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 맥다니엘의 『존재의 파편화』 제5장

5. 1. 도입

구멍, 균열, 그림자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가령, “치즈에 구멍이 7개 있다.”라거나 “그 구멍은 3피트이다.”와 같은 문장들을 사람들이 일상적 언어에서 종종 사용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구멍은 문장 속에서 양화될 수 있는 대상인 것 같다. 또한 과거에 내 스웨터에 생긴 구멍은 현재 내 스웨터에 있는 구멍과 동일한 구멍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구멍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존속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나는 종종 길에 있는 구멍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구멍은 일종의 인과적 효력을 지닌 것 같다. 구멍은 긍정적 존재물이 아니라 긍정적 존재물의 부재로서 ‘거의 무인 것(almost nothingness)’인데도, 우리는 구멍이 마치 어떠한 종류의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한 상태에서 생각하거나 말한다.

맥다니엘은 얼핏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가 ‘구멍의 존재’에 대한 물음보다는 ‘구멍이 지닌 존재의 방식’에 대한 물음을 고민해야 구멍의 존재론적 지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존재론적 다원주의자에게는, 어떠한 대상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보다도 그 대상의 실존론적 지위에 대해 배울 것이 더 있다. 즉, 그 존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McDaniel, 2017: 140)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구멍이 구체적 대상들처럼 ‘실재성’을 지닌다고 인정하면서도, 구체적 대상들과는 달리 ‘다른 존재의 방식’을 지닌다고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멍이나 거의 무인 것들은 비록 실재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McDaniel, 2017: 141)

따라서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제시해야 하는 설명은 다시 두 가지 항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로, 구멍, 균열, 그림자 등 거의 무인 것이 지닌 존재의 방식이란 무엇인가? 둘째로, 거의 무인 것이 지닌 존재의 방식은 왜 구체적 대상이 지닌 존재 방식보다도 존재론적으로 더 퇴화되어 있거나 덜 강건한가? 우선, 맥다니엘은 5. 2.절과 5. 3.절에서 각각 ‘존재의 수준(level of being)’과 ‘내-존재(being-in)’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러한 물음들에 대답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고려하지만, 결국 그 시도들이 성공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그는 5. 4절에서 ‘명목상의 존재(being-by-courtesy)’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거의 무인 것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는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확장하여, 5. 5.절에서는 구멍, 균열, 그림자 이외에도 어떠한 대상들이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5. 6.절에서는 자신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쉬운’ 존재론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며, 5. 7.절에서는 존재물이 언제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니는지에 대한 일반적 원칙들을 고려한다.

5. 2. 거의 무인 것과 존재의 수준

마이농주의적 현재주의(Meinongian presentism)나 정도 현재주의(degrees presentism)는 ‘존재의 수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존재론적 퇴화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가령, (인간, 생물, 쿼크 등) 구체적 대상만을 범위로 가지는 양화사와 (거의 무인 것 등) 모든 대상을 범위로 가지는 양화사가 두 가지 근본적 양화사로서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모든 대상을 범위로 가지는 양화사는 구체적 대상만을 범위로 가지는 양화사보다 더 포괄적이다. 따라서 어떠한 대상은 두 가지 양화사 모두를 통해 기술될 수 있는 두 가지 존재의 방식을 지니고, 다른 대상은 한 가지 양화사를 통해 기술될 수 있는 한 가지 존재의 방식을 지닌다. 어떠한 대상은 더 많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대상은 더 적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수준’에 대한 구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거의 무인 것들의 존재론적 퇴화도는, 긍정적 존재자들이 그것들보다 더 많은 존재를 지닌다는 사실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긍정적 존재자들이 누리는 일종의 존재가 거의 무인 것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McDaniel, 2017: 142)

그러나 맥다니엘은 ‘존재의 수준’이라는 개념으로 존재의 퇴화도를 구분하고자 하는 모델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는 이러한 모델이 거의 무인 것이 왜 구체적 대상보다도 결여된 존재의 방식을 지니는지 설명하기보다는, 단순히 구체적 대상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증가시키만 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거의 무인 것에 ‘무엇이 없는지’인데도, 정작 구체적 대상에 ‘무엇이 더 많은지’로 논의의 방향이 잘못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거의 무인 것들이 아니라 긍정적 존재물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이 모형이 오도되었다고 말한다.”(McDaniel, 2017: 142) 둘째로, 그는 이러한 모델이 구체적 대상에 대한 거의 무인 것의 의존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구체적 대상과 거의 무인 것에 모두 적용되는 양화사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쿼크가 존재하는 것과 구멍이 존재하는 것이 어떠한 방식에서는 동일하다면,) 거의 무인 것이 반드시 구체적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구체적 대상 옆에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상정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거의 무인 것들의 존재와 질적 본성은 긍정적 존재물들의 존재와 질적 본성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그러나 이 모델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놀랍다.”(McDaniel, 2017: 143)

5. 3. 거의 무인 것과 내-존재

거의 무인 것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내-존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모델도 있다. 여기서 ‘내-존재’란 속성이 지닌 존재의 방식이다. 즉, (빨강임과 같은) 속성이 언제나 (소방차와 같은) 실체에 의존하여 실체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구멍과 같은) 거의 무인 것도 언제나 (치즈와 같은) 숙주에 의존하여 숙주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특징이 있다. 속성과 거의 무인 것 사이의 유사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입장은 (a) 거의 무인 것이 언제나 ‘숙주(host)’에 의존하면서도 반드시 ‘특정한 숙주(particular host)’에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고, (b) 속성이 지닌 존재의 방식이 논리적 형식으로는 ‘이항적(two-placed)’인 것처럼 거의 무인 것이 지닌 존재의 방식도 ‘이항적’이라고 분석할 수 있으며, (c) 그 논리적 형식을 바탕으로 속성보다 실체가 ‘더욱 실재적(more real)’이라는 주장을 분석할 수 있는 것처럼 거의 무인 것보다도 숙주가 더욱 실재적이라는 주장도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맥다니엘은 ‘내-존재’라는 개념으로 거의 무인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델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는 이러한 모델이 속성과 거의 무인 것이 속한 존재론적 범주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속성과 거의 무인 것이 ‘내-존재’라는 동일한 존재의 방식을 공유한다는 주장은 그 두 가지가 같은 동일한 존재론적 범주에 속한다는 주장이지만, 거의 무인 것은 ‘개체적’으로 존재하고 속성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카사티와 바르지(1994)가 논증한 것처럼, 구멍들 및 다른 거의 무인 것들은 의존적 개체이지, 보편적 속성이 아니다.”(McDaniel, 2017: 145) 둘째로, 그는 속성이 거의 무인 것보다도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속성이 아무리 실체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속성은 거의 무인 것과 달리 긍정적 종류의 실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속성은 일종의 긍정적 실재성인 반면, 거의 무인 것은 단순한 결여이고, 그래서 속성보다도 덜 실재성을 지닌다.”(McDaniel, 2017: 145) 셋째로, 그는 거의 무인 것의 본성이 긍정적 존재물의 본성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속성이 실체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속성이 실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무인 것은 단순히 숙주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숙주에 의해 규정된다. “거의 무인 것이 지닌 질적 본성은 긍정적 존재물이 지닌 질적 본성에 의해 완전히 규정된다. […] 어떠한 긍정적 존재물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질적으로 존재하는지를 고정하라. 그러면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떠한 거의 무인 것이 존재하는지를 고정하게 된다.”(McDaniel, 2017: 146)

5. 4. 명목상의 존재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의미론적으로 원초적이며 제약된 양화사들(semantically primitive restricted quantifiers)’이 ‘제약되지 않은 양화사(unrestricted quantifier)’보다도 더욱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가령, 구체적 대상이 지닌 존재의 방식은 ‘∃m’라는 양화사로 표상된다고 가정하고, 추상적 대상이 지닌 존재의 방식은 ‘∃a’라는 양화사로 표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양화사가 범위로 가지는 영역들은 더욱 포괄적인 양화사 ‘∃’가 범위를 가지는 영역 내부에 속한다. “‘∃’의 영역은 ‘∃m’와 ‘∃a’의 영역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는 결국 제약되지 않은 양화사이며, 그 양화사의 역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에 관계 없이, 범위로 가지는 것이다.”(McDaniel, 2017: 147)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에서는 ‘∃m’와 ‘∃a’라는 제약된 양화사들이 ‘∃’라는 제약되지 않은 양화사보다도 더욱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에 대응한다고 여겨진다.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은 의미론적으로 원초적인 양화사들을 통해 표상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영역은 그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로부터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약된 양화사들이 범위로 가지는 영역들을 단순히 논리합(disjuction)의 형태로 결합하는 것만으로는 제약되지 않은 양화사가 범위로 가지는 영역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가령, ‘∃m’와 ‘∃a’가 모든 종류의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에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인 ‘∃m’와 ‘∃a’가 반드시 모든 종류의 존재의 방식 ‘∃’를 의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을 지닌 대상은 아니지만, 여전히 특정한 ‘존재의 방식’을 지닌 대상이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연에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대상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특정한 존재의 방식을 지닌 이러한 대상을 ‘명목상의 존재자’라고 할 수 있고, 그 존재 방식을 ‘명목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자연에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대상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닌 ‘명목상의 존재자’는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맥다니엘은 명목상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의 영역이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것들은 그것들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방식이 전혀 없다. 즉, 어떠한 근본적인 존재의 양태도 지니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물들을 명목상의 존재자라고 부르고, 이들이 지닌 파생적인 존재의 양태, 순전히 부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의 양태의 한 종류를 편의상 존재라고 부르자. “∃b”로 표상되는 편의상 존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bxΦ = df. ∃xΦ & ~(∃mxΦ or ∃axΦ). (McDaniel, 2017: 147)

우리는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의 퇴화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즉, (a)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닌 대상들은 제한되지 않은 양화사를 통해 양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대상들은 일종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b)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닌 대상들은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들에 대응하는 양화사들을 통해서는 양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대상들은 자연스러운 실재과 비교하여 ‘감소된 존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존재물들이 다른 존재물들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주장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x가 y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은, x가 근본적인 존재의 양태를 지닌 반면 y는 단지 명목상의 존재자일 뿐인 경우이다.”(McDaniel, 2017: 148)

또한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은 우리가 양화사를 사용하는 방식과도 부합한다. 가령, ‘∃’의 의미를 단순히 의미론적으로 원초적이며 제약된 양화사들인 ‘∃m’와 ‘∃a’만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입장은 “∃xΦ는 (∃mxΦ 또는 ∃axΦ)인 경우 그리고 그 경우이다.”라는 공식에 따라 양화사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즉, “존재하는 어떤 x가 Φ이다.”의 의미를 “m-존재하는 어떤 x가 Φ이다.” 또는 “a-존재하는 어떤 x가 Φ이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된 ‘∃’를 ‘∃d’라고 표현하고, ‘∃d’의 의미를 ‘m(‘∃d’)’라고 표현해 보자. 이제 우리가 ‘∃’를 사용하는 방식은 ‘∃d’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손쉽게 드러난다. 우리는 구멍, 균열, 그림자 등 거의 무인 것에 대해서도 ‘존재한다’라고 말하지만, ‘∃’를 ‘∃d’로 환원하고자 하는 입장은 거의 무인 것에 대해서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 대한 우리의 용법에는 m(‘∃d’) 역시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앞서 주목한 것처럼, 우리는 거의 무인 것들도 기꺼이, 그리고 빈번하게 양화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추상적 대상도 아니고 구체적 실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구체적 실재의 결여이다. 만약 “∃”의 의미가 m(‘∃d’)라면, ‘∃x x는 구멍이다.’는 거짓이다.”(McDaniel, 2017: 149) 그러나 우리가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입장을 취할 경우, 우리는 ‘∃’의 의미를 m(‘∃d’)보다 훨씬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원초적이며 제약된 양화사들만으로 양화할 수 없는 대상들까지도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 대상들서 ‘∃’의 영역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맥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마도, ‘∃’에 대한 우리의 용법에 m(‘∃d’)보다 더 잘 부합하는 ‘∃’의 다른 후보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들은 ‘∃x x는 구멍이다.’가 참인 것을 표현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후보들은 m(‘∃d’)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때로는 자연스러움보다 용법과의 부합성이 우선하는데, 특별히 의미가 용법과 부합하는 정도가 높고, 대안적 의미들이 지닌 자연스러움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 그러하다. 여기서 고려되고 있는 가설은 이러한 경우 용법과의 부합성이 자연스러움을 앞섰다는 것이다. 즉, ‘∃’의 의미는 m(‘∃d’)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 비추어 볼 때 ‘∃d’가 제한된 양화사가 되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근본적인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말로,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단순히 명목상의 존재자인 것들이 있다. (McDaniel, 2017: 149)

맥다니엘은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다른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서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옹호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존재하는 것(what is)’와 ‘실제로 존재하는 것(what really is)’을 구분한 파인이나, ‘실존하는 것(what exist)’과 ‘실제로 실존하는 것(what really exists)’를 구분한 카메론을 자신의 이론을 위한 현대적 선구자로 언급한다. 또한 그는 ‘존재’라는 용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가지 범주에 따라 구분되는 ‘자연적 대상들’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고 그 이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아퀴나스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한 인물로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는 (파인, 카메론, 아퀴나스 등의) 서양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니야야-바이셰시카 학파 등의) 인도 형이상학에서도 ‘사물의 실재적 범주들’과 ‘부재’에 대한 구별이 있었고, 심지어 부재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까지도 벌어졌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는 그 모든 인물들과 학파들의 이론이 ‘명목상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논의가 광범위한 철학적 맥락에서 진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구멍, 균열, 그림자가 ‘존재하기는’ 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명목상의 존재’라는 이론이 얼마나 풍부한 함의를 지닐 수 있는지를 철학의 역사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킷 파인, 로스 카메론


토마스 아퀴나스, 카나다

5. 5. 감소된 존재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이 반드시 구멍, 균열, 그림자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무인 것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존재물들 중에서 ‘명목상의 존재’를 지니는 대상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의 무인 것들이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가정할 경우 그 존재물들에 대한 설명이 쉬워지는 것처럼, 다른 존재물들 역시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가정할 경우 그 존재물들에 대한 설명이 쉬워질지도 모른다. 즉,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분류될 수 있는 대상들의 영역이 거의 무인 것들의 영역보다 훨씬 폭넓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자. 이제 우리는 수많은 대상들을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시도할 수 있다. “명목상의 존재자들의 집합은 얼마나 클까?”(McDaniel, 2017: 154) 맥다니엘은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다른 대상들을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자 하는 입장들을 검토한다.

관계들: 몇몇 중세철학자들은 관계가 우리의 마음에 의존하고 있는 ‘단지 이성의 존재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x가 ‘y로부터 5피트 떨어져 있을 수 있음’이라는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우리는 관계가 마음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사물과는 다른 존재의 방식을 지닌다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관계가 ‘명목상의 존재’를 지니지 않는지 고려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맥다니엘은 모든 관계가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관계들이 명목상의 존재자라는 생각을 의심하는데, 관계에 대한 어떤 사실들은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오히려 (어떤) 관계들은 다른 속성들이 지니는 종류의 실재성을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단지 가능성들을 탐구하고자 할 뿐이다.”(McDaniel, 2017: 155) 적어도, 관계가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고자 할 경우, 여러 가지 존재자들이 관계를 맺어 이루어진 복합적 대상도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맥다니엘이 강조하는 논점이다.

가능체들: 단지 가능한 대상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어떠한 의미에서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가 다소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가지 버전의 가장 극단적인 종류의 양상 실재론을 구별해 보자. 두 버전은 현실적 세계와는 다른 구체적인 가능한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한 버전은 비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가능한 세계들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명목상의 존재으로 격하시키는 반면, 다른 버전은 그 세계들에게 완전한 실재성을 부여한다. 전자의 견해는 가능한 존재자들이 ‘감소된(diminished)’ 종류의 존재를 지닌다고 주장한다.”(McDaniel, 2017: 156)

허구적 존재물들: 맥다니엘은 허구적 존재물들이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세철학자들이 이러한 존재물들을 ‘단지 이성의 존재자’들이라고 평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명목상의 존재자’들이 반드시 ‘단지 이성의 존재자’들인 것은 아니지만 ‘단지 이성의 존재자’들은 모두 ‘명목상의 존재자’들이라고 지적한다. “허구적 존재물들은 부수적으로 명목상의 존재자들이다. 사실, 그 존재물들은 중세적 의미에서의 이성의 존재자들의 훌륭한 예시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이성의 존재자들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 키메라와 다른 상상적 대상들, 신화와 허구의 생물들, 그리고 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스콜라 철학자들이 생각한 바로 그 방식대로 마음-의존적인 존재자를 위한 훌륭한 후보들이자 충분히 실재하는 것보다 못한 존재자를 위한 훌륭한 후보들이다.”(McDaniel, 2017: 156)

지향적 대상들: 마이농주의에서는 지향적 대상들이 일종의 ‘명목상의 존재’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역사적 마이농은 모든 대상을 범위로 가지는 ‘가장 외적인 양화사(outermost quantifier)’를 상정하기도 하고, 지향적 대상들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 양화사(existence quantifier)’와 구별되는 ‘존립 양화사(subsistence quantifier)’를 도입하기도 하는 등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와는 다소 상충하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마이농주의자들이 반드시 역사적 마이농이 제시한 모든 주장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마이농주의자들이 여기서 역사적 마이농을 따를 필요는 없다. 만일 그들이 마이농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향체들의 상존재(Sosein)들 역시 내적 양화사 안에 있는 그러한 사물들의 특징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직관적으로 올바른 견해인 것처럼 보인다.”(McDaniel, 2017: 157) 실제로, (마이농주의자는 아니지만) 스콜라 철학자인 아우리울은 이러한 방식으로 지향적 대상이 ‘감소된 존재의 양태’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라는 하나의 대상은 ‘실체’가 지니는 근본적 존재의 양태와 ‘지향적 대상’ 혹은 ‘표상’이 지니는 감소된 존재의 양태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우리울의 입장이었다.

용어적 존재물들: 쉬퍼는 명제(proposition)들과 속성(property)들 같은 용어적 존재물들이 문장(sentence)들과 술어(predicate)들의 그림자로서 일종의 ‘감소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용어적 존재물들이 마음이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대상들이라고도 주장한다. 맥다니엘은 이러한 용어적 존재물들이 ‘명목상의 존재’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쉬퍼의 용어적 명제들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의 한 종류처럼 들린다.”(McDaniel, 2017: 158) 다만, 그는 용어적 존재물들이 ‘사소한 추론’에 따라 도출된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물들이 ‘감소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쉬퍼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용어적 존재물들이 감소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는 사실은 사소한 추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추론에 앞서서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이 맥다니엘의 입장이다.

모든 것들: 모든 것들이 ‘명목상의 존재’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맥다니엘은 모든 것들을 명목상의 존재로 환원하고자 하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그 입장의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은 강한 성향이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 하지만 나의 성향이 나로 하여금 그 대안이 비정합적이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거나, 그 성향에 반대되는 논증들을 우리가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지도 않는다.”(McDaniel, 2017: 159) 가령, 현대철학자 중에서도 터너는 아무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논증하기도 하고, 불교철학자 중에서도 나가르주나 역시 모든 것들을 ‘공(空, emptiness)’이라는 관점에서 기술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 맥다니엘은 우리 자신 역시 ‘명목상의 존재’를 지닐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특정한 사실이나 논증을 바탕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닌 존재의 방식이 ‘명목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내가 손을 지니고 있다는 것, 곧 나의 손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어적 사실(Moorean fact)이다. […] 하지만 나의 손이 단순한 명목상의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은 무어적 사실이 아니다. 유사하게도,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확실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명목상의 존재자라기보다는 진정한 존재자이다.’가 확실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도 있다. 내가 단순히 명목상의 존재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가 제6장의 초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장에서 이러한 동요를 결정적으로 가라앉힐 만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McDaniel, 2017: 160)


조너선 셰퍼, 에이미 토마슨


토마스 호프베버, 크리스 맥다니엘

5. 6. 쉬운 존재론?

특정한 대상들이 ‘명목상의 존재’를 지닐지도 모른다고 분석하는 입장은 존재의 여부가 불분명한 대상들에 대한 철학의 오래된 고민들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함의를 지닌 것 같다. 물론,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만으로 모든 존재론적 논쟁이 곧바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신이 ‘명목상의 존재자’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자’여야 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논쟁은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탁자, 의자, 인격, 꿈 속 등장인물, 허구적 존재물, 구멍, 그림자가 ‘명목상의 존재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우리가 “구멍들이 존재한다.”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구멍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구멍과 같은 대상들에 대한 수많은 존재론적 논쟁을 낳았고, 그 대상들에 대한 존재론적 논쟁이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을 통해 제거될 수 있다면,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은 존재론적 논쟁을 해소하기 위한 쉬운 길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목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F들의 실존에 관한 특정한 존재론적 논쟁들이 F들의 편에서 해결하기 쉽다는 의미에서 ‘쉬운’지에 대해 함의를 지니는가?”(McDaniel, 2017: 161) 실제로, 오늘날 ‘쉬운 존재론(easy ontology)’라고 일컬어지는 진영도 존재론적 논쟁을 맥다니엘과 유사한 관점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맥다니엘은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자신의 입장이 쉬운 존재론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입장과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조너선 셰퍼: 셰퍼는 맥다니엘처럼 특정한 대상들이 ‘실존하는지 실존하지 않는지’가 존재론에서 종종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상들이 ‘어떻게 정초되는지’야말로 존재론에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문제라고 강조한다. “셰퍼와는 가장 분명한 유사성이 있는데, 그는 존재론에서 흥미로운 문제가 실존(existence)보다는 정초(grounding)라고 생각한다.”(McDaniel, 2017: 164) 다만, 맥다니엘의 입장과 셰퍼의 입장 사이의 차이는 ‘정초’를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인 관계라고 받아들이는지에서 나타난다. “셰퍼와 나의 주된 불일치는 […] 정초라는 그의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이라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초는 존재의 정도(degrees of being)와, 다범주적 존재론이 인정해야 하는 (정초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구조화하는 관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할을 넘어서거나 능가하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다. […] 나는 많은 존재론적 질문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셰퍼에게 거의 동의하지만, 그들의 지위를 기술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근저의 메타-메타형이상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McDaniel, 2017: 164)

에이미 토마슨: 맥다니엘은 자신이 토마슨과 몇 가지 문제에서 의견이 갈린다고 이야기한다. 특별히, 그는 존재물들 사이에 존재론적 지위의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토마슨이 이러한 차이를 간과한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마슨이 존재물들 사이의 존재론적 지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반면, 나는 우리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멍과 그 구멍의 숙주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구멍이 그것의 숙주보다 덜 견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존재론적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존재론적 불일치이다.”(McDaniel, 2017: 164) 또한 언어철학과 관련해서도 맥다니엘의 입장과 토마슨의 입장 사이에는 사소한 불일치가 있다. “나는 ‘탁자방식으로 배열된 입자들이 존재한다(there are particles arranged tablewise)’에서 ‘탁자들이 존재한다(there are tables)’로의 추론이 개념적으로나 분석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단지 내가 옹호하는 견해의 일부가 아닐 뿐이며, 반면에 그것은 아마도 토마슨의 견해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McDaniel, 2017: 164)

토마스 호프베버: 호프베버는 일상적 언어에서 양화사적 표현이 두 가지 방식에 따라 다의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가령, 우리는 “수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수’가 추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개념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사소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고, ‘수’가 존재론에서 논란이 되는 존재물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종종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우선, 맥다니엘은 양화사적 표현이 추론적 역할을 통해 독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호프베버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나에게 양화사 표현은 모두 일차적으로 그들의 구문론적 역할과 추론적 역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즉, 양화사란 일상적 언어의 제약되지 않은 존재 양화사처럼 구문론적으로 그리고 추론적으로 작용하는 어떠한 것이다.”(McDaniel, 2017: 165) 또한 그는 일상적 언어에서 존재론적 용어들이 반드시 다의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호프베버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일상적 언어에서 존재론적 용어들이 다의적인지 아니면 일의적인지는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일상 언어에서 ‘존재’, ‘어떤’, ‘존재한다’, ‘실존한다’가 기본적으로 교환 가능하며, 그 모든 것이 제약되지 않은 존재 양화사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McDaniel, 2017: 165)

5. 7. 명목상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

맥다니엘은 특정한 존재물이 언제 ‘명목상의 존재’를 지니는지에 대한 일반적 원칙들을 제시하여 자신의 설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거의 무인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였지만, 정작 자신이 ‘명목상의 존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 성찰을 전개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 ‘명목상의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이 성립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을 다루고자 한다. “[…] 이 장의 주된 목적은 구멍들과 다른 부재들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실재적이지만 그들의 숙주보다는 덜 실재적이라는 직관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론을 제공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진정한 존재자’와 ‘명목상의 존재자’라고 일컬은 것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거의 무인 것들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이라는 이론이 이러한 직관을 만족시킨다고 논증하였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존재자가 언제 단순히 명목상의 존재자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원칙들을 검토할 것이다.”(McDaniel, 2017: 166) 우리는 맥다니엘이 제시하는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진정한 존재자들에 수반한다: 구멍, 균열, 그림자 등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명목상 존재자들은 다른 ‘진정한’ 존재자들 혹은 ‘긍정적’ 존재물들에 수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구멍들과 그 밖의 거의 무인 것들에 관한 사실들은 ‘긍정적’ 존재물들에 대한 사실들에 수반한다. 구멍들과 그 밖의 거의 무인 것들은 그들의 숙주들과 부분전체론적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관찰들을 통해 시사되는 바는, 일반적으로 명목상의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이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에 수반한다는 것이다.”(McDaniel, 2017: 166)

명목상의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들을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들로 재서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나 영어 같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서는 “구멍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들로 재서술하는 것이 쉽지 않다. 구멍에 대한 진술들을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들로 재서술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무한히 긴 한국어나 영어 문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화된 한국어나 영어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강화된 한국어나 영어를 통해 구멍에 대한 진술들을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들로 재서술하였다면, 우리는 구멍이 ‘명목상의 존재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환원(ontological reduction)’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장된 버전의 영어가 우리의 영어보다도 [구멍에 대해] 말하기에는 형이상학적으로 더 나은 언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언어의 어떠한 양화사도 구멍들을 범위로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구멍들이 단순히 명목상의 존재자들이라고 생각할 이유를 지닌다. 존재론적 환원은, 이러한 그림에서 보자면, 어떤 존재물을 단순히 명목상의 존재자로서 식별하는 것에 해당한다.”(McDaniel, 2017: 167)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하지 않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지니지 않는다: 구멍, 균열, 그림자 같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부분성’, ‘시공간적 거리’, ‘인과’와 같은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지닌다. 이러한 속성들이나 관계들은 얼핏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되지 않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목상의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이 다른 진정한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에 수반해야 한다면,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하지 않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이 될 수 없다. 맥다니엘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부분성, 시공간적 거리, 인과가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하지 않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즉, 그에 따르면, 명목상의 존재자들이 그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그 속성들이나 관계들이 진정한 존재자들을 통해 예화되는 방식으로만 성립할 수 있는 ‘제약된’ 속성들이나 관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각각의 진정한 존재자들에서 예화되는 각각의 부분성들, 각각의 시공간적 거리들, 각각의 인과들은 존재하지만, 진정한 존재자들로부터 괴리된 부분성 자체, 시공간적 거리 자체, 인과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가 명목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McDaniel, 2017: 168)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하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도 지니지 않는 것 같다: 추상적 대상들을 통해 예화되는 속성들을 ‘고차적 속성(higher-order property)’들이라고 표현하고, 추상적 대상들을 통해 예화되는 관계들을 ‘고차적 관계(higher-order relation)’들이라고 표현해 보자. 가령, “빨강은 색깔이다.”라는 문장이 참이라는 사실은, ‘빨강임’이라는 속성이 ‘색깔임’이라는 고차적 속성을 예화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고차적 속성들이나 관계들 중에서 ‘다른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에 수반하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들이나 관계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명목상의 존재자들이 과연 그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맥다니엘은 명목상의 존재자들이 그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지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고차적 속성들이나 관계들은 ‘추상적 대상들’에 수반하는 것과 달리,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구멍, 균열, 그림자처럼 주로 ‘구체적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 어떤 근본적 속성들은 (그 가운데 양적 확정자들도 포함하여) 그 자체로 근본적 속성들을 지닌다. 하지만 전형적인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추상적 대상들이 아니며, 오히려 구체적이다. 즉, 구멍들, 그림자들, 사물들의 더미들, 임의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들 등 말이다.”(McDaniel, 2017: 168) 물론, 고차적 속성들이나 관계들 중에서 ‘동일성 관계’는 완벽하게 자연적인 관계이면서도 명목상의 존재자들이 예화할 수 있는 관계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연 그 관계가 ‘수반하는’ 관계인지와 ‘완벽하게 자연적’인지에 대한 맥다니엘의 입장은 다소 회의적이다. “나에게는 동일성 관계가 수반하는 관계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 나는 또한 동일성 자체가 완벽하게 자연적이라는 생각할 특별히 설득력 있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McDaniel, 2017: 168)

참고

McDaniel, K., The Fragmentation of Being,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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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텍스트 및 정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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