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과학기술학에 관심이 있어서 브루노 라투르의 저작을 몇 권 읽어 보았으나 『Reassembling the Social』 같은 '사회학자 라투르'는 아직 국역본이 없습니다. 대신 김홍중 교수님의 저서 『가까스로-있음』을 읽고 있는데, 초장부터 꽤 당황스러운 대목이 나오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20세기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인식[Heidegger, 1990: 67],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 게임’[Wittgenstein, 1978: 11], 라캉(Jacques Lacan)의 ‘상징계’,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랑그’,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 자본’,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텍스트’에 부여된 중심성은 모두, 실재와 인식 사이에 ‘언어’가 특권적 심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를 풍미했던 이 “언어적 전환, 기호적 전환, 해석적 전환, 문화적 전환”은 모두 언어에 과도한 힘을 부여하는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의 여러 버전들에 다름 아니었다[Barad, 2003]. 하지만, 인류세의 도래 속에서 우리는 언어의 자율성, 구성력, 매개 능력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점점 더 광폭해지는 기상 재난들 앞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을 언어에 의해 상징화되는 수동적 대상으로 보지 못한다. 가이아가 적대적 힘으로 귀환하는 이른바 “가이아의 침입(intrusion)” 상황에서[Stengers, 2009: 50], 자연은 인간의 상징계에 포섭되고, 구성되고, 종합되고, 이해되고, 도식화되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먼지, 독성 물질, 이산화탄소, 플라스틱 알갱이들, 구름, 바람 등은 기표 작용의 그물 사이로 새어 나와 활동력과 파괴력을 발휘한다. 원전에서 유출된 세슘에 오염된 물고기의 물질성, 즉 그것을 섭취한 생명의 신체에 가져올 치명적인 변용 가능성은 언어의 포섭력을 한껏 초과한다.
인류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던 상징의 두꺼운 작동 영역(문화, 언어, 텍스트, 의식, 표상)을 허물었다. 물질의 마성적이고 능동적인 역량은 이제 일상적 직관과 경험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구멍 난 상징계를 뚫고 엄습해 오는 물질적 실재와 인간(생명)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뒤엉켜 있음을 실감한다. “상징적인 것은 세계를 상실한 사람들의 마술”[Latour, 1988: 187]이라는 라투르(Bruno Latour)의 신랄한 지적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즉, 세계의 물질성이 일상적으로 감각되기에 이른 인류세에 상징계의 권위는 환멸적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제 우리는 자연/사회, 인간/비인간 구분의 허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류세의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문화의 영역에 유폐된 ‘구조의 수인(囚人)’이 아니다. 인간은 비인간 행위자들과 결합하여 하이브리드들을 제작해 왔고, 자연과 사회를 역동적으로 뒤섞어 버렸다. 모더니티란 이런 방식으로 구축된 강력한 행위자-네트워크, 즉 탄소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한 시기다.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명백히 근대인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직접적 결과물이 바로 인류세다[라투르, 2009].
김홍중, 『가까스로-있음』 (이음, 2025), 26–28쪽.
우선 여기서 인용된 Barad의 논문에서 '표상주의'를 어떤 뜻으로 쓰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래 번역에서는 representationalism을 '재현주의'로 옮겼지만, 김홍중 교수님이 말하는 '표상주의'와 같은 단어입니다.
Liberal social theories and theories of scientific knowledge alike owe much
to the idea that the world is composed of individuals—presumed to exist before the law, or the discovery of the law—awaiting/inviting represen-
tation. The idea that beings exist as individuals with inherent attributes,
anterior to their representation, is a metaphysical presupposition that un-
derlies the belief in political, linguistic, and epistemological forms of rep-
resentationalism. Or, to put the point the other way around, represen-
tationalism is the belief in the ontological distinction between
representations and that which they purport to represent; in particular,
that which is represented is held to be independent of all practices of
representing. That is, there are assumed to be two distinct and indepen-
dent kinds of entities—representations and entities to be represented. The
system of representation is sometimes explicitly theorized in terms of a
tripartite arrangement. For example, in addition to knowledge (i.e., rep-
resentations), on the one hand, and the known (i.e., that which is pur-
portedly represented), on the other, the existence of a knower (i.e., some-
one who does the representing) is sometimes made explicit. When this
happens it becomes clear that representations serve a mediating function
between independently existing entities. This taken-for-granted ontolog-
ical gap generates questions of the accuracy of representations. For ex-
ample, does scientific knowledge accurately represent an independently
existing reality? Does language accurately represent its referent? Does a
given political representative, legal counsel, or piece of legislation accu-
rately represent the interests of the people allegedly represented?자유주의적 사회이론과 과학적 지식에 관한 이론은 모두, 세계가 개별자들(individuals)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개별자들은 법이 존재하기 이전에, 혹은 법칙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며, 재현되기를 기다리거나 재현을 요청하는 존재들이다. 존재자들이 그 재현에 선행하여, 고유한 속성을 지닌 개별자들로서 존재한다는 관념은 정치적·언어적·인식론적 형태의 재현주의에 대한 믿음의 밑바탕을 이루는 형이상학적 전제이다. 혹은 이 논점을 반대 방향에서 표현하자면, 재현주의란 재현과 그것이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대상 사이에 존재론적 구별이 있다는 믿음이다. 특히 재현되는 것은 모든 재현의 실천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다시 말해, 서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두 종류의 존재자, 즉 재현과 재현될 존재자가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재현의 체계는 때때로 명시적으로 삼항적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론화된다. 예를 들어 한편에는 지식, 즉 재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알려지는 것, 즉 재현된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아는 자(knower), 즉 재현을 수행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명시적으로 추가되기도 한다. 이 세 번째 항이 명시될 때, 재현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들 사이에서 매개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존재론적 간극은 재현의 정확성에 관한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지식은 그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특정한 정치적 대표자, 법률 대리인, 혹은 하나의 법률은 자신이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대표하는가?
(ChatGPT 번역)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28, no. 3 (Spring 2003): 801–831. DOI: 10.1086/345321
원문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운데, 김홍중 교수님이 거론하는 철학자들, 적어도 하이데거,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는 오히려 (Barad가 비판하는) 표상주의를 비판하는 데 주력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Barad가 표상주의를 공유하는 입장으로 지목하는 것은 'social constructivist'와 'traditional realist'이고, 표상주의를 비판한 인물로는 푸코, 버틀러, 해킹, 라우스 등을 거론합니다. 오스틴과 데리다 역시 수행성(performative) 개념의 계보에 있고요. (그럼에도 '사회구성주의'가 어떤 인물들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