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모의 탈형이상학적 그리스도교

연세대학교 종교철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지금은 종교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신 박예담 선생님께 석사논문을 받았습니다. 잔니 바티모의 해석학이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함의를 분석하는 글입니다. 박예담 선생님이 저에게 논문을 주시면서, "절대 읽으시면 안 돼요!"라고 신신당부하며 내용에 대해 걱정하셨는데, 정작 읽어보니 매우 짜임새 있게 잘 쓰인 글이네요. 가다머 이후 해석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바티모를 소개하면서, (a) 바티모가 그리스도교를 해석학의 세속적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시키고 있다는 에릭 메간크의 비판과 (b) 바티모가 해석학을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담론으로 지나치게 환원시키고 있다는 압둘라 바샤란의 비판을 중재하며, (c) 바티모의 해석학이 분명 그리스도교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교'란 '근본주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탈형이상학적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논문의 전반부(제2장)는 바티모의 해석학을 체계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바티모의 해석학이 주장하는 중요한 포인트들이 잘 제시되어 있네요. 바티모가 현대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국내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논문의 전반부는 바티모의 전체적이 면모를 궁금해 하는 국내 독자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티모가 말하는 '약한 사유'가 전통적 형이상학의 '강력한 사유'와는 어떻게 다른지, 그 약한 사유가 니체와 하이데거에 대한 바티모의 해석으로부터 어떻게 도출되고 있는지가 논문에서 매우 평이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논문의 후반부(제3장-제4장)는 바티모의 해석학이 그리스도교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설명됩니다. 이 부분이 사실상 논문이 정말로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인데, 저는 이 부분에 서로 약간 결이 다른 세 가지 주장이 함께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논문에 따르면, 바티모는 (a) 우리가 언제나 주어진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조건으로 삼아 세계에 대한 해석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서구 문명의 뿌리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서양철학이 부정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고, (b) 그리스도교 자체가 해석의 생산성 및 신의 '자기비움(kenosis)'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사유로서, 니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이 등장하기 위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c) 형이상학이 청산된 우리의 시대야말로 종교를 종교로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해석학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도 지적하네요.

더 나아가, 논문은 바티모의 해석학을 더욱 일관적이고 급진적으로 개진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우리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속해 있다."라는 수동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교가 필요하다."라는 적극적 주장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논증합니다. 바티모는 그리스도교가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유의미한 사유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은 보여주었지만, 그가 염두에 두는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존재사건'이나 '개방성'이나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해석학을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고통이나 죽음 같은 현실의 실존적 문제에 아무런 실질적 대답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논문이 바티모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입니다. 정말로 바티모가 자신의 해석학을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교를 해석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그렇게 재구성된 그리스도교로부터 다시 우리가 지닌 현실의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실존적'이고 '신앙적'인 응답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논문이 제시하는 핵심적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를 형이상학 없이 재구성하는 시도를 넘어서, 그렇게 재구성된 그리스도교로부터 다시 현실의 문제에 대한 '실존적'이고 '신앙적'인 응답까지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입장은 바티모의 후속 세대로서 그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인 제임스 K. A. 스미스의 입장이기도 하고, 이 논문 역시 그 점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죠. 바티모나 그의 동료들인 데리다와 카푸토 등은 형이상학 없이 그리스도교를 재구성하면 일종의 '종교성이 탈색된 그리스도교'가 도출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형이상학을 제거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정말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부분들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급진정통주의 그리스도교'가 성립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입장이죠. 그리고 '형이상학'을 벗어나 이렇게 '근본'과 '정통'으로 더욱 철저하게 되돌아간 그리스도교야말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 사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응답을 할 수 있다는 거고요.

다만, 사소하고 자잘한 부분들에서 논문이 몇 가지 의문들을 남기기는 합니다. 특별히, 바티모의 해석학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를 소개하면서, 논문이 정확히 어떠한 근거에 초점을 맞추어 그 둘을 연결시키려 하는지가 저에게 약간 불분명하기는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우리 자신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주장, "그리스도교는 우리 시대의 해석학을 위한 씨앗을 품고 있다."라는 주장, "우리 시대의 해석학은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라는 주장이 논리적 동치는 아니니까요. 바티모의 사유에서 저 세 주장이 서로 다른 근거로부터 제시된 서로 별개의 주장인 것인지, 아니면 저 세 주장 중에서 어느 하나가 더욱 우선적 지위를 지니고 다른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것인지 논문의 내용만으로는 확실하게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예담 선생님이 에포케 책방(https://www.youtube.com/@epoche_bookclub)에서 바티모에 대해 다루게 될 때 이 점을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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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을 읽고 남들에게 말하기라니… 제가 무언가 선생님께 잘못을 했었던 건가요…ㅋㅋㅋㅋ 그래도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보다는 이렇게 읽어주시고 질문까지 해주시는 게 훨배 좋으니까요. 논평에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석사논문을 쓰자마자 바티모를 외면한 터라,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a), (b), (c)는 어느 하나가 다른 주장을 연역하는 관계라기보다 하나의 해석학적 순환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바티모의 논의가 진행되는 순서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a)에는 사실 두 가지 주장이 들어 있습니다.

  1. 모든 해석은 특정한 역사와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다.
  2. 서구 해석학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은 그리스도교다.

바티모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첫 번째 주장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허무주의적 해석학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는 해석학이 성립하게 된 역사를 살펴봅니다. 이때 바티모는 해석학이 이미 우리 시대의 공통어(koine)가 되었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그 기원을 소급합니다.

그 소급 과정에서 바티모는 먼저 니체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와 진리의 약화를 발견하고, 다시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와 세속화의 역사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b)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성서와 예수, 성령의 활동을 통해 생산적 해석의 전통을 품고 있었으며, 존재의 약화와 케노시스, 해석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가족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티모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유사성을 현대 해석학이 그리스도교적 영향사 안에서 가능해졌다는 주장으로 발전시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a)의 두 번째 주장, 곧 서구 해석학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이 그리스도교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방향이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교가 해석학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렇게 형성된 현대 해석학은 다시 그리스도교를 형이상학적 교리체계가 아니라 케노시스와 사랑, 지속적인 해석의 역사로 새롭게 읽게 합니다. 이것이 (c)입니다. 따라서 세 주장의 관계는 대략 다음과 같은 순환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석학적 현재 → 그리스도교적 기원으로의 소급 → 그리스도교에 대한 해석학적 재해석

다만 저는 논문을 쓰면서 이 순환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b)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재의 약화와 케노시스가 가족유사성을 가진다는 것과, 니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영향이자 성숙이라는 것은 같은 주장이 아니니까요. 아무리봐도 존재의 약화를 기독교적으로 읽어야할 충분한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바티모는 이를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라고 밝히고, 적어도 그것이 니체와 하이데거의 텍스트와 자기이해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도 언급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결을 설명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 바티모가 이 부분을 다소 뭉개고 넘어가는 측면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논문의 마지막에서는 바티모의 관점이 정말 가능하려면 오히려 조금 더 테토스럽게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바티모라면 '약한 사유'가 가능하기 위해서 특정한 신앙이 필요하면 안되기에 이런 주장을 할 수 없겠지만, 그러면 약한 사유가 기대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어지잖아요. 바티모는 이 둘 사이에서 충분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봐요. 그러니까 약한사유가 기대고 있는 역사적 관점을 받아들이려면, 신앙도 받아들여서 이렇게 얘기해야죠.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그러니 존재의 약화도 그리스도교적으로 읽겠소. 니체와 하이데거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사 안에서 읽겠소. 어쩌라고요ㅋㅋ”

이렇게 해야 그리스도교적 독해가 보편적으로 증명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어디에 서서 왜 그런 해석을 선택하는지는 분명해지니까요. 자신이 서 있는 신앙의 자리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된 역사를 통해 다시 자신을 이해하는 바티모식 해석학적 순환이 가능하려면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적 정체성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제 주장이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보니, 바티모가 뭉개고 넘어간 부분을 저도 논문에서 함께 뭉개는 바람에 이러한 관계와 제 문제의식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과 논평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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