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s, B., 「데카르트와 철학의 역사서술」

Williams, B. (2006). Descartes and the Historiography of Philosophy. In M. Burnyeat (Ed.), The Sense of the Past: Essays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pp. 257–264). Princeton university press.

철학과 역사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상사(history of ideas)와 철학사(history of philosophy)는 아주 크게 다음을 기준으로 해서 구별될 수 있다. 사상사는 철학이기 이전에 역사이지만, 철학사는 역사이기 이전에 철학이다. 사상사는 철학 텍스트의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철학자가 위치한 역사적 맥락에 집중한다. 반면 철학사는 철학자를 오늘날의 철학적 문제에 관계시키고, 그에 따라 해당 철학자가 후대에 미친 영향에 집중한다.

사상사와 철학사가 날카롭게 구별되거나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두 분야가 단순히 구별되지 않는다거나 하나로 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상사의 목표는 필연적으로 오늘날 철학에 반하는 일이다. 즉 좋은 사상사의 기준 중 하나는 후대의 철학이 해당 시대의 철학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파헤치고 그 철학을 당대의 역사적 이해 속에서 바로잡는 일이다. 둘째, 사상사와 철학사는 각기 상호 양립 불가능한 요소들에 의존하고 있다.

“철학사”라는 표현은, 이 분야가 그 스스로 철학이면서도 철학 속의 통시적인 영향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소는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철학사가 오늘날 현재적인 의미에서 철학이 되려면, 과거의 철학과 현재의 철학 사이의 역사적 차이들 및 전자가 후자에 미치는 영향관계를 일정 정도 무시하고 양자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적 철학사(analytical history of philosophy)는 먼저 바로 이 이유에서, 즉 예전의 철학이 현재의 철학과 지니는 간극과 관계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둘째로 제기되는 비판은, 현재 분석철학이 지니는 철학적 관심사가 예전의 철학에 비해 현저하게 좁다는 점이다. 셋째로 분석적인 철학사 접근은 과거의 철학이 오류를 저지르고 현재의 철학이 이 오류를 교정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오만하다고 비판받는다.

이 세 가지 비판은 모두 정당하다. 그런데 첫째는 철학사가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는지뿐만이 아니라 왜 연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물론 과거의 철학과 오늘날의 철학 사이의 간극을 아예 무시해버리고 “플라톤의 저작들이 마치 『마인드』의 지난 달 호에 실린 양”(Williams, 2006, 258) 다룬다면, 그러한 접근은 유의미한 점에서 철학“사”일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종류의 접근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분석적 접근법을 사용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철학사 작업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유의미하게 철학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사 연구들은 현재와 과거의 철학적 거리를 유지하지만, 여전히 철학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가 철학으로서 지니는 동일성을 보존함으로써 비로소 철학사의 유용함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즉 양자의 동일성을 견지함으로써 오늘날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생각들을 활용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우리는 철학사를 통해 우리 시대에 도움이 반시대적으로 오늘날과 거리를 두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Williams, 2006, 259)고, 다시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데카르트의 경우를 살펴보자. 데카르트는 독창적이었고, 그 스스로도 자기 철학의 전례 없는 독창성을 주장했으며, 후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다른 시대와 구별되는 근대라는 의식이 형성되는 데에 중심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후대에 영향을 끼치고 근대적 의식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대단한 오해들이 개입했으며, 이 오해들은 데카르트 자신이 알지도, 예상하지도, 그리고 알았다면 용납하지도 않았을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데카르트가 위치한 시대적 맥락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그를 둘러싼 오해를 걷어낼 수 있겠지만, 이와 더불어 데카르트라는 철학자의 독창성에 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데카르트는 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가 제시한 방법론적 및 형이상학적 전환이 그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나 몽테뉴에 빚지고 있고, 그가 스스로의 독창성을 주장하려 했다는 점 자체가 르네상스 시대의 자기형성(self-fashioning)이라는 역사적 영향 속에 있다고 해도, 이 물음은 여전히 충분히 대답되지 않은 채 남는다. 둘째, 데카르트에 대한 비역사적 ‘오해’를 걷어내고 나면 우리는 데카르트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데카르트에 대한 우리의 관점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전제들을 걷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의 철학사 속에서 전제해 왔던 데카르트에 대한 오해들을 걷어낸다면,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어떤 철학자로 드러나는가? 사상사나 철학사가 그대로 데카르트에 적용될 경우, 그 결과물은 순전히 역사적이기만 하거나 완전히 시대착오적이거나 둘 중 하나일 터이다. 사상사는 후기 스콜라주의나 라 플레슈, 당시에 발전했던 역학들을 살펴보면서 데카르트를 조명하겠지만, 그 결과 출현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와 거리를 둔 것이기는 하겠지만 철학이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철학사는 회의주의로부터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비초월적인 인식론을 데카르트로부터 이끌어내려고 하겠지만, 이렇게 구성된 결과는 철학이기는 하겠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적 선입견의 답습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역사 속의 어느 철학자에 대해서든 제기될 수 있지만,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데카르트에게 이 물음들은 유난히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왜냐하면 이런 칭호가 붙게끔 데카르트를 새로운 철학자로 브랜딩하려고 하고 철학적 사유들을 재정립하려 한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데카르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그 자신을 둘러싼 여러 오해들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셈이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그 시초라고 알려진 근대철학이란 무엇이고, 근대철학의 시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을 충족해야 하는가? “근대”(modern) 철학이란 우리 시대의 철학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는 했다. 그러나 “근대”는 점점 우리 시대와는 다른 철학사의 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설령 근대철학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는 데에 동의하더라도, 데카르트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철학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는 논쟁거리이다. 예컨대 인식론 대신 언어철학을 철학의 중심에 놓는 관점은, 데카르트 대신 프레게를 오늘날 철학의 시초로 놓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데카르트를 오늘날의 철학적 논의에 끌어들이겠지만, 그때 데카르트는 오늘날 철학의 창시자라기보다 안티히어로, 즉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실패 사례로 종종 활용된다.

안티히어로로 활용될 때에도 데카르트는 상당히 역설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예컨대 오늘날 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회의주의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내놓으려 하는 시도를 무망한 것으로 보고, 그 대신 왜 우리가 회의주의의 문제에 이끌리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들에게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려 한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언급된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그 스스로 회의주의의 문제에 빠져버리는 철학자로 묘사되며, 회의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답은 17세기 기독교 변증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식의 이해는 역사적 인물인 데카르트로부터 철학적인 결과를 산출하지만, 데카르트나 회의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철학 및 철학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해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오늘날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철학적 활동의 창시자로 간주하면서도, 그의 저작은 내용적으로 그가 창시한 철학에 대한 진지한 기여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철학적 문제 및 데카르트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해는 데카르트와 오늘날 우리의 철학적 활동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그 결과물은 오늘날 우리의 철학적 문제들에 대답하는 주장들을 이끌어낸다.

이런 식의 이중적인 접근법은 우리는 데카르트를 비롯한 과거의 철학자들이 우리가 현재 참여하는 활동인 철학과 충분한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 그리고 전자와 후자가 영향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들이 현재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오해가 깊숙이 개입했음을 발견한다. 이 옛 철학자들에 대한 전통적인 상을 파괴하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옛 철학자들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이해는 “오해의 전통”(Williams, 2006, 263)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 과거의 철학자들을 더 잘 이해할수록, 이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의 상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접근법 속에서, 근대의 전통을 구성한다고 여겨졌던 데카르트 및 과거의 다른 철학자들은 전통 속에서 이해되었던 바와 다르게 되며,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낯선 철학자들이 됨으로써 근대성에 대한 종래의 상을 뒤흔든다.

초두에 등장했던 철학사와 사상사의 구별에서 철학사를 사상사로부터 구별하는 철학적 특징은, 과거의 철학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현재 우리가 철학을 하는 데 암암리에 도입하고 있던 가정들을 뒤흔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철학자들이 현재 시대와 지니고 있는 간극을 없애버려서는 안 되며, 이들을 단순히 현재에 끼친 영향만으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철학사의 과제는 “우리의 현재 상황 및 [종래에] 수용되었던 전통의 그림을 의문시하도록 도와줄 만큼 충분히 낯설 그러한 철학적 구조를 과거의 철학에서 발견하는, 혹은 그로부터 만들어내는”(Williams, 2006, 264)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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