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장하석 교수님이 쓰신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나 보다. 과학자들이 물 분자를 H2O로 규정하게 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과학적 실재론을 비판하고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다루고 있지만, 더 넓게는 지칭 이론, 표상주의, 본질주의, 의미 외재주의 같은 주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될 수 있는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물은 H2O이다.”는 과학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영미권 언어철학과 형이상학에서도 매우 자주 등장하는 명제이다. 1970년대에 솔 크립키와 힐러리 퍼트남이라는 두 거인이 새로운 형태의 지시 이론을 통해 “물은 H2O이다.”를 필연적 명제의 예시로 내세운 이후로, (비트겐슈타인이 사망 선고를 내리다시피 하였던) 본질주의적 실재론이 영미권 철학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마치 시대착오적 이론이기라도 한 것처럼 영미권 철학자들에게 잊혀져 버렸다.).
솔직히, 나는 영미권에서 일어난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일종의 철학적 퇴행이라고 생각한다. 크립키와 퍼트남의 지시 이론은 ‘물’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가리켜야 하는지에 대해 애초부터 암묵적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전개될 뿐이다. 두 이론은 외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지닌 지구의 H2O와 쌍둥이 지구의 XYZ 사이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물’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확고한 합의를 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정한다. 나로서는 영미권 철학자들이 왜 크립키와 퍼트남의 지시 이론에 전제된 이런 가정을 당연하다는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번역된 책의 내용이 더욱 기대된다. 그동안 나는 화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크립키와 퍼트남의 의미론적 가정만 문제 삼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장하석 교수님의 책은 실제로 과학사 속에서 어떤 화학적 가정들이 물을 H2O로 규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는지 지적한다. 얼른 책을 구매해서 읽고 내용을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