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 번역본과 키르케고르 연구소에 대하여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철학의 부스러기』 새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인문고전' 시리즈의 제4권으로 나왔네요. '인문고전' 시리즈의 표지 디자인이 통일되어 있다 보니, 다른 키르케고르 저작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상당히 예쁩니다. 저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훈련』 상권과 『모든 것을 의심하라』를 구매하지 못하였는데, 이 저작들도 얼른 모아서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네요. 현재 키르케고르 연구소에서 『불안의 개념』, 『아이러니의 개념』,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번역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데, 그 책들도 나란히 놓고 읽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키르케고르의 번역본은 이미 국내에도 꽤 있는 편이지만,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은 두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이 영어 번역본이나 독일어 번역본에 근거한 중역본이었던 것과 달리,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들은 키르케고르 덴마크어 전집에 근거한 원역본이라는 점입니다.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설립 멤버 중 한 분이신 이창우 목사님이 키르케고르 전공자이시고 덴마크어도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이시다 보니, 번역 작업마다 덴마크어 전집과 영어 번역본을 함께 대조하는 과정을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 작업은 (a) 덴마크어 원본을 AI로 초벌 번역한 뒤에, (b) 그 내용을 키르케고르 전공자분들이 Howard V. Hong과 Edna H. Hong의 영어 번역본과 비교하면서 수정하고, (c) 그 내용을 이창우 목사님이 다시 전체적으로 덴마크어 원문과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덴마크어를 완전히 능숙하게 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을 위해 덴마크어를 새롭게 공부하시면서 참여하는 분들도 계실 뿐더러, 이창우 목사님도 덴마크어를 아주 자유롭게 구사하시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적어도 국내에서 그동안 이루어진 키르케고르 번역 작업에 비교해 보았을 때, 키르케고르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번역 작업은 상당히 꼼꼼한 편입니다. 그동안 키르케고르 덴마크어 원전 번역 자체가 시도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덴마크어로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를 연구할 수 있는 분들이 키르케고르 전공자들 중에서도 많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국내에 덴마크어를 공부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키르케고르 연구소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뽑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윤덕영 교수님처럼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키르케고르 전공자분들과 박사과정생분들이 번역 작업에 함께 참여하시는 만큼,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은 적어도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신뢰하고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들이 덴마크어 전집판에 있는 모든 각주들와 보충 자료들까지도 한국어로 빠짐 없이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펜하겐 대학교의 키르케고르 연구 센터에서 편집한 키르케고르 전집(SKS Table of Contents – Copenhagen University)에는 상당한 분량의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은 키르케고르가 본문을 집필할 당시에 썼던 일기나 참고했던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어 번역본들은 키르케고르의 텍스트에서 본문만을 번역하였을 뿐,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까지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본문만으로도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상당 부분 알 수 있겠지만,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이 종종 본문의 난해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뿐더러, 철학이나 신학 전공자들에게는 심화된 탐구를 위한 통찰까지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들에는 그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이 다수의 번역자분들의 엄청난 열정에 힘입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종종 한국어 번역본만의 새로운 해설들도 추가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처음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을 보고서 정말 놀랐던 것은 바로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의 꼼꼼함과 방대함이었습니다.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 같은 자잘한 내용들을 번역하는 것은 본문을 번역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수고로운 작업이었을 텐데도, 번역자분들이 그 수고로운 작업을 기꺼이 감내해주신 덕분에, 키르케고르 연구소의 번역본들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나 연구자의 입장에서나 상당히 가치 있는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일반 독자는 본문을 중심으로 책을 읽으면서 종종 난해한 부분을 만날 때마다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을 참고하면 되고, 연구자는 각주들과 보충 자료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책을 읽으면서 본문의 내용을 어떠한 방식으로 확장하면 좋을지 고민하면 되니 말입니다.

저도 박사 학위 논문을 통과한 이후에 키르케고르 연구소 멤버로 들어가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키르케고르 연구소는 정말 엄청난 열정으로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솔직히, 덴마크어 원본을 공부하면서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를 각주들과 보충 자료까지 빠짐 없이 번역해 놓는다고 해서, 국내에서 학술적으로 크게 인정받기도 힘들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도 힘듭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같은 대중적인 철학자들에 비하면,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아주 폭넓게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연구소에 참여하신 분들은 이 척박한 한국에 키르케고르를 매개로 그리스도교 사상과 그리스도교 철학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종교적' 사명감으로 가득하신 분들이다 보니, 명성도 되지 않고 돈도 되지 않는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아낌 없이 쏟아 부으셔서 별다른 외부의 지원 없이도 지금까지 놀라운 수준의 성과를 내놓고 계셨습니다. 연구소 설립 3년만에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저작들은 4권, 그리스도 강화집들은 8권이나 번역되었고, 그 이외에도 키르케고르 연구서들이 출간되거나 번역되기도 하였고, 각종 컨퍼런스와 독서 캠프도 진행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마 저도 『불안의 개념』과 『아이러니의 개념』 번역 작업에는 부족한 힘을 보태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요즘 틈 날때마다 기초 덴마크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덴마크어는 정말로 키르케고르 텍스트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제 인생에서 딱히 배울 이유가 없는 언어이지만, 명성도 되지 않고 돈도 되지 않는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붇는 것이 꽤나 낭만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저도 다른 분들처럼 열심히 번역 작업에 참여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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