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처음에 앨리슨의 책을 읽었을 때, "이것이 왜 새로운 해석이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감각에 의하면, 앨리슨의 물자체 해석은 오히려 소위 교과서적 해석에 굉장히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하이데거의 해석과의 유사성 역시 이 점에서 우연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이데거 당시에는 두 측면 해석이 주류 해석이 아마 아니었을 것입니다만, 하이데거처럼 해석학적 감각이 있는 명석한 철학자는 이미 그 온전한 얼개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이데거의 해석은 그저 예외일 뿐이고, 또한 그전까지 제가 교과서적으로 보고 들었던 해석들이 앨리슨에 의해 영향받은 결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한편으로 "두 세계 해석"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라 고려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두 대상 해석"(더 나아가 "두 측면 해석"들 중에서도 형이상학적/과학주의적 버전들)은 영미권에서 스트로슨 등에 의해서 메인스트림으로 논의되었으나, 대륙철학이 영미권에 수용되는 여타의 초기 역사에서도 보여지듯, 그저 1세대들의 잘못 정향된 해석이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의 또 다른 예시는 칸트에 대한 phenomenalism 해석이 있겠네요). 이에 비하면 앨리슨의 해석은 뭐랄까 특별히 "모 난데 없는" 무난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무난한 해석이 영미권 학자들에게 새롭게 느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앨리슨의 해석에 완벽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앨리슨은 대상을 물자체로서 고려하는 관점 (the way of considering things as they are in themselves)가 선험적 관념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것이 제게는 큰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칸트는 오히려 "그러한 물자체-관점에 (if any)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거라"로 읽히거든요.
이것은 다음의 의문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요. "대상을 물자체로서 고려하는 관점"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물자체"라는 것은 이미 그 정의상 인간에게 주어지는 바(현상)에 독립적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상을 우리로부터 독립적인 바로서 고려하는 (우리의) 관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게 "대상을 신적인 관점에서 고려하는 (인간의) 관점" 만큼이나 형용모순으로 들립니다. 그러한 관점을 "우리"는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없으니깐요. 물론, 칸트의 실천철학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역시 해야하기에,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한정 없이 길어지겠습니다만, 짧게 줄이자면, 인간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물자체-관점"에 앨리슨은 그것도 이론적 지식의 맥락에서(=순수이성비판의 맥락에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