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캐서린 모리 라쿠나는 삼위일체론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을 가르치고 있는 교의라고 강조한다. 즉,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라는 역설을 신비주의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교의가 아니다. 오히려 삼위일체론에는 아무런 신비주의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뒤편에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 '본성(nature)'을 계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내면을 상정하는 모든 입장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거부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경륜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하나도 남김 없이 계시하셨다. 라쿠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계시하시는 하나님 배후의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은 결국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가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구원 역사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인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사랑과 연합의 신비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서 영원하며, 자유롭고, 절대 신비다."(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304-305)
(7)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일찍부터 삼위일체론의 해석학적 의의에 주목한 철학자이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유가 '존재', '언어', '사유'의 통일성을 대단히 적절한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성부와 성자의 통일성은 사유 속에서 수행되는 '내적 말씀'과 언어를 통해 표현된 '외적 말씀'의 통일성을 반영하고 있다. 성부가 성자의 사역을 통해 풍성하게 넘쳐 흐르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사유는 언어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의 통일성은 언어와 존재의 통일성을 반영하고 있다. 말씀이 만물을 창조해내는 성령의 능력을 지닌 것처럼 언어는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능력을 지닌다.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볼 때 말씀의 탄생은 삼위일체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물론 생명을 점지하고 수태하는 파트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실제로 창조행위이고 진정한 탄생인 것이다. 말이 탄생하기까지의 이러한 정신적 성격은 신학적 모델로 기능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신인(神人)의 삼위일체와 사고의 과정 사이에는 실제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가다머, 『진리와 방법』, 제2권: 358)
(8) 도널드 데이비슨은 '존재론', '의미론', '진리론'이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매우 명료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즉, 우리가 무엇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따라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해명된다. 의미론은 대상언어 L을 구성하는 각각의 문장에 대해 진리 조건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의미'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해명된다. 존재론은 "s는 p일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라는 규약 T 형식의 문장에 대해 대상언어의 문장 s가 참인 상황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의미론적 해설 p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존재'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유' 사이에는 통일성이 성립한다. 말하자면, 존재론, 의미론, 진리론의 관계는 삼위일체적이다. 독단주의와 상대주의를 해소하여 소위 실재에 대한 "직접적 접촉"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존재론, 의미론, 진리론이 삼위일체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9) 따라서 삼위일체론이란 단순히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제하고 있는 교의적 고백일 뿐만 아니라, 지식의 가능 조건 일반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이기도 하다. 즉, 존재와 언어와 사유는 통일성을 지닌다. 이러한 통일성을 벗어나서는 실재에 대한 "직접적 접촉" 자체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실재론은 반드시 삼위일체론을 일종의 철학적 고백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이 없는 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뒤편에 '사물 자체(Ding-an-sich)' 따위가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적 표어를 내세워,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Nothing is hidden)."라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존재, 언어, 사유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삼위일체론의 해석학적 의의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참고
가다머, 한스게오르크., 『진리와 방법』, 제2권, 임홍배 옮김, 문학동네, 2012.
라쿠나, 캐서린., 『우리를 위한 하나님』, 이세형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8.
바르트, 칼., 『교회교의학』, 제Ⅰ/1권, 박순경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