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와 보어를 가리키면서 깜찍한 표정을 짓고 계신 하이데거 옹
16세기와 17세기의 자연과학의 위대함과 우월성은, 그 연구자들이 모두 철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이란 오직 설명 개념의 빛 아래에서야 비로소 사실일 수 있으며, 언제나 그러한 설명의 범위에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그리고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머물러 있는 입장인 실증주의의 특징은 이에 반대됩니다. 실증주의는 [확립된] 사실들이나 새로운 사실들로 존립하고자 하며, 개념들은 단지 어떤 식으로든 필요로 되는 임시방편이지만, 그 개념들에 너무 깊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상황에 대한 희극,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비극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실증주의를 실증주의의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오직 평균적이고 파생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지배적입니다. 본래적인, 그리고 선구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상황이 300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도 둔감함은 존재했으며, 반대로 오늘날 원자물리학의 주요 인물들—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은 철저하고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그들은 오직 이러한 점 때문에만 새로운 질문 방식들을 만들어내고, 무엇보다도 의문 가능성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The greatness and superiority of natural science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are based upon the fact that the investigators were all philosophers; they understood that there are no mere facts, but that a fact is what it is only in light of the explanatory concept and always in accordance with the range of such explanation. The characteristic of positivism, within which we have stood for decades and today more than ever, is opposed to this; it intends to get by with [established] facts or new facts, whereas concepts are merely expedients, which one somehow needs, but with which one ought not to get all too involved—for that would be philosophy. The comedy or, to speak more correctly, the tragedy of the scientific situation of the present is above all that one believes that one can overcome positivism by way of positivism. To be sure, this attitude only prevails where average and derivative work gets done. Where authentic and path-breaking research takes place, the situation is no different than it was 300 years ago; this era also had its obtuseness, just as, conversely, the present leaders in atomic physics, Niels Bohr, and Heisenberg, think philosophically through and through, and only because of this do they create new ways of posing questions and above all hold out in questionability.
(M. Heidegger, ,The Question Concerning the Thing, J. D. Reid & B. D. Crowe (trans.), Lanham: Rowman & Littlefield International, 2018, p. 45 My emphasis.)
놀랍게도,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가 "철저하고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지적한 인물은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가 근대 과학과 현대 기술에 대해 대개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 좀 놀랍네요.
사실, 이 구절뿐만 아니라 『사물에 관한 물음』이라는 하이데거의 1935-1936년 칸트 강의록 자체가 놀랍습니다. 예전에 하이데거의 칸트 강의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이 대단히 훌륭하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이 강의록도 정말 뛰어나네요. 하이데거의 주요 저작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단히 친절하고 명쾌한 논의들이 전개될 뿐만 아니라, 그 논의들이 오늘날 영미권의 형이상학이나 과학철학과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주제들이라 '크로스오버' 연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합니다.
당장 위의 저 인용구만 하더라도 '관찰의 이론적재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과학철학의 주요 주제와 직접 연결되죠. 또 이 책의 1-13절은 '실체'와 '속성', '기체 이론'과 '다발 이론', '구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 '진리대응론' 같은 주제들을 아주 구체적인 예시들을 통해 교과서적으로 잘 해설하면서도, 그 주제들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하이데거 본인의 견해와 통찰이 나타나 있어서 흥미롭더라고요. 물론, 저 주제들 자체가 하이데거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아니고, 오히려 하이데거는 저 주제들에 대한 기존 철학의 논의들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물의 사물성' 혹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논의가 왜 필요한지 말하고자 하지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