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의 철학은 표상주의?

개인적으로 과학기술학에 관심이 있어서 브루노 라투르의 저작을 몇 권 읽어 보았으나 『Reassembling the Social』 같은 '사회학자 라투르'는 아직 국역본이 없습니다. 대신 김홍중 교수님의 저서 『가까스로-있음』을 읽고 있는데, 초장부터 꽤 당황스러운 대목이 나오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20세기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인식[Heidegger, 1990: 67],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 게임’[Wittgenstein, 1978: 11], 라캉(Jacques Lacan)의 ‘상징계’,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랑그’,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 자본’,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텍스트’에 부여된 중심성은 모두, 실재와 인식 사이에 ‘언어’가 특권적 심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를 풍미했던 이 “언어적 전환, 기호적 전환, 해석적 전환, 문화적 전환”은 모두 언어에 과도한 힘을 부여하는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의 여러 버전들에 다름 아니었다[Barad, 2003]. 하지만, 인류세의 도래 속에서 우리는 언어의 자율성, 구성력, 매개 능력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점점 더 광폭해지는 기상 재난들 앞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을 언어에 의해 상징화되는 수동적 대상으로 보지 못한다. 가이아가 적대적 힘으로 귀환하는 이른바 “가이아의 침입(intrusion)” 상황에서[Stengers, 2009: 50], 자연은 인간의 상징계에 포섭되고, 구성되고, 종합되고, 이해되고, 도식화되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먼지, 독성 물질, 이산화탄소, 플라스틱 알갱이들, 구름, 바람 등은 기표 작용의 그물 사이로 새어 나와 활동력과 파괴력을 발휘한다. 원전에서 유출된 세슘에 오염된 물고기의 물질성, 즉 그것을 섭취한 생명의 신체에 가져올 치명적인 변용 가능성은 언어의 포섭력을 한껏 초과한다.

인류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던 상징의 두꺼운 작동 영역(문화, 언어, 텍스트, 의식, 표상)을 허물었다. 물질의 마성적이고 능동적인 역량은 이제 일상적 직관과 경험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구멍 난 상징계를 뚫고 엄습해 오는 물질적 실재와 인간(생명)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뒤엉켜 있음을 실감한다. “상징적인 것은 세계를 상실한 사람들의 마술”[Latour, 1988: 187]이라는 라투르(Bruno Latour)의 신랄한 지적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즉, 세계의 물질성이 일상적으로 감각되기에 이른 인류세에 상징계의 권위는 환멸적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제 우리는 자연/사회, 인간/비인간 구분의 허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류세의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문화의 영역에 유폐된 ‘구조의 수인(囚人)’이 아니다. 인간은 비인간 행위자들과 결합하여 하이브리드들을 제작해 왔고, 자연과 사회를 역동적으로 뒤섞어 버렸다. 모더니티란 이런 방식으로 구축된 강력한 행위자-네트워크, 즉 탄소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한 시기다.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명백히 근대인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직접적 결과물이 바로 인류세다[라투르, 2009].

김홍중, 『가까스로-있음』 (이음, 2025), 26–28쪽.

우선 여기서 인용된 Barad의 논문에서 '표상주의'를 어떤 뜻으로 쓰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래 번역에서는 representationalism을 '재현주의'로 옮겼지만, 김홍중 교수님이 말하는 '표상주의'와 같은 단어입니다.

Liberal social theories and theories of scientific knowledge alike owe much
to the idea that the world is composed of individuals—presumed to exist before the law, or the discovery of the law—awaiting/inviting represen-
tation. The idea that beings exist as individuals with inherent attributes,
anterior to their representation, is a metaphysical presupposition that un-
derlies the belief in political, linguistic, and epistemological forms of rep-
resentationalism. Or, to put the point the other way around, represen-
tationalism is the belief in the ontological distinction between
representations and that which they purport to represent; in particular,
that which is represented is held to be independent of all practices of
representing. That is, there are assumed to be two distinct and indepen-
dent kinds of entities—representations and entities to be represented. The
system of representation is sometimes explicitly theorized in terms of a
tripartite arrangement. For example, in addition to knowledge (i.e., rep-
resentations), on the one hand, and the known (i.e., that which is pur-
portedly represented), on the other, the existence of a knower (i.e., some-
one who does the representing) is sometimes made explicit. When this
happens it becomes clear that representations serve a mediating function
between independently existing entities. This taken-for-granted ontolog-
ical gap generates questions of the accuracy of representations. For ex-
ample, does scientific knowledge accurately represent an independently
existing reality? Does language accurately represent its referent? Does a
given political representative, legal counsel, or piece of legislation accu-
rately represent the interests of the people allegedly represented?

자유주의적 사회이론과 과학적 지식에 관한 이론은 모두, 세계가 개별자들(individuals)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개별자들은 법이 존재하기 이전에, 혹은 법칙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며, 재현되기를 기다리거나 재현을 요청하는 존재들이다. 존재자들이 그 재현에 선행하여, 고유한 속성을 지닌 개별자들로서 존재한다는 관념은 정치적·언어적·인식론적 형태의 재현주의에 대한 믿음의 밑바탕을 이루는 형이상학적 전제이다. 혹은 이 논점을 반대 방향에서 표현하자면, 재현주의란 재현과 그것이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대상 사이에 존재론적 구별이 있다는 믿음이다. 특히 재현되는 것은 모든 재현의 실천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다시 말해, 서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두 종류의 존재자, 즉 재현과 재현될 존재자가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재현의 체계는 때때로 명시적으로 삼항적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론화된다. 예를 들어 한편에는 지식, 즉 재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알려지는 것, 즉 재현된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아는 자(knower), 즉 재현을 수행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명시적으로 추가되기도 한다. 이 세 번째 항이 명시될 때, 재현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들 사이에서 매개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존재론적 간극은 재현의 정확성에 관한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지식은 그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특정한 정치적 대표자, 법률 대리인, 혹은 하나의 법률은 자신이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대표하는가?

(ChatGPT 번역)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28, no. 3 (Spring 2003): 801–831. DOI: 10.1086/345321

원문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운데, 김홍중 교수님이 거론하는 철학자들, 적어도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는 오히려 (Barad가 비판하는) 표상주의를 비판하는 데 주력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Barad가 표상주의를 공유하는 입장으로 지목하는 것은 'social constructivist'와 'traditional realist'이고, 표상주의를 비판한 인물로는 푸코, 버틀러, 해킹, 라우스 등을 거론합니다. 오스틴과 데리다 역시 수행성(performative) 개념의 계보에 있고요. (그럼에도 '사회구성주의'가 어떤 인물들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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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교수님의 텍스트에서,

20세기를 풍미했던 이 “언어적 전환, 기호적 전환, 해석적 전환, 문화적 전환”은 모두 언어에 과도한 힘을 부여하는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의 여러 버전들에 다름 아니었다[Barad, 2003].

라는 구절을 Barad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비교 검토하겠습니다. (이하 강조는 필자)

Indeed, the representationalist belief in the power of words to mirror preexisting phenomena is the metaphysical substrate that supports social constructivist, as well as traditional realist beliefs. Significantly, social constructivism has been the object of intense scrutiny within both feminist and science studies circles where considerable and informed dissatisfaction has been voiced.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p.188 (제가 구한 논문에 적힌 페이지입니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죠.

참으로, 말이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비추어 낼 수 있다는 표상주의적 믿음은 전통적 실재론은 물론 사회구성주의의 믿음까지 지지하는 형이상학적 기층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사회구성주의는 페미니즘 이론과 과학학 학계 모두에서 집중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그곳에서는 상당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는 불만이 제기되어 왔다.

아시다시피 전통적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입장입니다. 전통적 실재론은 말이 사물을 정확히 반영하거나 가리킬 수 있다고 보고, 사회구성주의는 말 내지 담론이 사물을 만들어 낸다는 입장이니까요. 하지만 Barad에 의하면 이들은 "말이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비추어 낼 수 있다는 표상주의적 믿음"이라는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고 합니다. 전자는 '반영', 후자는 '구성'으로 서로 방향은 반대에 가깝지만, 모두 말이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비추어 낼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드는 이 공통의 전제를 "표상주의"라 부르고, 이것이 두 입장 아래에 깔린 "형이상학적 기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서 '비추어 낸다'(mirror)는 표현이 '반영'에 가깝게 이해될 수도 있을 텐데요, 일단 Barad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위글에서 질문자 선생님께서 인용해 주신 구절에 따르면 Barad는

재현주의란 재현과 그것이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대상 사이에 존재론적 구별이 있다는 믿음이다. 특히 재현되는 것은 모든 재현의 실천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고 주장하는데요. (번역어를 수정하면) "표상과 표상되는 대상 사이의 구분"도 전통적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 양자에 모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Barad는 이런 공통되는 것들을 고려한 문맥에서 양자를 표상주의와 관련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원문을 확인해 보니 Barad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더군요. 그래도 Barad의 견해를 적용해서 판단해 보면, 이들은 표상주의의 내용은 비판하지만 그 비판이 언어와 해석을 중시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표상주의의 또다른 형태가 되었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너무 단순하게 독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Barad의 원문에서 데리다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이것 뿐이더군요.

Jacques Derrida is usually cited next as offering important poststructuralist amendments. Butler elaborates Derrida's notion of performativity through Foucault's understanding of the productive effects of regulatory power in theorizing the notion of identity performatively. (p.193, 주석 8)

자크 데리다는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수정을 제공한 인물로 여겨짐으로서 보통 다음으로 거론된다. 버틀러는 정체성 개념을 수행적으로 이론화하면서, 데리다의 수행성 개념을 규율 권력의 생산적 효과에 대한 푸코의 이해를 통해 정교화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데리다 자신이 표상주의를 비판한다고 보는 것에 비해, Barad는 자신의 행위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데리다 역시 물질의 능동적인 역할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Barad가 데리다를 표상주의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물론 Barad가 데리다를 독해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겠지요.

이를 통해 Barad가 말하는 '표상주의'의 외연이 상당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Barad가 이렇게 표상주의를 넓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등이 실재로 표상주의자였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들이 표상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실재로는 언어라는 표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취지 같아요. 그리고 Barad 자신의 행위적 실재론이 이러한 표상주의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는 맥락 같고요.

종합하면, 서두에 인용한 김홍중 교수님의 "언어에 과도한 힘을 부여하는 “표상주의”의 여러 버전들에 다름 아니었다"는 문장은 Barad의 표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다름 아니었다'는 것은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서,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등이 실제로 '표상주의자였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라고 보이고요, 이들이 '언어에 과도한 힘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Barad가 지적하는 바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입장이 Barad의 행위적 실재론 자체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고, 나아가 이 문장이 김홍중 교수님의 저서에 나타난 독자적인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며, 그러한 주장의 문맥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말하려면 김홍중 교수님의 텍스트를 깊이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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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올려주신 김홍중 교수님의 글이나 카렌 바라드의 글만 봐서는 상당히 어리둥절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는 표상주의를 비판한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니까요. 물론, @FrancesYates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의 표상주의 비판에도 여전히 표상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다고 공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글만으로 봐서는 이들이 정확히 어떤 점에서 여전히 표상주의적 요소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네요.

이런 점에서, 저는 카렌 바라드처럼 최근에 등장하는 신유물론 계열의 입장들이 이전 시대의 철학에 대해 뭔가 단단히 오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철학이 '표상주의'나 '인간중심주의'라는 것이 신유물론 계열의 입장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판인데, 정작 신유물론이 구시대의 철학의 대표자들로 삼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같은 인물들이말로 표상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누구보다 격렬하게 거부한 것이 철학사적으로 분명하니까요. 적어도, 신유물론이 제기하는 비판이 성립하려면 그 인물들에게 정확히 어떤 면에서 '표상주의'나 '인간중심주의'가 내재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지적이되어야 할 텐데, 신유물론이 어떤 논점을 제시하는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뒤져보았지만, 저로서는 아직 그런 논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글을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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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님의 지적에 동감이에요. 사실 '신유물론 계열' -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 신유물론, 행위적 실재론, 생기적 유물론 등등 여러 이름과 다양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이런 흐름은 그 이름의 다양성만큼이나 주장하는 바의 차이도 조금씩 있죠. 그래서 이들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비판하면 일반화의 오류가 생길 수도 있어서 조금 망설여지지만, 대체적으로 이러한 입장들은 사용하는 개념들을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엄밀한 논리를 제시하는 것도 부족해 보이고, 자신의 견해를 요연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들을 이해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까다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 까다로움이 이론의 치밀함에 따른 것이거나 주제가 고도로 전문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금방 언급한 사정이 놓여 있기 때문이라면, 이론으로서는 참 문제인 것이겠죠.

표상주의와 관련해서도 표상주의의 의미라고 제시하는 것이 논자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너무 넓거나 모호합니다. 따라서 표상주의의 의미로 '표상주의1'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표상주의2'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표상주의3'에 대해서는 조건부로 동의할 수도 있겠죠. 사정이 이러니, 이 계열의 학자들 중 표상주의를 '표상주의1'로 이해하는 사람이 하이데거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표상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해도 '표상주의2'의 입장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게다가 표상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논거 또한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고, 선언이나 은유적 형식, 어떤 내러티브 안에 위치시키는 방식, 혹은 순환논리적 구조를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위에 @YOUN 님의 말씀처럼 그런 비판의 정확한 논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 같습니다. 이외에도 신유물론 계열의 주장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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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까스로-있음』과 Barad의 논문 모두 끝까지 읽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성급하게 글을 쓴 것 같네요. 두 분 모두 좋은 의견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FrancesYates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Barad의 비판을

로 이해하고, 김홍중 교수님이 그러한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고 보면 앞의 서술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등을 그렇게 해석하는 게 정당한지는 별도의 철학적 문제일 것입니다.

여전히 책을 끝까지 읽은 상태는 아니지만, 저는 이 대목을 일종의 시대 진단처럼 읽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이 언어, 담론, 사회적 구조 등에 주목해 왔다면, 기후변화, 방사능 오염, 감염병과 같은 '인류세'의 문제는 (기존 인문사회과학이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비인간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라투르가 주목한 것은 계급 투쟁이나 이데올로기의 충돌(맑스)이 아니며, 기계적 연대나 유기적 연대(뒤르켐)도 아니다. 라투르는 훨씬 더 물질적이고 생리적이고 미생물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연대의 형식을 발견했다. 인간-너머의 행위 능력과 사회-너머의 사회성이 그것이다. ANT는 생명, 심리, 사회의 분리선을 가로지르는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를 찾아낸다. 신체와 심리와 사회는 횡단적 연결선들로 관통되고 있다. 이 연결선들을 정확히 찾아낼 때 한 사회의 경계가 비로소 명확히 드러난다. 라투르는 사회학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포스트휴머니즘(세균의 행위 능력을 인정하고 이를 고려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감행해야 하는 과제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다.

김홍중, 『가까스로-있음』 (이음, 2025), 160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YOUN 님께서 지적하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 철학자들에게 이러한 비판을 귀속하는 것이 온당한지부터 의문이기도 하고요. 다만 약간 층위가 다른 서술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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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댓글을 깊이 읽고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Paterson 님. 새로이 덧붙여 주신 댓글 내용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문제가 된 대목을 '시대진단'의 취지로 읽는 것에 공감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직면하지 못한 새로운 인류세의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해 "(기존 인문사회과학이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비인간의 연결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이론이 요청된다는 것'과 그 때문에 '어떤 특정 이론이 당연히 정당하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이 두 차원의 문제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성이 이론의 논리성 및 타당성, 정당성 등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진 신유물론 계열에 다양한 '여러 이론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론의 필요성이 이론을 한 방향으로만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의 사례일 수 있습니다.

인류세의 생태적 문제에 있어서도 생태맑시즘, ANT, 지구시스템과학에 근거한 이론, 차크라바르티의 역사이론, 원주민의 존재를 고려하는 이론, 행위적 실재론 등의 이른바 신유물론류의 이론들 혹은 다른 대체적 이론들이 고려되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 이론들 모두가 '인류세의 문제를 위해 요청되는 이론들'이라고 해도, 결국 다시 이론의 논리성 및 타당성, 정당성이라는 맥락을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러한 논의는 @Paterson 님의 의견을 특정한 식으로 미루어 전제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논의의 지형을 고려하여 개인적인 의견을 조금 전개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깊이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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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Yates 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또 동의합니다.

다소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입니다만, 라투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ㅎㅎ) ANT를 조금 나이브하게 변호해 보자면, 라투르는 오히려 데이빗슨이나 로티와 꽤 가까운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궁극적인 관심사는 상당히 다르지만요. 제가 이를 논증할 능력은 없지만, Joseph Rouse가 『Engaging Science』와 『How Scientific Practices Matter』에서 이들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어 보려는 책이기도 하고요.

라투르는 ANT를 '이론'이라기보다, 구조를 전제하지 않은 채 행위자들을 따라가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행위소'나 '비인간 행위성' 역시 특정한 형이상학을 선언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기술을 위한 어휘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라투르에게 행위성이란 다른 행위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판도라의 희망』에서는 과속방지턱도 운전자가 속도를 줄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행위성을 갖는다고 말하죠.

그래서 신유물론 쪽에서 라투르를 일종의 유물론자나 적극적인 형이상학자로 읽는 것이 제게는 조금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의 어휘나 표현이 상당히 형이상학적으로 들리긴 하지만요. 이러한 주제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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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브뤼노 라투르에 많은 관심이 있던 차에, @Paterson 선생님의 고견을 들을 수 있어서 기쁘네요. 저도 ANT가 '이론'이라기보다 '기술(description)'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라투르는 물질성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 신유물론 계열의 이론들과 결이 다른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여요. 사실 라투르는 신유물론 계열의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오래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했으니, 그를 신유물론 계열의 학자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여러 신유물론자들이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죠. 신유물론자들은 라투르를 일종의 극복 대상으로 삼는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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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로티는 라투르를 자신이 선호하는 '비트겐슈타인 이후 언어철학'과 '쿤 이후 과학철학'의 계보에 올려놓습니다.

Post-Wittgensteinian Anglophone philosophy of language, of the sort found in Putnam, Davidson, and Brandom, has collaborated with post-Kuhnian philosophy of science, of the sort found in Latour, Hacking, and Fine. The result of this collaboration has been a blurring of the lines between the sciences and the humanities, and an attempt to make Snow’s techie-fuzzie controversy seem as quaint as the nineteenth-century debate over the age of the earth.

R. Rorty, “Being That Can Be Understood Is Language”, Gadamer’s Repercussions: Reconsidering Philosophical Hermeneutics, B. Krajewski(ed.), Berkeley/Los Angeles/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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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erson 님의 말씀대로 라투르와 데이비슨 사이에도 유사한 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Rorty는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들 중에 이 두 사람을 포함시키며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진 플라톤주의적) 이원론에 대해 라투르와 데이비슨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언급하지요.

The gap between so-called 'analytic' and so-called 'Continental' philosophy shows no signs of being bridged. This seems to me a pity, because I think that the best works being done in these two traditions overlaps to an important extent. In this essay I shall try to sketch a way of looking at things which is common to the philosophers I most admire on both sides of the gap.
The quickest way of expressing this commonality is to say that philosophers as diverse as William James and Friedrich Nietzsche, Donald Davidson and Jacques Derrida, Hilary Putnam and Bruno Latour, John Dewey and Michel Foucault, are antidualists. (Philosophy and Social Hope, Richard Rorty, 1999)

여기서 비이원론자(antidualist)라는 표현은 어떤 이분법적 사고, 즉 참과 거짓 혹은 정신과 물질 같은 것의 구분을 모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로티의 문맥상 플라톤주의적 이원론이라는 특정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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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쪽을 잘은 모르지만, '신유물론'이라는 호칭이 붙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보통 자연주의적, 객관적 실재론과는 대립하는 것 같았습니다. 외부 세계는 우리의 순전한 구성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발견되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도 아닙니다. 사물들은 우리의 인식에 어떤 힘을 미치고, 또한 우리가 그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면서 상호적인 인식이 만들어진다는 입장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들의 실재론은 표상주의적 요소도 갖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윅스퀼이나 들뢰즈가 그런 입장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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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신유물론 계열의 이론이 대체로 자연주의적, 실재론적 견해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리 틀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물질을 인간과 독립적으로 능동적이고 활성화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자연주의'라도 물질을 죽은 것으로 환원시키는 기계론적인 견해는 배척하려 할 것입니다. @edg00 님께서 "'신유물론'이라는 호칭이 붙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보통 자연주의적, 객관적 실재론과는 대립하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자연주의에도 여러 경향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강한 환원론으로 기울어진 자연주의는 배척하되, '비환원적 자연주의'는 지향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명칭 자체가 시사하는 것처럼, 대체로 신유물론 계열의 이론들은 실재론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실재론'의 의미의 스펙트럼을 고려해야 할 텐데요, 객관적 실재론은 거부하되 '관계적 실재론'은 대체로 인정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레이엄 하먼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사변적 실재론"은 신유물론과는 결이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좀 복잡하네요)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실재론이 가진 '관계론'적 특성을 대상과 표상의 관계에로 확장하면 신유물론자들의 실재론이 표상주의적 요소도 가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제 생각은 다시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윅스킬이 이런 입장인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들뢰즈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적어도 제가 알기로 들뢰즈는 반표상주의자로서, 신유물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도 그들 역시 들뢰즈와 유사하게 표상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의 주장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차이'가 실재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이미 주어진 동일한 것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에 대한 거부 - 표상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지요.

정리해 보면, (저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주의'와 '실재론'도 여러 경향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좀 더 정밀한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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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단어를 잘못 썼는데, 표상주의가 아니라 구성주의를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인식이 투명하게 사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이 구성된다는 의미에서요. 다만 그 인식을 구성하는 게 인간 뿐만이 아닌데, 사물 또한 능동적으로 신호를 보내며 인식에 관여한다는 보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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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표상주의'를 '구성주의'로 대체하고 @edg00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구성주의를

"인간의 인식이 투명하게 사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이 구성된다는 의미"

로 이해한다면, 신유물론 계열의 이론들은 구성주의와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구성주의'의 일반적 의미를 고려할 때는, 사물과의 관계보다 "인식주체의 조건과 활동을 통해 구성"이 이루어지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의미의 '구성주의'는 사실상 '관계적 존재론'에 근접하는 것 같습니다. (혹은 '관계적 존재론'이나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캐런 바라드의 견해를 보자면, 사물이 이미 존재하는 다른 사물과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는 식으로 관계가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작용(intra-action)' 내에서 이미 얽혀있는 사물들의 속성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구성주의는 인식론의 이론이고 관계적 존재론은 존재론인데, 어째서 인식론이 존재론의 용어로 바뀌었는지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거칠게 말해 인식이라는 행동이 바로 존재론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캐런 바라드가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중슬릿 실험은 관찰 여부에 따라 실험결과가 변할 수 있습니다. 즉, 빛의 입자성 혹은 파동성을 반영하는 식으로 실험 결과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데요, 이는 '존재론'적 상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주의할 것은 마음 안의 인식만으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서 관찰이 필요하고, 관찰이라는 물리적 행동의 개입으로 물질적 관계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유물론 계열 중에 대표적으로 정밀하게 이에 관련된 이론을 구성하는 바라드에 의할 때) 인식론과 존재론은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모두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드가 자신의 이론을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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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바라드는 인식 주체와 사물의 역동적인 관계 자체가 실재에 기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 같군요. 실재는 그 관계 자체이지, (그것이 어떤 불가해한 형태든) 인간과 분리되어 따로 떨어진 사물은 없다고 보는 거라면 바라드는 상당히 강력한 입장인 것 같습니다. 메를로퐁티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러나 바라드의 그런 세계관이 다른 신유물론자들에게도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