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말해주는 인생의 비밀?! (by 존 카푸토)

오늘날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중요한 학자 중에 존 카푸토(John D. Caputo)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와 데리다에 대한 연구에서 매우 권위가 있는 데다, 소위 '약한 신학(weak theology)'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종교철학으로도 유명하죠.

그런데 이런 카푸토가 쓴 『포스트모던 해석학』의 말미에 아주 재미 있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철학자들이 인생의 비밀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카푸토가 아주 직접적으로 제기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내놓고 있어서요.

사실, 철학에 흥미를 느끼시는 대부분의 분들이 이런 '인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서 다루어지는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철학에서는 이런 실존적인 문제가 언급되는 일이 없죠. 서강올빼미에서도 인생의 비밀과 관련된 질문이 몇 번씩이나 올라왔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죠.

그런데 카푸토의 대답은 좀 다릅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카푸토는 인생의 비밀을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으로 (그것도 소위 '포스트모던적' 대답으로) '신'을 제시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생에 숨겨진 형이상학적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신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언제나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기적과 경이 앞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밀 아닌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신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기적과 경이의 가능성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때 카푸토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신'이란 바로 니체 이후의 신입니다. 카푸토의 용어를 그대로 가지고 오자면, '니체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을 신'이라고도 할 수 있죠. 카푸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의 끝에 도달했으니, 철학자들은 인생의 비밀에 관해 무언가 좀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비밀은, 신비를 풀어줄 아무런 비밀도, 비밀스런 진리나 열쇠도 없다고 나는 말하겠다. 그것은 데리다가 '해석학'이라는 말을 피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서 연마한 해석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해석에서, 우리는 암호를 풀거나 비밀스런 의미를 찾으려는 일은 하지 않는다. 비밀은 구조적 비밀이다.

여기서 '구조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비밀이 체계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밀을 아는데도 그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보류하는 어떤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접근할 수 없는 것이고, 휴식 중이고, 원리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건네지지 않고 보류되었다. 언약의 궤는 비어 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아무 모델도 없는 초상화, 전혀 원본이 없는 복사를 상상해보라. 그것은 끝까지 초상화이고, 복사이고, 대체물이고, 보충이다. 비밀은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또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계시될 때까지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모든 해석에서 빠진 채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해석학적 조건에 스며들어 있는 분위기와 애매성, 개방성과 프로그램화 불가능성과 놀이하면서 머무는 것이다.

그런 애매성만을 이야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신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신은 비밀이 아니라 비밀의 상징이다. 여전히 상징들은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전달해줄 비밀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는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을 또는 '신'이라는(의) 이름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그런 신에 대한 예언자이다.

니체? 누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

바로 니체다. 그리고 나는 니체가 비판했던 신이 정말로 잘 죽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이렇게 물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창조할 것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리고. 그것은 대단한 질문이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인간 창조성의 탄생을 의미했다. 신이 없이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신에 대한 니체의 반론을 받아들여 그것을 커다란 신학적 돌파구로 변모시킨다. 다시 한번 묻겠는데, 그것이 신이 존재하는 모양이라면 어쩔 것인가? 신의 이름이 불가능한 것까지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것의 이름이었다면 어쩔 것인가?

당신은 니체가 이런 신과 함께 살았다고 생각하는가?

니체에게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에게 신이 일으키는 문제는, 신이 항상 대화 중단자, 해석의 놀이를 막으려는 힘과 같은 존재였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니체가 신을 정면으로 공격했던 이유이다. 그러니까 나는, 신의 섭리와 도래할 컴퓨터 프로그램 사이에, 지고의 존재와 슈퍼컴퓨터 사이에, 야훼와 왓슨 사이에 일종의 유비가 있다고 말해왔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제안은 니체를 곧이곧대로, 그를 새로운 종의 신학자들의 예언자로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나는 도래할 신을 함께 예언할 신학자들을 더 보탬으로써 이를 개조할 것이다.

그러면 도래할 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가?

신의 섭리로서가 아니라 사건으로서 여겨지는 신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완성된 신이 아니라, 여느 약속처럼 위험에서 보호될 수 없는 미래의 약속으로서 여겨지는 신, 창조의 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창조의 가능성으로서 여겨지는 신, 해석적 창조성을 위협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대리 선동가agent provocateur로서 여겨지는 신, 하늘의 최종적 이유Why로서가 아니라, '왜 안 돼Why not?'로서 여겨지는 신이다. 이런 신은 옛 철학자들의 '필연적 존재'가 아니랄, 도래하는 철학자들의 아마도-존재may-being, 사태 속에 새겨진 궁극적인 '아마도'의 새로운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아마도-존재이다. 그런 신은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요구하고 있는, 위험한 '아마도'의 철학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니체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을 신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이런 신은 성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관계가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성서는 신과 더불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서 속의 '신의 왕국'은 온갖 불가능한 일들, 기적과 경이, 잇달아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성서는 신문 보도가 아니라 '좋은 소식good news', 이야기라는 점을 명심하라. 복음주의자들은 기자들이 아니다. 성서는 왕국의 도래를 요구하는, 항상 도래하고 있는 것인 희망의 노래이다. 성서는 틸리히의 의미에서 신의 이름을 하나의 대역, 비유, 상징으로 삼는 하나의 시학이다.

(존 카푸토, 『포스트모던 해석학』, 이윤일 옮김, 도서출판b, 2020, 305-308쪽.)

사실, 제가 카푸토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카푸토가 '신'을 '희망의 상징'이라는 의미로 추상화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소 불만족스러워서요. 오히려 저는 하이데거, 가다머, 데리다, 바티모, 로티를 통해 제시된 해석학을 모두 종합하고자 하는 카푸토의 입장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갈 경우, '신'이라는 일반명사보다도 '예수'라는 고유명사를 훨씬 강조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고 봅니다. 단순히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신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성서 전통에서 증언되고 있는 예수의 구체적인 말씀과 행위를 해석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거죠.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 내부에서 이런 노선을 취하는 입장으로는 제임스 스미스 등의 급진정통주의가 있죠.)

그렇지만 1급 해석학자가 '인생의 비밀'이라는 주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다는 점도 흥미롭고, 더욱이 그 비밀에 대한 대답으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놀랍네요. 그 이외에도, (여기서 인용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기도'의 철학적 의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어서 눈길이 가고요. 해석학과 종교철학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라면 카푸토의 책에서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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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예배를 보고와서 글을읽으니간 기분이 홀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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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굉장히 재밌습니다. 저는 장로교 쪽 기독교 동아리에 몸담고 있는데 이 내용에 대해 한 번 의논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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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젠가 카푸토의 저 책으로 세미나를 해보고 싶네요. 종교철학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해석학 입문서로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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