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다원주의에 대한 짧은 반론

윤 선생님이 맥대니얼 글을 올리신 김에,

짧게 적어봅니다.


존재 다원주의에 대한 짧은 반론

존재 다원주의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gical pluralism)’라는 입장이 있다. 나는 이를 ‘존재 다원주의(ontic pluralism)’로 일컫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이 입장은 존재론의 다수성을 말한다기보다는 존재 개념의 다수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존재 다원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입장을 중핵으로 삼는 듯하다:

존재 다수성
가장 근본적인 언어에서, ‘X가 존재한다’의 의미는 ‘X’에 대해 의도된 범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이 논제가 거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제약된 양화 문장 이해에 대한 도전

일단 통상적인 이해를 따라, 존재 다수성 논제가 ‘근본적인 언어의 존재 진술은 제약된 존재 양화 문장으로써 이루어진다’라고 해 보자. 이때 ‘제약된 존재 양화 문장’이란 다음 꼴의 논리식들을 말하는데,

(∃x: A)𝜑

표준적인 의미론에 따를 때 그 진리 조건은 다음과 같다:

대상 도메인 D의 부분 집합 D(A)에 대해, 어떤 a ∈ D(A)가 𝜑를 만족한다. 즉, 𝜑[x := a]가 참이다.

그런데 이는,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 ∃에 관한, 다음 문장의 진리 조건과 동일하다:

∃x(Ax ∧ 𝜑)

이 문장을 읽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Ax와 𝜑를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 존재한다’ 정도일 텐데,
이때의 ‘존재한다’는 범주와 무관히 항상적인 의미를 갖는 낱말이어야 할 것 같다.

이는 근본적인 언어라 하더라도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포함하기만 한다면 훨씬 일반적인 층위에서 존재 진술을 다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원론자들에게는 슬픈 일인데, 이는 존재의 개념이 단일하다는 결론을 낳기 때문이다.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포기하기

자연스러운 대응은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를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록 관행에 따라 ‘∃x: A’ 따위의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는, 가령 ‘∃x: B’와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는 독립적인 논리 연산자라는 것이다. 즉, 애초에 다원론적 양화사란 ‘제약된’ 것이 아니므로, 위와 같은 문법적인 (이를테면) 하강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다원론자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의의 범주 낱말 X에 대해 다음의 두 추론 규칙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도입 Xa, 𝜑(a) ⊢ (∃x: X)𝜑(x)
제거 (∃x: X)𝜑, (Xa ∧ 𝜑[a/x]) ⊃ 𝜓 ⊢ 𝜓

그런데 어떠한 X에 대해서도 위의 두 규칙이 준용된다면, 이 추론을 타당하게 만드는 어떤 모형에서건 다원론자의 존재 양화 문장의 의미는 각 범주로 제약된 존재 양화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아진다.

논리적 특이성에 호소하기

이에 대해, 다원론자는 도입과 제거 규칙 다원론적 양화사들이 공통되게 준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입과 제거 규칙 외의 논리적 특이성이 있으므로 양화사들은 서로 구분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사건 범주 E와 허구 범주 F에 대해,

(∃x: E)(x가 일어났다) ⊢ (∃x: E)(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는 성립하지만

(∃x: F)(x가 일어났다) ⊢ (∃x: F)(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는 성립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존재 다원론 없이도, 나아가 존재 다원론이 가정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잘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임의의 사건에 대해, 그것이 일어났다면, 아무튼 임의의 사건이 있어서 그것이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사건이라면,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것이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즉, 애당초 의도된 근본 원리는 다음 꼴이어야 했다:

∀x(Ex ⊃ (x가 일어났다 ⊃ x가 물리적 시공간점을 점유한다))

이 원리는 주장되었던 추론 규칙도 정당화하면서, 우리의 원래 직관을 가장 잘 설명한다.

나아가, 존재 다원주의는 다음의 주장이 왜 정당한지 설명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a가 존재하고 a가 물리적 범주에 속한다면, a는 물리적 시공간을 점유한다.

주어진 인식적 상황에서, 전건의 연언지 ‘a가 존재한다’는 a가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와 무관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원주의자는 다음의 대안적 번역을 고려할 수 있는데,

∃X((∃x: X)x=a ∧ Pa) ⊃ (a는 물리적 시공간을 점유한다)

여기에는 범주 변항 X가 무제약적으로 양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개별자는 무제약적 양화 범위에 없으면서 범주는 이에 있는 이유는 다원주의로부터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를 실질적 속성으로 보기

이제 다원론자는, 존재란 그 ‘정도’를 갖는 실질적 속성이므로 단지 어떤 대상이 어떤 존재 양화사의 범위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존재 여부를 가를 수 없다고, 따라서 존재를 무제약적 존재 양화사와 술어로써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원주의자에 따르더라도, 존재자가 어떤 범주에 ‘특정 정도로’ 속하지는 않는다. 어떤 범주, 가령 ‘허구적임’이 특정 정도의 존재만을 해당 범주에 속하는 것들에 허용할 뿐이다.

즉, 𝛿(x)가 x가 존재하는 정도를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의 논리를 갖고 있다:

∀X∃d∀x(Xx ⊃ 𝛿(x) = d)

이를 위해 그 어떤 ‘존재의 양태’도 필요하지 않다. 범주와 표준 논리학만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존재 다원주의 없이도 존재 다원주의가 설명하려는 바들이 모두 설명된다.

결론

따라서 나는 존재 다원주의가 존재의 논리에 관한 어떤 그럴듯한 이론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결론내린다. 존재 다원주의는, 기껏해야 어떤 범주들이 어떤 함축을 갖는지 보여주는 데에서 그친다. 존재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실질적 존재 개념이란, 논리적 측면에서, 형식적 존재 개념과 범주 개념이 결합한 것에 다르지 않다. 그리고 콰인적 전통에 따라, 우리는 형식적 존재 개념을 가장 일반적인 존재 개념으로 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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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논증문에 감사드립니다.

반 인와겐과 사이더가 맥다니엘에 대해 동일한 맥락에서의 비판을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아직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 딱히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의견은 없지만, (a)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과연 '제약적 양화사'를 굳이 도입해야 하는지, 그리고 (b) 애초에 콰인이 존재론적 개입 기준에 대해 제시한 논의 자체가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러워하는 입장이긴 해요.

다만,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맥다니엘이 이미 나름대로의 대답을 The Fragmentation of Being, pp. 29-31에서 제시하고 있어요.

Recall the worry mentioned at the end of section 1.2. To keep things simple, consider a meta-ontological theory that recognizes two ways in which entities can exist: the way in which abstract objects exist and the way in which concrete objects exist. According to the account offered here, there are two fundamental semantically primitive restricted quantifiers, represented symbolically as “∃ax” and “∃cx”. Consider the domain of “∃ax.” We can introduce a special predicate, “Ax,” that objects satisfy if and only if they are members of this domain. Let “Dx” be a fundamental predicate that applies to some but not all entities within the domain of “∃ax”. Now consider the following two sentences:

(1) ∃ax Dx.
(2) ∃x (Ax & Dx).

The worry is that (1) and (2) are necessarily equivalent, and consequently seem to be equally good ways of expressing exactly the same facts about the world. In what respect is (1) a better sentence to assert than (2)? If there is no metaphysical difference between these two ways of speaking, then the hypothesis that there are ways of being is idle.

Let’s examine a parallel case. Recall the following definitions introduced to us by Nelson Goodman (1955):

x is grue = df. x is green and is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or is blue and is not examined before AD 3000.
x is bleen = df. x is blue and is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or is green and is not examined before AD 3000.

Although “is grue” and “is bleen” are intelligible, they are highly unnatural, whereas “is green” and “is blue” are in far better shape. Now consider a culture that speaks a language much like ours, except that this language lacks the color-vocabulary we have in our language. Let’s call this language the Gruesome Tongue (GT). GT has two semantically primitive predicates, “is grue*” and “is bleen*,” which are necessarily equivalent to “is grue” and “is bleen.” When speakers of GT first encounter us, they are bewildered by assertions that employ color-predicates.40 They ask us to define “is blue” and “is green,” but since these terms are semantically primitive in our language, we can’t do this. We point at things that are green or blue and hope that they will catch on, but they just don’t get it.

Eventually, a clever linguist from their culture introduces terms in their language that allow them to state the truth-conditions for sentences in our language that employ color-predicates:

x is green* = df. x is grue* and is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or is bleen* and is not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x is blue* = df. x is bleen* and is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or is grue* and is not examined before the year AD 3000.

“Is green” does not have the same meaning as “is green*,” since “is green” is semantically primitive while “is green*” is capable of explicit definition. Nonetheless, “is green” and “is green*” are necessarily coextensive. So the defectiveness of GT does not simply consist in its inability to describe possibilities that we can describe. But GT is defective nonetheless.

A language is defective if its primitive predicates are not fundamental. It is certainly a mistake to think that language must mirror reality in the sense that one is guaranteed that there will be a correspondence between our words and the world. However, it is no mistake to think that language is in one respect defective to the extent that there is no such correspondence between word and world. Having primitive but non-fundamental predicates is one metaphysically bad feature of a language. We can generalize. Call a language metaphysically ideal just in case every primitive expression in that language has a perfectly natural meaning.

말하자면, "∃ax Dx"와 "∃x (Ax & Dx)"가 논리적 동치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is green"과 "is blue"처럼 자연스러운 언어인 데 반해, 후자는 "is grue"와 "is bleen"으로부터 구성된 "is green*"과 "is blue*"처럼 부자연스러운 언어라는 것이 맥다니엘이 말하려는 핵심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맥다니엘은 사이더처럼 자연에 논리적 이음매가 있다고 상정하고 있고, 그 이음매를 가장 잘 그려내는 자연스러운 양화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상정하고 있고, "∃x (Ax & Dx)"보다는 "∃ax Dx"가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솔직히 저는 '자연의 이음매'라는 개념 자체를 의문스러워하다 보니, 반 인와겐이나, 사이더나, 맥다니엘이나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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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실과 다르다는 거긴 합니다. 존재 다원론자들이 생각하는 듯한, 범주에 관한 자연스러운 직관들을 반영하는 논리적 구조는 제약된 양화사보다 무제약적 양화사로 더 잘 실현되는 것 같아요. 뭐… ‘존재한다’의 의미가 추론주의적으로 해명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만약 다원론자가 답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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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다원론의 글을 올리시고, 맥다니엘의 다원론을 다루시려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읽을 때마다 맥다니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시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1)

일단 potential misunderstanding을 하나를 없애고 가겠습니다.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 (henceforth '다원론') 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언어에 '존재'란 단어가 포함돼있지 않습니다. 다원론에서 '존재'란 단어는 여러 존재 방식 (혹은 범주; 맥다니엘은 존재 방식과 범주를 동일시합니다. Ch4 참조) 의 disjunction입니다. 맥다니엘의 책 가장 첫번째 장에서 다루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몇 가지 오해를 없애고 시작하자면:

  1. 다원론에서는 '존재'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Ch1의 Sense-Kind Confusion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다원론은 일반 존재 의미가 근본적인 언어에 포함돼있지 않다고 할 뿐입니다. 근본적인 언어에 포함돼있지 않다고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흑백논리입니다.
  2. '존재'는 disjunction이지만 그렇다고 gruesome하진 않습니다. disjunction은 gruesomeness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맥다니엘은 '건강'을 예를 듭니다. '건강'이란 단어는 여러 건강-개념의 disjunction 이지만 (예: 몸의 건강함, 마음의 건강함, 관계의 건강함) 어찌됐든 이 건강-개념은 이 disjunct에 어느 정도의 overarching unity를 주고 있습니다. 맥다니엘은 '존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맥다니엘이 존재가 '비유적'이라고 하는 게 이 의미입니다. Ch2참고하시면 됩니다. 맥다니엘에게 있어 '존재'는 완벽하게 자연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자연적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을 봅시다:

앞서 말했듯이, 다원론은 일반 존재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반 존재 개념을 받아들여야 '훨씬 일반적인 층위에서 존재 진술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다원론자들은 받아들일 겁니다. 다원론자들에게 있어 일반 존재 개념이 있다는 것은 전혀 슬픈 일이 아닙니다. '단일'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이를 'simple'의 번역어로써 받아들이고 결국 '존재'가 여러 개의 disjunct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쓰신 거라면, 다원론자들은 '존재' 개념이 단일하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개념의 단일하다면 다원론자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죠. 하지만 꼭 '존재' 개념이 단일해야 일반적인 층위에서 존재 진술을 다룰 수 있지 않습니다. 일반 존재 개념만 있어도 됩니다. 만일 '단일' 이라는 단어를 'simple'의 번역어로 읽는다면

이 논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2)

여기서 논증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다원론은 어찌됐든 비근본적 언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연성은 있는 언어) 에서 이 모형을 받아들일 수 잇습니다.

(3)

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맥다니엘이 논리적 특이점을 보이기 위해 사건과 물리적 시공간점에 대해서 말하나요? 물론 물리적 시공간점에 대해서 말을 하긴 하지만 (pp. 60-64; Ch3; Ch 6), (1) 논리학의 맥락이 아닌 형이상학, 그리고 가치의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2) 위에서 말씀하신 부분과 사뭇 다르다는 점에 저 말을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제가 이해하기로 맥다니엘은 논리적 특이점을 보이기 위해 paraconsistent logic, stuff-logic, modal logic (pp. 68-75) 등을 예로 들던데요. 다만 제가 놓치고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제가 이 부분을 놓쳤다고 해서 카르납님의 논증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앞서 말한 부분들이 전부 실패한다고 보여야 도입과 제거 규칙 외의 논리적 특이성이 없다고 보이시는 거기 때문이죠).

(4)

이는 흔히 말하는 'parsimony'와 비슷합니다. '다원론이 이런 존재 방식들을 들이면서 표현하려는 문장들이 일반 존재 개념으로 표현된다면 왜 다원론이 필요한가?' 와 비슷한 형태로 주장되죠. 다만 parsimony를 정확하게 적고 시작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Parsimony If theory T1 is more parsimonious than theory T2 and if T2 is better than T1 in no other way (i.e. all else is equal), then T1 is a better theory than T2.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all else being equal'을 주장해야되고, 이 부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맥다니엘은 시간철학, 범주, 기반 (ground), 본질, 구멍, 가치, 특정 논리학들에 대한 논쟁에 다원론이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다원론이 일원론보다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라는 것을 보이려면 이 모든 것에 대한 반박을 해야합니다.

(5)

카르납님의 포스팅을 자주 봐왔습니다. 하지만 볼 때마다 맥다니엘을 제대로 설명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맥다니엘의 관점이라고 설명하시는 부분들이 부정확하고 비자비로워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르납님과 맥다니엘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되면 철학적인 논쟁이 아닌 문헌적인 논쟁으로 흘러갑니다. '맥다니엘은 저런 말을 하고 있다,' '맥다니엘이 의미한 바는 그게 아니다' 와 같은 말들로 흘러갑니다. 맥다니엘이 주장하는 바를 설명을 하실 때 어느 정도의 독해가 뒷받침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인용이 포함이 된다면 저로써 더 철학적으로 얻어낼 것이 많아보입니다. 예를 들어,

와 같은 주장을 하시려면 맥다니엘이 논리적 특이점을 논하면서 언급한 paraconsistent logic, stuff-logic, modal logic 을 고려해서 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의미있는 토론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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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맥다니엘에 대한 문헌 비평을 하려는 목적은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철학적 논제를 비판하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철학이 레슬링 경기는 아니니까요.

아무튼, 맥다니엘이건 누구건 현대의 존재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반적 논제는 여하간 양화사 다원론, 내지는 제약된 양화사를 통해 각각의 존재 개념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일반적 입장 자체가 그다지 설명력이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이 즈음에서 변명하자면, 근본적인 언어 뭐시기저시기 달아둔 건 사실 ‘이른바 근본적인 언어의 층위에서 다원주의가 주장되더라도 그것이 헛소리다’를 말하려던 거였는데, 이런 의도를 주절주절 설명할 만큼 엄격한 에세이를 이곳에 남기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런 반론에 대해 댈 법한, 그리고 실제로 대곤 하는 응답이 ‘무제약적 양화와 별개로, 중요한 건 무엇이 더 근본적인 존재 개념인지이다!’라는 그라운딩 클레임일 겁니다. 말이 길어지는 게 싫어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안 했는데, 짧게만 남겨놓겠습니다.

상위 범주 S, 하위 범주 A에 대해 A가 S보다 더 근본적이다. 그럴 수 있죠. 유명론자들이 보통 그렇게 주장해 왔고, 따라서 존재 다원론자들을 일종의 ‘무제약적 양화 유명론’자들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 최상위 존재 범주(i.e. 무제약적 양화 범위에 속함)는 범주입니까 아닙니까?

범주라면, 순수한 존재 범주랄 게 있으니 순수한 존재 방식도 있고, 그러면 왜 굳이 다원주의가 고려되어야 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발생학적으로야 세부 존재 개념이 앞서지만, 결과적인 우리의 존재론은 순수 존재 개념만 가지고 구성될 수 있습니다.

범주가 아니라면, 서로 다른 존재 개념들이 어떻게 전부 존재 개념이냐는, 보편과 개별에 관한 오래된 질문이 제기될 겁니다. 여기서부터의 문답은 제 몸글로 돌아가는 것과 같아서 따로 적진 않겠습니다.

제 의도를 짐작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셨길 바라며….

(1)

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비평을 하시려는 게 목적인 줄 알았는데요. 이 글 포스팅 제목도 '반론'을 포함하고 있고요. '그런 방식'이 무슨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 논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요. 만일 의도하신 바가 '난 논증을 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냥 나의 주관적인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라면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전 맥다니엘의 저작에 철학적으로 engage하면서 반론을 제시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2)

이 부분도 논증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여기서 논증을 구성해본다면:

전제 1: 우리의 존재론은 순수 존재 개념만 가지고 구성될 수 있다.
전제 2: 순수 존재 개념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론 (i.e. 일원론) 이 그렇지 않은 이론 (i.e. 다원론) 보다 더 단순하다.
전제 3: 이론 T1이 이론 T2보다 더 단순하고, T2가 T1보다 다른 이점을 지니지 않고 있다면, T1이 T2보다 더 우월하다.
전제 4: 다원론은 일원론보다 어떤 이점도 지니지 않고 있다.
결론: 일원론이 다원론보다 더 우월하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제 4가 거짓입니다. 적어도 전제 4를 보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전제 4를 보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원론에게 parsimony를 기반으로 반박을 하기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기서도 철학적인 반론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감상을 공유한 것이라면 제가 다시 한 번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3)
전 다원론에 대한 반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적어도 parsimony에 기반해서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다원론도 어느 정도는 falsifiable해야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원론에 대한 반박을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무제약적 양화사의 근본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무제약적 근본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주로 순수성을 논합니다:

순수성 문장 S는 근본적이다 if and only if 문장을 구성하는 항들이 근본적이다.

순수성이 받아들여질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사이더와 같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만 토마슨과 같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의문을 제기하기는 하니깐요. 하지만 맥다니엘 같은 경우는 사이더의 이론을 많이 받아들이고, 사이더의 이론 자체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순수성에 기반해서 맥다니엘에 반박을 하면 꽤나 강한 반박이 될 겁니다. 그리고 순수성에 더해서 완전성까지 더합시다:

완전성 모든 비근본적인 문장들은 근본적인 문장(들)에 의해 metaphysical semantics가 마련돼야한다.

순수성과 완전성을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전제 1: 순수 존재 개념을 포함하는 문장 중 metaphysical semantics가 마련될 수 없는 문장이 있다면, 그 문장은 근본적이다. (완전성)
전제 2: 그 문장은 근본적이기 때문에 순수 존재 개념도 근본적이다. (순수성)
결론: 다원론은 틀렸고, 일원론이 맞다.

Builes의 "Pluralism and the Problem of Purity"가 이 논증 구조를 갖고 다원론에 대한 반박을 제시합니다. 다만 Rettler의 "Ways of Thinking about Ways of Being"에서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지는 metaphysical semantics를 마련할 수 없는 순수 존재 개념을 포함한 문장을 찾을 수 있다면 다원론에 대한 큰 반박이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원론이 일원론보다 우월한 점이 단 하나도 없다' 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고도 다원론에 반박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주장을 좀 약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맥다니엘과 같은 다원론자들은 parsimony 때문에 다원론이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점을 하나라고 지운다면 다원론자에 대한 'knockdown argument'는 아니더라도 위협은 가할 수 있습니다. ('knockdown argument'는 철학에서 자주 쓰는 투기 종목 비유입니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철학이 레슬링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레슬링에서는 'knockdown'이란 단어가 아닌 'pin'과 같은 단어를 씁니다.). 예를 들어, 맥다니엘은 다원론의 이점을 보이기 위해서 시간철학에 대해 논합니다. 그럼에 있어서 다원론이 기존 현재주의보다 더 우월한 이론을 내줄 수 있다고 주장을 하지요. 하지만 현대 시간철학에서는 상대성 이론이 현재주의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Turner, "Why Special Relativity is a Problem for the A-Theory" 참조). 만일 이 주장을 끌고 나가서 (1) 맥다니엘의 대안 역시 현재주의처럼 상대성 이론과 양립불가능하다, (2) 애초에 현재주의는 live option도 아니었기에, 현재주의보다 우월한 (하지만 상대성 이론과 양립불가능한) 시간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과 현재주의가 양립가능하다고 주장한 논문들과도 engage해야겠죠 (Zimmerman, "Presentism and the Space-Time Manifold"; Markosian, "A Defense of Presentism" 참조. 상대성 이론말고 마르코프 이론에 기반하여 현재주의에 '과학적 주장'을 마련한 사람도 있습니다. Builes의 "An Empirical Argument for Presentism"을 보시면 됩니다.).

(4)

전 제가 훈련을 받은대로 철학적 논증을 어떻게 구성해야되는지에 대해서 적어봤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게 -- 카르납님의 말을 빌리자면 -- 너무 '레슬링'스럽고, '의미없는' 비판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유감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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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랑 싸우시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상대하는 논제를 적었고, 이에 대한 고려됨 직한 변증들과 한계를 적었고, 그리고 끝냈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들로는 무슨 ‘맥다니엘과 싸우는 사람들은 X라고 하는데 너는 그걸 안 하니 한심하다’ 같은 소리를 하시나 싶기도 한데, 그런 말씀이라면 이에 딱히 응할 생각은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선생께서 제 지도교수도 아니고, 심지어 제 지도교수라고 해도 이런 이상한 ‘튜터링’에 따를 이유가 제게는 없네요….

제가 하는 말은 간단합니다. 그냥 카르납님께서 하시는 반박이 철학적인 strength을 지니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다원론에 대해 할 수 있는 조금 더 promising 한 (혹은 그럴 수도 있는) 반박들을 제시한 것 뿐입니다. 전 이런 류의 대화가 전형적인 철학적 토론의 예시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일종의 '튜터링'으로 비춰줬다면 사과드립니다.

네… 뭐 우리가 공유하는 기반이 달라서 그런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듭니다. 제가 몸글에서 제기한 반론은 통상 진리다원주의에 대한 강한 반론으로 주장되는 혼합된 추론 문제(the problem of mixed inferences)에서 착안한 것인데, 시간이 여유로우시면 한 번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별개로 Aaron Cotnoir가 십 년 쯤 전에 발표한, 진리다원론과 존재다원론의 독립성에 관한 글이 있는데 예전에 꽤 흥미롭게 읽었고 두 다원론에 대해서도 저는 이 논문에서의 정식화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 (문득 깨달았습니다). 혹시 관심이 생기실까 싶어 서지정보 남겨둡니다.

Cotnoir, Aaron J. & Edwards, Douglas (2015). From Truth Pluralism to Ontological Pluralism and Back. Journal of Philosophy 112 (3):11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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