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호네트의 『자유의 권리』가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호네트 본인이 스스로 ‘대작‘이라고 지칭한 책이라는데,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됩니다!
현대 정의론의 새로운 얼개를 제시하다
구체적 사회 현실에서 캐내는 ‘자유’와 ‘정의’의 원칙
21세기 버전으로 되살려낸 헤겔 『법철학』의 정신오늘날 ‘자유’는 오염되었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서, 그리고 어떤 간섭도 없는 시장에서의 자유라는 요구와 함께, 자유라는 이상은 이제 상호 공존과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구호로 바뀌었다. 세계적인 사회철학자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 제3세대 대표자로 꼽히는 악셀 호네트는 이 책에서 이미 때가 묻어버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고자 한다. 현대 사회철학의 명저 『인정투쟁』(1992) 이후 20년 만에 다시 쓴 이 책에서, 그는 자유를 중심으로 현대 정의론의 틀을 다시 짜려는 야심찬 기획을 보여준다.
그러나 왜 하필 자유인가? 평등 혹은 공정이야말로 현대 정의론의 과제 아닌가? 호네트는 평등이란 “자유의 성취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똑같이 해당될 때”를 가리키므로 역시 자유의 이념 아래 포섭된다고 본다. 근대 이후 모든 사회적, 정치적 기획은 자유의 실현을 목표로 했고, 자유는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이익과 필요에 고루 부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라는 사회 정의론의 과제와 뗄 수 없는 이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호네트는 자유의 다양한 측면을 소극적 자유, 반성적 자유, 사회적 자유로 정리함으로써 근대 정치철학의 역사를 다시 쓴다. 근대적 자유의 기틀을 정초하려 했던 헤겔 『법철학』의 정신과 방법을 본받아 개인적 영역, 시장경제, 민주적 법치국가의 세 가지 ‘인륜적’ 영역에서 21세기 자유의 이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저자 스스로 “필생의 역작”이라 부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이상이 조화된 사회 정의로서의 자유 이념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 21세기에 다시 쓰는 헤겔 『법철학』
이 책 『자유의 권리』의 핵심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호네트는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자유의 형태를 소극적 자유, 반성적 자유, 사회적 자유로 구분하고, 앞의 두 자유가 개인에게 사회적 세계로부터 물러날 수 있는 권리와 자기 결정의 가능성을 보장한다면, 사회적 자유는 다시 개인을 사회적 장으로 돌려놓아 타인과의 상호인정 속에서 자유를 실현하게 하는 완성된 형태의 자유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의 가능성을 정초하기 위해 호네트가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헤겔 ‘법철학’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헤겔을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 헤겔이 1820/21년 『법철학 요강』에서 제시한 인륜성의 구조(개인의 추상적 권리(홉스)에서 시작해 도덕적 반성(칸트)을 거쳐 인륜성에 이르는 자유의 발전 형태)를 이후 200년 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현대화하는 데 있다. 즉 『자유의 권리』는 헤겔 『법철학』을 21세기의 조건에서 다시 쓴 새로운 ‘법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호네트는 근대 정치철학의 다양한 시도들을 당대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일일이 재검토한다. 그 범위는 홉스, 로크, 루소, 칸트,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에서 시작하여 에밀 뒤르켐, 존 듀이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이들의 논의를 통합하고 또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저자가 핵심적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규범적 재구성’이다. 규범적 재구성이란 첫째, 정의의 규범적 기준을 현실 사회 바깥의 추상적 원리에서 가져오는 대신 현존하는 사회에 이미 내재된 가치와 규범에서 찾아내고, 둘째, 그 가치가 구체적인 제도와 사회적 관행 안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며, 셋째, 그러한 제도와 관행을 단순히 주어진 사실로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 연관성에 비추어 현실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사회 변혁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호네트는 친구, 연인, 가족과 같은 개인적 관계, 시장경제와 노동, 국가 차원의 민주적 공론장이라는 현대 사회의 세 가지 핵심 영역을 분석하고, 그 각각이 자유를 어떻게 현실화하고 있으며 또 왜곡하고 있는지 짚는다. 따라서 이 책은 자유에 관한 철학적 이론인 동시에, 자유가 명실상부하게 실현되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와 제도, 그리고 민주적 인륜성이 필요한지를 탐구하는 현대 정치철학의 거대한 재구성이라 할 만하다.
■ 사회 정의론으로서 ‘자유’ 이념의 재구성
홉스 식의 소극적 자유와 칸트 식의 반성적이고 도덕적인 자유를 넘어 사회적 자유의 가능성을 정초하려고 한 점에서, 이 책은 존 롤스 등의 정치철학에서 칸트주의가 차지해온 중심적 위치를 넘어 헤겔적 전통을 다시 세우려는 야심찬 시도이기도 하다. 칸트 이후 롤스에게까지 이어지는 정의론의 전통이 보편적으로 타당한 정의의 원칙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선험적 규범이론에 머물렀다면, 호네트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우리가 이미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가치가 제도 안에 어떤 형태로 구현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의 권리』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연대 사이의 오랜 대립을 새롭게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개인의 고립된 선택으로 축소하지 않고, 사회적 공동체를 중시하면서도 개인을 공동체의 단순한 구성원으로 환원하지 않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호네트가 전작 『인정투쟁』에서 제시한 ‘상호인정’의 이념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자유에서 타인은 나의 자유와 맞서는 한계가 아니라 나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즉 자유는 “상호인정의 관계를 통해 함께 실현되는 사회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사회적 자유의 가능성을 세 가지 영역에서 모색한다.
■ 가족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민주주의로
호네트는 이 책에서 헤겔 『법철학』이 제시한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세 가지 ‘인륜’(Sittlichkeit)의 구조를 참조하여, 이에 비견되는 현대 사회의 핵심 영역들에서 자유의 실현 정도와 가능성을 분석한다.
첫 번째 영역은 개인적 관계 영역이다. 친구, 연인, 가족은 단순히 사적인 삶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이 타인의 인정과 배려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고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적 조건이다. 따라서 가족 관계의 변화, 성 역할의 변화, 동성 간의 결합 등 새로운 친밀성의 형태는 단순히 사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자유의 사회적 조건이 새롭게 갖춰지고 있다는 중요한 단서다.
두 번째 영역은 시장경제 영역이다. 여기서 호네트의 분석은 암울하다. 오늘날 시장 영역을 지배하는 시장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자유의 실현을 가장 방해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이 무한 경쟁과 이윤 추구로 착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 영역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호네트는 시장 자체가 원래부터 무제한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 영역은 아니라고 본다. 시장이 개인들의 필요 충족이라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일정한 상호인정과 협력의 규범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는 단순히 상품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과 노동을 통해 사회적 분업에 참여하고, 그 기여를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경험한다. 소비시장에서도 소비자와 생산자는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관계를 전제로 해야 한다. 시장이 사회적 자유의 제도로 기능하려면 바로 이러한 상호성의 규범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호네트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하여 뒤르켐, 칼 폴라니, E. P. 톰슨 등으로 이어지는 ‘도덕경제론’의 전통을 되살린다.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와 20세기 코포라티즘 및 조직자본주의의 경험을 살려, 시장적 행위가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사회관계 안에 착근된 경제를 규범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 ‘민주적 공론장’의 영역과 위기에 처한 사회적 자유
세 번째 영역은 민주적 의지 형성의 정치적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자유의 권리』의 정치철학적 논의는 절정에 이른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이유를 제시하고, 논쟁하고, 공동의 문제에 대한 판단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때 호네트는 헤겔만이 아니라 존 듀이와 하버마스의 통찰을 끌어들인다. 듀이가 말한 민주적 ‘공중’(Public)과 하버마스의 ‘담론적 공간’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소통하고 지성을 사용하는 시민들의 집합이다. 여기서 국가와 민주적 공론장은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가진다. 민주적 의지 형성은 민주적 법치국가 성립의 전제조건이고, 민주적 법치국가는 다시 민주적 공론장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환경이자 전제조건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친밀성으로 맺어진 개인적 관계 영역, 시장 행위의 상호보완적 영역, 그리고 민주적 법치국가의 영역 역시 서로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민주적 공론장의 존립은 개인들의 물질적, 관계적 조건이 확보되고 시장의 안정성이 뒷받침할 때 가능하고, 민주적 공론장의 제도는 다시 다른 두 영역의 오작동을 막는 규제적 원리로 작용한다. 그러나 호네트의 현재 진단은 상당히 어둡다.
개인적 관계 영역에서는 직업상의 성과 압력, 노동시장의 불안정이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여유를 빼앗는다. 시장 자체에서는 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사회적 자유의 조건을 침식한다. 비용 절감과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노동 조건을 후퇴시킨 기업들로 인해 노동자는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시장에 맞추라는 압박과 노동 불안정에 시달리게 되었고, 소비자는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라기보다는 기업이 만들어낸 욕망과 광고에 포획된 존재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심각하다. 공론장 형성의 중심인 언론이 이윤 추구 기업으로 변화하면서 공적 토론보다 오락과 자극이 우선시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치적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감각을 잃고 ‘무관심’(apathy)에 빠진 상태이다. 이처럼 민주적 의지 형성의 공간이 부실해지면, 국가 역시 시민의 보편적 의지를 반영하기보다 로비와 조직화된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게 된다.
■ 『자유의 권리』가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들
이 책의 특징은 모든 문제에 완성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 철학의 탁월한 해설자이자 명망 있는 사회철학자 중의 한 명인 테리 핀카드는, 호네트가 이 책에서 매우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호네트는 단순히 자유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인간 행위의 일반적인 구조를 설명하고, 근대의 역사적 발전을 재구성하며, 가족, 시장, 민주주의의 제도적 변화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규범적 원리, 즉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관점 아래 통합하고자 한다.
확실히 호네트는 이 책에서 단지 사회적 자유를 자유의 개념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 정의의 규범적 척도로 삼고, 그 자유가 실현되는 제도들을 분석함으로써 인정이론과 사회이론과 정의론을 하나의 틀 안에서 결합하고자 한다. 정의로운 사회란 사회적 자유가 제대로 실현되는 사회이며, 사회적 자유는 상호인정의 관계가 제도화된 공간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 권리』가 다루는 자유의 횡단면과 종단면이 방대하고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고, 또한 호네트가 바라는 자유의 실현 과정이 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네트의 정의론은 특히 혐오의 시대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인의 다양한 개성과 문화적 배경을 인정하면서도, 민주적 공론장의 유지에 기여하는 공통의 역할을 서로에게서 발견할 때, 공론장을 와해시키는 극단의 정치적 대립이나 소수자 차별의 심각한 위험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상호 인정의 원칙 아래 자유가 모든 사회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임을 인식할 때, 진정한 사회적 자유와 세계 시민적 이상이 우리에게도 실현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