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선생님이 맥대니얼 글을 올리신 김에,
짧게 적어봅니다.
존재 다원주의에 대한 짧은 반론
존재 다원주의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gical pluralism)’라는 입장이 있다. 나는 이를 ‘존재 다원주의(ontic pluralism)’로 일컫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이 입장은 존재론의 다수성을 말한다기보다는 존재 개념의 다수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존재 다원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입장을 중핵으로 삼는 듯하다:
존재 다수성
가장 근본적인 언어에서, ‘X가 존재한다’의 의미는 ‘X’에 대해 의도된 범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이 논제가 거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제약된 양화 문장 이해에 대한 도전
일단 통상적인 이해를 따라, 존재 다수성 논제가 ‘근본적인 언어의 존재 진술은 제약된 존재 양화 문장으로써 이루어진다’라고 해 보자. 이때 ‘제약된 존재 양화 문장’이란 다음 꼴의 논리식들을 말하는데,
(∃x: A)𝜑
표준적인 의미론에 따를 때 그 진리 조건은 다음과 같다:
대상 도메인 D의 부분 집합 D(A)에 대해, 어떤 a ∈ D(A)가 𝜑를 만족한다. 즉, 𝜑[x := a]가 참이다.
그런데 이는,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 ∃에 관한, 다음 문장의 진리 조건과 동일하다:
∃x(Ax ∧ 𝜑)
이 문장을 읽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Ax와 𝜑를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 존재한다’ 정도일 텐데,
이때의 ‘존재한다’는 범주와 무관히 항상적인 의미를 갖는 낱말이어야 할 것 같다.
이는 근본적인 언어라 하더라도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포함하기만 한다면 훨씬 일반적인 층위에서 존재 진술을 다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원론자들에게는 슬픈 일인데, 이는 존재의 개념이 단일하다는 결론을 낳기 때문이다.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포기하기
자연스러운 대응은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록 관행에 따라 ‘∃x: A’ 따위의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는, 가령 ‘∃x: B’와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는 독립적인 논리 연산자라는 것이다. 즉, 애초에 다원론적 양화사란 ‘제약된’ 것이 아니므로, 위와 같은 문법적인 (이를테면) 하강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다원론자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의의 범주 낱말 X에 대해 다음의 두 추론 규칙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도입 Xa, 𝜑(a) ⊢ (∃x: X)𝜑(x)
제거 (∃x: X)𝜑, (Xa ∧ 𝜑[a/x]) ⊃ 𝜓 ⊢ 𝜓
그런데 어떠한 X에 대해서도 위의 두 규칙이 준용된다면, 이 추론을 타당하게 만드는 어떤 모형에서건 다원론자의 존재 양화 문장의 의미는 각 범주로 제약된 존재 양화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아진다.
논리적 특이성에 호소하기
이에 대해, 다원론자는 도입과 제거 규칙을 다원론적 양화사들이 공통되게 준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입과 제거 규칙 외의 논리적 특이성이 있으므로 양화사들은 서로 구분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사건 범주 E와 허구 범주 F에 대해,
(∃x: E)(x가 일어났다) ⊢ (∃x: E)(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는 성립하지만
(∃x: F)(x가 일어났다) ⊢ (∃x: F)(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는 성립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존재 다원론 없이도, 나아가 존재 다원론이 가정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잘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임의의 사건에 대해, 그것이 일어났다면, 아무튼 임의의 사건이 있어서 그것이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사건이라면,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것이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즉, 애당초 의도된 근본 원리는 다음 꼴이어야 했다:
∀x(Ex ⊃ (x가 일어났다 ⊃ 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이 원리는 주장되었던 추론 규칙도 정당화하면서, 우리의 원래 직관을 가장 잘 설명한다.
나아가, 존재 다원주의는 다음의 주장이 왜 정당한지 설명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a가 존재하고 a가 물리적 범주에 속한다면, a는 물리적 시공간을 점유한다.
주어진 인식적 상황에서, 전건의 연언지 ‘a가 존재한다’는 a가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와 무관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원주의자는 다음의 대안적 번역을 고려할 수 있는데,
∃X((∃x: X)x=a ∧ Pa) ⊃ (a는 물리적 시공간을 점유한다)
여기에는 범주 변항 X가 무제약적으로 양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개별자는 무제약적 양화 범위에 없으면서 범주는 이에 있는 이유는 다원주의로부터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를 실질적 속성으로 보기
이제 다원론자는, 존재란 그 ‘정도’를 갖는 실질적 속성이므로 단지 어떤 대상이 어떤 존재 양화사의 범위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존재 여부를 가를 수 없다고, 따라서 존재를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와 술어로써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원주의자에 따르더라도, 존재자가 어떤 범주에 ‘특정 정도로’ 속하지는 않는다. 어떤 범주, 가령 ‘허구적임’이 특정 정도의 존재만을 해당 범주에 속하는 것들에 허용할 뿐이다.
즉, 𝛿(x)가 x가 존재하는 정도를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의 논리를 갖고 있다:
∀X∃d∀x(Xx ⊃ 𝛿(x) = d)
이를 위해 그 어떤 ‘존재의 양태’도 필요하지 않다. 범주와 표준 논리학만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존재 다원주의 없이도 존재 다원주의가 설명하려는 바들이 모두 설명된다.
결론
따라서 나는 존재 다원주의가 존재의 논리에 관한 어떤 그럴듯한 이론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결론내린다. 존재 다원주의는, 기껏해야 어떤 범주들이 어떤 함축을 갖는지 보여주는 데에서 그친다. 존재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실질적 존재 개념이란, 논리적 측면에서, 형식적 존재 개념과 범주 개념이 결합한 것에 다르지 않다. 그리고 콰인적 전통에 따라, 우리는 형식적 존재 개념을 가장 일반적인 존재 개념으로 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