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규범(학)의 대립은 제대로 된 문제인가? - 설명이라는 두 관점

(0) 20세기 초반 독일어권(비엔나 그룹과 현상학자들)에서 과학과 다른 학문(윤리학 등의 인문학 - 여기서는 규범학이라고 불릴 예정)을 구분하고 그 성격을 다르게 규정한 뒤, 과학과 규범학은 대비되는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그 뒤 오늘날까지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은 허수아비 논쟁을 피하기 위해, '설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중의성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설명에는 크게 a) 인과적 설명과 b) 목적론적(흔히 규범적이라는 표현과 혼용되지만, 앞선 규범학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목적론적으로 쓰겠다) 설명이 있으며, 학자들 간의 논쟁은 과학/규범학과 설명의 관계, 설명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1) 설명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 '왜 그러한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왜냐하면, ~ 때문에 등의 구문과 함께) 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이 설명에는 두 가지 의미 - 즉 두 가지 관점이 성립한다.

(2) 과학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우리는 과학적 설명이 (a) 인과적 설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예컨대, '사과가 빨간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과 껍질의 특정 색소가 특정 빛의 파장을 반사해서, 그 반사된파장을 인간 눈의 특정한 시신경이 감지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반면 과학적 설명이 (b) 목적론적 설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과가 빨간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같은 질문에, '사과가 빨개서, 생물체가 그걸 더 많이 먹어서 더 많이 번식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라는 답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학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이 가진 차이는 개연성에 있다. (a) 인과적 설명은 단순히 A-B 간의 '개연적 연관성’을 주장하며, 미래에도 그런 '개연적 연관성’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만’을 제시한다. 그러나 (b) 목적론적 설명은 ‘개연적 연관성’ 이상을 과학적 설명이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한편, 규범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지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일 제시할 수 있다. (b) 목적론적 설명을 우선 살펴보자. '왜 우물에 떨어질 것 같은 아이를 구했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러는게 규범적으로 옳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반대로 (a) 인과적 설명 역시 제시될 수 있다. 우물에 떨어진 아이를 왜 구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해야함을 느껴서 그렇게 했다.'라는 설명이 제시될 수 있다.

(3-1) 규범의 영역에서 (a) 인과적 설명과 (b) 목적론적 설명이 저 예시에서는 모호해 보인다. [학자들 사이에 온갖 논쟁이 있지만] 둘의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동기’에 달려있다. (a) 인과적 설명의 경우, 행위의 동기-설명을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으로 취급한다. 반대로 (b) 목적론적 설명의 경우, 행위의 동기-설명을 우리가 내리는 어떠한 '판단’으로 취급한다.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시는 '의지 박약’이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야한다’는 당위-목적론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러한 감정이 들지 않아서 (인과적 동기가 부족해서) 행동하지 않는 경우를 제시할 수 있다.

(4) 과학/규범학과 설명을 둘러싼 문제는 다음과 같을 때 흔히 일어난다. (4.1) 과학에서 설명이 단순한 (a)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 (b) 목적론적 설명이라고 주장할 때 일어난다. 이 경우, 학자들은 어떻게 ‘관찰’ 이상의 것을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지 논증해야한다.

반대로 (4.2) 규범학/행위 이론에서 행위에 대한 설명을 온전히 (b) 목적론적 설명으로 보고, (a) 인과적 설명을 제거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 경우, 학자들은 앞서 논의한 '의지 박약’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5) 특히 오늘날에도 학자들이 행위에 대한 (a) 인과론적 설명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는 여전히 물질/영혼 이원론의 잔재처럼 보인다. (b) 목적론적 설명이 행위에도 선호되는 이유는, 행위자가 (i) 인과적으로 결정되어있다고 보지 않고 (ii) 자기 스스로 행위를 결정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혹은 여겨지는 것이 여러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잘못되었다. (i) 행위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행위에 대한 인과적 결정론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다시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아이 사례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이 아이를 구하는 행위에 대한 인과적 원인으로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감정, 예전에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았던 죄책감, 남들이 날 보고 있다는 시선, 이 아이를 구해줄 경우 얻는 명예 등, 많은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인들 간의 관계, 원인들과 결과의 관계는 ‘모호하다.’ 저 인과적 설명에는 어떠한 원인이 결정적인지, 즉 다른 원인 없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는지가 부재한다. 달리 말해, 인과적 설명은 여전히 '개연성’만으로 충분히 성립하며, 무엇이 ‘결정적인지’ 결정론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비록, 학자들이 여기서 무엇이 결정적인지 탐구하고 싶어하고, 주장할 수 있어도 말이다.]

(ii) 행위자가 자기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다. 이번에는 무차별 살인의 예시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낯선 사람들 공원에서 갑자기 죽였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살인자는 자기 스스로 행위를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우리는 이 역시도 시간의 범위를 넓히면 '인과적 설명’으로 대체할 수 있다. 저 누군가가 고아이고, 그래서 뇌신경이 손상되어서, 분노 조절이 잘 안 되어서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살인이라는 결과가 자기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설명 대신, 시간적으로 먼 '원인’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인과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간 행위자와 물질의 구분은 자기 원인과 자기 원인이 아닌 것의 차이가 아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의 차이가 될 것이다.

5개의 좋아요

향후의 문제
(6) 그렇다면 (a) 인과적 설명과 (b) 목적론적 설명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나의 설명을 다른 하나의 설명으로 ‘환원’ 혹은 '대체’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아니지만, 네이글의 1인칭/3인칭의 구분이 어느정도 돌파구가 될 수 있어 보인다. 우리는 (a) 인과적 설명에 대해서는 3인칭적 관점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즉, 다른 사람 자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 같은 규범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과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개념/언어가 아닌 규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달리 말해, 이는 사적 언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윤리 등의 '규범’이 다른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인 나와 케냐 사람인 A가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빨강이 되는 것을 자주 관찰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규범과 관계 없이, 단풍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
허나 (b) 목적론적 설명은 이와 다르다. 만약 규범이 다르다면, 우리는 같은 현상에 대한 전혀 다른 목적론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도교 신자라서 단풍이 되는 이유가 기의 쇠함이라 설명을 제시할 수도 있는 반면, 케냐인인 A는 기독교도라 단순히 신의 뜻이라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7) 인과적 설명의 최소 단위는 무엇인가? 다시 살인자의 예시로 돌아가보자. 만약 우리가 인과적 설명의 최소 단위를 한 인간 개인으로 놓고보자면, 인과적 설명에서 살인자는 자기 원인이 된다.

그러나 한번, 최소 단위를 뇌신경으로 바꾸어보자. 그렇다면 고아가 된 것, 가난한 것 등등 뇌신경에 인과적 영향을 준 것들은 모두 원인이 될 것이다. 이렇듯, 최소 단위를 설정하는 것은 인과적 설명을 명확히 하는게 필수적인 문제다.

그렇지만, 과연 인과적 설명의 최소 단위는 제시될 수 있는가? 제시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쓰신 내용과 완전히 정확히 일치하는 논의는 아니지만, 저는 '인과적 질서(causal order)'가 '추론적 질서(inferential order)'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모든 설명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는 '추론’의 과정이고, 두 사태 사이에 '인과’가 성립한다는 설명도 궁극적으로는 추론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다는 거죠. 즉, F와 G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주장은, 아주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x)(Fx⊃Gx)인데, 우리는 이 주장을 Fa&Ga, Fb&Gb, Fc&Gc, …… 같은 유한한 사례로부터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정당화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동안 일어난 유한한 개별 F의 사례가 성립할 때마다 G의 사례도 성립했으니, 다음 F의 사례가 일어날 때에도 G가 성립할 거다."라는 방식으로 인과를 추론한다는 거죠. 예전에 이런 논지로 쓰인 로티와 브랜덤의 논문을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찾아보려니 제목이 기억 나지 않네요.

2개의 좋아요

"행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과 "행위가 인과적 설명이 인과적 결정론을 함축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양립가능한지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결정이라고 하면 그것이 법칙적으로, 같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같은 방식으로 그 사건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과적 설명이 개연적인 것으로 충분하다면, 행위가 인과적 설명 가능하다는 것과 인과적으로 결정됐다는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또 행위의 자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인과성이 개연적일 수 있다고 규정할 경우 행위의 인과성을 인정하면서도 행위의 자유 옹호 논변을 구성할 방법이 생깁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무법칙적 일원론의 데이비슨이고요.

혹시 만달라님께서는 "결정"이라는 용어와 "행위의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추가적으로, 본문에서는 "인과성이 개연적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댓글에서는 인과적 설명에 대해 해석자가 어느 규범에 속해있든 상관없이 인과적 설명에 동의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과성이 개연적이라면, 어떤 인과적 설명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개연적일 것입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규범에 제약을 받아 비동의가 일어나는 반면 인과적 설명은 규범에 상관없이 동의가 된다기엔, 인과적 설명 자체가 개연적이므로 동의/비동의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됩니다.

(1) 제가 '결정되어있다’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쓴 것으로 보입니다. 제 전반적인 요지는 (a) 인간 행위자 - 심적 행위자를 기존의 모든 인과에서 온전히 벗어난 '공백 상태’의 자기원인으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심적 행위자가 단순히 '그때 그때의 사건만을 원인’으로 해서, 그걸 적절한 심적 과정(자기 원인)을 통해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공 상태의 '현재적 심적 행위자’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i) 자기 원인의 근거가 되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것을 위협하는 ‘감정’ 등의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 자기 인식이 되는 것과 (ii) 자기 인식이 되지 않더라도, 판단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화된 판단/편향’은 심적 행위자가 과거에 겪었던 사건과 그로 인한 ‘물리적 영향’(뇌의 변화)라는 형태로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 심적 행위자의 최소 단위를 고민해봐야하지 않나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고로, 에릭님이 말하신 대로, 인과는 여전히 개연적이기에 결정론은 아닌 겁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심적 행위자는 '현재에 과거 사건들이 없는 공백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모두 개연적이기에, 말씀하신대로 동의/비동의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기서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두 설명이 '정당화되는 과정’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도덕 혹은 세계관을 공유해야만, 그 설명이 정당화되는 반면, 인과적 설명은 도덕/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관찰을 통한 귀납을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고차원적으로 귀납을 통한 정당화 역시도 위의 윤님이 말하신 것처럼 추론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원에 대해서 저는 열려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은,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이 다른 방식의 정당화[더 높은 차원에서는 같은 것으로 환원될지라도] 과정이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