 그런 개념은 없다. 세계에 있는 실제 사물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와 어떤 식으로든 부합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존재와 유사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한 실수이다. […] 어떤 술어이건 그것이 거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점은 없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말하는 그런 개별자에 대한 존재와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은 완벽히 명확하다. 그리고 이런 것은 전형적인 실수이다.

(Russell 1988a: 211)15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일상 언어에서 개별자에게 존재를 적용하는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는 나폴레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19세기 논리학자 리처드 웨이틀리는 그의 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관련된 역사적 의구심Historic Doubts Relative to Napoleon Buonaparte> (Whately 1832)에서 이 질문을 제기했고, 나폴레옹이 당연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왜냐하면, 흄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너무 환상적이 이야기를 이야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이야기는 꽤나 환상적이다).16 어쨌거나, 우리는 나폴레옹이 실제로 한번이라도 존재했는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역사학자들은 가끔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겠지만(웨이틀리가 그랬거나, 적어도 그런 척을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건 그가 맞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경우에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개별자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듯이, 프레게와 러셀은 이 문제를 그들의 고유 이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대답했다. 그들은, 각각의 고유 이름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그 이름으로써 이름되어야 하는 개별자를 특정하는 기준이나 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경우에서, 그러한 기준은 '워털루에서 패배한 세력의 수장이 되는' 또는 여러 가지 다른 우리가 나폴레옹에 대해 들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일 수 있다. (사실 방금 것은 별로 환상적이지 않았다.) 그 이름은 '문제가 되는 기준을 만족하는 그 무언가'를 뜻할 것이다. 우리는 나폴레옹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개념 '워털루에서 패배한 세력의 수장이 되는'이 독하게 예화 – 즉, 개념 '유일하게 워털루에서 패배한 세력의 수장이 되는'이 예화 – 되었다고 의미함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프레게와 러셀에 따르면,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각각의 고유 이름을 어떤 독특하게 예화되어야 하는 술어와 짝짓는다. 만일 실제로 문제가 되는 속성을 독특하게 예화하는 사물 A가 있다면, 우리는 나폴레옹이 존재한다고, 또는, 보편적인 경우에서, A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실제로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신 어떤 술어에 대해 그것이 독특하게 예화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부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도, 사실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어떤 역사학자가 나폴레옹이 실제로 존재했느냐고 질문받았다면 그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일단 나폴레옹을 찾아서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살펴봄으로써 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를 살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우리가 나폴레옹에 대해 들은 이야기의 속성들에 모두, 또는 어떤 의미에서든, 대부분, 또는 "충분히" 들어맞는 어떤 한 사람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 보편적인 학설은 아마도 우리가 눈 앞에 놓인 것인 문학, 신화의 작품, 혹은 사료인지 모를 때에도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우리가 모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물을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주어진 모든 속성 – 또는 충분히 많은 속성 – 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철학적 탐구>의 유명한 문단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경우에 대해서, 우리가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떠날 때 하나의 지도자가 있지 않았다, 또는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라고 불리지 않았다, 또는 모세에 관해서 성경에서 관련짓는 모든 것들을 성취한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등등. "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모세'로써 나는 성경에서 모세에게 관련짓는 것들을 한, 또는 어떠한 의미에서든, 상당한 양을 만족시킨 그 사람을 이해한다" (1953: §79).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와 러셀을 따르고 있다. 그는 한 가지 점에서 그들을 수정하려 하기는 한다. 단일한 것이 아닌 속성의 다발이 그 사람을 특정하며, 이 다발은 경계가 모호하다: 즉, 우리가 모세가 존재했는지 아닐지를 결정짓게 한다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내 목적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많은 당대 사람들('당대 사람들'로써 나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17은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프레게와 러셀이 이 점에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정설(orthodox doctrine)에 따르면, 우리가 예를 들어 문학 작품을 마주했을 때, 또는 실제 사료인지 허구인 지 모를 이야기가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에서 이름된 사람에 대해서 그 이야기에서 발생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 그리고 이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예를 들어 셜록 홈즈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 홈즈에게 부여된 속성을 만족하는 독특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홈즈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람, 또는 어찌 되었든 그러한 독특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그러한 사람이 열 명이 있어, 우리가 그 중 누가 홈즈인지 말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정설이다.18

우리는 여기서 프레게-러셀 분석의 강력함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사실, 존재의 경우에 있어서 나는 러셀의 분석이 프레게의 것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러셀의 분석이 더욱 통일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러셀은 포괄적으로 기술과 이름을 술어의 측면에서 분석해내고, 그리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존재의 경우에서도 분석이 되기 때문이다. 프레게의 분석에서, 존재 진술은, 이를테면 우리가 모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의 문제를 분석할 때처럼, 조금 특수하게 다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등장한 이후로 – 아마도 최근까지도 – 철학 학계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프레게-러셀 학설의 힘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고 통일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이었고, 위의 문제는 그 중 하나였다. 이 학설은 비슷한 방식으로 동일성 진술, 내포적 문맥intensional context에서의 지시, 그리고 애초에 어떻게 이름과 단칭 어구singular terms들이 지시체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어려움을 분석해냈다. 이 학설은 위의 문제들을 다른 모든 경우들을 성공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은 통일된 방법으로 분석했다.19 그 어떤 대체적인 설명을 제시하려는 이론은 이 아름다운 그림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이고, 대체적이고 동등하게 강력한 그림을 그곳에 내세워야 한다. 이것이 내가 N&N에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강의들에서 나는 프레게와 러셀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여하튼 여러 방면에서 밀과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유명한 탈무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 여기서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standing on one foot,” N&N에서 다뤄진 견해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프레게와 러셀의 견해와 차이가 있다.

첫째로, 나는 고유 이름은, 대부분의 한정 기술구와 달리, 고정적rigid이라고 주장했다. 프레게와 러셀에 따르면, 이를테면 '모세'라는 이름은,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사람'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이 '모세'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고, 또한 만약 우리가 어떤 다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탈출시켰다는 상황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모세'라는 이름을 반사실적 상황들에 대해 사용할 때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 고 나온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고, 그 것은 모세 자신이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레게와 러셀에 따르면, 그들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모세'와 같은 이름은 비고정적일 것이다. 이름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시할 것이다. 반면에, 나는 우리가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것은 언제나 그 사람, 그 - 나는 그들이 나머지에 관해서는 맞다고 가정한다 – 실제로 이스라엘 사름들을 이끌고 나온 특수한 사람을 의미하거나 지시한다고 논증했다. 사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그들의 견해를 거부하지만, 일단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기로 하자.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그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세'라는 이름을 어떤 사람을 지시하기 위해 고정적으로 사용하고,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 않은 반사실적 상황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그 사람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것이 내가 프레게와 러셀이 틀리고 밀이 맞았다고 생각하는 한 측면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왔다' –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수정에서는, '모세는, 만약 그가 존재했다면, 성경에서 그와 연관시킨 많은 일들을 했다' – 와 같은 진술은 분석적이고 따라서 짐작컨대 필연적 참이라고 단언했을 것인데, 나에게는 그것이 단순히 우유적contingent 참으로 보인다. 어떤 모세가 아닌 사람이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모세가 그 일들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진술은 거짓일 것이고; 진술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분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 아니다.

둘째로, 나는 실제 세계에서 지시체를 결정함 – 이것은 또 다른 문젯거리이다 - 에 있어서조차 우리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그 대상이 만족한다고 믿는 속성을 사용해서 특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그림이 주장된다: 어떤 사람이 최초로 그 대상을 '세례'하며, 아마도 가리킴을 통해서, 또는 아마도 그의 성질을 통해서, 또는 아마도 다른 방식을 통해 대상을 특정한다. 그렇다면 – 여기서 나는 밀을 따른다 – 화자는 오직 이름의 지시체만을 남겨놓기를 원하고, 이름이 고리에서 고리로 전달되는 한, 만약 한 사람이 한 이름을 그가 들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이름을 그가 그 이름을 전해들었던 화자와 같은 지시체를 가지고 사용한다. 그 이름은 공동체에, 역사를 타고 전파되며, 오직 지시체만이 보류된다. 그 대상에 대하여 참이 아닌 수많은 환상이 떠돌아다닐 수는 있다. 어쩌면 대다수의, 또는 모든 그 대상을 독특하게 특정한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사실 그것에게 적용되기를 실패한다고 밝혀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통상의 견해에 대한 일련의 반례들을 통해 입증하려 하였다. 나는 지금 그 반례들을 다룰 생각은 없지만, 어쩌면 나중에 그것들을 검토할 것이다.

내가 다루지 않은 한 문제는 바로 존재의 문제이며, 나는 그 공백을 여기서 메우고자 한다 - 이 문제들은 사실 매우 정교하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특히 러셀이 빈이름과 존재에 관해 무엇을 주장했는지 조금만 더 말할 수 있게 해 달라. 러셀은 프레게와 달리 (여기서 나는 전에 그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철회한다!), 고유 이름이 외연은 갖지만 내포를 갖지 않는다는 밀과 동의한다. 내가 밀과 반대되는 프레게-러셀 견해에 대해 말한 곳에서, 어쩌면 나는 프레게와 반대되는 밀-러셀 견해에 대해 얘기했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따라서 약간 부정확했다. 왜 나는 그런 방식으로 말했나? 왜냐하면 당신이 어떤 것이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져왔을 때, 러셀은(심지어 이것조차 어느 정도 부정확하다) 밀에 반대하며 프레게와 동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그런 이름은 기술어구에 의해 주어진 의미를 가진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프레게적 뜻이란 것은 없다고 여겼지만,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겠다; 그 차이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주석 13을 보라.) 그렇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밀에 동의하기에,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름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며, 진정한 이름들genuine names이 실제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석하여 탐구되어야 할 것으로 남겨둔다.

이 논증에 의하여 이름들 - 진정한 대상들의 진정한 이름들 - 이 만족하여야 할 기준으로 요구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우리가 유의미하게 그들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대상들을 이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런 대상들의 존재는 심지어 데카르트식 회의의 주제도 될 수 없다. 여기서 러셀은 우리가 이름되어질 수 있는 대상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대상들은, 그의 용어에서 직접대면acquaintance의 대상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후보는 한 사람의 즉각적 감각 자료sense-data였는데, 왜냐하면 - 정의에 따라 - 한 사람의 즉각적 감각자료야말로 데카르트식 회의의 주제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20 만일 내가 눈 앞에 놓인 노란색 반점의 감각 자료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심, 또는 데카르트식 의심에 빠질 수 없다. 이 경우 그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것 - 이 눈앞의 노란 반점 - 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누군가 원한다면 뜻이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취소될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제기할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러셀은 또한 여러 경우에서 다른 진정한으로 이름가능한 직접대면의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 예시로, 그가 그런 개체에 대해 믿었을 때, 데카르트식의 자아를 들 수 있을 것이다.21

감각 자료 또는 시각적 인상이 사라진 순간부터, 그것은 이름되어질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상태를 잃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러셀의 유명한 논증처럼,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었는지에 대한 한 사람의 기억을 불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논리적 원자론의 강의에서 러셀은 그의 믿음을 강조한다. 질의응답 시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물렸다:

물음: 만약 한 이름의 고유 이름, 즉 “이것”, 이 매 순간마다 바뀐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떠한 논증이든지 할 수 있는가? (1988a: 180)

요지는 러셀이 맞다면, 진정으로 이름될 수 있는 대상들은 아주 단발적이다. 우리가 머리를 움직인 순간, 사물들은 그 전과 같지 않으며, 그리고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그와 동시에 ‘샘’, ‘해리’ 등과 같이 이름될 새로운 대상의 집합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연역 논증을 펼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만약 전제가 이름을 포함한다면, 그 결론에서도 아주 같은 이름을 포함할 텐데, 그 이름은 더 이상 당신의 언어의 부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러셀: 우리는 “이것”을 약 일에서 이 분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점을 만들었고 [그는 이어서 칠판에 점을 그렸다] 그리고 이것에 관해 약간의 시간동안 이야기했다. 내 말은, 이건 변동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빠르게 논증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끝나기 전에 약간을 얻어갈 수 있다. 내 생각에 사물은 몇 초나 몇 분, 또는 얼마든지 실제로 그러한 만큼 유지된다.

물음: 당신은 공기가 그 점에 작용하며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러셀: 만약 그것이 그 생김새를 당신이 다른 감각 자료를 가지게 할 만큼 충분히 변동시키지 않는 한 이 일에 상관없다.

오직 감각 자료만이 문제시된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이 그림은 환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어지는 철학 활동에서 러셀이 이런 답에 이르게끔 만든 논증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이 논증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름될 수 있는 대상들 (그는 단순히 “대상들“이라고 불렀는데, 러셀은 “개별자“라고 부른 것들이었다) 은 세계의 필연적 구성물, 존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오직 우유적 존재만을 가지는 것들은 사실 대상이 아니며 - 그것들은 진정한 대상들의 복합물이다. 여기서 나는 실제 대상들이 분자,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책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물론 이 책상을 구성하는 분자들이 이 책상으로 드러나는 조합을 이루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른 구성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우유적 존재에 관해 말할 때마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다.22 그러나 진정한 대상은 세계의 필연적 구성물 중 하나이며 - 그것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다. 그리고 이것 또한 이 논증들에서 따라나오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만일 이름하기의 유일한 기능이 지시이고, 우리는 존재에 관한 물음조차 제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무어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의 우유성에 관해 말할 수 없다 - 그렇게 함은 단칭 존재 진술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 (다음 강의를 보라)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와 러셀을 따르고 있다 - 그리고, 나는 특히 여기서 러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대상들의 존재에 부여하는 두 요구사항 - 하나는 의심불가능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요구사항 - 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3 적어도 내가 보기에, 한 사람의 즉각적 감각 자료, 즉각적 시각 인상보다 뻔하게 우유적 존재를 가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많은 감각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이것들을 전혀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떻게 내가 그것들을 가지는 것을 회피할 수 있었는가? 이를테면, 내 강의에 참석한 인원이 달랐었거나, 내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거나, 내가 여기 들어와서 눈을 감은 채로 말하기로 결정했거나. 이 중 어떤 경우라도 나는 지금 가지는 감각 자료들 중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나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총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고, 내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개체들은 확실히 우유적 존재를 가지며; 만약 어느 개체라도 필연적 존재를 갖는다면, 이것들은 아니다.24 자아 또한 필연적 존재가 아닌데, 왜냐하면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대상에 놓인 요구 사항들이 두 철학자를 양립 불가능하고 모순된 결론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식론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둘째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의 영역에 적용된, 본질적으로는 같은 논증이 두 개의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다.

<논고>의 주석적 작업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이 사실 러셀의 대상인지, 그것들이 사실 한 사람의 즉각적 지각인지, 또는 적어도 그것들을 포함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주석적 문제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고, 또한 확실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이 이 분야에 대한 지혜가 있었다면, 대상들은 한 사람의 즉각적 감각자료일 수는 없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대상들이라면 이 이론의 가장 기초적인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많은 것들에 주의하기를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증은 아마도 결정적이지 않다.

어쨌든간에, 사람들은 같은 논증이 두 양립 불가능한 결론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관련된 개별자들 중에서, 나는 어떠한 필연적 존재와 의심불가능한 존재 두 기준을 동시에 만족하는 대상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진술은 조금 더 강경해야 할 것이다: 나는 확실히 필연적 존재 단 하나의 기준만이라도 만족하는 그 어떠한 개별자인 대상도 알지 못한다.)25 이런 양립불가능한 결론이 있는 한 분석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틀렸음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무엇이 틀렸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주의하는 것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자주 인식론적 확실성 또는 선험성(실제로 이 두 인식론적 개념은 서로와 동일시되지는 않지만)은 필연성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N&N에서 이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다. 특히, 나는 모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그가 성경에서 그에게 귀속된 대부분의 일들을 실제로 했었음이 의심불가능했더라도, 모세가 존재하고 그러한 일들을 했었다는 주장이 필연적 참이 되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어떤 반사실적 상황에서는 그것이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경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너무 크기에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나는 러셀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 반대하여 다른 것을 말하고 싶다. 그는 논리적 고유 명사라는 아주 특별한 범주를 도입한다: 한 사람이 유의미하게 개별자에 대하여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물을 수 없기 때문에 - 왜냐하면 한 사람이 개별자를 지시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존재하기에 - 러셀은 이름될 수 있고 의심불가능하게 존재하는 개별자의 특별한 범주를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이 특별한 경우를 위해 부정 존재 진술negative existential statements을 분석할 필요를 제거했어야 할 터다. 부정 실존 진술은 특히 우리가 허구fiction에 대해 논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셜록 홈즈, 딕 트레이스 (이 나라에서 그가 유명한가?), 제우스, 그리고 페가수스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허구에서 발생한다. 러셀은 허구적 존재fictional existence의 영역을 원하지 않기에, 그는 이런 진술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어떤 단일한 사물도 이야기 속에 담긴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다.’ 즉각적 감각 자료에 대한 진정한 이름의 경우 이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어야 하며, 그것이 그가 이 범주를 만든 이유이다. 나는 그가 이 특정한 경우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즉각적 감각 자료의 존재가 데카르트식 회의의 주제가 되지 않아서, 존재의 물음이 유의미하게 제기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해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적으로, 내가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채우지만, 일단 이 경우에서 내가 러셀의 논리적 진정한 이름을 좋아하는 러셀주의자라고 가정하자. 나는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즉각적 감각 자료에 대해서 쓴다; 오직 이 경우에만 감각 자료는 상상된 것imaginary이다. 따라서 나는 저기에 있는 노란색 반점을 보지 않지만, 나는 내가 가정하는 바처럼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쓸 것이며, 그리고 그 반점에 ‘마틸다’라는 고유 이름을 부여한다. 이야기의 맥락에서, 이것은 내게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러셀이 제시한 명명 과정을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 스스로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단지 이야기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나는 ’그렇지만, 당연히 마틸다는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에, 나는 내 눈앞에 있는 노란 반점의 경험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는 이 노란 반점을 보게 된 결과로서 무슨 일이 내게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심지어 실제 경험 자료의26 이름을 포함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로이시오’와 같이, 그리고 나는 알로이시오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된 개체가 허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 실제 사람인 - 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가 있는데,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은 나폴레옹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이야기 속 그의 충성스러운 개 피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 그는 허구적 부분에서 왔다 - 라고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또한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알로이시오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마틸다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완벽하게 좋은 주석이고, 한 경우에서 진정한 러셀식 고유 이름인 ’알로이시오’를 사용하고, 다른 경우에 여기서 단지 허구적일 뿐이라고 주장된, 가정적으로putative 그러한 이름인 ’마틸다’를 사용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명명할 때 적용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그렇고, 정확히 동일한 분석 또는 적절한 설명의 질문이 발생해야 한다.

우리는 ‘마틸다’와 ‘알로이시오’가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알로이시우스’는 - 여기서는 ‘마틸다’와 대조되고 있다 - 그런 진정한 이름일 것이라 약정되었고, ‘마틸다’ 또한 가적으로 진정한 러셀식 이름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이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 중 하나라도 사실 한정 기술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이유는, 그렇게 되면 내가 진술한 것과 같이 사실에 대한 잘못된 기술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들이 어떤 한정 기술구일 것인가? 일단 ‘알로이시오’는 한정 기술구가 아닌데; 나는 그 반대로 이름을 도입했다. 아마도 우리는 ‘마틸다’가 사실 한정 기술구라고 드러난다고 논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한정 기술구인가?

한 가지 가능한 후보는, ‘눈앞에 놓인 내가 본 노란색 반점’ - 이름이 실제로 이 한정 기술구의 축약으로 사용되었다고 해 보자. 그러나 그것은 맞을 수 없다 - 그 이야기는 단 하나의 노란색 반점이 눈앞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했다면 상당히 운이 좋겠지만, 어쩌면 아주 많은 노란색 반점이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 ‘마틸다’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이름은 그 단일한 내 눈앞에 보이는 노란색 반점을 지시할 수 없고, 또한 ‘마틸다’가 ‘그 내가 “마틸다”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분석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그렇게 쓰지는 않지만 내가 다른 맥락에서 진정하게 ‘마틸다’를 일반적인 여성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금 전에 내가 어떤 노란색 반점을 ‘마틸다’라고 불렀고, 또는 아마도 바로 지금에도 (지금에도 내 눈앞에) 내가 ‘마틸다‘라고 부르는 어떤 노란색 반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마틸다’로써 그 반점을 지시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히, 내 기호에 의하여, 그 반점을 따서 내 허구적 대상을 이름하고 있다. 같은 것이 더욱 설득력 있게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이야기 속에서 다음 문장 ‘이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마틸다”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회피하려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다 - 적어도 급하게는. 이런 자기 지시self-reference에 관련된 문제는 잘 알려져 있고,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거기에 뛰어들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심지어 그 논증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러한 서술이 명백하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한 사람이 그 자신에게 그가 한 대상에게 정식의 러셀식 고유 이름을 주고 있다고 들려주는 것이다. 러셀이 자신이 문제를 풀었다고 여기는 까닭은, 만약 그가 맞다면, 그가 이름하는 것들이 의심불가능한 존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능한 실수의 문제, 즉, 나폴레옹이 있지 않는 경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제거하는데, 빈이름의 가능성을 제거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비존재자의 경우도 그렇다. 러셀의 이론은 그러한 가정적 이름을 포함한 허구적 담론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정 존재 진술을 제거하지 않으며, ‘마틸다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 사소trivial할지언정 -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뻔할 것이다 - 부정적일 것이다. 마틸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알로이시오는 존재한다. 우리는 이 대조를 그려낼 수 있으며, 러셀은 따라서 문제를 회피하지 못한다.27

바로 이 러셀에 반대하는 논증은 무언가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단칭 부정 존재자의 문제 - A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예를 들어,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 는 모든 밀적인 유형의 패러다임에, 모든 지시체의 존재가 이름하기의 의미론적 기능에 본질적이라고 주장한 패러다임에게 치명적인 논증인 것으로 가정되었다. ‘허구의 경우에는?’은 즉각적으로 말해졌다. 그저 지시하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28

정확히 그 반대인 것 같다. 허구의 존재는 그 무엇에도 강력한 논증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러셀주의 이론과 밀주의 이론 간의 문제를 결론짓지 못하며, 밀주의 이론과 다른 어떤 이론 간의 문제도 결론짓지 못한다. 이름의 본질적 의미론적 속성이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는 의미론의 이론을 떠올려보라 - 예를 들어, 이름의 본질적 특성이 지시체를 가지는 것이라고 하는 밀적인 이론이나, 방금 말한 것이 진정한 고유 이름에 있어서는 참이지만, 내가 전에 말했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유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참이 아니라고 하는 러셀의 이론.29 어떤 기준이나 다른 것이 주어졌다고 가정하자: 자, 여기서 우리는 허구의 경우에 있어서 뭐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한 이론과 다른 이론 사이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큰 문제를 표현하지 않는가? 이것이 허구의 경우와 같이 지시체 없는 이름이 있을 수 없는 밀의 이론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한 사람이 허구의 작품을 쓸 때, 무엇이 되었든 이름하기의 기준이 만족되었다는 것은 그 허구의 가장pretense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해리’라는 이름을 허구의 작품 속에서 사용하는데; 나는 일반적으로 이 허구의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내가 다른 많은 것들을 가장하는 것처럼, 이름하기의 기준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 밀주의, 러셀주의 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 - 만족되었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이 허구 작품의 가장의 한 부분이다. 이름의 지시 이론이 그러한 허구 작품의 가능성에 대한 특별 조항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시의 이론은 이러한 경우는 간주하지 않고, 단순히 허구 작품에서 이러한 기준이 만족되었다는 것이 허구의 가장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어떤 작품이 허구이게끔 하는 것이 이러한 기준이 사실 만족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많은 이야기 속 다른 것들도) 일 수 있겠지만, 가장은 단순히 가장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가장 원리The Pretense Principle’라고 부르겠다.30 만약 이것이 옳다면, 이것은 그 어떤 이름하기의 이론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내가 방금 지적한 것처럼, 러셀의 논리적 고유 이름의 개념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허구의 경우에서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허구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가 러셀 식의 논리적 고유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가장하며, 러셀 또한 이 가능성을 회피하지 않는다. 따라서, 허구의 경우는 이름하기의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시험대와는 거리가 멀고, 그 어떤 것에 대한 시험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밀에게 있어서 이름하기의 의미론적 기능의 본질적 부분이 지시체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허구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본질적 기능이 만족되었다고 가장한다. 나는 따라서 - 만일 내가 이 원칙에 따른다면 - 밀의 추종자들게 있어서, 허구 작품에 나타나는 명제는 단지, 말하자면 가장된 명제일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만약 누군가가 ‘마틸다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허구의 작품 속에서 말한다면, 무슨 명제가 여기서 표현되어 있는가? 러셀의 견해에서 이 명제는 물체 ‘마틸다‘를 상항으로, 그리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에 대응하는 관계적 속성 그리고 어쩌면 다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마틸다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런 명제는 없다. 우리는 단순히 그렇다고 가장할 뿐이다. 같은 것이 더욱 보편적인 - 또는 보편적-밀적 - 경우에도 다음과 같이 적용될 것이다: 더욱 일반적인 지시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에 대한 명제들이 서술되었다. 그런 사람이 없음에 따라서, 그런 명제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허구에서의 가장에 대해서 몇 가지 뻔한 명료화가 필요하다. 첫째, 당연히 허구의 작품 속에서, 거기에서 쓰인 이름이 일상적 의미에서 캐릭터의 이름이라고 주장될 필요는 없다. <롤리타>에서, 나보코프는 그 이름들이 사실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변경되었다고 말한다. 둘째, 허구 작품이 주어졌을 때, 그 작품이 이론적으로 지시체에 대한 올바른 철학적 이론을 따랐을 필요는 없다. 허구 작품은 물론 허구적으로 어떤 틀린 이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이론적으로만 생기는 드문 예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허구 작품은 그러한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구체적인 지시체 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가정될 수 있다.

이 가장 원리는, 내가 보기에, 프레게-러셀 분석이 올바랐을 경우에라도 적용될 것이며, 이것이 정설의 분석이 얼마나 틀린 방향으로 갔는지를 보여준다. 프레게와 러셀이 맞았고 이름하기(일상적인 사용에서)의 본질적 기능이 정말로 한 대상의 기술적 속성을 주어서 그를 통해 특정하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나는 여기서, 어쨌든간에, 허구 작품의 경우에 적용된 그들의 분석이 옳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분석을 떠올려보라. 거기서는 허구에서의 이름은 ‘이야기에서 서술된 속성들, 또는 하여튼 대부분을 만족하는 그것 - 그 독특한 것’31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가장이라는 것, 일상적 이름하기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것을 가장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요구되어야 할 것은 오직 이야기 속에서 서술자narrator가 사물을 특정하는 어떤 속성이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는 것이고, 이런 속성들이 이야기 속에서 서술되거나, 만약 서술되었다고 해도 올바르게 주어졌다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프레게-러셀 이론이 비허구적 경우에 있어서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허구에 있어서 얼마나 틀린 설명을 하는지 명료하게 볼 수 있다.

첫째로, 그 이론은 고유 이름은 ‘이야기 속의 속성을 만족하는 그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야기 속의 속성을 만족하는 독특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거짓이다. 왜 독특성이 필요한가? 왜 이야기는 무엇이든 추정적으로라도 어떤 대상을 독특하게 특정해야 하는가? 어떤 이야기가 아주 잠시동안, 주인공과 어떤 길모퉁이에서 나란히 있었던 특정한 키가 큰 남성 샘 스미스에 대해 말한다고 하자. 여기서 이것이 그 유일한 어떤 길모퉁이에서 중인공과 나란히 있었던 키가 큰 남성을 의미하는가? 또는 이야기에서 샘 스미스는 키가 큰 남성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은 그를 알았으며, ‘만일 내가 샘 스미스와 같이 키가 컸다면, 나는 이러저러 했을 것이다.’라고만 쓰여있을 수 있다. 위 내용은 정말로 샘 스미스가 독특한 키가 큰 남성이라는 것, 또는 주인공이 그렇게 생각했었던 독특한 키가 큰 남성이라는 것을 함축하는가? 주인공이 그렇게 생각했었던, ‘샘 스미스’라고 불린 독특한 키가 큰 남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여러 명이 있었을 수 있다. 여전히, 주인공는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키가 큰 남성, 샘 스미스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표상represent(재현이라고도 많이 번역함)된다. 이야기는 추정적으로도 독특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둘째로, 만일 이야기에서 대상에게 귀속된 속성을 독특하게 만족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설명은 전혀 허구적이지 않다. 그러나 작가들의 일반적인 행위는 바로 정반대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이름은 허구이며. 어떤 죽었거나 살아 있는 인물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적입니다’. 자신이 유효하게 사생활 침해로 소송을 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의 작가를 고소하여 법정에서 자신이 이야기에서 언급된 속성을 독특하게 만족한다고 증명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판사는 반드시 원고의 편에서 판결을 내릴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지 않다. 그 이야기의 작가가 그가 이 사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고; 그가 확실히 그에 대해서 썼던 것이 아니라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속성을 독특하게 만족한 것이 오직 우연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합리적인 판사는 원고에 반대편에 서서, 프레게의 반대편에 서서, 러셀의 반대편에 서서, 비트겐슈타인의 반대편에 서서 판결을 내릴 것이며, 원고가 독특하게 이야기에 들어맞지만, 그 작가가 유효하게 자신을 변호했다고 여길 것이다. 32

마지막으로, 프레게와 러셀은 만일 그 어떤 사람도 이야기에 들어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셜록 홈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거짓이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인물에 관한 허구 작품과 허구적 인물에 관한 허구 작품 사이를 구분하는 데 실패한다. 내가 전에 언급한 나폴레옹의 예시를 떠올려보라. 서기 3000년에, 오직 하나의 나폴레옹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만 전해진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나폴레옹이 존재한 적 없다고, 또는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사용된 바로는, ‘나폴레옹’은 누구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있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이 경우에 유일하게 전해진 것이 허구일지라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한 실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나는 N&N에서 모세의 경우는 반례가 아니지만, 성경 속의 요나의 경우 그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요나에 대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구적이지만, 요나라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했다고 논증하며, 이를 실제로 인용할 수 있다. 성경은 진정으로 존재했던 히브리 예언가에 대한 전설적 설명(불행하게도 역사적인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다) 중 하나였다.33

지금 시간이 초과했으므로, 나는 여기서 멈추겠다. 나는 바로 이 경우에 대한 분석 - 반사실적 상황 - 이, 내가 생각하기에 프레게-러셀 이론이 더욱 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루겠다.

나는 (a) 프레게-러셀 이론이 허구적 작품의 존재에 의해 요구되지 않으며 - 실상 그 어떤 특정 이론도 요구되지 않는다 - , 또한 (b) 설명된 바처럼, 허구적 작품에 관해 그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를 올바르지 않게 해결한다고 논증했다. 나는 이 이론이 심지어 허구 작품에 잘못 적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 속의 술어를 사용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순히 서술자에게 알려진 대상을 골라내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가장의 일부라고만 해야 한다. 물론, 위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 진술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연히 다음의 중요한 사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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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작성하신 번역문을 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구적 존재에 대한 가장하는 사용(pretend use)이라는 크립키의 해결책이 이 책에서 나왔군요.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구"나 "어구"는 보통 "phrase"에 할당되는 번역어인 듯하고(예: 기술어구/기술구="descriptive phrase"), "singular term" 같은 경우 단순히 "단칭어"로 많이 번역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되었다" 정도로 번역하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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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 "왜 이렇게 허구적 캐릭터의 존재론 논문이 많아졌지?" 하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대부분 논의의 시발점은 이 책이더라고요. 중요한 자료 번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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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렇군요! 저도 번역문을 읽으면서 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이 떠올랐는데, 이게 크립키의 논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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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을텐데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