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자가 한 명도 없는 사회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진행하고 있지 않다. 재활만을 목적으로 한 아주 간단한 운동조차도 안 하고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내 방과 화장실과 거실과 식탁 사이를 오가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방바닥에 앉을 때 문제의 그 다리가 조금이라도 힘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재활이 조금씩 이뤄진다. 수술 한지 대략 한달 째인 며칠 전부터는 목발을 안 짚게 되었다.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다. '절름발이'가 된것인데, 저녁만 되어도 아침보다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이 느껴지니, 더 많은 힘을 주어도 덜 아프니 한달 이상 가지 않을 절름발이다. 아마 오늘날의 한국의 절름발이 대다수는 나와 같은, 머지 않아 조금도 절름거리지 않고 걷게될 이들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국에서 '절름발이'는 낯선 낱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주 어릴 때인 70년대 초만 해도 안 그랬다. '동네'에서 회복 중이 아닌 절름발이를 간혹 볼 수 있었고 철없는 아이 중 일부는 그들을 '절름발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골절 치료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되어 있지 않았고 인공 관절 같은 것이 없었거나 있었어도 수술 비용이 너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은 의학의 도움을 전혀 안받지는 않았겠지만 대충 붙이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류의 수술 비용은 국민 의료보험의 덕을 보더라도 비싼 편이다. 상위 10%가 아니라면 빚을 지게 되지는 않더라도 부담을 느낄 비용이다. 간병비를 더하면 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내 경우는, 굳이 개념화 하자면, 2년치 '비상금'이 날아갔다. '대한민국'에 이 수술 비용이 거의 무료가 될 날이 올까? 아도르노는 유토피아를 굶주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회로 규정했다. 나는, 골반과 다리를 잇는 뼈가 완전히 부러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으로서, 유토피아를 불구자가 한 명도 없는 사회로 규정하고 싶다. 강화 외골격 기술(Exoskeleton Technology), 생체 재료 기술(Biomaterials Technology),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또는 신경 보형물(Neural Prosthesis) 기술의 발전 속도를 놓고 보면 기술적으로는 그런 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날이 머지 않았다. 문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극명한 예인데, 기술의 풍부한 유토피아적 잠재적 힘의 상당 부분을 늘 파괴적이거나 양면적인 힘으로 현실화하는 경향이 있는 지배적 사회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대표하는 가장 잘 산다는 나라가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소비를 가장 심하게 하면서도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전혀 서두르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정말이지, 이 모순이 산산히 부서지는 시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기 전에 그 시간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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