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인 병 모델: 일본 비평계의 어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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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아키라, 『구조와 힘』

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아사다 아키라도 그렇고, 가라타니 고진도 그렇고, 아즈마 히로키도 그렇고, 일본 비평가들의 책은 읽을 때마다 정말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게 만든다.

분명 이 사람들이 제시한 텍스트 독법이나 철학적 주장은 굉장히 참신하다. 그런데 사실 ‘참신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로서는 이 사람들의 독법과 주장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더 정확히 말해, 단순히 동의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대하는 입장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바로 이 ‘참신한데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사람들이 쓴 글들은 자꾸 머릿속을 맴돌면서, 생각을 자극하면서, 짜증을 불러일으키면서, 흥미가 생기게 하면서, 뭔가 계속 여기에 대해 말하고 싶게 한다.

괜히 자기 전에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가 잠을 설치고 있다. 그놈의 ‘클라인 병’ 모델이 문제다. 80년대에 아사다가 이상한 방식으로 유럽 대륙철학을 요약해둬서, 00년대까지 일본 비평계에 이상한 논의 구조가 생겨버렸다.

클라인 병이 무엇인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병이다. 아사다는 이 병을 통해 '근대'라는 시대가 지닌 구조를 보여주고자 한다. 근대란, 화폐가 사회 내부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안)인 동시에 사회가 지향하는 절대적 가치(밖)가 된 나머지, 화폐를 증식시키고자 하는 무한한 운동이 계속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대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수직적 위계 질서가 없다. 오히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계속하면서 위계 질서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단순히 고정된 위계 질서를 비판하는 논리로 '근대'라는 시대를 진단하고 비판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클라인 병의 형태로 구조화된 '근대'라는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무한한 운동 그 자체가 고착화되었다는 점이다. '화폐'라는 매체=절대적 가치를 증식시키고자 하는 끊임없는 운동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정된 위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운동이,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로 고정된 질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아사다 이후로 일본 사상계에서는 소위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일컬어지는 근대 비판이 클라인 병 구조에 대한 비판이 되어버렸다. 가령, 아사다 본인은 들뢰즈의 '차이', '리좀', '유목민', '탈주' 같은 개념들을 통해 고정된 방향 없이 뻗어나가는 운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반면, 가라타니는 들뢰즈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통해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아즈마는 데리다의 '산종', '우편', '탈구축'과 같은 개념들을 빌려서 우연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논의는 현대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독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솔직히 너무나 얼척이 없는데도 희안하게 말이 되는 통찰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럽은 커녕 일본하고도 인연이 거의 없는데도 ‘현대철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우연히 이 사람들의 글에 어그로가 끌리게 된 20년대의 한국 사람인 내가 새벽 두 시까지 괜히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자고 있다. ''클라인 병'이라는 구조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는데,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비전은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괴델적 탈구축'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데리다적 탈구축'이라는 것이 오히려 형이상학으로 귀결되고 있는데……. 그래도 논의 자체가 말은 되네.' 같은 온갖 생각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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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병'이라는 구조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는데,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비전은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괴델적 탈구축'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데리다적 탈구축'이라는 것이 오히려 형이상학으로 귀결되고 있는데……. 그래도 논의 자체가 말은 되네.

그럼 답은 간단한 거 아닌가요? "결론은 그럴듯한데 전개방식이 넌센스다."
뭐.. 저 그림이나 괴상한 단어들이 20세기 후반 유럽철학을 어떻게 요약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맞는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조차 짐작도 안 되는 그림이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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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갈라파고스화 된 일본 사상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 일반적인 방식으로 유럽철학 공부한 사람들도 ‘도대체 저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도식이긴 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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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화"가 더 통찰력 있어보이는군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