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저서가 있을까요?

조금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듯한 느낌이 있는데 저는 꽤 오랜시간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왔습니다 그러던중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었는데, 이 경험이 저를 철학으로 이끈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요. 최근에 다시 이 공포감이 저를 엄습해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었을 때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데 종교에 대한 얘기 없이/ 적게 얘기하면서 죽음에 대해 얘기한 철학책이 있을까요?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명상록도 읽어본 경험이 있는데 스토아 철학은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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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극복’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책이지만, 문화인류학적으로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로 어네스트 베커의 책이 있습니다.

또 간호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가 있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단계별로 서술한 책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룬 철학 입문서로는 셸리 케이건의 책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논문 중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도 죽음 충동을 주제로 다룬 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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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연구자들이 쓴 『철학, 죽음을 말하다』(2004)라는 책이 있습니다. 출간된지 좀 되어서 품절되었지만, 도서관이나 중고 서점에서 구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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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책 말고도 죽음을 좀 더 철학이라는 면에 치중해서 서술한 책이 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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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얘기한 철학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는 것은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과는 다른 류의 것입니다. 원하는 목적지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지도는 존재하고 따라서 추천도 할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책은 지도의 경우와 같은 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추천할 수도 없습니다. 공포감을 포함해 감정은 논변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변은 사라진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고 그 착각마저도 일시적입니다. 우리의 감정들의 복합체와 뉘앙스들은 우리의 삶과 하나이고 부지불식간으로든 수행을 통해서든 삶이 변할 때만 변합니다. 물론 훌륭한 책을 읽어서 삶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책이 훌륭한 책인가요?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추천하는 책은 너무나 많고 그 중 일부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합니다. 삶의 결정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훌륭한 책은 없습니다. 나에게 훌륭한 책만 있습니다. 그 방면에서 나에게 훌륭한 책, 즉 나의 삶을 지금까지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책은 내 안에 이미 호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논변이 마음에 드는 책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효과 말고는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결국 (삶의) 수행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인간적 능력들과 의지로, 어떤 깨달음과 결단을 통해 나의 삶을 이미 벌써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오직 그 때만 그 방향으로 훌쩍 더 움직인 이가 쓴 책이 나의 삶을 더 결정적으로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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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정도 문제입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의해 압도되지 않는 것이지 - 압도되면 비열해지고 위축되고 평정보다는 불안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압도되지 않는 것이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라고 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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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릅니다. 그 공포감이 어느 정도든 그 공포감에 덜 사로잡힐 수 있는 방도 중 하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 간의 좁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랑도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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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공포스러워 하면, 타자의 필연적이지 않은 죽음을 안스러워하고 막으려고 노력하면서 살면 나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줄어듭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죽음이 공포스러운 것이니 나를 위하는 마음을 줄이고 타자들을 위하는 마음을 늘리라는 얘기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내 마음에서 타자에 대한 사랑이 늘어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줄어듭니다. 여기서 타자는 반드시 인간인 타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 일반 (중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애잔한 마음을 가지고 잘 해주려고 노력하면, 부처님의 심성을 조금이라도 더 닮으면, 그만큼 [나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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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책들은 죽음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저에게 훌륭한 책들과 훌륭한 책일 것 같은 책입니다. <부정변증법>은 번역이 좋지 않습니다. 제일 아래 글은 바로 그 위 책의 요약본입니다. 케이건의 것을 포함해 주류? 죽음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 출판사) 의 3강에서의 죽음론 (하이데거의 죽음론 비판 포함)

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의 3장 3절에서의 죽음론 (하이데거의 죽음론 비판 포함)

Palle Yourgrau - Death and Nonexistence (2019)

Palle Yourgrau - Do You Disappear When You Di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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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ta님께서 이미 중요한 이야기들을 해주셨지만, 몇 가지만 덧붙여 봅니다.

(1) 위에서 제가 소개해드린 책들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특히, 베커나, 퀴블러 로스나, 프로이트의 책들은 죽음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논의들에서 거의 매번 인용되는 '고전'의 반열에 속하는 책들이기도 합니다. 또 케이건의 책 역시 분석철학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논의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2) 그렇지만 zeppelin1651님께서도 이 책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철학이라는 면에 치중해 있지 않다'라는 인상을 받으셨듯이,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관련된 철학의 고전들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식의 '철학적' 고민들을 만족시켜주지 않습니다. 저는 일부러 배제하였지만, 설령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개념을 다루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자살과 살인의 문제를 다루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이나, 실존주의의 고전 격으로 알려져 있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결국 비슷한 인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이 책들이 제가 위에서 소개해 드린 책들보다 훨씬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죽음과 관련된 철학의 고전이라는 책들일수록 이상하게도 현실의 구체적인 죽음이나 무의미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만 한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3)

저는 citta님의 이 말씀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철학 책을 읽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고민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철학자들의 논의가 훨씬 '이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존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조조차 결코 삶의 무의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철학에서는 기껏해야 "인간이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이란 형이상학적으로 이러이러한 사건이다.", "죽음은 우리의 사회와 문화에서 이러이러한 의미를 지닌다." 정도의 담론들밖에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4) 그래서 결국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과 '나에게 훌륭한 책들'을 각자가 철학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예술에 전생애를 던져서 죽음 앞에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타인을 위한 헌신과 봉사에 삶을 바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때의 '의미'란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키에르케고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사람은 각자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렇게 각자가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쫓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야말로 '신앙'의 진정한 의미라고 키에르케고어는 지적합니다.

(5) 이런 점에서 죽음이나 삶의 의미와 관련된 모든 논의들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나 종교를 배제하고서 이런 문제들을 고민한다는 것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시작조차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논의를 하기 위해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 같은 기성의 제도 종교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문제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확신하는 '세계관'이나 '인생관' 없이는 애초에 논의조차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라는 일종의 종교적 고백과 열정 위에서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성립합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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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부분에 동의합니다. 얕은 지식으로나마 철학과 종교를 모두 접한 사람으로써 철학이 어떤 인생의 무언가를 제공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철학이 이정표를 줄 순 있어도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는 목적지를 주진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도 자신의 유신론적, 무신론적 혹은 기타의 사상에 대해 피력하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역설적이게도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혹은 죽음에 대한 의미를 다른 분야에서 찾지 못했다면 종교가 종착점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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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학교 철학과에서 진행했던 죽음 수업 리딩리스트입니다.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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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면 가능한 일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답입니다. YOUN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시지프스 신화나 존재와 무 같은 책을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길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채요. 세상으로 제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겠군요.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정신분석이나 실존주의적(문학을 곁들인) 저서들도 있겠지만 그런 죽음에 대한 용서를, 타자로의 우회를 가지는 공식의 죽음을 극복하는 저서들보다도 저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윤동주를 읽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을 극복했다고 판단할 영역을 집어줄 수는 없으나 휘양찬 달, 싸늘한 달 등의 윤동주에게 있어서 충동의 표현, 상징이라고 할만한 영역을 넘어서는 시들이 있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