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입장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해소하기와 기술하기라는 핵심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YOUN의 핵심주장 : YOUN은 기술하기가 유의미하기 위해서라도 **해소하기(회의주의/형이상학자의 논변이 선제하는 가정에 대한 지적)**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YOUN은 다른 글에서 김영건에 대해 이렇게 비판합니다.
김영건은 '치유적' 접근과 '기술적' 분석 사이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맥도웰의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주의를 바탕으로 해명하면서 "주어진 철학적 문제들의 해소와 해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우리 일상 언어의 사용을 서술함으로써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술적 분석이 치유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적 접근이 기술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치유적 접근이 전제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기술적 분석은 단순히 주어진 사이비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허구적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후략-
voiceright의 핵심주장: voiceright은 이 입장이 비트겐슈타인적이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기술하기(문법에 관한 일목요연한 조망을 제시하여 회의주의/형이상학자의 언어가 사용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통한 해소하기(회의주의자/형이상학자의 언어가 언어게임 바깥에서 말하도록 이끌기)를 주장합니다.
저는 YOUN의 주장을 평가하기 위해 두 가지 기준을 상정하고자 합니다.
(a) YW가 LW인가?
(b) YOUN의 핵심주장이 정당한가?
(a)에 관해서는 voiceright이 열심히 논증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상하게 적기는 했지만,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은 YOUN의 주장처럼 명시적으로 해소하기를 진행한 후에 기술하기를 진행하는 식으로 명시적으로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문제를 해소(치유)하는 과정이 언어의 사용을 포괄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본다는 점에서 저는 voiceright님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두 가지 활동이 명시적으로 구별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구절들이 중요해 보입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우리 앞에 내놓을 뿐, 아무것도 설명하거나 추론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으므로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PI, ∮126)
철학에서는 어떤 추론도 도출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은 이러함에 틀림없다!"는 철학의 명제가 아니다. 철학은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을 밝혀낼 뿐이다. (PI, ∮599)
그러나 (a)에 관한 논의는 그 특성상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YOUN은 126절 같은 구절을 언어활동 배후에 실재/규칙/사적감각 등을 상정하는 형이상학자들에 대한 명시적 비판으로 읽어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이 그렇게 읽힌다 하더라도 보여주기에 앞서 형이상학자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구절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이 구절들이 기존 철학의 설명하기/추론하기와 대비하여 보여주기/기술하기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구절들로 읽힙니다.
(b)에 관한 논의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YOUN은 다음을 근거로 기술하기에 대한 해소하기의 선행성을 주장합니다.
- 보여주기의 오해가능성 : '해소하기' 이전에 이루어지는 '보여주기'는 '신적 관점'을 선제하는 활동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 보여주기의 설득력 : 모순의 지적, 잘못된 가정을 지적하는 논증이 결여된 보여주기는 형이상학자의 논증을 논박하는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첫 번째 근거의 경우, 보여주기 작업의 특성을 미리 한정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어 보입니다. '신적 관점'을 취한다면 보여주기를 할 필요가 없이 특정한 논제를 독단적으로 도입하면 되기 때문에, 작업의 특성에 대한 명세가 먼저 제공된다면 오해의 여지를 불식할 수 있어 보입니다. 오해는 풀면 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근거의 경우(아마도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만), YOUN님이 사용하신 해소하기와 기술하기(보여주기) 의 구분이 갖는 해석적 정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저는 YOUN님의 방식이 비트겐슈타인의 방식보다 세련된 방식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그런 논증 진행방식은 맥도웰의 논문들이나 셀라스의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같은 곳에서도 엿볼 수 있지요. 제가 그 형님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불호로 보자면 극호인 방식입니다. 저는 철학적 작업이 YOUN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b)와 관련하여 YOUN님의 주장은 정당합니다.
*실제로 박사학위가 없는 저 같은 사람이 보여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형이상학 비판을 시도한다면, 당장에 제 글을 누구도 읽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실용적인 견지에서 (b)의 입장을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